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쏴아아아-
하늘이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무더운 여름의 시작과 함께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북해빙궁으로 향하던 일행은 산동을 지나 하북 형수에 들어선 직후 장마에 의해 발길이 멈췄다.
끄덕끄덕.
묵경은 호피로 감싼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창가에 선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심란한 표정으로 중간중간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겠지.’
묵경은 돌아누웠다.
바로 옆에서 고진유 또한 같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일부러 늦게 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왜……?’
물어보고자 했다면 벌써 이유를 알았을 것이었다.
‘쩝. 그때 가르쳐 달라고 할걸.’
사내가 두말할 수는 없었다.
“자냐?”
“아닙니다. 빗소리 듣고 있습니다.”
“언제 비가 그칠지 모르겠군. 빨리 그쳐야 할 텐데.”
“며칠 동안 무리하게 움직였으니 잘됐어요.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때 쉬어야죠.”
“그렇긴 하지만 한숨을 쉬는 설 소저를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고진유는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애잔한 눈이 보였다.
“…….”
“그냥 비 맞고 가면 안 될까?”
“내일까지 기다려 보죠. 그때도 멈출 기미가 없으면 출발하고요.”
“그래?”
묵경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갑니까?”
“이 좋은 소식을 설 소저에게 먼저 알려야지 않겠냐.”
“아…….”
고진유가 잡기도 전에 이미 묵경은 그녀 곁으로 가 있었다.
꾸벅.
서로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설미가 돌아서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형님도 참.’
사실 비가 그치든 그치지 않든 내일 출발할 예정이었다.
일행이 이틀을 머문 이곳은 영하문(影下門).
하북 형수에 기반을 둔 군소방파로서 도문(刀門)에 속한 문파였다.
일행이 형수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은 영하문주 능허가 무읍까지 비를 뚫고 직접 마중을 나왔다.
화산도협에 대한 성의를 보인다며 우의도 없이 비를 맞으면서까지.
‘부담스럽게 말이지.’
영하문 같은 군소방파가 살아남기 위해 대문파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었다.
‘이해가 되긴 하지만 붙어서 떨어지질 않으니.’
일행 모두 그의 말과 행동에 부담을 받았다.
한 문파의 문주가 하는 행동이라기엔 심하다고 여길 정도로 말이다.
“화산도협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침, 들뜬 사내의 목소리가 문밖에 들렸다.
이각 전에 나갔던 문주 능허가 다시 찾아왔다.
드륵.
벌써 세 번째 방문.
이번에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당연하다는 듯 들어섰다.
이번에도 역시 함께 들어온 시비들의 손에는 큰 쟁반이 들려 있었다.
“화산도협님, 후식을 드셔야지 않겠습니까. 요건 화룡과(火龙果)입니다. 한 번 드셔보시지요.”
“문주님의 환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탁자에 내려놓고 가시면 됩니다.”
“…….”
문주 능허는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어떻게 할지 몰라 쭈뼛쭈뼛했다.
“오랜만에 화룡과를 먹는 것 같군. 문주님, 고맙게 잘 먹겠소이다.”
“아…… 네에. 풍류옥협님.”
묵경은 화룡과를 하나 집으서 고진유를 살짝 건드렸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한번 들어보기나 하지?]
[산동악가 일도 그렇고, 이번에도 도와주면 앞으로 무림을 다닐 때 피곤할 것 같아서요.]
[나도 알아. 영하문까지 부탁을 들어준 게 소문나면 너 나 없이 달려오겠지. 근데…… 장대 같은 비를 반시진 동안 맞으면서도 기다렸잖아. 최소한의 성의는 보인 셈이니…….]
한 문파의 문주가 우물쭈물거리는 모양새는 과연 보기 좋지 않았다.
‘그만큼 부탁할 내용이 무겁겠지.’
고진유는 손을 뻗어 화룡과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왕 가지고 오셨으니 문주님께서도 같이 드시지요.”
“아…… 네에. 고맙습니다.”
능허는 얼른 탁자 가까이 앉으며 시비들에게 손짓했다.
“너희들은 먼저 가도록 해라.”
* * *
접객실이 고요해졌다.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만이 가득했다.
영하문이 하북 형수에서 이백 년을 넘게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사에도 나름대로 탁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하북팽가라…….’
고민을 말하던 능허의 입에서 상당히 까다로운 문파가 툭 튀어나왔다.
영하문에서 운영하는 점포 중 가장 알짜배기인 백주노백간을 원한다며 다짜고짜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노백간을 제조하는 양조장은 영하문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는 주요한 사업체였다.
묵경은 십대세가 가주들의 성향을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능 문주님, 하북팽가는 겨우 양조장(釀造場) 하나를 눈독 들일 정도로 속이 좁은 곳은 아닐 텐데요.”
“풍류옥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노백간(老白干)을 원하는 이는 팽가의 넷째 공자로…….”
“팽병진.”
“팽가사견(彭家四犬).”
하북팽가의 넷째란 말에 묵경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바로 나왔다.
장두총도 한마디 거들었다.
워낙 하북팽가에서 유명한 인물인지라 멀리 떨어진 화산파까지 소문이 들려올 정도였던 것이다.
‘인간말종 자식이 결국 사고를 치는군.’
팽가에서도 포기할 만큼 내놓은 인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장의 점포들을 때려 부수고, 심지어 일반 백성들 상대로 사고까지 낼 만큼 유명했다.
다른 문파 같았으면 백번이라도 내쫓았을 테지만, 그의 외가가 석가장으로 모친이 장주의 장녀 석화린이었다.
“복을 입에 물고 태어난 놈이 하는 짓거리는 뒷골목 더러운 놈들처럼 노는군.”
하지만 아무리 개차반이라고 해도, 팽병진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영하문뿐 아니라 하북성의 군소방파들은 마음 편히 지내고 싶다면 하북팽가와 석가장과 무탈 없어야 했다.
우종성은 걱정이 앞섰다.
“호정, 작은 일이 아니다.”
영하문에서 부탁한 일이 화산파와 관련될지 모르는 중대사인 만큼 신중히 고려해야 했다.
“호진 사형께서 염려하신 뜻을 알겠어요. 근데…….”
고진유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런.’
고진유의 목소리에 집중하던 일행은 실룩거리는 입술을 보며 알았다.
‘또 가만히 있지 않겠구나.’
‘남궁세가에 이어 이번에는 하북팽가와 석가장까지 척을 돌릴 수도 있겠는데.’
화산파는 무림의 검문(劍門)이기도 하지만, 도를 깨우치고 수행하는 도문(道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의 잘나가는 사제는 패문(覇門)을 만들고자 하고 있었다.
‘하아…….’
우종성은 대사형의 입장에서 사제를 말려야 할지 망설였다.
분명 자신이 거부한다면 하지 않을 녀석임을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와 함께 끝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이 생애서 도를 닦기는 틀렸군. 혹시 다음 생애에도 도인이 된다면 그때는 세상에 관여하지 않고 도(道)만을 증진하는 도사가 되리라.’
“본도가 그를 한 번 만나보리다.”
곧이어 예상과 한 치도 빗나가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예에! 정말 감사합니다!”
능허의 머리와 허리가 자동적으로 수십 번씩 힘차게 움직였다.
‘북해빙궁은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그 순간, 동생과 함께 한편으로 떨어져 있던 설강의 표정이 굳어졌다.
‘망할…… 우린 원래부터 안중에도 없었던 거야.’
산동악가에 이어 이번에도 딴짓을 하기로 결정하다니.
“설미야, 차라리 우리끼리 가자.”
“오라버니…….”
“그의 행동을 보니 본 궁에 가기 싫은 모양이다. 굳이 억지로 같이 갈 필요 없지 않느냐.”
“우리끼리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저분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본 궁에 갈 수 없잖아요.”
“이젠 거의 무공이 돌아왔다. 충분히 놈들을 상대할 수 있어. 본 궁에서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아버지 외에는 없다.”
“그건…… 그렇지만…….”
북해빙궁에서 백 년 만에 태어난 귀재라 칭송받는 오라버니다.
중원에 냉풍만 데리고 내려온 이유도 무공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화산도협께서 우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지금까지 보셨잖아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신 분이세요. 만일 그분께서 우릴 무시했다면 지옥수에서 목숨을 걸고 오라버니를 구하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그거야…… 무림맹주가 부탁을 한 게 아니더냐?”
“지금도 보세요. 저분께서 맹주님의 부탁을 중요시했다면 하북팽가와 문제를 만들고자 하시겠어요?”
설미의 말이 맞았다.
그동안 그를 따르면서 어떠한 인물인지 알았다.
“휴…….”
설강은 짜증이 올라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빨리 가서 중독된 아버지를 구하고 지옥혈림에 자신을 의뢰한 놈들을 찾아 복수하고 싶었다.
마음은 급한데, 당장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말을 내뱉긴 했지만, 설미를 데리고 위험이 도사리는 본 궁에 단신으로 돌아가는 것도 무리였다.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
“오라버니…….”
설강은 비가 떨어지는 처마 아래로 나갔다.
주륵주륵.
쉴 새 없이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북해빙궁에는 비가 내리지 않겠지요?”
설강은 흠칫했다.
언제 옆에 다가왔는지 고진유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가끔 비도 내립니다.”
“그렇군요. 추운 곳이라 해서 눈만 오는 줄 알았습니다. 화산에도 가끔 눈이 오긴 하던데 자주는 오지 않더군요. 풍경 전체가 하얗게 변한다면 정말 멋질 것 같습니다.”
“한 달만 살아보시면 지긋지긋할 겁니다.”
“후후후, 그런가요?”
고진유와 설강은 잠시 말없이 세차게 떨어지는 비를 보았다.
“지옥수에서 나오기 전 북흑신왕이 알려주더군요.”
“……?”
“설 공자를 의뢰한 인물이 누구인지.”
설강의 눈이 커졌다.
‘누가 의뢰했는지 안다고? 그런데 왜……?’
의아했다.
왜 알려주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었다.
“원래 그런 업들이 신용이 꽤나 좋아야 하거든요. 근데 의뢰 한 번 잘못 받아 난리가 났다고 괜한 용심이 났던 모양인지, 의뢰자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정…… 말입니까?”
“알고 싶습니까?”
“…….”
“원한다면 알려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알고 싶었다.
설강의 입이 움찔거렸다.
한데,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간 고진유의 모습이 마치 삶과 죽음을 결정하도록 유도하는 사자(使者)와 같아 보였다.
“은공께서는 알고 계시면서 왜 지금까지 숨겼습니까? 혹시 다른 뜻이 있습니까?”
“본도는 일부러 복잡하게 살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을 믿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옥혈림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진실은 직접 확인하는 순간부터 사실이 되는 것이지요. 안 그런가요?”
“……맞습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본도가 일부러 말하지 않은 이유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흔들려 후회하는 경우가 생길까 봐서입니다. 잘못된 사실이라면 괜한 오해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알겠습니다. 직접 확인할 때까지, 그 일에 대해서 묻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북해빙궁의 일이 다급했다면 어떤 일보다도 먼저 그곳에 갔을 겁니다.”
설강은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나 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상황이 조급하게 만들었니까요. 그만 들어가죠.”
“아닙니다. 전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를 두고 돌아서 나올 때, 고진유와 조용히 서 있는 설미의 눈이 마주쳤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설 소저께서 중간에서 난처하셨을 텐데 잘하셨습니다.”
“소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지금처럼 하시면 됩니다. 설 공자께선 강한 사내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소녀도 잘 알고 있어요. 항상 오라버니를 믿고 있으니까.”
설강과 설미. 두 남녀는 남매간에 정이 유난히 깊어 보였다.
어릴 적 모친을 잃은 남매는 엄격한 가부 아래에서 지내며 서로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고진유는 잠시 고민했다.
‘설 공자를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설 소저뿐이다.’
* * *
건물 안에서만 지낸 일행은 따분해하기 시작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장두총이 멍하게 말했다.
“하아…… 지독스럽게 내리네. 본산이 괜찮을까 걱정되는데.”
“그러게. 매화관 지붕이 오래되어서 저번에 고치기는 했는데, 이 정도라면 분명 물이 새고 난리 났을 거야.”
“호민, 내가 알기로는 장문전에도 비가 샌다고 들었어.”
“장문전까지요? 완전 총체적 난국이네요. 그동안 보수 공사를 왜 안 했던 거죠?”
화산파 건물들이 낡아 비가 새고 있다는 내용을 처음 들은 고진유가 물었다.
“비 새는 문제는 비가 내릴 때만 참으면 되니까. 당장 급한 것도 아니라고 하시더군. 돈도 들고.”
“흠, 안 되겠어요. 돈이 없어 비가 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럴 때 제자 기회를 사용하는 것이군요.”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중앙상국에 있는 제자에게 당장 연락해야겠어요.”
“연락을 해서?”
“화산파 제자의 일원으로서 우환(雨患)에 빠진 본 문을 도우라고 하겠습니다.”
고진유의 말에 우종성이 놀라 말했다.
“호정, 우환이라고 말할 것까진 없지 않을까? 사정을 모르는 이가 들으면 본 문에 정말로 난리가 났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아직 본 문의 제자라고 하기에는…….”
“사형, 우환이라고 해야 다급하게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사조님께서도 증사손을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우종성은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그렇다면 사제 뜻대로 하게.”
* * *
하늘이 뚫린 듯 쏟아붓던 장대 같은 비가 멈췄다.
비가 그친 하늘은 오랜만에 붉은 노을이 비치고 있었다.
“우린 내일 북해빙궁으로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가는 길에 창주에 잠시 들르는 것으로 하겠어요.”
“알겠어.”
“내일까지 각자 편히들 쉬세요.”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정을 위해 준비물을 챙겼다.
설미도 당우희와 연자련 사이에서 일어나려는데,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설 소저, 잠시 함께 걸어도 되겠습니까?”
“네에. 알겠어요.”
지금까지 동행하는 동안 둘이서 이야기를 따로 나눈 적은 없었다.
일행은 하던 일을 멈추고 창문가에 서서 정원을 거닐고 있는 두 남녀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