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하북팽가.
중원 무림의 도종(刀宗)이라 자부하는 도가의 명문세가다.
중원오성의 일인으로 하북성 최고의 무인인 도성(刀星) 팽하벽이 있는 곳.
화산파 일행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크크크…… 멍청한 새끼.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군.’
팽병진은 화산파 일행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세가에 가는 것이었다.
저놈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세가에 직접 가서 따지겠다고? 들어가는 즉시 네놈들은 나와 신세가 바뀌게 될 것이다. 어머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크크크…….’
그는 자신이 자잘한 잘못을 저질러 가벼운 문책상 창주지부에 갔다고 굳게 믿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하북팽가 가주의 사남이며, 석가장 장주의 외조카의 신분.
하북성 최고의 부모와 최고의 명문 가문을 두었다.
그런 자신이 하북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자리 잡은 영하문의 양조장 하나를 가지고 수모를 당했다.
팽병진은 하북팽가로 끌려가는 내내 이를 갈면서 화산파 일행을 조용히 따랐다.
* * *
휘익!
척후로 나섰던 녹림야검이 돌아와 곧바로 고진유에게 보고했다.
“대사님, 전방에 하북팽가의 인물들이 오고 있습니다.”
“수고했어요.”
하북팽가는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이 정도로 빠르게 반응하는 걸 보니 북경으로 들어올 때부터 우리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말이네요.”
묵경이 물었다.
“진유 아우, 저들이 우리가 하북팽가에 가는 이유를 알고 있을까?”
“저놈이 개망나니라도 창주지부에서 연락을 띄웠을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달려올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그렇다면 당장 시끄러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이잖아.”
“그건 모르죠. 후후.”
흠칫.
고진유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묵경의 얼굴 근육이 살짝 굳어졌다.
‘으, 이 녀석이 가끔 웃을 때마다 겁이 난다 말이야.’
곧이어 황천벽력기(黃天霹靂旗)를 내세운 하북팽가 문도들이 나타났다.
황색의 표기 사이로 혼원무력군 월도대의 붉은색 극월의 월도기(月刀旗)도 함께 펄럭거렸다.
‘월후 숙부님!’
한 손으론 극월도를 잡고 반대 손은 갈색마의 고삐를 쥐며 달려오는 중년 무인.
월도대 수장 팽월후가 화산파 일행을 맞이하라는 내당주의 명을 받고 곧장 세가에서 내려왔다.
월도대는 화산파 일행 앞에 멈췄다.
타앗!
팽월후가 말 아래로 내려선 후 우렁차게 소리쳤다.
“본인은 팽월후라고 하오. 어느 분께서 화산도협 고진유이오?”
“본도가 고진유입니다.”
고진유가 일행 사이로 나와 그와 마주 섰다.
남궁무적검을 이긴 화산파 신진고수의 소문은 중원 무림 전체에 퍼져 있었다.
팽월후의 시선이 스치듯 고진유의 신형을 빠르게 훑었다.
‘흐음…… 소문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중원 최고의 후기지수라 일컫는 화산도협의 소문.
고진유의 신형에서 흐르는 내기가 정순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판단하기에 이 정도로는 남궁무적검을 이길 수 없었다.
‘그가 방심한 탓인가?’
혹시나 놓친 게 있지 않았는지 재차 확인해도 처음 느낌 그대로였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본신 내력을 감춘 것인지도 모르겠군.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화산도협은 상당히 약은 인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팽월후는 고진유에 대해 판단은 잠시 미루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화산도협, 북경으로 들어선 것으로 봐서 본 가를 향해 오는 듯하군요.”
“맞습니다. 본 일행은 하북팽가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본도는 하북팽가의 가주님을 뵙고자 요청하는 바입니다.”
“바로 가주님을 뵙고자 하는 이유를 무엇이오?”
“창주지부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하북팽가의 사공자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팽월후의 눈 아래가 꿈틀거렸다.
(#회시)“사공자를 데리고 오게. 월도대와 함께 가는 게 좋겠군.(#회끝)
내당주 팽홍은 그에게 명을 내리면서도 사공자가 화산파 일행과 함께하고 있는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다.
‘저 녀석이…… 또 사고를 쳤군.’
그의 시선이 화산파 일행 사이에 있는 팽병진을 향했다.
팽병진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에 짜증이 일어났다.
‘망할 녀석. 대체 어떤 사고를 쳤기에 화산파에서 직접 온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그냥 두고 세가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나 월도대와 함께 자신을 보낸 팽홍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정말 사고를 쳤다면 쉽게 저 녀석을 데리고 갈 수 없겠군.’
그때였다.
“월후 숙부, 어서 조카를 구해주십시오! 이놈들이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둥바둥하는 어색한 모습.
‘애도 아니고.’
고진유는 너무나 어설픈 그의 연기 탓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숙부……!! 숙부!”
팽병진은 계속해서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 저런 놈이 어떻게 가주 형님의 자식인지…….’
어이가 없어서 차라리 애처로워 보였다.
“……화산도협, 어떻게 된 것이오? 조카의 말이 사실이오?”
“맞습니다. 본도가 단번에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
물론 농담인 줄 바로 눈치챘다.
하지만…….
‘너무 건방지군.’
팽월후의 검미 사이에 주름이 깊게 생겼다.
‘저리 무작정 내뱉다니. 하북팽가를 무시할 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것인가?’
“숙부! 이놈은 본 가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고만 있으십니까? 빨리 구해주시오!!”
처음과 달리 애원하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상관이 수하에게 명을 내리는 듯 재촉하면서 소리쳤다.
‘저 녀석이…….’
조카라 하지만 그에 대해 애정을 가진 적은 없다.
세가에서의 생활도 개차반이 따로 없었다.
외가의 가문을 믿고 하루라도 조용하게 보낸 날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게 뻔하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큰 사고를 쳤고, 운이 없게도 화산파 일행에게 걸린 게 확실했다.
“화산도협, 본인이 가주님께 이번 사건에 대해 보고하겠소이다. 그 전에 일단 그를 풀어주면 고맙겠소이다.”
“죄송합니다. 본도가 그분께 직접 데리고 가겠습니다.”
팽월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재차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화산도협, 사공자를 본인에게 맡기더라도 가주님을 만나뵐 수 있소이다.”
“죄송합니다. 가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그를 풀어주도록 하겠습니다.”
“허, 본인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오?”
팽월후의 얼굴이 붉어지며 감정이 상했다.
“대주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공자를 풀어놓으면 시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
순간 ‘그건 맞네’ 하고 동조할 뻔했다.
그의 말처럼 팽병진을 풀어준다면 세가까지 가는 동안 어떤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팽병진은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자 악을 썼다.
“잘 보시오!! 이놈은 숙부까지 개무시하고……!!”
쉬이이익-
순간, 빠르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퍼어억!
“아아악!!”
팽병진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뒹굴었다.
“사내 자식이…… 시끄럽군.”
혁자영은 손을 가볍게 틀었다.
화산파의 사형제 중 가장 이성적인 혁자영조차도 참을 수 없었다.
팽월후는 어이가 없었다.
맞을 짓을 한 건 이해가 가지만 자신을 앞에 뻔히 두고 손을 쓰다니!
“화산도협, 지금 무슨 짓인가? 본인의 눈앞에서 손을 쓴 것인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조용히 따라오기에 가만히 둔 게 잘못이군요. 처음부터 점혈할 걸 그랬습니다.”
“그를 당장 풀어주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본인의 말을 무시하는 것인가?”
“본도가 보기에 반대인 것 같습니다만…….”
파아아앗-!!
팽월후는 결국 내기를 뿜어냈다.
“지금 본인과 싸우고자 하는 것이군. 아니면 하북팽가와 싸우고자 하는가?”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는군요. 가주님을 만나고 난 뒤 그를 풀어준다고 했습니다. 대주께서 이 말이 싸우겠다는 소리로 들리신다면, 얼마든지 받아주겠습니다.”
고진유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슈우우우우-
하단전은 물론 중단전의 십이 성 내력까지 단숨에 뿜어냈다.
‘허억.’
팽월후의 동공이 흔들거렸다.
그로서도 가늠하기조차 힘든 무형의 내력을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었다.
고진유의 목소리와 함께 눈빛이 강맹하게 변했다.
“먼저 도를 뽑으시오.”
“…….”
“싫소? 그럼 내가 먼저 검을 뽑겠소이다.”
고진유의 말과 행동은 앞전과 달리 단호했다.
“잠깐…….”
팽월후는 사의검을 잡은 그를 보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다급하게 손을 내밀며 좌우로 흔들었다.
남궁무적검을 이긴 게 운이 아니었다.
‘망할…… 사실이었군. 정말로 내력을 숨겼던 거야.’
세가에서 남궁무적검과 견줄 수 있는 무인은 오직 한 명뿐.
혼원무력군의 총군장이자 중원오성의 일인, 도성 팽하벽이 유일했다.
“대주는 본도와 싸울 뜻이 없소?”
고진유의 목소리에서 패기(覇氣)가 쏟아져 나왔다.
‘정도에서 이런 인물이…… 이런 건 천검궁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겼거늘…….’
월도대의 수장으로서 무인이라면 당연히 목숨을 잃어도 두렵지 않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 두려움이 팽월후의 전신을 지배했다.
‘내가 떨고 있다니…….’
* * *
웅성웅성.
하북팽가가 소란스러워졌다.
소란스러움의 원인은 세가로 들어선 화산파 일행.
팽월후는 그들을 바로 영빈정으로 안내했다.
‘바로 가주 형님께 가는 게 낫겠군.’
달래기도 하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화산도협은 오히려 더 강하게 나왔다.
내당주 팽홍에게 먼저 보고했다가는 분명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터.
팽월후는 경내를 지나 바혼원가주전으로 향했다.
“자네, 어디 가는 길인가? 내당은 그쪽이 아니라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내당주 팽홍이 그를 불러 세웠다.
“가주 형님께 가는 길이오.”
“무슨 일로 가는 것인가?”
“사공자에 관한 내용이외다.”
“어허. 조용하게 지내시는 분께 굳이 갈 이유가 있는가?”
팽홍은 흐느적거리며 다가섰다.
“이번 일은 직접 아셔야 할 것 같소이다.”
“왜?”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팽월후의 앞으로 얼굴을 바짝 다가섰다.
“형님은…… 몰라서 묻소? 사공자가 창주에서 사고를 쳤소이다.”
“이 사람아. 조카가 사고를 친 게 한 두 번인가? 가주께서 참고 참다가 창주까지 보냈는데 그곳에서도 사고를 쳤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겠나?”
“형님. 지금 조카를 걱정하는 거요?”
“숙부라면 당연한 일이네. 조카 걱정을 어찌 하지 못하겠는가.”
“세가 걱정은 안 되는 모양이구려.”
“이거 참…… 겨우 이 정도 일로 세가까지. 자네 너무 멀리 가는 듯하구만.”
‘이까짓 일이라고?’
팽월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내당주 팽홍이 이부인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를 내당주에 오른 것도 이부인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더는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됐소. 난 가주께 보고하겠소.”
휘익!
팽월후는 몸을 틀며 돌아섰다.
“저, 저 녀석이……!!”
멀리 사라지는 그를 본 팽홍의 코 평수가 씰룩거렸지만, 말도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 * *
“하아…….”
팽월후는 한숨을 쉬며 혼원가주전으로 들어섰다.
창문 사이로 서책을 읽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세상에 가주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까.
‘어떻게 말을 꺼내지?’
집무실로 들어서는 그의 걸음이 무거웠다.
“가주 형님. 월후입니다.”
“아우, 어서 오시게.”
가주 팽직도는 환한 표정으로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늘 웃음이 가득한 얼굴에 인자한 표정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대했다.
“화산파 일행과 함께 들어왔다고 들었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네에. 일이 생겼습니다.”
“일이라…… 창주에 있어야 할 넷째도 그들과 함께 들어왔다고 하던데.”
“…….”
팽월후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에 팽직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화산파에서 온 손님들은 어디에 모셨는가?”
“제가 영빈정에 안내를 했습니다.”
“잘했네, 화산대사 일행이라면 당연히 귀빈으로 모셔야지. 세가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을 쓰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지만 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게. 그들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화산도협이 가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가? 나를?”
“그렇습니다.”
“나하고는 아무런 접점도 없지 않는가?”
“저…… 그게…….”
팽월후는 말을 더듬었다.
“창주에 있어야 할 넷째가 함께 온 것과 분명 연관이 있겠군. 당연히 안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해보게.”
“사공자가 영하문과 시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영하문이라면 형수에 있는 문파가 아닌가. 예전에 문주를 한 번 만났는데 사람이 괜찮더구만. 함부로 소란을 피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네. 그렇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화산도협을 만나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다다다다-
그때, 집무실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호위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가주님, 급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일이더냐?”
“이부인님께서 노기를 터뜨리며 영빈정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뭐라?!”
팽월후는 깜짝 놀랐는지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팽직도는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월후 아우, 왜 그리 놀라는가? 그녀가 실례를 할까 그러는가?”
“빨리 가셔야겠습니다. 둘째 형수님께서 곤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허허. 자네는 아직도 그녀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만.”
“그게 아니라……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가시지요!”
팽월후의 걸음이 다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