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27화 (127/425)

127화

팽하벽은 영빈정에서 나온 뒤 곧바로 교화전으로 향했다.

진지한 그의 얼굴에 단호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시비를 따라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다가설 때였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건물 밖까지 이부인 석화린과 사내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가 와 있군.’

팽하벽은 걸음을 멈춘 뒤 정원에서 기다렸다.

듣고 싶지 않아도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내용에 눈살을 찌푸렸다.

‘팽홍, 이 녀석.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군.’

능력도 안 되는 녀석이 이부인을 등에 업고 내당주 자리를 차지했다.

교화전에 사람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그들의 목소리가 컸다.

‘……본 가의 주요 거래처를 석가장에 넘길 수 있도록 세가 회의를 하겠다고?’

하북팽가의 주요 인물들이 들었다면 기가 찰 일이었다.

팽하벽은 그동안 세가의 세부적인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세가의 주요 일은 내당주가 앞장서서 처리하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이부인의 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더는 못 듣겠군.’

후다닥!

정원을 향해 석화린이 빠르게 달려 나왔다.

팽하벽이 기다린다는 시비의 말에 다급하게 달려 나온 것.

‘어디 있지?’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도성께서는?”

“아, 안에 손님이 계시니 다음에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갔다고?”

“네…… 그렇습니다.”

“뭐라고? 그분을 잡지 않고 뭐 했어?”

“죄, 죄송합니다! 금방 나오실 것이라 했는데…….”

짜악!!

석하린은 시비의 뺨을 내리쳤다.

시비의 얼굴이 단번에 뻘겋게 달아올랐다.

“망할 년이…… 그것도 똑바로 못해?”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변하기 시작했다.

‘젠장…… 어떻게 됐지?’

* * *

“묵경 형, 사람 사는 곳은 전부 똑같네요.”

소연회가 끝난 후, 고진유는 묵경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하북팽가에서 머문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건만 세가의 분위기만 봐도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뭐…… 그렇겠지. 여기라고 다를 게 있겠어?”

“그러게요. 우린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나도록 하죠.”

“그냥 떠나도 괜찮나?”

“어차피 그들의 일이잖아요. 우리가 함부로 관여할 수 없고요.”

“그건 맞긴 해.”

“그리고 제가 보기엔 가주님께서 충분히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강한 분이시더군요.”

“엥, 그래? 난 전혀 반대로 봤는데. 성격이 약해 보이지 않아?”

“전혀요. 그분의 내면은 절대로 약하지 않을 겁니다.”

“오우…… 아우가 그렇게 말하니 가주님이 새롭게 보이는걸.”

세가의 인물들은 팽직도를 가리켜 역사상 가장 약한 가주라 불렀다.

하지만 고진유는 오히려 가장 강한 가주로 여기고 있었다.

“이제 우리도 그만 자도록 하죠.”

“피곤하긴 하네. 꽤 밤이 깊었어. 하, 우리 막내도 잘 지내는지 궁금한데.”

“인양은 똑똑한 녀석이라서 잘하고 있을 겁니다.”

고진유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이 기는…….’

바람을 타고 스쳐 지나간 기.

‘그놈들 특유의 기.’

고진유는 기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순간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하필이면 영빈정 근처로 지나가고 있던 인물.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극일천이라면 다르지.’

사부의 원수.

그의 예상대로 극일천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왜 그래?”

안으로 먼저 들어가려던 묵경이 돌아서며 물었다.

“극일천이에요.”

“……!”

묵경의 표정도 단번에 굳어졌다.

“여기에?”

“경내로 들어갔어요.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조심……!”

휘이익!!

묵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진유의 신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캬아, 대단해. 인양이 옆에서 배울 때 구박하더라도 저걸 따라 배웠어야 했는데…… 아깝군, 아까워.”

묵경은 중원 최고의 신법을 배울 기회를 놓친 게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셨다.

쉬이이익-!!

내력 없이 신체만 이용하여 신법을 펼치면, 고진유의 신형을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어디서 움직이는지 찾을 수 없었다.

고진유는 미세한 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빠르게 날았다.

‘저놈이군.’

그리고 하북팽가 안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흑의복면인의 뒤를 따라잡았다.

휘이익!

연분홍빛 지붕 위로 흑의복면인이 내려섰다.

‘저기가 어디지?’

고진유도 곧바로 따라서 건물로 다가섰다.

‘우선…… 최대한 가까이 가서 뭘 하는지 살펴야겠군.’

스르르르-

고진유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 * *

흑의복면인이 교화전으로 들어섰다.

짙은 어둠 속이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방문을 열자 안에서 중년여인의 웃음이 들렸다.

“호호호, 어서 오세요.”

석화린은 투명할 정도로 비치는 속옷을 입은 채 두 팔을 벌렸다.

“후후, 구(姤) 매, 잘 지냈는가?”

“잘 지낼 리가 있겠어요? 당신이 언제 오실까 늘 그 생각에 항상 잠을 설쳤지요.”

“농담도 예쁘게 하는군.”

흑의복면인은 복면을 벗어 던진 후 그녀를 한 손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는 한동안 사내의 품에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두 남녀의 애정 행각을 지켜보는 시선.

‘이거…… 놀랄 놀 자인데?’

가주 팽직도의 부인이 구(姤)로 불리는 극일천의 인물이었다.

‘이걸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모르겠네.’

직접 보이지 않은 이상 가주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병진이는 잘 지내고 있소?”

“당연히 우리 아들이니 잘 지내고 있지요.”

“팽가의 멍청한 두 놈은 아직도 자신들의 아들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당연하잖아요. 가주는 가주대로, 도성은 도성대로 속고 있지요.”

“나중에 자신들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서로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호호호호! 재미있겠네요.”

석화린은 마치 그때를 상상하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가 물었다.

“가주의 세 아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녀의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가주 팽직도의 사이에서 낳은 세 명의 자식들.

어릴 때부터 세 아들에게 정을 줄 수 없었다.

세 아들은 자라면서 갑자기 가주의 명에 의해 구파에 제자로 보내져 더욱더 정을 가질 수 없었다.

“그놈들은 가주의 명만 따르는 놈들이에요.”

“우리 쪽으로 오게 할 수 없겠소?”

“힘들 거예요. 무슨 일이든지 가주에게만 보고를 해요. 괜히 잘못될 수 있으니 조용히 두는 게 좋아요.”

“알겠소. 그대가 할 수 없다고 하니 그대로 갈 수밖에. 그 외에 문제가 있소?”

“근데 귀찮은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라는 것이오?”

“그놈들이 영하문의 일을 방해했어요. 제대로 됐다면 하북성의 많은 문파들이 하북팽가를 멀리했을 텐데…… 아쉽게 됐어요.”

“화산도협은 어디에 있소?”

“영빈관에 있을 거예요. 천에서는 그를 가만히 둘 생각이신가요?”

“철갑을 찾는 당분간은 지켜본다고 하더군.”

스윽.

흑의인은 비스듬히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붉은색 주머니를 꺼냈다.

“이걸 받으시오.”

“어머나, 그렇지 않아도 몇 개 남지 않았거든요. 고마워요.”

“이번 물건은 새롭게 제조된 선단이오. 전 물건보다 효력이 두 배 뛰어나다고 하더군.”

석화린은 붉은색 주머니에서 신무선단 한 알을 꺼냈다.

한 번 냄새를 맡은 뒤 곧바로 입어 넣었다.

부르르-

그녀의 몸이 떨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혈맥을 따라 전신으로 신무선단의 힘이 솟구쳤다.

“흐음, 좋군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오.”

“다음에도 잘 부탁하겠어요.”

“구 매, 이젠 얼마 남지 않았소. 팽가의 일은 잘 진행되고 있소?”

“걱정 마세요. 언제든지 천명(天命)이 떨어지면 하북팽가는 가주가 아닌 제 명을 들을 수밖에 없죠.”

“크크크, 잘하고 있구려. 이리 오시오.”

흑의인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았다.

‘하아…… 미친…….’

당장 아래로 내려가서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판국이었다.

‘잘들 논다.’

아래에서 두 남녀가 서로 붙은 채 뒹굴기 시작하자 고진유는 어이가 없었다.

‘으, 이제 끝났군.’

일각 후, 서로 볼일을 모두 마쳤는지 사내가 침상 아래로 던져 놓았던 옷을 입었다.

“가야 할 시간이오.”

“벌써 가시나요?”

“후후후. 우리가 함께 지낼 날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그때까지는 아쉬워도 참고 지내시오.”

“알겠어요. 그땐 항상 함께해요.”

흑의인은 다시 벗어놓았던 복면을 뒤집어쓴 뒤 교화전에서 사라졌다.

* * *

흑의복면인 지무괘장 풍(豐)은 하북팽가를 벗어난 뒤 안심한 듯 천천히 걸었다.

그때,

‘누구지?’

어둠 속 앞에 기척이 느껴졌다.

풍은 주위를 둘러보며 살폈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냐?”

풍이 살기를 뻗어냈다.

“내가 누굴까?”

“……!”

스윽.

어둠 속에서 천천히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젊은 놈……?’

얼굴을 먼저 봤을 때는 안심했다.

하지만 구름이 비껴가자 달빛에 의해 매화도의가 선명하게 빛났다.

“화산…… 파…….”

“맞소.”

“왜…… 내 앞을 막아섰지?”

“당신, 극일천이잖아.”

자신을 정체를 아는 인물

“넌…… 누구지?”

“극일천을 너무나 보고 싶어 하는 사람.”

“……화산도협.”

“맞아.”

파앗!!

풍은 신법을 펼치며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고진유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어딜 가시나?”

달빛이 비치는 사의검.

자줏빛의 검신이 달빛과 함께 길게 이어졌다.

스걱-

깨끗하고 선명하게 들려온 소리.

“커어억!”

뒤를 이어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렸다.

풍은 상대의 검을 충분히 피했다고 확신했지만 매화검기가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어딜 보는가?”

“……!!”

고진유의 공격은 한 번이 아니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떨어지는 듯 사방에서 매화가 빛을 내며 하늘거렸다.

팟팟팟팟--!!

풍은 매화를 없애기 위해 검을 휘둘렀렸지만 매화 꽃잎은 점점 더 흐드러지고 있었다.

‘젠장…… 피하지 못하겠어!’

그의 전신에 땀이 흘러내렸다.

허공 위에서 하늘거리던 매화잎은 날카로운 매화검기가 되어 풍의 전신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피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털썩.

풍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헉헉헉…….”

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화산도협…… 나를 죽여라.”

“당신의 목이야 베고 싶지만, 그건 다른 사람의 몫인 것 같군.”

“무슨…… 말이지?”

“교화전에 들어가는 것을 봤소. 물론 나올 때까지 전부. 누구와 아주 더럽게 놀더이다.”

“……!!”

풍은 재빨리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지만.

“어딜.”

그보다 고진유의 손이 먼저 빨랐다.

핏핏핏!

점혈을 당하자, 오직 흔들리는 눈동자만이 풍의 심정을 대신 알려주었다.

그는 점점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 * *

“아이고, 두야…….”

묵경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흑의인을 내려다보며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부 들었다.

잠시 다녀온다고 하더니 엄청난 사건을 만들고 들아왔다.

하북팽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변했다.

“상관 안 한다면서?”

“상황이 다르잖아요. 이놈들은 극일천이라서요.”

“그래…… 극일천이다. 하아…… 이걸 어떡하냐?”

반송장을 그대로 방 안에 둘 수 없었다.

날이 밝는다면 영빈정을 맡은 하인과 시비들이 들어와서 청소할 것이었다.

“모두 깨울까?”

“주위에 눈이 너무 많아요. 이 시간에 모두 일어나면 분명 일이 생겼다고 생각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긴 해.”

“아침에 이야기하면 돼요. 그 전에 이걸 먼저.”

아침이 되기 전까지 해결해야 했다.

“이걸 땅에 파묻을 수도 없고…….”

“형, 묻죠.”

묵경이 무심결에 툭 던진 말에 고진유가 얼른 답했다.

“에엥? 죽이자고?”

“그게 아니라, 여기 바닥을 뜯으면 되지 않을까요?”

퉁퉁.

묵경은 바닥을 두드려 보았다.

서너 개의 판자만 뜯어내면 안에 공간이 나올 듯했다.

“음…… 의외로 괜찮을 것 같네? 한번 뜯어볼까?”

툭, 투두둑!

침실 바닥은 생각보다 쉽게 뜯어졌다.

네 개의 판을 뜯어내자 한 사람 정도 들어갈 구멍이 생겼다.

“밀어 넣죠.”

“좋아.”

묵경은 발을 툭툭 차며 그를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좋았어. 딱 들어가는구만. 감쪽같아.”

그 후 고진유가 뜯어낸 마루 판자를 원래대로 복구시켰다.

“형, 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또 어디?!”

묵경은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는 거 아니에요?”

“나갔다 오기만 하면 자꾸 사고 치잖아.”

“이번에는 조용히 다녀올게요. 교화전에 가서 가지고 와야 할 물건이 있어요.”

“바쁘구만. 내가 할 일은?”

“아직은 없어요. 생각해 보죠.”

휘이익!

고진유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신났네. 어휴, 난 잠이나 자야겠다.”

털썩!

묵경은 침상에 누웠다.

막상 잠을 청했지만, 눈만 말똥거렸다.

“휴우…… 오늘 제대로 자긴 틀렸군.”

그는 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해서 좌우로 뒤척거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정신이 비몽사몽이 되어 조금만 더 있으면 잘 수 있을 것 같은 무렵.

휘익!

방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

눈을 뜨자 교화전으로 갔던 고진유가 들어왔다.

“안 잤어요?”

“……간 일은?”

“여기 있어요.”

고진유가 붉은색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솜씨 좋구나.”

“예전 솜씨가 죽진 않더라고요. 중원에 무영도수의 전설을 한번 만들어볼까 싶던데요.”

“네가 나선다면 중원에 남아도는 물건이 없겠네…….”

“사부님의 유언만 아니었다면 해볼 만했을 텐데…… 아쉽네요.”

고진유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또 어딜 가?”

“자야죠.”

“…….”

“많이 돌아다녔더니 잠이 오네요.”

“……난 다 깨워놓고?”

“알아서 주무세요.”

스륵.

고진유의 신형이 사라졌다.

“에라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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