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대단한 인물이 오고 있네.’
영빈정으로 다가오는 무거운 기.
‘하북팽가에서 이 정도의 내기를 자연스럽게 단전 밖으로 뿜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
도성(刀星) 팽하벽의 명성을 넘는 인물은 하북팽가에 없었다.
‘도성이 분명해.’
끼이익-
예상대로 영빈정에 찾아온 인물은 팽하벽, 그가 확실했다.
하북팽가 제일의 무인이 홀로 찾아왔다.
“…….”
그의 등장으로 영빈정은 고요해졌다.
굳게 다문 입술과 힘이 느껴지는 눈빛에 단호한 결심이 느껴졌다.
팽하벽은 응접실에 들어선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어…… 하나같이 고강하구나.’
모두가 자신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치고 있었다.
묵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선 팽하벽을 맞이했다.
“도성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무림에서는 서문이 아니라 묵경이라 부르던데. 종종 자네 소식은 들었네.”
그는 묵경과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응접실 안쪽에서 일어난 청년과 시선을 마주쳤다.
‘역시…….’
낭중지추(囊中之錐)인가.
팽하벽은 매화도의를 입은 사내들 사이에서 정확히 고진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슈우우우--
‘흐음…….’
화경에 가까워진 자신의 내력을 받으면서도 고진유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화산도협의 내력 또한 최소한 자신과 동등하다는 뜻.
“그대가 화산도협인 모양이군. 팽하벽이네.”
“처음 뵙겠습니다. 고진유라 합니다.”
고진유는 예를 다해 절도 있게 인사했다.
그 모습조차도 흐트러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산파에서 제대로 인물이 나타났군.’
지난 이십 년 동안 구파일방의 기세는 중원세가들에 비해 약해졌다.
이런 마당에 화산파에서 새로운 젊은 영웅이 탄생했다.
‘세대가 바뀌는 것인가?’
팽하벽의 시선은 고진유에게서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내력은 보면 볼수록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느껴졌다.
그는 한 명의 무인으로서 호승심이 생겼다.
화산도협이 펼치는 매화검법이 얼마나 고절한지, 자신의 도(刀)로 직접 받아보고 싶었다.
“본인이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라네.”
“저와 비무를 원하시는군요.”
고진유는 단번에 알아맞혔다.
“맞네. 그대가 중원 제일의 후기지수란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군.”
‘후후후.’
고진유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아무리 이름을 날린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후기지수.
중원오성에 속한 도성이 찾아와 먼저 비무를 청했다는 것을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오히려 바라던 바긴 하지만.’
고진유는 그에게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도성께서 비무를 먼저 청해주시니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히려 제가 어떻게 부탁을 드려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후후후후. 그런가? 그대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구만. 비무는 지금 가능하겠는가?”
굳이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이부인이 원하는 대로 비무에서 고진유를 부상 입히면 되는 일이었다.
“전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뒤로 나오게. 그곳에 비무할 장소가 있을걸세.”
두 사람에게 비무 장소의 크기는 의미가 없었다.
팽하벽이 먼저 영빈정 뒤에 있는 작은 공터로 나가자, 고진유의 곁으로 일행이 다가섰다.
우종성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호정 사제, 정말 괜찮겠느냐?”
“싸워볼 만하지 않을까요?”
“상대는 도성이야. 어쩌면 창궁기검보다 강한…….”
“혹시 창성(槍星)보다는요?”
“창성?”
묵경은 단번에 고진유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창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다.
‘그렇군. 산동악가에서 그냥 왔을 리 없지.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우 형, 저 녀석 일은 신경 안 써도 되겠어. 알아서 하도록 두자고.”
묵경의 말이 맞았다.
그도 바로 동의했다.
“그렇군요. 호정 사제의 일이니.”
“그럼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조심해.”
고진유는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 * *
기의 폭풍이 솟구쳤다.
중원오성인 도성이 내뿜는 내력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팽하벽의 내력을 상대하는 고진유의 내력 또한 절대로 낮지 않았다.
팽하벽은 강기(剛氣)였고 고진유는 패기(覇氣)였다.
펄럭!
매화도의가 휘날리는 사이로 고진유의 손이 사의검을 잡았다.
스르릉-
언제부터인가 악기를 연주하는 듯 맑은 소리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팽하벽 또한 사의검의 발검 소리를 들었다.
‘청명하다.’
발검의 소리만으로도 상대의 무공이 어떠한지 알았다.
팽하벽은 영빈정으로 오기 전 고진유가 한 수 아래라고 여겼던 생각을 지웠다.
‘검황과 비슷하군.’
그에게서 예전에 비무를 나누었던 검황의 기세가 떠올랐다.
화산도협을 곧 검황이라고 여기지 않는 한 이길 수 없을 듯싶었다.
‘좋은 대결이 되겠어.’
이부인의 협박으로 억지로 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슨 이유로 왔는지도 잊었다.
팽하벽은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좋아.’
살아서 숨 쉰다는 느낌.
채애애앵--!!
‘너도 기분이 좋구나.’
그는 혼원도에 내력을 불어 넣었다.
“화산도협, 선수를 양보하겠네.”
팽하벽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렇게 하시죠. 사양은 안 합니다.”
“하하. 한 번 정도는 뺄 줄 알았거늘.”
“굳이 유리한 것을 안 받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타앗!!
고진유는 신법을 펼쳐 거리를 줄이며 팽하벽의 일 장 앞에 다가섰다.
동시에 팽하벽의 가슴을 향해 자줏빛의 검기가 날카롭게 떨어졌다.
‘첫 수부터 끝장을 볼 생각인가!’
고진유의 일검을 제대로 막지 못한다면 한 수도 펼치지 못하고 질 수밖에 없을 터.
‘싸움에 진심인 녀석이군.’
비무가 아닌 진심으로 죽이고자 달려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팽하벽은 혼원강기를 끌어낸 뒤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떨어지는 매화검기를 향해 도강을 올려치며 반격했다.
스걱-
도강에 의해 매화검기가 날카롭게 잘려 나갔다.
‘분명 강한 것은 맞아. 하지만 남궁무적검을 이기기에는 부족한데.’
팽하벽은 혼원도를 고쳐 잡으며 재차 두 번째 반격을 준비했다.
그때,
사아악-!
상의 자락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가슴이 철렁했다. 팽하벽의 눈이 커졌다.
‘너무 빠르다. 보이지 않아.’
화산도협의 사의검이 언제 가슴을 지나갔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혼원강기가 아니었다면 가슴에 진한 상처가 났을 것이다.
“화산도협, 비무일세. 너무 세게 하는 것은 아닌가?”
“당연히 막아내실 줄 알았습니다.”
“…….”
막아내기 어려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매화검법이 맞는가?”
한 번도 상대한 적 없는 것 같은 검법이었다.
“그렇습니다.”
“매화검이 쾌검이었나?”
“빠르게 펼치면 쾌요. 느리게 펼치면 만(晩)이지 않습니까.”
검은 결국 하나인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검의 묘를 깨우친 모양이군.’
쉽지 않은 비무가 될 것이었다.
“우리, 계속하세나.”
전력을 다해야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우우우웅-
혼원도에서 도명이 세차게 울었다.
십이 성의 내력이 담긴 혼원벽력도법.
‘길게 끌면 불리하다. 한 번에 내가 가진 것을 모두 토해낸다.’
팽하벽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고진유는 신법을 펼치려다가 잠시 멈췄다.
‘한 수를 기다리는군. 무턱대고 들어간다면 당할 수 있어.’
상대는 도성이다.
중원 무림에서 명성이 높은 절대고수보다 한 수 높은 윗단계의 절대무인이다.
그런 인물이 마치 약자처럼 마지막 한 수를 위해 일격필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승부를 봐야겠지.’
고진유는 물러나지 않았다.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 상대할 수 있었지만 정면 대결을 원했다.
사의검을 두 손으로 잡으며 몸의 정중앙에서 멈췄다.
파앗!!
하단전과 중단전을 일직선으로 이어놓은 사의검에서 빛이 쏟아졌다.
사의검의 자줏빛 검신이 투명하게 변해갔다.
‘저 녀석도 마지막 한 수를 준비하는군.’
혼원도를 잡은 그의 손이 떨렸다.
승패는 서로의 한 수만에 끝이 날 것이었다.
슈우우욱--!!
투명해진 사의검 뒤로 자줏빛의 검강이 팽하벽의 향해 떨어졌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매화일검.
하늘에서 거대한 힘이 그를 압박했다.
‘욱…… 남궁허를 이길 만하다…….’
자신처럼 그 또한 화산도협의 뒤로 화산의 하늘이 무한으로 느껴졌을 게 분명했다.
팽하벽은 뒤로 물러날 수 없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하늘을 베어야 한다……!’
쿵 쿵 쿵 쿵.
혼원도의 끝에서 천둥과 벼락이 일어났다.
오직 자신의 혼원도를 믿어야 했다.
쿠아아아앙--!!!
화산의 하늘을 향해 벽력을 쏟아냈다.
혼돈의 세상처럼 굉음이 터져 나왔다.
사의검과 혼원도가 지나가고, 고진유와 팽하벽도 스치며 지나갔다.
잠시 뒤.
세상은 어느덧 고요해졌다.
“…….”
“…….”
누가 이기고 졌는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었다.
스르르륵.
팽하벽의 허리에 찬 요대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졌네.”
“아닙니다. 비무가 아니었다면 도성께선 마지막에 다른 방법으로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비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네.”
팽하벽은 끊어진 요대를 주워 들었다.
“오랫동안 사용한 물건인데 아깝군.”
“죄송합니다.”
“괜찮네. 어차피 버릴 물건이었으니.”
그는 잘려 나간 요대를 내려다보았다.
‘운명인가?’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옭아매는 요대를 끊어내라는 뜻처럼 느껴졌다.
“화산도협. 본인이 그대와 비무를 한 이유가 있네.”
“그냥 오셨을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본인을 여기에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는가?”
“이부인이겠지요.”
“……어떻게 알았는가?”
고진유가 단번에 의뢰자를 맞히자 당황스러웠다.
“어렵지 않습니다. 도성께서 비무를 하시겠다고 찾아온 것부터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명이나 부탁으로 오셨을 테지요.”
“…….”
“하북팽가에서 도성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인물. 과연 누구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두 사람뿐입니다. 가주님과 이부인이 아니고서야 도성께 명을 내리거나 부탁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 가주가 아니라 이부인이 보냈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더 간단합니다. 가주님께서 보내셨다면 방금 전 말씀을 하셨겠지요. 그분은 나가시면서 전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정확하게 맞혔네. 이부인이 내게 부탁햇지. 억지로 비무하게 만든 뒤 자네의 사지 중 하나를 부러뜨렸으면 했다네.”
“죽이라고 안 한 게 다행이군요.”
이부인의 계획은 실패했다.
도성과의 비무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게 차라리 더 좋았을 것이다.
고진유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비무에서 진 자가 무엇을 하겠는가? 내가 졌음을 알리면 되지 않겠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니? 도성을 꺾은 것이 알려지면 자네의 위명이 더 높아질 텐데. 싫은가?”
“단지 비무일 뿐입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승패가 정확히 난 것도 아니지요.”
“……하하하!”
팽하벽은 대소를 터뜨렸다.
화산파에서 엄청난 인물이 나온 것이 확실했다.
“화산도협, 무림을 위해 큰 힘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네.”
척.
팽하벽은 포권을 하며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 * *
팽하벽은 영빈정 앞으로 돌아 나왔다.
흠칫.
영빈정 앞에 나타난 뜻밖의 인물에 그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형…… 가주님.”
가주 팽직도가 눈가에 미소를 띠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나란히 마주 섰다.
“고 대협과 비무를 한 모양이구려.”
“네. 그렇습니다.”
“아우가 이겼겠지?”
“…….”
“도성인 아우는 우리 세가의 자랑이지 않은가? 당연히 이겼을 것이라 보네.”
“가주님, 그건…….”
“맞습니다. 미세한 차이로 도성께서 이겼습니다.”
건물 뒤에서 고진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팽직도의 입가에 웃음이 나왔다.
“허허허. 그럴 줄 알았네.”
“…….”
“고 대협과 저녁에 식사를 할 것인데, 아우도 함께하겠는가?”
“죄송합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아쉽군. 우리 형제가 마주 선 건 오랜만이거늘.”
“제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화산도협과 좋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렇게 하게나.”
팽하벽은 고개를 숙인 뒤 영빈정을 떠나갔다.
‘흐음,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군.’
고진유는 떠나간 그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보는 팽직도를 보았다.
‘휴우.’
팽직도는 소리 내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 대협, 고맙네.”
“무슨……?”
“본 세가를 찾아준 것도 고맙고, 그 아이를 데리고 온 것도 고맙고, 하벽 아우와 비무를 한 것도 고맙네.”
“별일 아닙니다.”
“고 대협에게는 별일이 아니라고 해도, 본인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네. 아…… 참,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걸세. 들어가세나.”
팽직도는 영빈정으로 들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아우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