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25화 (125/425)

125화

터어어엉!!!

영빈정의 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중년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찢어질 듯 울렸다.

“감히 내 아들을 납치한 놈이 누구더냐?!!”

씩씩거리며 고함을 치는 중년 여인.

가주 팽직도의 둘째 부인이자 팽병진의 모친 석화린이었다.

그녀는 응접실 한편에 쪼그리고 있는 팽병진을 본 뒤 더 흥분했다.

“내 착한 아들을 누가 괴롭혔는지 당장 내 발밑에 나와서 엎드리지 못하겠느냐?!!”

“…….”

“비켜!”

그녀는 응접실을 가로질러 가고자 손을 휘두르며 내저었다.

“부인께서는 누구시기에 난리를 치는 것입니까?”

고진유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지금 난리라 했나?”

“갑자기 찾아와서 괴성을 지르는 게 난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넌 누구야? 내가 누군지 몰라?”

“본도가 오늘 처음 보는 부인을 어떻게 압니까?”

석화린의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고진유의 위아래를 반복해서 쳐다보았다.

“화산파 어린 도사 놈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가 누군지 똑바로 가르쳐 주마. 하북팽가의 가주께서 내 남편이다. 알아들었지?”

“그렇군요.”

“알았으면 옆으로 꺼져!”

그녀는 손을 휘두르며 고진유를 옆으로 밀쳤다.

타악!

‘이놈이……!’

그녀도 무가의 여인.

내력을 주며 밀어내려고 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도사 놈이 죽고 싶으냐? 물러나지 못할까?”

“한 가문의 대부인께서 너무 말이 거칠군요.”

“이게 어디서 훈계질을 하지?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따끔하게 혼을 내주겠다!”

‘이거 참…….’

그녀가 온몸으로 부딪치려는 순간, 당우희가 벌떡 일어나며 고진유 앞을 막아섰다.

“아줌마, 지금 보자 보자 하니깐 정말 웃겨.”

석화린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이 계집애가 어디서 누구보고 아줌마라고 하는 거야?”

“아줌마 보고 아줌마라고 하는데 뭐가 잘못됐나? 아들이 왜 개차반인지 딱 보니 알겠네.”

“뭐?! 이 미친년이!”

“내가 보기에 그쪽이 미친년 같은데요?”

당우희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지 있는 말 없는 말 가리지 않았다.

“우희야, 그만해.”

연자련이 흥분한 그녀를 말렸다.

“저 아줌마가 하는 말 들었잖아요!”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린 대화산파의 교양 있는 여인이잖아. 저런 배우지 못한 몰상식한 여자하고는 말을 섞으면 안 돼. 알겠지?”

“……!!!”

차분하게 말하는 연자련을 보면서 석화린은 어이가 없었다.

“어디 이런 년들이 있어?!!”

“그만하시는 게 좋겠군요. 가주님의 부인이시라는 분이 정말 교양이 없으시네요. 중원 무림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하북팽가의 가주님을 동정하실지…….”

‘끄으으응.’

석화린의 속에서 화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미친 것들이 쌍으로 놀고 있어. 좋은 말 할 때……!”

“부인.”

중년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석화린의 몸이 움찔하며 굳었다.

가주 팽직도가 뒤에 서 있었다.

“사, 상공…….”

“부인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이까?”

“저놈들이 병진을 잡고 있다고 하기에…….”

“부인, 저번에 분명 약조를 하지 않았소이까. 병진에 대해서는 나서지 않겠다고. 마지막이라 해서 창주에 보냈거늘.”

“…….”

“그만 돌아가세요. 나중에 이 일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소이다.”

“상공, 하지만 화산파 도사 놈들이……!”

“어허. 그만하시구려. 그대는 어찌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소. 물러나시오.”

석화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팽직도의 차가운 눈빛을 보면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니었으면 가주가 되지도 못했을 사람이……!’

팽직도는 그녀와 혼인했을 당시 가주가 아니었다.

전대 가주이자 그의 형님이었던 팽장석이 단명하자 팽직도를 가주위에 오르도록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그녀였다.

‘두고 봐. 화산파 도사 놈들…… 가만히 두지 않겠어.’

* * *

영빈정의 정원으로 나오기 전, 팽직도는 팽병진을 그의 거처로 돌려보내고는, 절대 거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정원으로 돌아와 고진유와 마주했다.

매화도의가 하늘거렸다.

바람도 불지 않았건만 전신에서 흐르는 내기에 매화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고진유는 일부러 미세할 정도로 내력을 끌어냈다.

가주 팽직도는 감탄이 나왔다.

소문은 소문일 것이라 여겼다.

하나 화산도협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었다.

“화산도협, 본 가에서 큰 실례를 한 것 같소이다.”

“가주님께서 사과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아니오. 본인의 안사람이 나서야 할 자리가 아니지 않소이까.”

“이부인께서 아들의 일 때문에 감정이 상해서 한 행동이라 이해합니다.”

“화산도협께서 좋게 생각해 주니 고맙소이다.”

하북팽가의 가주 팽직도는 중원인들의 평가대로 군자다웠다.

묵경은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무가의 자식이지만 문인의 자제에 가까운 성품. 가주의 자리에 오를 인물은 아니었다지.”

전대 가주 팽장석이 단명만 하지 않았다면 팽가에서 조용하게 편안한 삶을 지냈을지도 몰랐다.

본래 유림가의 여식과 결혼을 하고자 했지만, 정략적 동맹을 위해 갑작스레 석화린과 동시에 결혼해야 했다.

그 후 첫 해가 지나기도 전에 일부인은 몸이 좋지 않아 단명했다.

석화린은 이부인이긴 하지만 정실부인이기도 했다.

정자에 마련된 자리에 앉은 고진유는 찻잔을 쥔 그의 손을 유심히 보았다.

‘수련을 많이 하셨군.’

손등에 보인 도흔들.

수련하면서 손에 생기는 상처들 대부분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북팽가와 같은 대가문을 이끌고 가려면 무공에 대한 부담감이 심하겠지.’

무공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노력으로 끌어 올릴 수 있지만 분명 한계는 있다.

그 단계를 넘기 위해 스스로 깨우칠 정도의 기재가 아니고서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가르침을 제대로 받을 수 있어야 했다.

갑자기 가주가 된 팽직도에게 상승 무공을 자세히 가르쳐 줄 인물이 없었던 게 확실했다.

“고 대협이라 불러도 되겠소이까?”

“편하실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그 아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아주 큰일을 벌이려고 했습니다만, 다행히 무마시켰습니다.”

“아…….”

팽직도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했던가.

고진유는 그에게 형수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알려주었다.

“허어…… 고 대협께서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군요.”

“맞습니다. 무림에 하북팽가의 위명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마음고생을 한 영하문에 미안하다는 전언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가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영하문에서도 기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사공자의 성격상 가만히 있지 않을 듯싶군요.”

팽직도는 가슴이 무거웠다. 누구보다 팽병진에 대해 잘 알았다.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그 모친의 성격을 닮았다.

“그…… 아이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이까?”

“…….”

그는 오히려 고진유에게 물었다.

“이런 ,또 결례한 것 같소이다. 본인이 답답해서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아닙니다.”

“다른 형제들은 그렇지 않은데 넷째만 유독…… 근데 그 아이도 어릴 때는 정말로 본인을 잘 따랐습니다.”

팽직도는 네 명의 자식 중 제일 좋아했던 아들이 팽병진이었다.

막내기도 했지만 자신을 많이 따랐다.

근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멀리하는 게 눈에 보였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씩 겪는 성장통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날 이후 넷째와는 거의 말도 하지 않은 사이처럼 지내면서 세월을 보냈다.

“넷째에 의해 영하문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본인이 책임지겠소이다.”

“알겠습니다. 가주님을 믿고 본 일행은 그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고 대협, 귀한 손님을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은 채 보낼 수는 없소이다. 만일 무림인들이 안다면 본인을 욕할 게 분명합니다. 하루를 보내시고 내일 떠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탁드리겠소이다.”

“알겠습니다. 내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 * *

교화전으로 들어선 중년 사내를 맞이하는 여인들.

“총군장님을 뵙습니다.”

“…….”

팽하벽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각 전 교화전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이부인 석화린이 보낸 서신.

교화전으로 당장 찾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앞으로는 가지 않겠노라 분명히 말했거늘.’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보낸 서신의 마지막 글귀.

<비밀을 밝힐까 생각해요.>

협박이었다.

몇십 년 동안 그때 그 일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밝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팽하벽이 교화전으로 들어서자 복도를 따라 진한 향내가 흘렀다.

“총군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드륵.

문 바로 앞에 석화린이 서 있었다.

팽하벽은 허리를 숙였다.

“형수님을 뵙소이다.”

“호호호. 우리 오랜만에 뵙는군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스윽.

그녀는 스스럼없이 팽하벽의 팔을 잡으며 안으로 당겼다.

“……시선들이 많습니다.”

“괜찮아요. 전부 제 사람들이랍니다. 그리고 어때서요? 형수와 도련님 사이가 아닌가요?”

“안 됩니다.”

팽하벽은 단호하게 대답하면서 그녀의 팔을 거부했다.

“어쨌든 안으로 들어오세요.”

팽하벽은 그녀를 따라 들어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괜히 왔다는 후회가 다시 들었다.

“앉으세요.”

그녀가 돌아서면서 환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팽하벽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팽하벽이 앉은 자리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앞에 떨어졌으면 합니다.”

“괜찮아요. 방에는 우리밖에 없어요.”

석화린은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거의 붙을 정도로 다가섰다.

“혹시 들었나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본 가에 화산도협이라는 녀석이 왔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고맙겠어요.”

“…….”

그녀의 손이 어느덧 팽하벽의 손 위에 올라가 있었다.

“형수님, 선을 지키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 선이라는 게 뭔가요? 그때 우리가…….”

벌떡!

팽하벽은 그녀의 손을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나오시면 그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이젠 장난치지 않겠어요.”

석화린은 뒤로 물러났다.

처음과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부탁은 간단해요. 그 도사 놈의 사지 중 하나만 불구로 만들어주면 고맙겠군요.”

팽하벽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와 싸우라는 것입니까?”

“비무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

“도성에게는 쉬운 일이잖아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는 남궁허를 이긴 고수인 데다 북흑신왕까지 이겼소이다.”

“당신은 그들보다 강한 중원오성이잖아요. 겨우 약관밖에 안 된 젊은 사내를 이기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요?”

“…….”

“이번 한 번만 제 부탁을 들어주면 그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꺼내지 않겠어요.”

“저번에도 그러지 않았소이까?”

“지금이 진짜 마지막이에요. 우리 진이를 다치게 한 그놈을 용서할 수 없어요.”

이번에도 당하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빛은 애원이 아닌 자신을 비웃는 듯한 실소였다.

네까짓 게 내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는 자신감.

“……알겠소이다.”

팽하벽은 진저리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손을 뻗어 팽하벽의 장포 자락을 잡았다.

“가시는 건가요? 좀 더 계시지 않으시고?”

“이번 일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만일 또 부탁하신다면 그땐 내가 모든 것을 먼저 밝힐 것입니다.”

휘익!

팽하벽은 장포를 잡아당기며 방을 나섰다.

‘흥. 과연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교화전을 나온 팽하벽은 걸음을 멈췄다.

‘하아……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는 수십 년 동안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하루하루 죽고 싶은 마음이 늘 마음 한편에 숨어 있었다.

그개를 돌린 그의 시선이 영빈정으로 향했다.

‘좋아, 이번이 마지막 부탁이다.’

휘이익!

팽하벽은 신형을 날렸다.

* * *

가주 팽직도가 저녁 식사에 화산파 일행을 초대했다.

반시진 정도의 시간이 남는 동안 영빈정에서 일행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당우희와 이부인과의 작은 말다툼이 있었지만 다행히 순조롭게 넘어갔다.

장두총은 그때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희야, 다음에는 성질 좀 죽이고 조용히 넘어가자. 알겠지?”

“알겠어요. 하지만 못됐잖아요?”

“나도 알아. 그래도 한 가문의 대부인이잖아. 너무 함부로 말했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괜찮지만, 호정 사제가 책임을 져야 해.”

“다음에는 그러지 않을게요.”

그러고는 곧바로 건너편에 설강과 설미 남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고진유를 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호정 사제, 아까 괜히 나서서 미안해.”

“아닙니다. 저 대신에 시원하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도움이 돼서…… 다음에도 곤란한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사저,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입가에 미소가 나왔다.

설미는 시원하게 이부인을 향해 따지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 미소를 지었다.

“우희 언니가 대단해요.”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완전 대장부 같은 면도 있지요.”

“저도…… 우희 언니처럼 강하고 멋진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닙니다. 설 소저도 이미 제가 보기에 호청 사저처럼 강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천하의 오미화이지 않습니까.”

“고마워요. 별말씀이 없으셔서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뭐…… 너무 예쁘다 보면 감각을 잃어버릴 때가 많지요.”

“……그런가요?”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이유보다 그의 칭찬이 좋았다.

“그리고 우린 내일 떠날 테니 마음 편하게 쉬고 계세요.”

“대협께서는 저희 남매에게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돼요.”

이번에는 설강이 대답했다.

“은공, 맞습니다. 이젠 저도 괜찮습니다. 북해빙궁으로 가는 일에 부담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소이다. 그럼 식사 때까지 쉬고 계세요.”

고진유는 두 사람과 대화를 마친 후 일어났다.

그때,

멈칫.

그가 걸음을 멈추고 영빈정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기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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