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21화 (121/425)

121화

팔각 모양의 이단 지붕.

그 아래로 여덟 개의 기둥이 여의봉과 닮았다고 하여 여의정이라 불리는 곳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가슴까지 가지런히 내려온 백색 수염은 백색 비단 장포와 함께 휘날렸다.

백의노인의 모습은 마치 선계에 들어선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천문전 전주 나하중.

극일천의 십전(十殿)의 수장 중 대전주이며, 천주를 제외하고 극일천의 결정권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다.

‘흐음.’

나하중은 뒷짐을 쥔 채 하늘 끝을 올려다보았다.

중원에서 하루에도 수십 통의 하늘을 통해 전서가 날아왔다.

그중 대부분은 화산도협 고진유에 관한 내용들.

그가 무림맹을 나선 이후 모든 행적을 속속들이 파악했다.

재밌는 녀석이었다.

무림맹주의 명이라 하지만 화산지의 모든 인원을 끌고 무림맹을 나서질 않나.

북해빙궁의 꼬맹이를 지옥혈림의 쓰레기장에서 꺼내고자 목숨을 걸지 않나.

‘그럴 놈이 아니거늘.’

패도를 걷는 녀석이 타인의 어려움을 알고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도와준다?

역사에 그와 같은 패도를 걷는 인물은 없었다.

‘게다가 철갑을 가지고 다니면서까지…….’

무리할 일이 없을 텐데.

‘잠깐. 철갑을 가지고 다닌다?’

왜?

그놈의 사부가 목숨까지 버리며 지킨 철갑이었다.

그런 물건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여정에 들고 다니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파아아앗!!

그 순간, 나하중의 내기가 솟구쳤다.

진동하는 내기에 의해 여의정의 여덟 개 기둥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당했다.”

완전히 속았다.

겨우 약관밖에 안 되는 어린 망할 녀석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이노오옴…… 철갑을 찾지 못한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무림맹을 나올 리 없다.”

실수로 무림맹에서 잃어버린 철갑.

그것을 얻은 오청석.

철갑을 찾기 위해 오청석을 무림맹 밖에서 잡았을 때 그는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결국 철갑의 존재는 무림맹에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오 년 동안 무림맹에서 철갑을 찾고자 했지만, 시간만 보낼 뿐 오리무중에 빠져 있었다.

“클클클…… 뒷골목 도둑 출신이라 잔머리 하나는 인정해야겠군.”

나하중은 뒤를 돌아 여의정에 앉았다.

쪼르르륵-

차분히 생각하기 위해 차를 따랐다.

“흐으음.”

차 한 모금을 마시자 점점 정신이 맑아졌다.

‘어디서 시작을 해볼까.’

그는 무림맹에 들어온 뒤 고진유의 행적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맹주의 부탁으로 허창에 내려갔다.

녹림까지 연관된 일을 제법 잘 처리했다.

슥슥슥.

나하중은 붓을 들어 그만이 알 수 있는 글자로 그림을 그리듯 적어 내려갔다.

‘패도를 지닌 인물은 쉽게 사람을 믿지 않지. 최측근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화산파에 가기 전 인연을 맺은 두 녀석.

묵경과 인양.

‘잠깐…….’

그가 화산파 일행이 북해빙궁으로 떠난 시점에 무림맹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찾았다.

무림맹을 나선 인물.

한 명도 빠짐없이 데리고 간다고 적혀 있었다.

화산도협을 포함한 화산칠협, 풍류미군 묵경, 녹림야검, 다섯 명의 특사.

“없어. 이 어린놈이 없어.”

고진유가 제자처럼 가르치던 도둑 출신인 어린놈이 사라졌다.

타아앙!

탁자를 내리쳤다.

“약은 놈.”

북해빙궁을 도와주라는 황보강의 명을 받아준 이유가 여기 있었다.

“제법이야.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뒤 몰래 철갑을 찾을 생각이었어. 후후후…… 그래, 그놈보다는 이쪽이 잡기 더 편하지. 오히려 잘됐군.”

나하중은 미소를 지었다.

이 사실은 자신밖에 알지 못했다.

‘이번 일은 조용히 움직여야겠군. 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우문전에서도 철갑을 노린다고 했지.’

극일천 내부에서도 견제하기 위해 많은 간자들이 서로를 지켜보고 있다.

“허허허. 여기에도 마음에 드는 놈이 없다니. 시간이 나면 한 번 물갈이를 해야겠어.”

채애앵!

나하중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찻잔을 튕겼다.

휘이익.

공각원의 수장 무신해가 여의정 화강암 계단 아래에 부복 했다.

양쪽 짙은 눈썹이 서로 붙어 강인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부르셨습니까?”

“이번 임무는 본좌 외에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될 극비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공각원을 풀어 무림맹에 가서 최대한 빠르게 인양이란 꼬마의 행방을 찾아라.”

“찾아서 죽이면 됩니까?”

“……행방을 찾게 되면 본좌에게 무조건 연락해라. 그놈에게는 절대로 손을 대어도 안 되며 누군가 그 녀석을 잡고자 한다면 그자는 죽여도 좋다. 지금 당장 떠나라.”

“존명.”

휘이이익!

바람 소리만을 남긴 채 그의 신형이 여의정 앞에서 사라졌다.

다시금 홀로 남은 나하중은 찻잔을 완전히 비웠다.

“후후후…… 만일 철갑을 찾게 된다면 화산도협, 네놈은 중원으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 *

설미는 고진유와 한 걸음 사이를 두고 뒤를 따랐다.

앞선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설마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그때마다 애써 아닐 것이라며 생각들을 지웠다.

“설 소저.”

그녀는 이름을 부르며 돌아선 사내의 표정을 보면서 알았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고백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당연히 그게 아니었다.

그는 연인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 아닌, 상대를 염려하는 시선으로 선뜻 말하기 쉽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좋지 않은 일이라도 경청하겠어요.”

“본도가 설 공자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오라버니를 지옥수에 갇히게 만든 의뢰자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요?”

“맞습니다.”

“소녀도 몰래 듣고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심결에 두 분의 대화가 들려와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고진유는 일대 주위를 살피고는, 내력을 주위에 흘려보내 두 사람이 선 자리 중심으로 삼 장 반경을 막아섰다.

“확실하게 밝혀진 내용은 아니지만 설 소저께 알려 드리겠소이다.”

“네? 오라버니는 안 되면서 소녀에겐 가르쳐 주시는 이유가 있나요?”

설강에게는 확실하지 않기에 가르쳐 주지 않았던 의뢰자의 신분을 자신에게는 가르쳐 주겠다는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설 공자를 막을 수 있는 분은 설 소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오라버니를? 내가?’

점점 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설 소저께서만 알고 있어야 할 겁니다.”

“비밀을 지키겠어요.”

“지옥혈림에 설 공자를 의뢰한 인물은…….”

고진유는 북흑신왕에게 들은 내용을 그녀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의뢰자의 신상에 대해 듣는 순간 설미는 한순간 몸에 기운이 빠져나가 휘청거렸다.

“아아…….”

스윽.

고진유는 재빨리 그녀의 곁에 다가서며 몸을 받쳐 주었다.

설미의 가느다란 몸이 고진유의 품에 안긴 듯했다.

“고…… 마워요.”

“괜찮으십니까? 잠시 저곳에 앉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정원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설 공자에게 말한 것처럼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에요. 대협께서 말씀하신 게 맞을 것 같아요.”

설미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오라버니를 잡아가도록 지옥혈림에 의뢰한 인물.

중원무림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인물은 극소수의 인원밖에 없었다.

한 명 한 명 모두가 범인의 선상에 놓은 뒤 추측했다.

오라버니를 지옥혈림에 의뢰를 하면 누가 이익을 얻을까.

뜻밖의 인물.

‘그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원래 그런 사람이니깐.’

설미는 고개를 들어 고진유의 눈을 마주보았다.

“미리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본도의 생각이 틀렸으면 합니다.”

“대협께서는 참으로 자상한 분이시네요.”

“…….”

단둘만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본 건 처음이었다.

‘속눈썹이 상당히 길구나.’

계속 그녀를 보다가는 얼굴이 붉어질 듯했다.

고진유는 옆으로 돌아섰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따로 만난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할 겁니다.”

“말을 맞춰야 하지 않겠어요?”

“음…… 사저들이 물어보면 그동안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해서 위로차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면 됩니다.”

“알겠어요. 근데 믿을까요?”

“믿지 않겠지만 그냥 넘어갈 겁니다.”

“아…… 네에…… 대협의 말씀대로 하겠어요.”

설미의 목소리는 조금씩 안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고진유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만 돌아가도록 하죠.”

스윽.

설미는 일어난 뒤 고진유의 등을 보며 바짝 다가섰다.

며칠 동안 묻고자 했던 질문.

이 시간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다.

“저어……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무엇인가요?”

“악 소저…… 와는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나요?”

“…….”

묵경 형과 사형들이 장난치는 대화를 옆에서 들은 모양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괜히 사형들이 본도를 놀리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대답을 해줘서 고마워요.”

등 뒤에서 들려온 설미의 목소리는 정원에서 함께 들어선 뒤 가장 밝게 들렸다.

* * *

하북 무림의 패자 하북팽가이기에 팽가의 지부 또한 그 지역에서 영향력이 컸다.

하북팽가 창주지부.

지부 정문 앞에 허리에 대도를 찬 두 명의 위무사가 서 있었다.

넓적한 얼굴에 유난히 납작한 코.

위무사 평후는 한숨을 쉬며 탄식을 내뱉었다.

“하아…….”

“허어. 이보게, 그러다 땅 꺼지겠네.”

동료인 위무사 한심은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다.

그가 왜 한숨을 쉬는지 잘 알고 있다.

당연히 한 달 전에 지부장으로 발령받고 내려온 개망나니 팽가사견 때문.

한 달 동안 그가 한 짓이라고는 창주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떡이 되도록 술을 퍼마시고, 팽가의 관리 점포에 찾아가서 지적하고, 괜히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시비 거는 일이 다반사였다.

창주의 현령조차 그의 악행을 보면서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흠흠, 사내라면 당연히 술을 마실 수 있지 않는가. 자기 점포에서 직원들이 똑바로 일을 못하면 말을 좀 할 수도 있지. 음…… 그리고 상대가 지나가면서 이유 없이 먼저 욕을 했다고 하니, 이것 또한 정당한 싸움으로 볼 수 있고…… 크흠, 흠, 더구나 무림인들끼리 싸우는 일에 관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 아닌가. 앞으로 이런 문제로 더는 현청에 문제로 삼지 말도록 하게. 크흠!”

관에서도 그를 말릴 수 없다 보니 창주는 온통 팽병진의 눈치를 보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쨍그랑!!

“뭐라고!!”

정문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

평휴의 몸이 흠칫했다.

“……저 개새끼가 또 지랄이야.”

“쉬잇, 조용히 말하게. 안에서 듣겠네.”

“한 형님. 지금 안에서 술 처먹고 개지랄 떠는 게 안 보이오? 진짜 더러워서 때려치워야지.”

“참게나. 저 성격에 여기에 오래 있겠는가? 조만간 다시 올라가지 않겠나.”

하북팽가 지부 중 본진과 가까운 지부에 발령받은 인물들은 대부분 잠시 왔다가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세가에서 큰 잘못을 저지른 경우 문책성 인사로써 가까운 지부로 휴식차 내려오곤 했던 것이다.

“하여튼 이해 안 되는 놈이야. 아니, 지 돈으로 술을 사서 퍼 마시면 될 것을 왜 남의 집안 양조장을 뺏으려는 거야?”

“에휴…… 그건 자네 말이 맞네. 영하문에서 가만히 내줄 리 없지 않겠나.”

“미쳤소? 그걸 주게? 나 같으면 빼앗길 때 빼앗기더라도 한 판 붙고 말겠수.”

“그렇긴 하지만…… 그들이 상대가 될까?”

하북팽가의 혼원무력군 일도대(日刀隊)만으로 영하문은 충분히 멸문시킬 수 있다.

형수와 가까이 붙어 있어 영하문 무인과 친한 한심의 마음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뭐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낯선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땅이 점점 강하게 울렸다.

평휴와 한심은 긴장하며 앞을 주시했다.

솟구친 먼지의 양을 봐서는 기마대가 달려오는 게 확실했다.

마치 돌격하는 것처럼 거세게 달려오고 있었다.

“평휴. 비상 신호를 올려라!”

“넵!”

방금 전까지만 해도 편안하게 대답을 주고받던 그들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변했다.

뿌우우우우-

평휴는 허리에 찬 나팔을 불었다.

사방에 울린 비상 긴급 신호가 창주지부를 들썩거리게 했다.

“적이다!!!”

“사파 놈들이 쳐들어왔다!!”

“뭣들 하느냐? 어서 무장하고 정문에 집합하라!!”

평휴는 나팔을 쥐고 있던 한 손을 내렸다.

“뭐야, 이놈들? 내가 언제 사파인들이 처들어왔다고 했어? 그냥 긴급 신호인데…….”

평휴가 그들을 향해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창주지부 부장 두철희가 지부의 무인들을 이끌고 정문에 도착했다.

두두두두두-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기마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어디에서 오는 놈들이냐?”

“두 부장님. 그게 아직 저희들도…….”

“미치지 않고서야 하북 땅에서 하북팽가에 쳐들어오다니. 간 덩어리가 부은 놈들이 확실하다.”

두철희는 발도할 준비를 했다.

펄럭펄럭!

기마의 선두에서 달리는 장두총의 매화도의가 바람에 휘날렸다.

하북팽가 창주지부의 정문.

처억!

장두총은 손을 들며 화산파 일행의 속도를 줄였다.

“호정 사제, 팽가에서 나와 있다. 내가 가서 우리가 누군지 밝히지.”

“그렇게 하세요.”

타앗!

장두총은 말 허리를 차며 정문으로 먼저 움직였다.

두철희는 다가오는 말 위의 인물을 주시했다.

‘흠…… 저 도의는?’

매화문양이 뚜렷하게 보였다.

“화산파 제자?”

휘익!

장두총이 말 위에서 내려섰다.

정문 뒤로 지부 소속의 무인들이 모두 나온 듯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본도는 화산파 제자 장두총이라 합니다.”

‘장두총…… 이라면…… 칠협의 화산전협?’

무림의 후기지수 중 최고인 화산칠협이 창주지부에 찾아왔다.

“반…… 갑소이다. 본인은 하북팽가 창주지부 부장인 두철희라 하외다.”

그는 포권을 하면서 장두총 뒤로 점점 다가오는 일행을 보았다.

찌릿.

전신을 누르는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허어…… 근데…… 이들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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