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남궁세가의 검에는 끝이 없다.
남궁허는 제왕검을 아직 뽑지 않은 채 앞으로 내밀었다.
“화산도협, 마지막 기회를 주겠네. 그자를 넘기도록 하게.”
“그는 본도에게 의탁을 했습니다. 스스로 의탁을 풀지 않는 한 제가 지켜야 할 식구입니다.”
“훗, 웃기는군. 대남궁세가 호천수호대의 부대주가 화산파에 의탁했다고? 믿기지 않는군. 사실인지 내가 직접 물어보겠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남궁허의 시선이 반의중을 향했다.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반 부대주, 대남궁세가의 인물이 화산파에 의탁했다는 게 사실이더냐?”
“……죄송합니다. 사실입니다.”
반의중은 그의 부릅뜬 시선을 마주 볼 수 없었다.
“큭, 크하하하하! 네놈이 본 세가와 인연을 끊자는 말이구나.”
“그건…… 아닙니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 네놈이 말을 할 수 있는 곳은 본 세가의 형옥대일 뿐이다.”
척!
남궁허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왕군 부군장 남궁조후가 곧장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제왕군은 대창궁무애검진을 개진(開陣)하라!”
“옙!!”
파아아앗!!
제왕군 소속의 무인들은 말 위에서 뛰어내린 후 대창궁무애검진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남궁세가 최고의 검진.
남궁허의 명이 떨어지면 무적검진이 상대를 향해 움직일 것이었다.
“호정 사제, 남궁세가의 대창궁무애검진이다.”
우종성의 진한 갈색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합진의 무서움은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점.
게다가 검진을 이룬 구성원들의 내공과 상승 무공에 따라 위력은 배가 되어 고수조차 쉽게 대합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호진 사형, 본 문에도 그에 못지않은 합진들이 있지 않습니까.”
‘……호민.’
곽우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즐거운 놀이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뚫어지게 대창궁무애검진을 주시했다.
대창궁무애검진은 당연히 무섭다.
하지만 절대 무적은 아니다.
약점이 보이지 않을 뿐,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법을 파훼하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방법은 약점을 건드리면 된다.”
어릴 적 진법 공부를 하던 중 가친이 가르쳐 준 내용이었다.
‘우리 사형제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곽우는 자신이 있었다.
‘남궁세가의 검진이 무섭다고 소문이 난 것은 그들의 무력에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저들이 두렵지 않아.’
“파훼의 기본은 나무가 아닌 숲 전체를 살피는 것이니라.”
중원 무림에 이미 대창궁무애검진의 묘(妙)는 팔방지사(八方之死)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깨기 힘든 이유가 바로 남궁세가의 저력이었다.
“잘 들으세요. 검진의 팔방을 잡기 위해 우린 그보다 두 배 많은 방위를 칠 겁니다. 제가 부르는 곳으로 움직이세요.”
곽우가 생각한 비책.
역팔방지사진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곽우는 각자의 방위를 가리키며 호명했다.
“호진 사형은 건천(乾天), 호중은 간하(艮地), 호경은 진해(震海), 호청은 손하(巽河), 호화는 이산(離山), 군 특사는 곤구(坤邱), 태호(兌湖)는 내가 맡습니다. 묵 형님은 감동(坎川), 그 외 나머지 분들은 중앙에서 주시하다가 시급한 곳을 도와주면 됩니다.”
“알았다!”
휘이이익!
화산파 일행은 곽우가 말한 위치로 재빨리 움직였다.
고진유는 혼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호민 사형, 나는?”
“사제는 저기.”
곽우는 가장 강한 상대인 사내를 가리켰다.
“그렇군요.”
처음부터 그들의 싸움은 정해져 있었다.
남궁허가 노기가 깃든 눈빛을 쏟아냈다.
‘불나방 같은 놈들.’
남궁세가의 제왕군을 상대로 하찮은 놈들이 싸우고자 하고 있었다.
“화산파 따위가 감히 대남궁세가의 적수가 될 듯싶더냐?”
“그게 당신들의 본심인 모양이군요. 강자라며 너그러운 척하면서 조금이라도 일어나고자 하면 가차 없이 잘라 버리는 게 정파의 심장이라는 남궁세가가 맞소?”
“이놈이……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얼마나 잘났는지 네놈의 무공을 직접 받아보겠다.”
“그건 본도가 할 말이외다. 당신의 잘난 무공이 본 도에게 실망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소.”
파아아앙-!!
고진유는 말이 끝나는 동시에 호충신법을 펼쳤다.
악진경과 비무를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상대가 무공이 높을수록 선수는 양보하지 말자.
그리고 후회하기 전에 내력은 극성으로 올려라.
고진유의 내력은 천화난추(天花亂墜)를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내력이 높아지면서 신법도 빨라졌다.
호탄신(虎彈身)을 펼치자 고진유의 신형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튕겨 나갔다.
‘빠르……!’
남궁허는 제왕검을 뽑기도 전에 가슴에 닿는 둔탁한 일권을 느꼈다.
“우욱.”
퍼억!!
화산복호권이 간발의 차이로 막혔다.
남궁허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기습에 부상을 당했을 터.
기습이라고 하나 남궁허가 단 한 번의 공격에 뒤로 밀려난 적은 처음이었다.
삼 장(丈)이나 밀려난 그는 노기에 휩싸여 온몸 전체가 강한 열기로 이글거렸다.
스르르릉-!
제왕검이 빠르게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한 번 더 해보지. 당장 팔목을 잘라 주겠다.’
하지만 바로 후속 공격이 들어올 거란 그의 예상과는 달리 고진유는 조금 전과 같은 빠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기습은 한 번이면 족해. 역시 중원오기의 무력은 강하다. 쉽게 생각할 상대가 아니야. 제대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한 순간에 반탄력을 이용해 호신강기로 튕겨냈어.’
악진경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찌 보면 악진경와의 비무는 생사결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은 생사의 갈림길을 결정짓는 대결.
‘정식으로 검을 펼쳐야 하는군.’
스르르르릉-
고진유가 검집에서 사의검을 당기자 자줏빛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허의 눈빛이 의외라는 듯 가늘어졌다.
“화산파에서 외날검이라…….”
무공의 종류와 사람의 성향에 따라 검의 형태도 달라졌다.
남궁세가의 검은 중검의 묘이기에 양날검이 유리했다.
‘흠. 화산파는 외날검이 맞을 수도 있겠군.’
원래 사의검은 자소광류검법을 익힌 오청석을 위한 검이었다.
베기에 중점을 둔 무공이기에 그의 사부가 제자를 위해 특별히 제작했던 것이다.
‘흥. 외날이건 양날이건 부수면 될 뿐. 상관없다.’
고진유가 손목에 힘을 풀며 사의검을 천천히 좌우로 움직였다.
부드러운 미풍이 일어나며 매화 향과 함께 매화 꽃잎이 두 사람 사이에 퍼져 나왔다.
“이런 잔재주는 본인에게 소용없다.”
우우우웅-
남궁허는 제왕검에 내력을 불어넣은 뒤 가볍게 십자 모양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 또한 탈형의 검지.
파아아아앗--!!
무애조비(無涯鳥飛)의 초식에 단번에 매화가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애송이. 이런 장난은 본인에겐 통하지 않는다.’
남궁허는 시야가 보이는 동시에 연환식을 펼칠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번쩍!
그의 눈앞에서 자색광이 번쩍거렸다.
“큿?!”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목을 향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살기가 쇄도했다.
피부 바로 앞에 닿을 때까지 눈치도 채지 못했다.
데구르르-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고 싶지 않다.
남궁허는 목이 잘리지 않기 위해 허리를 순간 뒤로 젖히며 바닥을 굴렀다.
‘젠…… 장…….’
무공을 익힌 뒤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순간은 없었다.
남궁허가 바닥에 구르는 그 순간, 모든 시선들이 그를 향해 있었다.
* * *
화산파 정도는 얼마든지 쉽게 밀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대남궁세가의 제왕군이 아닌가.
그래서 한 번의 공격이 막혔을 때는 화산파에서 제법 대응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째의 공격도 막히자 당황했다.
‘저놈들이 어떻게 파훼법을 알고 있지?’
상대는 대창궁무애검진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슈우우욱-!!
바람 소리와 함께 푸른빛의 일장이 쇄도했다.
‘감히 어떤 놈이?!’
남궁조후는 뒤로 물러나며 일 장을 펼친 상대를 보았다.
푸른빛의 장법.
‘매화청심장을 익힌 놈이 있군.’
화산파 제자가 검공이 아닌 장공을 익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놈, 본인을 무시하는구나!”
퍼어어엉--!!!
매화청심장과 제왕신권이 부딪히면서 폭음이 터졌다.
‘내력의 힘겨루기라면 젊은 네놈보다는 내가 더 유리하지.’
일장일권의 격돌에서 상대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날 줄 알았다.
파앗!
‘뭐지?’
하지만 상대는 물러나지 않고 매화신보를 펼치며 반대로 치고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곽우의 손바닥에서 푸른빛이 번쩍거렸다.
매화청심장 청화오풍(靑花五風).
그를 향해 청장강(靑掌罡)이 다섯 방위에서 쏟아졌다.
콰아아아앙-!!
순간적인 방심의 결과는 처참했다.
매화청심장을 가격당한 가슴에 푸른빛의 매화가 흘러내렸다.
‘허어…… 이런…… 어린놈에게…….’
남궁조후는 일어나고자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아악!!”
“커어어억……!!”
주위에서는 수하들의 비명과 신음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 * *
“크하하하!!”
남궁허는 스스로도 어이없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자 삼류 잡배들이나 펼치는 나려타곤을 펼쳤다.
툭툭.
일어나면서 남궁검의에 묻은 흙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싸울 맛…… 아니, 죽일 맛이 나는군.”
얼마 만에 살성이 솟구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런 기분도 나쁘지는 않군.’
채애애앵-
제왕검에서 검명이 울렸다.
“오랜만에 좋은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니 네놈도 좋은 모양이구나.”
남궁허는 제왕검을 보며 씨익 웃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수하들의 비명 소리들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놈만 죽이면 나머지 놈들은 별볼일 없다.’
남궁허는 완전히 살성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생각뿐.
제왕검의 검기가 점점 붉게 물들었다.
“화산파는…… 대남궁세가의 검을 절대로 이기지 못해!!!”
남궁허는 고함을 지르며 극성에 이른 창궁무애검법을 쏟아냈다.
제왕검이 일으키는 수십 갈래의 검강이 창공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고진유의 전신을 향해 떨어졌다.
‘하나씩 상대할 수 없어. 단번에 자른다.’
고진유는 사의검을 잡은 오른손에 화기를 불어넣었다.
자줏빛 검신이 점점 진하게 변해갔다.
‘지금……!’
고진유는 떨어진 제왕검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의검을 휘둘렀다.
심오할수록 단순하게.
복잡할수록 간단하게.
사의검의 움직임이 그러했다.
스걱-
허공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났다.
절대무인 사이에서 한 번의 공격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더 없었다.
남궁허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
역사의 상징인 남궁검의가 잘려 바람에 펄럭거렸다.
‘내가…….’
가슴에 생긴 검흔에서 뜨거운 피가 새어 나왔다.
“쿨럭.”
온몸에서 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젠…… 장…….’
이번에는 다리가 풀리며 몸이 휘청거렸다.
척!
고진유는 사의검을 그의 목에 겨누었다.
“본도가 어떻게 했으면 합니까?”
“……패자는…… 유구무언이다.”
“좋습니다. 유구무언이라 했으니 그대는 당분간 조용히 지내면 되겠군요.”
사의검을 거둔 고진유가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쿠욱…… 화산도협, 오늘 본인을 살려준 것에 대해 후회할지도 모른다.”
“상관없습니다. 언제든지 도전해도 받아주겠소이다. 하지만 다음에는 조용히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
“그리고 반 특사는 당분간 본도와 함께 지낼 것입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남궁세가에서는 그 어디에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당당하게 뜻을 밝히는 고진유의 모습.
‘……완벽한 패배로군.’
싸움은 이미 멈춰 있었다.
남궁세가의 역사이자 자랑인 대창궁무애검진 또한 처참하게 깨졌다.
남궁조후도 화산파의 제자에게 당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물러날 수밖에.
남궁허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제왕군과 함께 물러났다.
* * *
“허허…… 이럴 수가…….”
중년인의 날카로운 눈썹이 더 가늘어졌다.
남궁세가로 돌아가는 길에 들려온 소문.
남궁무적검이자 중원오기의 창천기검이 화산도협에게 패배했다.
“북흑신왕에 이어 창천기검까지 꺾었다…… 화산파에서 오랜만에 제대로 인물이 나왔어.”
며칠 전이였다면 화산도협에 관한 소문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었다.
‘훗, 하나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녀석이 있지. 창천황신공을 대성한다면 또 한 번 남궁기가 중원의 하늘 위에 솟구칠 것이다.’
남궁무명을 생각하자 남궁파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후후. 뭐가 그리 즐겁소이까?”
“……!”
관로 옆 나무 아래에 의외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창법전주, 왜 여기에 있지?”
“한참을 기다렸소이다. 남궁파 형님.”
남궁당요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남궁파라고 했나?”
“후후후, 당신이 남궁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된다는 말이오?”
그는 세가에서 늘 파검이라 호칭했다.
“하긴 아무렇게 불러도 상관없지. 여기는 무슨 일이냐?”
“그 녀석은 어디에 있소?”
“무명을 말하는 것인가?”
“무명? 오호…… 검황을 죽인 살인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니 조카로 여기는 모양이군요.”
“무명은 그분을 죽이지 않았다.”
“혼자 온 걸 보니 그 살인자를 살려 보낸 준 것이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무명은 그분의 아들이자 우리의 조카다.”
“설마…… 그 녀석에게 동조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남궁파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나를 의심하는 것이더냐?”
“하하하하! 농담입니다. 남궁파 형님이 그놈과 한패가 될 리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그는 말을 하면서도 입술 꼬리가 계속해서 말려 올라갔다.
“하나 창법전주로서 묻겠소. 왜 잡아 오지 않았소? 비대위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이 모르지는 않을 터. 이유가 있소?”
‘이유? 당연히 있지. 그 녀석은 남궁세가의 미래이니.’
남궁파는 그에게 속마음을 그대로 옮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심문하는 그에게 알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세가에 돌아가면 이유에 대해서 알려주지.”
“크큭,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려. 근데 세가에 돌아가서 밝히겠다는 말은…… 어쩌면 실현이 되지 않을 것 같소이다.”
“무슨 뜻이지?”
남궁당요의 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남궁가의 내기가 아닌 기이하게 변한 괴기(怪氣).
남궁파의 인상이 점점 굳어졌다.
“……오늘은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는 날이군.”
“오호라. 그럼 혹시 이것도 알고 있소? 당신이 과연 남궁세가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큭, 몇십 년을 함께했건만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소?”
“…….”
남궁파는 저자가 면구를 이용해 변용했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남궁세가의 창법전주 남궁당요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