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17화 (117/425)

117화

악비극의(岳飛極意).

악가의 역사상 최고의 무인.

극의창신(極意槍神) 악항조가 말년에 고안한 일초의 절대무적창법이다.

악비극의는 무림에 단 한 번 펼쳐진 적이 있었다.

전전대 가주였던 악지.

마교의 중원 침공 당시 이십오대 마교주 천마와의 일전에서 그분이 최후의 일격으로 악비극의를 시전했다.

결과는 동수였다.

그 사건 이후, 산동악가의 창법은 중원 최고로 칭송받았다.

‘아직 극성에 못 미치지만……!’

고진유를 상대로 악비극의를 펼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슈우우우욱-!!

천신창에서 뻗어 나간 창강기와 함께, 악진경의 신법이 단숨에 고진유의 앞에 다가섰다.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악비극의의 무리(武理)는 착(着).’

파아앗--!!

창강기가 고진유를 베었다.

아니, 허공에 남겨진 고진유의 잔상을 베고 지나갔다.

‘……탈각?’

곤충이 허물을 벗어 던진 것처럼, 사라진 고진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피하지 못할 거라 자신했던 악진경의 마지막 한 수가 허무하게 지나간 것이다.

‘위다!’

“좋은 수법이었습니다.”

“……!”

고진유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학처럼 한쪽 무릎을 든 채 공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천인하강(天人下降).

양손으로 원을 그리며 사의검을 머리 위로 올렸다.

매화천하(梅花天下)의 초식.

전력을 다한 검강을 아래로 쏟아냈다.

‘우우욱……!!’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과 압박.

고진유가 뻗어낸 내력의 무형기만으로 서서히 몸이 무너지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파앗!

“……아악.”

자신도 모르게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확히 가슴의 한 치 앞에서, 사의검이 멈췄다.

꿀꺽.

악진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믿을 수 없게도 약관의 화산파 제자에게 완벽한 패배를 당하는 순간이었다.

“이겼습니다.”

“그…… 렇네. 그대에게 졌소이다.”

한데, 약관도 되지 않은 화산파 제자에게 졌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말이 있듯, 중원 무림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화산파의 검이 이렇게 매서울 줄은 몰랐소.”

고진유를 바라보는 그가 진심으로 탄복했다.

‘세상이 이만한 사윗감이 어디 있겠는가?’

악진경이 사의검을 검집에 넣는 고진유를 보며 물었다.

“한데…… 본인과 비무를 해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 본인이 중원 오성이라서 도전을 한 것이오?”

“그렇습니다.”

고진유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혹시나 했더니…… 패왕지도(霸王之道)가 열렸군.’

패왕의 길이 열린 이상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전진만 있을 뿐 멈출 수 없을 터였다.

패왕지도의 끝은 하나.

“그대의 목표가 무엇이오?”

“화산천하제일문입니다.”

악진경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사내라면 누구나 꿈꾸는 욕망이 아닌가.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역시 패왕지도의 걷는 자들의 운명인가 보군.’

“그대는 천하의 패왕(覇王)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오?”

“패왕은 무슨.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나 그대의 행적이 대신 말을 해줄 것이외다.”

“대충 가주님의 말씀은 이해했으나 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삼 년 내 화산천하제일문을 만드는 것 외에 원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투우웅!

악진경은 순간 뒷통수를 맞은 듯했다.

‘이런 광오한 녀석이 있나? 삼 년 내에 화산파를 천하제일로 만들겠다고? 이건 패도(霸道)가 아니라 광도(狂道)다.’

“혹시 화산파에서도 그대의 뜻을 알고 있는지?”

“장문인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뭐라고 하시었소?”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허어…….’

화산파 장문인도 고진유의 능력에 대해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하나 인정한 것일 뿐, 그것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누구도 확답하지 못한다.

‘창성인 나를 꺾었다고 하나 중원에는 수많은 고인들이 있거늘 삼 년이라니…….’

“그대의 능력은 충분하오. 다만…… 삼 년이라는 시간은 짧은 듯하지 않소?”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너무 말을 쉽게 내뱉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년 더 올려 오 년 안에 한다고 할 걸 후회하는 중입니다.”

“…….”

삼 년이나 오 년이나 마찬가지였다.

‘웃긴 녀석이로다.’

“화산천하제일문이라는 목표를 세운 이유를 알 수 있겠소이까?”

“제 사부님께선 화산파가 천하제일문으로 당당히 무림의 최고위에 올라서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연히 제자 된 도리로 사부님의 유언을 이루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화산천하제일문을 이루려는 그대의 이유였소?”

“사부님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 또한 맞소만, 본인은 그대가 무림 최고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 줄 알았소이다.”

“제가 원하는 것은 사부님의 유언을 실천하는 것이며, 사부님을 죽인 놈들을 사부님께 보내 드리는 것뿐입니다.”

고진유의 동공에서 강렬한 살성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의 사부를 죽인 세력.

‘허허, 지옥혈림도 제대로 걸렸군. 화산도협의 앞에 몸을 수그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무림에서 살아남기 힘들 게야.’

패왕에 관심이 없다고 하나 그건 본인의 생각일 뿐.

그가 가는 길이 패왕지도(霸王之道)기에, 늘 혼돈의 중심에 있을 것이었다.

괴물의 등장에 악진경은 마음이 설렜다.

‘앞으로 무신의 신화가 과연 깨어질지 기대되는구먼.’

이십 년 전부터 천검궁에 박혀 중원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무신 초일군.

현 무림 최고의 위치에 당당히 서 있는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젊은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재미있겠어. 이 녀석이 그자의 콧대를 꺾어주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생각대로 해준다면 할 수 있는 한 고진유를 돕고 싶었다.

“혹시나 염려돼서 하는 말이지만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하오.”

“경청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그대와 본인이 비무를 했지만, 천하이십절대무인의 경우 그대가 함부로 먼저 도전할 수 없소이다. 그들이 원한다면 모를까.”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명성을 쌓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렇소. 최소한 사파오패천의 한 곳의 수장과 싸워 이긴다면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길 것이오.”

무림에 나온 후배는 고인에 대한 존경심이 가져야 했다.

천하이십절대무인의 명성을 위해 중구난방으로 도전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무림의 불문율.

만일 누군가 불문율을 어길 시에는 비무에서 목숨을 잃는다고 해서 손속이 가혹하다고 항변할 수 없도록 정했다.

“우리의 비무도 무림에 알려져서는 안 되오.”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한 번 더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가주님께서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오. 본인이 더 고맙소이다. 그동안 무공 수련을 게을리한 게 바로 표가 나더군요. 다음에도 잘 부탁하겠소이다.”

악진경은 딸아이의 걱정에 마음이 심란하여 십여 년간 무공 수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젠 마음의 짐이 사라진 이상 다시금 무공 수련의 목표가 생겼다.

“맞습니다. 무공이 생각보다…….”

“흠? 본인을 상대하는 데 별로였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크하하하하!”

중원오성의 무공에 대해 별로라 말하는 인물.

악진경은 그동안 억눌렸던 가슴이 시원해지도록 대소를 터뜨렸다.

* * *

산동악가를 나선 일행은 다시금 북해빙궁으로 향해 말을 몰았다.

마차에 탄 설미는 조금 열린 창문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검붉은색의 말 위에 탄 사내가 보였다.

산동악가를 떠나기 전 자수를 놓은 수건을 고진유의 손목에 걸어주던 악소소의 모습을 보았다.

‘그와는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을.’

하지만 가슴 한 곳이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뭘 봐?”

당우희가 고개를 내밀며 창문 밖을 보았다.

마차 옆으로 고진유와 묵경의 모습이 보였다.

“흐흥, 진짜로 잘생겼지? 처음 묵경 오라버니를 봤을 땐 나도 깜짝 놀랐다니깐.”

“아…… 네에.”

설미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근데 아무리 잘생겨도 묵경 오라버니는 좋아하면 안 돼. 중원에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구. 괜히 불똥이 뛸 수도 있어.”

“그러네요.”

타악!

설미는 창문을 닫았다.

‘에구, 하필이면 사제를…….’

당우희는 사실 그녀가 누구를 보고 있었는지 알았다.

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설 매는 좋겠다. 너무 예뻐서 모든 사내들이 좋아하잖아.”

“아니에요. 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헛! 세상에 어느 사내가 설 매를 싫어하겠어! 연 언니, 안 그래요?”

당우희가 앞에 앉은 연자련을 톡톡 쳤다.

“우희 말이 맞아. 설 매는 자신감을 가져도 돼.”

“…….”

“설 매는 아직 젊잖아. 시간은 얼마든지 있단다.”

설미는 곰곰이 그녀의 말을 생각했다.

‘맞아. 너무 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냥…… 조급했나 봐.’

“언니들, 고마워요.”

“헤헷, 웃으니 더 예쁘네.”

미소를 띤 설미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변했다.

‘아이고, 기분 맞춰주는 거 힘드네.’

* * *

설강은 일행이 움직이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유람을 떠나는 모습 같지 않은가…….’

한시라도 빨리 빙궁에 도착해 그분의 병을 고쳐야 했다.

만일 늦기라도 한다면.

타앗!

설강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저어…… 은공.”

“설 공자, 무슨 일입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일행의 움직임이 너무 늦는 것 같습니다.”

“가부께서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서 치료를 했으면 합니다.”

설강은 공손하게 묻는 듯했지만 표정에는 불만이 나타나 있었다.

고진유는 눈치를 채지 못한 척했다.

“설 공자, 그분께서는 우리가 갈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시지 않습니다. 정말로 작화의가 빙궁주를 죽이고자 했다면 중독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

“설 공자께서 빙궁에 돌아갈 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심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강은 더는 물을 수 없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그를 보면서 어렴풋이 느낌이 왔다.

‘역시 뭔가 알고 있는 듯해.’

“……알겠습니다. 은공을 믿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걱정되는 게 맞습니다. 만일 저라도 설 공자의 입장이었다면 조급했겠지요.”

설강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휘이이익!

그때, 일행의 전방에 정찰을 나갔던 인물, 녹림야검이 고진유의 앞에 내려섰다.

“대사님, 전방에 남궁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궁세가와 고진유는 악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묵경이 바로 나섰다.

“인원이 어느 정도인가?”

“많지는 않지만 오십여 명 정도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남궁기와 함께 제왕군기(帝王軍旗)가 보였습니다.”

“제왕군기의 색이 어떠하오?”

반의중이 다급히 물었다.

“두 가지 색으로 흑백이 상하로 보였소이다.”

“흑백제왕군기…….”

반의중의 목소리가 떨렸다.

흑백제왕군기가 상징적인 인물.

남궁무적검이자 중원오기인 창궁기검 남궁허가 바로 그였다.

“창궁기검이 온다는 말인가?”

“그런 듯합니다.”

묵경은 고진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예전에 비무대회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진유 아우. 그가 누군지 알지?”

“그때 만났던 남궁세가의 인물인가요?”

“맞아. 그가 맞다.”

남궁세가 제왕군의 수장이 직접 말을 타고 산동성까지 찾아왔다.

그것만 보더라도 대화를 하고자 먼 길을 달려오는 게 아니었다.

“화산도협님, 저 때문에 그분이 오시는 것 같습니다.”

반의중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상대는 남궁세가 최고의 무인 중 일인이었다.

“반 특사 때문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습니다. 본도에게 의탁하는 이상 내 사람이오.”

“화산…… 도협…… 님.”

고진유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자 그의 주위로 다섯 필의 말이 뒤를 받쳤다.

우종성의 눈에 멀리 두 개의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을 보였다.

‘남궁세가라…….’

화산파와 남궁세가는 수백 년 동안 검종을 인정받기 위해 검을 겨루었다.

때로는 화산검종이 되었고, 어떤 때에는 남궁검종이 되기도 했다.

당금의 검종은 검황의 존재가 있는 남궁세가의 차지였다.

‘이젠…… 우리 차례다.’

다른 건 몰라도 남궁세가만큼은 꼭 잡고 싶었다.

온화한 성정의 사부인 화산군자검 허송도 오직 원하는 게 있다면 그의 사부 도무 도인이 잃은 검종을 되찾아 오는 것이었다.

검집을 잡은 우종성의 손등에 붉은 힘줄이 튀어나왔다.

“사제, 우린 검종을 되찾아야 한다.”

“당연합니다. 허송 사백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까?”

“고맙다.”

우종성은 가슴이 든든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옆에 선 사형제들.

남궁무적검이 온다고 해도 전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점점 크게 보이는 남궁기는 예전과 달리 그저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일 뿐이었다.

두두두두두-

땅이 울리도록 달려오던 남궁세가의 기마들이 속도를 죽였다.

이십여 장 거리에서 남궁세가의 제왕군이 멈췄다.

다각. 다각.

제왕군 사이에서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백마를 탄 중년 무인이 앞으로 나왔다.

“남궁허라 한다.”

이름을 밝힌 것만으로 주위가 고요해졌다.

타악!

고진유는 가볍게 말허리를 차며 그를 향해 나아갔다.

거만하게 상대를 내려다보는 눈빛과 비웃는 듯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

‘변함없이 강해 보여. 다만…….’

예전과 달리 그의 어깨에서 태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진유는 미소를 띠며 포권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궁허의 검미에 주름이 생겼다.

다가오는 그를 보며 무형기를 뿜어내 압박했지만 인상조차 변하지 않았다.

“화산도협, 우리가 만난 지 벌써 이 년이 넘었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 제대로 손을 보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보시겠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 겁니다.”

“하하하하!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다고 보는가?”

고진유는 그를 보며 여전히 소리 내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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