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15화 (115/425)

115화

끼이이익-

대문을 열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허리가 반쯤 앞으로 구부러진 노인이 먼저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사내가 두리번거리며 따랐다.

산문 아래에 비어 있던 촌집.

마당에 서면 촌락으로 들어오는 길이 환하게 내려다보였다.

“이보게. 어떻게, 마음에 드는가?”

“아…… 예에, 그러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만. 열 냥이네.”

“여기 있소이.”

주름이 잡힌 노인의 손바닥에 사내가 열 냥을 올렸다.

머리를 숙인 노인의 시선이 돈을 꺼낸 목상자에 힐끗 닿았다.

“고맙구려. 목수라 했으니 나중에 부탁할 게 있으면 해도 되겠능감?”

“괜찮소이다.”

“허허허, 좋구먼. 나중에 보세나.”

노인은 허리를 구부린 채 집 밖을 나섰다.

‘하아…… 이제 됐나…….’

크게 숨을 쉬는 사내.

추당이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다가 일이 잊힐 때쯤 식구들을 데리고 와야겠어.’

추당은 마루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허리가 굽은 노인이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잘 보이는군.’

추당은 그동안 도망 다니느라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잠부터 쏟아졌다.

그는 일단 허리에 단단히 묶어 놓은 천을 풀어 철갑부터 꺼냈다.

도저히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이걸 잘 숨겨놔야지.”

추당은 집 주위를 살피며 철갑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저기가 좋겠어.’

돌벽 사이에 공간이 있을 듯싶었다.

슥. 슥. 슥.

추당은 널찍한 돌멩이를 꺼낸 뒤 손을 넣어 공간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들어가겠는데.’

곧바로 철갑을 넣고 원래대로 감쪽같이 복구시켜 놓았다.

‘이춘광처럼 쉽게 보이는 곳에 두면 안 되지. 이 정도면 절대로 찾지 못할 거야.’

돈이 든 상자는 방에 가지고 들어가 대들보 위에 올려다 놓았다.

“크으으으……! 이제야 편히 좀 잘 수 있겠네.”

드르렁.

긴장이 풀린 추당은 세상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스르륵.

방문을 열고 검은 인영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들의 모습들은 전형적인 산적.

손에는 날이 중간중간 빠진 대도를 쥐고 있었다.

두목 판두웅이 한잠에 빠진 추당을 가리켰다.

“정신없이 자는군. 깨워.”

“넵, 두목.”

산적 수하 중 한 명이 추당의 허리를 툭툭 찼다.

“……끄응…….”

추당은 몸만 뒤척일 뿐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이…… 완전히 정신줄 놓고 있구만.”

판두웅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비켜.”

그가 두꺼운 발등으로 자고 있던 추당의 허벅지를 냅다 찼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밖으로 나갈 정도였다.

“아아악!”

그와 동시에 추당이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어…… 억…….”

허벅지가 얼마나 아팠는지 제대로 말도 못한 채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만 돌아 댕기고, 이리 와봐.”

“허억…… 누, 누구…… 십니까?”

“우리? 보면 모르겠냐? 누구인지?”

“…….”

점점 그들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허어억!!”

산적들의 모습에 추당은 팔에 힘이 빠져 뒤로 넘어졌다.

“카하하하! 이제 우리가 누군지 알겠구만?”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이곳은 산적들이 활동하는 지역이 아니라고 들었다.

‘어, 어떻게 된 일이지? 노인이 산적은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고 해, 했는데?’

더구나 마을 안까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스윽.

판두웅이 대도를 추당의 목을 겨누었다.

“빨리 내놔.”

“무…… 엇을 말입니까? 전 한 푼도 없습니다요.”

“이 새끼가 죽고 싶나? 돈이 있는 줄 알고 왔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지, 진짜입니다!! 찾아보시면…… 알게…… 아닙니까?”

“이게? 우리가 바보 멍청이로 아는 모양이군. 영감! 들어오슈.”

‘영감이라고?’

추당은 열린 방문으로 얼굴을 먼저 내민 노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저…… 노인이……!’

낮에 집을 소개해 준 노인이 틀림없었다.

“이보게, 아까 가지고 있던 돈상자는 어디에 두었는가?”

“……!!”

노인의 탐욕스러운 눈빛.

추당은 더는 없다고 할 수 없었다.

“돈…… 을 주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크크크, 당연히 살려주지! 우린 살인백정이 아니라 산적이다.”

“……알겠습니다요.”

그제야 판두웅이 대도를 뒤로 물렸다.

‘저 노인은 철갑에 대해선 모른다. 철갑에는 엄청난 보물이 들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살아남아서 철갑을 밑천 삼아 일을 하면 돈은 얼마든지 모을 수 있을 터.

“저기 위에…….”

“어디?”

산적들은 그가 가리킨 대들보 위를 올려다보았다.

목상자는 마치 대들보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야, 좋은 곳에 숨겨놨군?”

산적 중 한 명이 대들보에서 목상자를 꺼낸 뒤 내려왔다.

뚜껑을 연 뒤 안에 든 돈을 확인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좋은데? 돈이 꽤 많아! 잘 쓰겠네.”

“목숨은…… 살려주시는 겁니까?”

“음? 난 살려주고 싶지만, 죽일 수밖에 없어.”

“예? 방금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클클. 자네가 내 얼굴을 보지 않았는가?”

“……!!!”

“만일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살 수 있었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구만. 그만 죽어야겠네. 허허.”

“노, 노인장!! 살려……!”

휘익!

판두웅의 대도가 추당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툭.

목이 잘린 그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피가 온 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크, 오늘 횡재를 했군.”

“자네들은 시신을 가지고 가서 버리게. 여긴 내가 처리하겠네.”

“소 영감, 수고했소. 이건 수고비요. 다음에도 잘 부탁하겠소.”

휙!

산적들이 목상자에서 은자 열 냥을 꺼낸 뒤 노인에게 던져주었다.

그러고는 목이 잘린 시신을 끌고 산으로 사라졌다.

* * *

봉황정에서 돌아와 가주를 만난 이야기를 일행에게 했다.

잠시 동안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이내 묵경의 대소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진유 아우가 드디어 사내가 되는 것인가?”

“형…… 님, 그런 게 아닙니다.”

고진유는 얼굴을 붉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었다.

“그런 게 아니라니? 내가 알기로는 서로…… 남녀가…… 합…… 궁을……!!”

“아, 아닙니다. 서로 합…… 궁이 아니라, 내력으로 치료를 한다고 했습니다!”

“어어어어라? 진짜 아니라고? 에이…….”

묵경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와 동시에 설미는 저도 모르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에이, 일부러 우리한테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푸핫! 묵 형님, 너무 이상한 서적을 많이 보신 거 아닙니까?”

장두총도 무엇이 즐거운지 연신 웃음이 나왔다.

고진유는 일행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들통날 일을 왜 거짓말하겠어요. 저도 처음에는 그런 건 줄 알고 얼마나 놀랬다고요.”

타악!

장두총이 고진유의 어깨를 잡았다.

“사제, 실망했겠군. 담에 또 좋은 기회가 올지 몰라.”

“…….”

“아아야!!”

갑자기 장두총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곁으로 다가선 당우희가 허리를 꼬집은 뒤 비틀었다.

“호호호, 호경 사형이 못하는 말이 없네요.”

“아…… 미안.”

일행은 오음절맥에 대해 들어보긴 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정말로 오음절맥을 타고난 인물은 스무 해가 되기 전에 목숨을 잃는 게 맞는가 봐.”

“네, 호화 사저. 그분의 생이 한 달도 안 남았다고 했습니다.”

연자련은 비록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이십 년 동안 고통 속에서만 지내다가 죽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할 거니? 난 도와주었으면 해.”

“맞아, 나도…….”

당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사저의 뜻을 잘 알겠어요. 다른 분들은요?”

“도움을 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난 네가 희생한다고 해도…….”

“사형…… 그게 아니라니깐요.”

“그래?”

우종성마저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짓는 모습에, 고진유는 정말 드물게 또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 * *

산동악가 금지옥엽의 이름은 악소소라 했다.

고진유는 산동악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악후원으로 들어섰다.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시비들이 정원 앞에서 조심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화산도협님을 뵙습니다. 소비들이 안내를 하겠습니다.”

시비들은 모두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여인들이군.’

고진유는 그녀들을 따라 악후원의 건물로 들어섰다.

여인의 기거하는 곳에서 으레 풍기는 화사한 향이 아닌, 가까이 다가갈수록 진한 약재의 향만이 가득했다.

시비들이 문을 연 뒤 옆으로 물러났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맙소.”

고진유가 홀로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모. 저를 일으켜 주세요.”

“아가씨…….”

“밖에 귀한 손님께서 오시지 않았나요. 어찌 누워서 손님을 맞이하겠어요.”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네, 들어오세요.”

고진유는 길게 내려온 백색의 천 사이로 들어섰다.

한 명의 젊은 여인과 중년 여인이 일어나 있었다.

“고진유라 합니다.”

“화산도협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소녀는 악소소라 해요.”

“악 소저, 만나서 반갑소이다.”

억지로 서 있는 듯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분을 침상에 앉히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 네에…….”

유모는 악소소를 조심스럽게 부축한 뒤 침상에 앉혔다.

고진유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고진유는 침상에 앉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소저, 실례가 안 된다면 손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네에…….”

물론 다른 뜻이 없음을 알았지만, 젊은 사내의 손에 잡히자 기분이 이상했다.

고진유는 악소소의 손을 잡은 뒤 미세한 기를 불넣어 반응을 살폈다.

‘호민 사형이 오음절맥에 대해 알려주셨지.’

사람은 선천지기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선천지기는 혈맥을 통해 완전히 빠져나간다.

한데, 아주 드물게 그러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여자아이의 경우, 다섯 개의 혈인 태음폐경, 태음비경, 소음신경, 궐음신포경, 궐음간경이 막히는 것.

그것이 바로 오음절맥이라 했다.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선천지기가 신체의 모든 신진대사를 방해하기에, 오음절맥을 뚫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완전 엉망이군.’

혈맥의 위치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자체가 대단하다.’

그녀를 살리고 있는 것은 살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였다.

고진유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동안 힘든 싸움을 하셨군요.”

“…….”

악소소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냥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왜 눈물이 나오는지 몰랐다.

고진유도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본도가 최선을 다해 소저의 절맥을 고쳐보도록 하겠습니다.”

“고…… 맙습니다…….”

“내일 오겠습니다.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고진유는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스으으으으-

그녀가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도록 우선 태음폐경을 임시적으로 뚫기 위해 태양폐경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이…… 느낌은…… 너무 편안하다.’

단 한 번도 편안히 쉬어보지 못한 숨을 내쉬었다.

“내일까지는 편안할 것입니다. 그동안 편히 주무시도록 하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대협…….”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후원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곧장 악진경을 만나기 위해 가주전으로 향했다.

* * *

화 의원이 오음절맥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산동악가에 고진유를 부르도록 만든 인물이었다.

극양의 내공이 아닌 동정을 지닌 사내의 내력으로도 가능하다고 했던 그 의원이었다.

“정말로 가능합니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고 보네. 극양의 양기와 비슷한 내력이라면 충분히 오음을 녹일 수 있네.”

“가능성이 있다면 해봐야겠군요.”

“흐음…… 근데…….”

화의원이 뭔가 의심쩍은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문제가 있습니까?”

“그대의 무공이 강하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극양의 양기를 누를 만큼 내력이 강한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말일세.”

“저도 얼마만큼의 내력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내력을 한번 보여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보게.”

화 의원이 세 자 정도 넓이가 되는 물통에 물을 담았다.

“여기에 손을 넣고 단번에 내력으로 물을 끓여보게.”

고진유가 손에 내력을 올렸다.

우우우우웅-

손바닥에 뜨거운 진기가 모아졌다.

‘오오오우…… 이건…… 극양기도 이 정도까진 못하거늘…….’

고진유가 물에 손을 담그자마자 단번에 끓어올랐다.

파아아앗!

순간, 통 안에 든 물이 천장까지 솟구치더니 떨어졌다.

“하…… 하하, 자네…… 괴물이구만.”

진작 고진유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극양기를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직 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됐어. 내력은 충분해.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더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네.”

“무엇입니까?”

“그대는 동정이 확실한가?”

“……그것도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당연히. 만일 그대가 동정이 아니라면 내력에 음기가 섞여 있을 거야. 오음절맥의 절대음기를 녹이기 위해서는 절대양기가 필요해. 그게 아니라면 녹였다고 한들 미세한 음기로 인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란 말일세.”

“아…… 하…… 이제야 알겠습니다. 동정이 왜 중요한지.”

“맞는가?”

“맞습니다.”

“잘됐군! 잘된 일이기 하나…… 자네 같은 사내라면 그동안 많은 여인을 만났을 텐데…… 어디 이상한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사내가 맞습니다.”

고진유는 괜히 목소리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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