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짜증 나.’
마치 승자처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모습.
남궁세가 놈들이나 이놈이나 모두 똑같은 놈들이었다.
“물러나!!”
팽병진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다가오던 고진유의 걸음이 멈췄다.
“당신, 마음이 썩었군.”
고진유의 한마디 말은 그 어떠한 충격보다 강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대체 뭐가 썩었다는 것이오?”
팽병진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소.”
‘망할 놈이…… 사람 기분 나쁘게 해놓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눈에 거슬리는 녀석을 한시라도 빨리 내쫓고 싶었다.
“대체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오?”
“잘 물어봤소. 내가 먼저 말을 꺼낼까 하던 참인데.”
“…….”
“며칠 전 형수를 지나가다가 장마를 만나 우연히 영하문에 들르게 되었소이다.”
‘영하문?’
팽병진은 영하문이란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에서 본도가 극진히 대접을 받아 보답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움을 주겠다고 했소이다.”
“…….”
“바로 문주께서 한 가지 도움을 청하더군요.”
확히 어떠한 보답인지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창주지부에 있던 자신에게 찾아온 것만 봐도 영하문에서 무엇을 부탁했는지 알았다.
두철희의 안색이 굳어졌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일이 터졌어.’
팽병진은 영하문의 일반 점포도 아닌 가장 주요한 사업체를 내놓으라고 했다.
북경 본가로 올라갈 때 선물이라면서 들고 갈 생각이었던 것.
고진유는 아이에게 가르치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이 무엇인지 아시오?”
“…….”
“도둑질이라는 거요. 세상의 모든 악은 도둑질에서 비롯되지요. 내 행복을 위해 남의 행복을 훔치는 행위니까.
살인, 탐욕 또한 마찬가지. 살인이란 타인의 생명을 훔치는 것이요, 탐욕으로 타인의 물건을 가지는 것 또한 결국 도둑질이요.”
고진유는 그를 똑바로 직시하면서 말을 했다.
“나 또한 한때 도둑놈이었소. 다행히 사부님을 만나 도둑질은 나쁜 짓이라는 걸 배웠지. 그래서 난 의적이 되기로 했소.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도둑놈들이 도적질한 것을 다시 훔치는 도둑이 될 되는 것. 이게 바로 본도의 도(盜)이오.”
“…….”
“본도의 말을 잘 명심하시오. 당신이 그들의 삶을 훔치는 순간, 본도는 당신의 삶을 훔칠 것이외다.”
고진유의 안광에서 쏟아진 무형의 압박에 팽병진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려움.
언제라도 목을 벨 수 있는 무형의 칼날이 날카롭게 닿아 있었다.
“본도의 말이 헛소리로 들린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시오. 그 대신 뒷일은 그대가 책임져야 할 것이오.”
휙.
고진유는 몸을 돌렸다.
창주지부에서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두철희는 돌아선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두 부장님.”
“넵. 하명하십시오.”
“앞으로 그의 생사는 두 부장께 달려 있으니, 창주에 그가 있는 동안 허튼짓하지 않도록 잘 보필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수고하시오.”
고진유는 내원에서 물러났다.
정문에서 기다리던 일행이 밖으로 나온 고진유를 반겼다.
일행 대표로 묵경이 물었다.
“잘 해결됐어?
“우선 잘 알아듣게 이야기했어요. 머리가 나쁘지 않다면 가만히 있을 겁니다.”
“그놈이라면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닌데? 순순히 알겠다고 하던가?”
“그럴 리가요. 뒤통수가 튀어나온 것을 보니 딱 봐도 반골 기질이라 사람 뒤통수 제대로 칠 것 같더군요.”
“그럼 어떻게 하려고? 우린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없잖아?”
“여기 오기 전에 이야기를 했어요. 만일 그가 다시 양조장의 일로 찝쩍거린다면 연락 달라고 했습니다.”
“그땐 어떻게 할 생각인데?”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일을 할 땐 확실히 해야지 않겠어요?”
묵경은 미소를 짓는 고진유의 얼굴을 보며 당황해싿.
“너어 설마……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는 건 아니겠지?”
그에 장두총이 다급히 물었다.
“묵경 형님. 사제가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하북팽가에 쳐들어갈 생각인 거야.”
“…….”
일행의 시선이 고진유에게 향했다.
“서, 설마요. 겨우 그 문제로 하북팽가에 쳐들어간다고요?”
“장 아우. 지금까지 사제와 같이 다니면서 성격 파악했잖아. 삼 년 안에 무엇을 하겠다고 했는지, 기억 안 나?”
고진유가 밝힌 삼년지계.
화산파를 천하제일문으로 만들겠다고 당당히 포부를 밝혔다.
“사제는 천하를 훔치기 위해 발을 들여놓았다는 말이군.”
휘익!
혁자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진유가 말 위에 올라탔다.
“이제 북해빙궁으로 가죠.”
다각다각.
일행 모두가 말을 타며 앞서가는 고진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재미있겠어.”
혁자영이 먼저 말 위에 올라타 고진유의 뒤를 따랐다.
* * *
남궁사천성(南宮四天星).
남궁세가의 네 개의 별.
이는 검황과 남궁삼천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중 두 개의 별이 떨어졌다.
검황의 죽음에 이어 남궁제일검 남궁파의 죽음이 전해졌다.
그 전엔 남궁무적검 남궁허가 패배했다는 소식까지.
남궁세가는 충격에 빠져들었다.
남궁파의 시신이 남궁세가로 돌아왔다.
시신의 전신에는 수백 개의 검흔이 형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그려져 있었다.
비대위의 수장을 맡은 남궁형소는 광분했다.
남궁무명을 잡기 위해 갔던 남궁파가 목숨을 잃었다.
“이번 일은 절대로 넘어갈 수 없소이다!”
“맞습니다. 남궁파 숙부님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남궁영운도 흥분한 투로 소리쳤다.
“당장 남궁무명을 잡기 위해 고혼군이 나서야 하겠습니다.”
“잠시만!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소이다.”
“일장로님, 지금 진정이 되겠습니까? 세가의 변절자 남궁무명이 남궁파 숙부님을 죽였습니다.”
“허허, 영운은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는가?”
“죄송합니다.”
남궁영운은 얼른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쳇. 망할 늙은이.’
연장자인 일장로 남궁삼은 애써 주변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독였다.
그가 봤을 때, 지금은 상황을 똑바로 주시하며 흥분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세가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가주조차 없는 마당에 악재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남궁무명을 잡으러 갔던 남궁제일검은 물론 대연군의 무인들까지 모두 죽었네. 본인이 하나만 묻지. 그 아이 혼자서 모두를 죽일 수 있다고 보는가?”
남궁도가 손을 들었다.
“일장로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절대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호천수호대주였던 그의 무공이 강하다고 하나 상대는 남궁제일검과 대연군입니다. 그리고 옥해원(鈺解院)에서 남궁제일검의 사인을 찾아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대연군과 남궁제일검을 죽인 상대의 무공은 백사백백무진이었습니다.”
“방금 백사백백무진이라고 했는가?”
남궁삼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과거 중원 무림을 충격에 빠뜨렸던 죽음의 검진.
백사문(白死門)의 사사진(邪死陣)이 이백 년 만에 중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일장로님, 혹시 혈사천이 백사문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남궁영운은 의문을 제시했다.
“…….”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장로님, 일공자의 말에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듯합니다.”
남궁형소 또한 같은 의견이었다.
“허허. 본가에 어찌 이런 일이…….”
남궁삼은 안타까운 탄식만 나왔다.
혈사천과 백사문이 관계가 있다면 남궁세가 입장에서는 안희성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해 혈사천과의 전쟁에 나서야 했다.
그 일에 앞장설 인물은…….
‘허어…… 사람이 넋이 나갔어.’
화산도협에게 패하고 돌아온 남궁무적검 남궁허는 멍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남궁세가 최고의 무력군의 수장인 남궁허가 앞장을 서야 했지만, 지금 상태로 봐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듯했다.
“이보게, 괜찮은가?”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딴생각에 빠져 그들의 대화도 따라가지 못했다.
“아니네. 당분간 자네는 쉬고 있게나.”
“……괜찮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듣지 못한 것뿐입니다. 세가의 어려움이 보면서 쉴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맡겠습니다.”
“그런가. 혹시 조금 쉬고 싶다면 언제라도 말을 하게나.”
“알겠습니다.”
남궁허는 필요한 일을 맡겠다고 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예전처럼 자신감에 강해 보이지 않았다.
‘후후후, 남궁허 숙부님까지. 이제 내 경쟁자는 없군.’
남궁영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그런 그를 유심히 지켜보는 눈빛.
‘허허…… 그 녀석의 말이 맞단 말인가.’
남궁삼은 마음이 착잡해져 갔다.
어제저녁 늦게 남궁후진이 찾아왔었다.
특검신패와 함께.
* * *
두두두두-
한 필의 말이 영하문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이 내가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이지?”
팽병진은 형수로 향해 곧장 말을 몰았다.
화산도협이 지나간 지 하루가 지날 때까지는 지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놈이 멀리 가버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다음 날이 되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일러바친 영하문의 문주가 괘씸했다.
“가만히 안 두겠어! 망할……! 하북 땅에서 하북팽가를 무시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직접 알려주마.”
멀리 영하문의 정문이 나타났다.
타아앗!!
팽병진은 말 위에서 신형을 날려 영하문 정문에 내려서는 동시에 일도(一刀)를 펼쳤다.
샷샷!!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문 앞으로 열 명의 도수(刀手)가 빠르게 막아섰다.
순식간에 합벽도를 펼친 그들이 팽병진의 일도를 밀어냈다.
“뭐야, 네놈들은?”
“우린 영하문의 문도들이오.”
“감히 영하문 주제에 내 앞을 막아선다는 것이냐? 내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지. 나 하북팽가의 팽병진이다!”
“당연히 알고 있소. 팽가사견이라 불린 개망나니가 그대가 아니오.”
“뭐?! 이 새끼들이 단체로 미쳤나?”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최근에 두 번이나 면전에서 들었다.
팽병진은 재차 벽력도법을 일으키며 열 명의 도수를 향해 천벽도를 펼쳤다.
쿵! 쿵! 쿵!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졌다.
하북팽가의 도법은 기세만으로 상대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영하문 최고의 실력자들에게 팽병진의 무공은 어설퍼 보였다.
열 명의 합벽도에서 쏟아낸 도기가 팽벽진의 공격을 간단하게 막아낸 뒤 재반격을 가했다.
“커어어억!!”
팽병진은 가슴에 충격을 받은 채 뒤로 떨어졌다.
넘어진 상태에서도 믿기지 않은 듯 그의 눈이 커졌다.
“이…… 놈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지금 누구를 죽이려고 한지 아느냐?!”
“조용히 하시오.”
“뭣이…… 라……!!”
팽병진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고자 할 때였다.
휘익!
영하문 문주 능허가 다가서면서 쓰러진 그의 혈을 눌렀다.
“사공자, 그만 주무시게.”
‘어억…… 죽…… 일…… 노오오오.’
팽병진은 정신을 잃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휴우. 됐다.”
화산도협이 예상이 맞았다.
팽병진의 성격상 억울함에 미쳐 하루 만에 분명 찾아올 거라고.
뒷일은 무조건 화산도협이 책임 지겠다고.
이젠 일은 저질렀다.
‘화산도협을 믿을 수밖에.’
능허가 수하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이놈을 묶은 뒤 그분께 끌고 가라!”
* * *
창주지부를 나선 일행이 패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루 쉴 겁니다.”
설강도 더는 조바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화산파의 사형제들과 친해졌는지 객루의 별관에 자리를 잡은 뒤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길을 나서기 전에 영하문의 문도들이 찾아왔다.
묵경이 말 위에 엎어놓은 인물의 복면을 풀었다.
“놀랍지도 않네.”
화들짝 놀라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묵경은 정신을 잃은 팽병진을 담담하게 내려다보았다.
팽병진을 끌고 온 영하문의 문도들만 봐도 어떠한 상황인지 파악되었다.
‘이 물건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군.’
‘멍청한 놈. 영하문이 겨우 네놈에게 당할 줄 알았던 모양이지.’
영하문을 무시한 결과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고진유는 영하문의 문도들에게 짧게 포권을 했다.
“급하게 오느라 고생했소이다.”
“아닙니다. 문주님께서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거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시오. 본도가 책임질 것이외다.”
“고맙습니다. 저희들은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영하문 문도들은 공손하게 인사한 후 다시 형수로 내려갔다.
팽병진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엎드려 있었다.
“설 공자,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가 갈 곳이 있는데 괜찮겠소이까?”
“은공께서 편하실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소이다.”
설강은 정신을 잃은 그를 불쌍히 내려다 보았다.
‘하필이면 화산도협에게 걸릴 게 뭐람…… 운도 없군.’
툭.
고진유는 가볍게 팽병진의 머리를 쳤다.
“일어날 시간이오.”
“으…… 으…… 이…… 개…… 쌔끼들이……!!”
눈을 번쩍 뜨는 동시에 팽병진이 몸을 일으켰다.
“어…… 어……?”
그리고 말에서 떨어졌다.
“아악!!”
육 척 정도의 높이에서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며 온몸에 고통의 충격이 가해졌다.
팽병진은 아직 옆에 누가 있는지 몰랐다.
“영하문…… 네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줄 테다!!”
“놀고 있네.”
“어떤 놈이냐?!”
팽병진이 빠르게 일어나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의 눈이 커지는 동시에 동공이 흔들렸다.
‘네…… 놈은……!’
창주지부에서 헤어졌던 화산도협 고진유가 바로 앞에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난 분명 영하문에 있었는데……?’
“내가 분명 조용히 지내자고 하지 않았나?”
“……!!”
“그새를 참지 못하고 형수까지 갔더군. 조용히 경고했건만 내 말을 무시했으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요.”
“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하북팽가에 가서 따져야지. 두 번 다시 형수를 건드릴 생각 못 하게. 후후후.”
고진유의 웃음소리는 마치 신난 일을 앞에 둔 것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