소설리스트

화산대도-128화 (128/425)

128화

영빈정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고진유는 일어난 뒤 묵경과 함께 사형제들만을 조용하게 불러 모았다.

사형제들은 어렴풋이 저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우종성이 먼저 물었다.

“호정,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들으셨군요. 조용히 움직였는데.”

장두총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예전의 우리가 아니거든. 그 정도로 떠드는데 안 깨는 게 이상하겠다.”

“일단…… 사형들이 신경 안 쓰고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제가 힘든 일을 다 했습니다.”

“일단은 알겠고. 이단은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 봐.”

여섯 명의 사형제들은 고진유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저에게 가까이 오세요. 극비라서 엄청난 일이거든요.”

“푸흡.”

“훗…….”

“아하, 그래?”

이미 내력을 사용해 목소리가 외부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웃으며 고진유의 말대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연회가 끝난 뒤 묵경 형과 잠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세가로 수상한 기가 영빈정을 빠르게 지나가더군요.”

“누군지 몰라도 더럽게 운이 없었구나.”

“호경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운이 없는 놈이었죠. 몰래 그를 따라갔는데 그곳에서…….”

그 뒤로 이어진 충격적인 내용.

믿기지 않았다.

당우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미친년일세.”

“그러게. 가주님이 가여워서 어떡하니. 정말 좋으신 분이신데…….”

연자련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제, 그 썩을 놈이 여기 밑에 있다고?”

장두총은 바닥 아래를 가리켰다.

“잘 자고 있을 겁니다.”

“흐음…… 이 녀석이 입만 제대로 열어준다면 좋겠지만. 하지 않겠지?”

“이놈들은 틈만 나면 스스로 죽으려고 하더군요.”

혁자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다는 소리군.”

“맞습니다. 이부인이 빠져나갈 수 없는 확실한 함정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뭐지?”

고진유는 시선을 돌려 묵경을 보았다.

“묵경 형이 맡아서 할 일이 있어요.”

“내가? 뭘?”

일곱 명의 시선이 묵경에게 고정되었다.

“잠깐.”

묵경은 얼른 손을 앞으로 뻗었다.

“미리 말하는데 이상한 거 시키면 절대로 안 할 거야.”

“이상한 거 아닙니다. 가끔 형님이 잘한다고 자랑하셨잖아요.”

“그니까 내가 뭘?”

묵경은 자기가 뭘 잘한다고 했는지 생각했다.

“아…… 그거……?”

“네. 그거요.”

* * *

가주 팽직도는 가주전으로 찾아온 고진유의 방문을 받았다.

‘예의가 정말 바르군.’

세가를 떠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인사차 온 것 같았다.

고진유가 접객실로 들어섰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일찍부터 오셨구려. 앉게나. 그렇지. 차 한잔 마시겠소?”

“고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게.”

그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차를 끓일 준비를 했다.

반각이 지나자 차 향이 접객실 안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이런 분을…….’

팽직도의 모습은 호진 사형의 사부이신 허송 사숙과 많이 닮아 보였다.

인자하면서도 단단한 군자와 같은 모습.

“한잔 받게나.”

“잘 마시겠습니다.”

고진유의 앞에 놓인 찻잔에 이른 아침에 어울리는 맑은 향이 피어올랐다.

스윽.

찻잔을 내려놓은 팽직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떠나기 위해 온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닌 것 같구려. 본인에게 할 말이 있소이까?”

고진유의 표정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인사차 왔다면 먼저 떠나겠다는 말문을 열었을 것이었다.

“어제저녁까지는 바로 떠나려고 했습니다.”

“본인과 헤어지고 난 후 일이 생긴 모양이구려.”

“제가 과연 가주님을 찾아뵈어도 괜찮은지 지금까지도 망설이고 있습니다.”

“…….”

“전…… 모른 체하며 그냥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하아…….”

팽직도는 가슴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고진유의 표정에서 보통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넘어간다면 세가는 어떻게 되겠는가?”

“멸문할지도 모릅니다.”

하북팽가의 멸문이라 말을 꺼냈다.

멸문이란 말 앞에 농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고 대협, 본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멸문은 면할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대신 가주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을지도 모릅니다.”

“후후후. 이 자리가 무에 좋다고 연연하겠는가? 어쩔 수 없다면 내려놓아야지.”

팽직도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대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네.”

“……가주님께서는 저를 믿으십니까?”

고진유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그대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하북팽가에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믿지 않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믿소이다.”

“알겠습니다. 판단과 결정은 가주님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고진유는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도 그는 담담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그는 끝내 흥분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팽직도는 찻잔을 들어 마셨다.

덜덜.

하지만 표정과 달리, 찻잔을 잡은 손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참으면서 애써 미소를 지었다.

“본인이 엄청난 오해를 했소이다.”

“…….”

고진유는 순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군.’

그에게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는 듯했다.

팽직도의 말이 이어졌다.

“고 대협은 지금 현재 본인이 기쁘다고 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정말로 기쁘오.”

“다행입니다.”

“오래전부터 이부인이 어떤 여인인지 알고 있었소이다. 두려운 사람이지요.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혼인을 했지만, 본인의 부인이기에 좋아하기로 했소이다. 넷째를 임신한 그때까지.”

‘사공자에 대해서…… 알고 계셨군.’

팽직도는 사공자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지내왔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부인이 태기를 가졌다고 하기에 교화전으로 조용히 찾아갔소이다. 보통 때라면 시비들이 있어야 했지만, 그날은 일부러 피한 듯 보이지 않았지……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안을 살폈소. 그때 안에서 하벽과 대화를 나누는 이부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지요.”

“…….”

“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참을 들은 후에야 알았소.”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지 미세하게 노기가 일어났다.

“그 자리에서 당장 뛰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실수라고 말하던 아우의 말을 들었소이다. 나만 모르는 척 넘어간다면 조용하게 지나갈 거란 생각이 들었지요. 이부인은 다른 세 아이의 모친이기도 했으니…… 난 그날 이후 세 아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각각 무당파와 청성파, 그리고 소림에 보냈소이다.”

팽직도의 표정에서 홀로 고통의 시간을 참았던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게 이부인의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팽직도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 모른 척했을 게 확실했다.

도성을 가주에게서 멀어지게 만든 뒤 그녀의 말을 잘 듣도록 위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고 대협의 말을 들으니 그놈도…… 멍청하게 당한 것이었군.”

팽직도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긴 세월 동안 그를 얼마나 속으로 미워했는가.

“고 대협, 본인에게 이 사실을 무턱대고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라 보네.”

‘역시…… 강한 분이야. 바로 감정을 바로잡았어.’

“가주님, 화산파 제자인 제가 감히 어떻게 나설 수 있겠습니까?”

“아니네. 이번 일은 가주인 본인이 부탁하는 걸세. 도움을 줬으면 하는 바일세.”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가주님의 부탁을 수락하겠습니다.”

“고맙소.”

고진유는 계획한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이부인의 입에서 진실을 밝히도록 할 것입니다.”

“가능하겠는가? 발뺌하지 않겠나?”

“그 일에 대해서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알겠네. 본인은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단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결단력을 지니시면 됩니다.”

팽직도는 고개만을 끄덕였다.

* * *

수곡자는 천문전의 집무실로 다급히 전서를 들고 왔다.

나하중의 손에 든 십여 장의 전서.

무림맹으로 떠난 공각원주 무신해가 긴급하게 보내온 것이었다.

전서에는 무림맹에 들어선 이후 인양에 대한 모든 행적이 적혀 있었다.

인양은 분명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인물이 대목장 이춘광이며 그가 무림맹에서 어떠한 작업을 했는지까지 알아냈다.

황와정의 보수 공사.

나하중은 단번에 알았다.

‘오청석, 이놈이 철갑을 풍림지의 황와정에 숨겨 놓았군.’

어이가 없었다.

무림맹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던 철갑이 황와정에 숨겨져 있을 줄이야.

“허허허…….”

나하중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황와정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철갑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욕심이라는 게 늘 문제였다.

‘그놈이 무림맹에 알렸다면 일이 쉽게 풀렸을 것을.’

하지만 탐욕에 눈이 먼 그는 철갑을 가지고 정주를 떠났다.

“이 녀석이 대목장을 따라 호북으로 갔다는 건…….”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었다.

무신해 또한 곧바로 호북으로 갈 것이라 연락이 왔다.

‘아쉽구나. 너무 늦게 알았어. 어쩌면 어린놈이 철갑을 찾았을지도.’

인양이 무림맹을 떠난 지 거의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났다.

‘철갑을 찾았다면 그놈에게 가지고 갈 것이 분명하다.’

나하중은 좋은 생각이 났다.

화산파 일행의 주위에서 기다렸다가 인양이 나타나는 순간 철갑을 가로채는 방법.

“이번에는 확실한 녀석들을 보내야겠군.”

육십사괘무장 중 특무괘장을 보낼 계획이었다.

“대과와 명이라면 충분하고도 남겠군.”

나하중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전주님. 여림입니다.”

집무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도록.”

백사건을 두른 사내, 윤여림이 고개를 숙인 채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천주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주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나를 보자고 하신다?”

최근 무림맹에 있는 영사에게 사람을 보낸 것을 알고 있었다.

‘천주께서 십전을 통하지 않고 직접 움직이기로 한 것인가?’

“알겠네. 그분께서 부르신다면 바로 가야겠지.”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됐네.”

나하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주의 부름은 그 어떤 일보다 먼저였다.

그는 전서들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수곡자가 전서들을 가지고 오면 이것들과 같이 놓아두게.”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윤여림은 허리를 숙였다.

‘클클…….’

나하중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짧게 실소를 지었다.

드르륵- 탁.

윤여림은 그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본 뒤에야 허리를 폈다.

슥슥.

그리고 흩어져 있던 전서들을 정리하면서 빠르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철갑은…… 황와정에 숨겨져 있었어……!’

그들은 고진유의 의동생이라 알려진 인양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빨리 연락을 해야겠어.’

윤여림의 손발이 빨라졌다.

* * *

인양과 파숙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형님, 분명 여기에 철갑을 숨겼을 거예요.”

“내 생각도 그래. 흐음…… 어디 보자…….”

“형님은 집안에서 찾아보세요. 전 밖에서 찾아볼게요.”

“오냐.”

파숙이 방으로 들어간 뒤 인양은 마당에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철갑을 숨긴다면 최우선으로 뭘 고려했을까?’

은밀하면서도 곁에 있어 항상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곳.

만일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숨겨놓았다면 어떻게 될지 몰라 하루 종일 마음 졸이며 지낼 것이다.

“쉽게 보이는 장소면서도 찾기 어려운 곳.”

인양의 시선이 구석구석을 훑었다.

한눈에 들어온 장소.

마루에 앉은 채로도 언제든지 확인이 가능한 곳.

그가 돌벽으로 다가섰다.

‘철갑이 이 정도이라고 했으니…….’

돌벽 사이에서 널찍한 돌멩이를 찾았다.

바닥에 닿아 있는 돌멩이 중 한 개가 유독 눈에 띄었다.

가볍게 툭툭 건드리자 쉽게 흔들거렸다.

‘수상한데…….’

돌멩이를 잡아당기자 쉽게 빠져나왔다.

빈 공간 아래를 손으로 긁었다.

‘오래된 바닥이 아니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는데도 바닥이 파였다.

‘……찾았다!’

인양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손끝에 닿는 딱딱한 느낌.

무림맹을 나와 이춘광의 행적을 뒤쫓아 여기까지 왔다.

철갑이 드디어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진한 흑색의 철갑.

손으로 차가울 정도로 기분 나쁜 느낌이 전해지는 물건이었다.

‘이게 열쇠 구멍인가 본데?’

미세한 구멍만이 철갑 외부에 유일한 틈이었다.

인양은 돌벽을 원래대로 복구한 뒤 철갑을 가지고 방을 들어갔다.

“파숙 형! 여기.”

“아아…… 찾았구나!”

인양의 손에 들린 철갑을 본 파숙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퍼져 나왔다.

하지만 이내 둘의 얼굴은 심각하게 변했다.

“이걸 어떻게 가지고 다니죠?”

인양은 덜컥 겁이 났다.

한 손으로 충분히 들고 다닐 수 있는 무게였지만 세상도 이보다 무겁지 않을 듯했다.

“그러게 말이다.”

“진유 형님께선 철갑을 찾는 순간 수많은 시선을 받게 될 거라고 했었어요.”

“일단…… 대사님이 계획한 대로 변장한 뒤 화산파로 가자.”

무림맹을 떠나기 전 고진유는 인양에게 당부했다.

만일 철갑을 찾게 되면 절대로 자신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그들은 네가 철갑을 찾게 될 때쯤 눈치챌 거야. 그러면 네가 철갑을 찾아낸 후 나를 찾아올 거라 생각하겠지. 그들은 늘 내 주위에 숨어 있을 게 분명하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하오문에게 통해 나에게 연락한 뒤 곧장 화산파로 가면 된다.

반각 후.

인양과 파숙은 자신들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며 향운촌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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