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14화 (114/425)

114화

산동이대무림가.

황보세가와 함께 산동악가는 산동무림의 패자였다.

중원이대창법인 양가창법과 더불어 산동악가의 창법은 중원 무림에서 천하제일창이라 칭송받았으며, 무림 일절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더구나 권왕 황보강의 등장에도 패자의 자리에서 황보세가와 당당히 맞서며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다.

<천하제일악창(天下第一岳槍)>

산동악가의 경내로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악가소문에 걸린 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높은지, 현판이 걸려 있는 소문(小門)의 높이만 해도 대단했다.

사전에 이미 연락이 도착했는지 정문인 악가대문에는 각 당의 주요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가주 악진경의 친동생이자 산동정의 총관 악호문은 악가대문으로 다가오는 일행을 보았다.

‘저들이 지옥혈림의 지옥수와 싸워 이겼다는 것인가?’

겨우 이십 명도 되지 않는 인원으로 지옥수를 제압했다는 소문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악가대사 악양의 보고는 매번 그들을 보잘것없다는 듯 깎아내렸다.

‘쯔쯔. 악양, 이 녀석…….’

어릴 적부터 질투심이 많았다.

무공을 수련할 때는 그런 부분도 필요하니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었다.

나이가 들면 어느 정도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거늘 전혀 나아지지 않았구나……,’

화산파 일행을 보자마자 단번에 그의 보고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악가대문에서 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매화 향이 바람을 타고 느껴졌다.

안내를 맡은 악천기마대가 먼저 도착했다.

악도가 말 위에서 내려섰다.

“총관님, 화산도협을 모시고 왔습니다.”

“수고했네.”

총관 악호문은 앞으로 서너 걸음 나섰다.

검붉은빛의 말 위에 탄 사내.

가장 먼저 사내의 매화도의에 눈이 갔다.

휘익.

고진유는 말 위에서 내려서자 그 뒤를 일행도 모두 아래로 내려섰다.

스윽.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고진유의 걸음.

일보매화향천(一步梅花香天).

일보마다 전신에서 흐르는 내기에 매화 향이 피어올랐다.

‘약관의 나이에 내력에서 이 정도의 매화 향을 피울 정도이니 북흑신왕을 이긴 게 운이 아니구나.’

고진유를 보는 그의 시선이 달라졌다. 부러움과 함께 감탄의 눈빛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고진유가 악호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화산파 제자 고진유라고 합니다.”

“악가에서 총관직을 맡은 악호문이라 하오. 무림의 젊은 영웅들을 환영하는 바이외다.”

“보잘것없는 저희를 초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허어, 중원 무림에서 화산칠협의 명성이 보잘것없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명함을 내보이겠소이까. 화산도협께서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악 총관님께서 본도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악호문은 옆으로 비켜섰다.

“무림의 젊은 영웅들께서는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고맙습니다.”

악호문이 앞장서며 악가대문을 넘어섰다.

그의 뒤를 고진유를 선두로 한 일행이 따랐다.

일행은 악가의 경내로 들어선 뒤 외원을 지나 내원으로 안내를 받았다.

경내를 지나가는 동안 산동악가의 젊은 무인들이 일행을 주시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맞댄 채 소곤거렸다.

“야아, 저기…….”

“한미화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한 여인, 한미화 설미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면사를 썼는데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한 번이라도 본 모습을 봤으면…….”

젊은 사내들의 시선이 그녀가 지나가는 모습을 따라가다가 순간 멈칫했다.

호안광(虎眼光)이라 불리는 악호문.

악호문의 살벌한 눈빛이 청년 무인들의 기를 죽여 놓았다.

내원에 들어선 뒤 곧장 최고의 귀빈이 머무는 봉황전각으로 들어섰다.

전각 앞에는 이미 다섯 명의 하인과 다섯 명의 여비들이 정갈하게 허리를 숙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명심하도록 해라. 이분들께서 여기에서 지내시는 동안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알겠사옵니다.”

열 명의 하인과 여비들이 허리를 숙이는 동작에도 절도가 느껴졌다.

“화산도협,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시면 되겠소이다. 본인이 가주님께 보고를 한 뒤 따로 연락하겠소이다.”

“그렇게 하시죠.”

악호문은 포권을 한 뒤 봉황전각을 나섰다.

* * *

봉황전각을 나온 악호문은 그대로 가주전으로 들어섰다.

호위천무장은 그를 보면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총관님을 뵙습니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총관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악호문은 가주실로 들어서기 전 복도 앞에 멈춰 섰다.

오 장의 거리에 폭은 일 장밖에 되지 않는 복도이지만 구궁팔괘의 묘리가 숨겨져 있었다.

입구에 진법을 펼친 이유는 많은 인원의 친위대를 세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 개의 생문과 한 개의 사문.

하지만 일각에도 수십 번이나 생문과 사문의 위치가 바뀌었다.

‘바뀌는 시점에 생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의 시선이 좌우를 빠르게 살피다, 생문이 나타나자 곧바로 지체 없이 들어었다.

악진경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좋아 보이더군.”

“저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의 내력은 정기가 정순한 듯했습니다.”

본 가로 들어오는 고진유를 몰래 지켜보았다.

“그가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악진경은 말을 하면서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연하게도 북해빙궁으로 가는 화산파 일행과 단지 안면을 익히기 위해 초청한 것은 아니었다.

“총관, 만일 그 아이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난 모든 것을 그에게 줄 수 있다네.”

악진경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주님, 화산도협은 무림의 영웅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당연히 우리를 도와줄 겁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연고도 없는 북해빙궁의 인물을 구하기 위해 지옥수에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악호문의 말대로 세상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상대를 도와주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악진경은 화산도협의 대한 소문을 듣고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 그를 만나고 싶네.”

“제가 그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니네. 부탁하는 처지에 어찌 그를 오라 가라 하겠는가. 당연히 내가 가는 게 도리에 맞지.”

“……알겠습니다.”

산동악가 철혈신창 악진경.

산동성에서 그의 위명은 사파인들조차 존경을 보일 만큼 강맹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의 표정에는 백마를 타고 철혈신창을 휘두르며 포효하던 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님…….’

앞장서며 걷는 악호문 또한 가슴이 무거웠다.

멀리 보이는 봉황전각은 오랜만에 객들이 찾아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악진경을 보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을 해라.”

악진경은 고개를 숙이는 하인들을 헤치며 봉황전각의 정원에 마련된 정자를 가리켰다.

특별하게 모시는 귀빈들만을 위해 화려하게 지어진 정자에는 봉황의 분홍 그림이 팔각형의 기둥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저기로 그를 모시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악진경이 먼저 봉황전각으로 들어가는 동안 악호문은 홀로 봉황정으로 향했다.

“총관님, 오셨습니까?”

“서문 사질. 잘 지냈는가?”

악호문은 묵경과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서문이란 성으로 불리기는 오랜만입니다.”

“자네 가부께서 풍류옥협이 당신의 아들이라 하시며 자랑하시더군.”

“하하, 저는 처음 듣는 말이군요. 어머니 성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도 고맙다고 하시던 분이신데…… 의외입니다.”

“후후후, 그때는 그때이지 않은가. 상황은 언제든지 바뀌는 법이지.”

“아 참, 어서 들어오시지요.”

“아닐세. 저기 봉황정에 그분께서 오셨네.”

“그분이시라면…… 가주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화산도협을 만나 뵙고자 하시네.”

“아, 알겠습니다. 진유 아우에게는 바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가 계시면 금방 가도록 하지요.”

“부탁하네.”

악호문이 봉황전각을 나서자 묵경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가주께서 직접 찾아올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언제 나왔는지 고진유가 앞에 서 있었다.

“나를 따로 찾는다구요?”

“들었구나.”

어느덧 일행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장두총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우리가 대단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환대하는 걸 보니 뭔가 크게 부탁할 모양인데?”

“그러게. 가주가 직접 객을 찾아올 정도라면…….”

일행도 보통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무슨 부탁인지 들어보고 결정해야겠군요. 다녀올게요.”

봉황정까지 찾아온 가주 악진경을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 * *

“휴우…….”

봉황정에서 기다리는 중년 사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상대를 만났어도 떨린 적이 없었건만.

‘허어, 내가 긴장을 다 하다니.’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채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운은…….’

봉황정 뒤로 다가오는 기가 느껴졌다.

세상을 포용하는 기운이나 절대로 부드럽지 않았다.

한데 강압적이지도 않다.

악진경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니 뒤돌아섰다.

봉황정으로 다가오는 청년.

고진유의 주위로 흐르는 매화 향이 봉황정까지 느껴졌다.

‘소문대로군.’

계단을 밟으며 올라선 고진유를 보며 그가 먼저 포권했다.

“화산도협, 반갑소이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서로 마주 본 눈빛만으로 상대의 내력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천천히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앞에 악호문이 차를 따른 뒤 뒤로 물러났다.

“화산도협의 위명은 많이 들었소. 직접 마주 앉아서 보니 중원에서 칭송하는 이유를 알겠군요. 정말 대단하외다.”

“후배를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또한 가주님의 인품의 훌륭함을 익히 들었습니다.”

“허허. 부끄럽소이다.”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잠시 조용하게 서로를 주시했다.

악진경은 긴장을 한 탓인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후루룩.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

고진유는 찻잔을 내려놓는 그를 보면서 물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그대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악진경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차라리 산동악가에 문제가 있다면 쉽게 부탁했을 것이었다.

‘개인적인 일인가?’

그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말을 꺼내기 힘든 일임을 눈치챘다.

“본 일행을 초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본도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화산도협, 말이라도 고맙소.”

한참 주저하던 악진경은 결심이 선 듯 말을 꺼냈다.

“본인에게 방년 한 딸아이가 있다네.”

“…….”

“그런데…… 그 딸아이가 이승에서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영애께서 어디 몸이 아프십니까?”

고진유는 딸이 아프다는 그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병이 난 거라면 무인이 아닌 의원을 찾아야 했다.

“화산도협께서 이상하게 생각했겠지만, 딸아이는 일반 병이 아니라네. 오음절맥(五陰絶脈)일세.”

그가 병명을 밝혔지만, 고진유는 여전히 자신을 만나려고 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주님, 죄송합니다. 본도는 오음절맥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악진경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때, 뒤에 있던 악호문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화산도협, 오음절맥을 고치기 위해 본 가에서 많은 의원들을 수소문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소이다.”

“제가 그 분야는 잘 모릅니다만, 오음절맥은 의원들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소이다. 오음절맥은 선천적으로 여자아이의 경우 다섯 개의 혈이 막힌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동안 수많은 영약을 복용했지만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막히더군요.”

“…….”

“오음절맥을 고치려면 방법은 한 가지뿐. 다섯 혈을 완전히 녹일 수 있는 극양의 내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 그렇다면 무림에서 극양의 내력을 지닌 인물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

산동악가는 고진유가 말한 대로 중원 무림에서 극양의 내력을 지닌 무인을 수소문했다.

중원의 알려진 대표적인 극양의 무공인 태양혈경. 구양신공. 열화심경.

첫째로 태양혈경은 북원 태양궁의 비전 절학이었다.

태양궁주만이 익히는 무공이기에 산동악가의 부탁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구양신공은 상황이 더 나빴다.

구양신공을 익힌 전대 무림 고수 동주령은 물론, 그의 전인조차 무림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열화심경을 익힌 화공문주는 겨우 팔 성밖에 익히지 못한 상황.

“화산도협, 본 가에서도 그들에게 도움을 얻고자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네.”

악진경의 목소리가 측은하게 들렸다.

고진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상황은 안타깝습니다만…… 도움을 주고 싶어도 본도의 내공은 극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잘못 찾으신 것 같군요.”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최근에…… 극양의 내력이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만큼 내력을 지닌 사내 중 동정을 지켰다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동정을 지닌 사내의 내력이라는 말에 고진유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산동악가에서 살펴본 바 극양의 내력과 동등한 열기를 뿜어낼 수 있는 내력을 지닌 무인은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동정을 지킨 사내는 찾기 힘들었다.

대부분 중년 이상의 나이가 되어야만, 극양의 양기와 동등한 내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화산도협 고진유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천하의 주목을 받는 사내이니, 물론 수많은 여인들의 관심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오미화에게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지……?’

악진경은 거기서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저어…… 화산도협. 묻기에 대단히 큰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으나…….”

“…….”

악진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진경을 향해 무릎을 꿇고자 하는 순간.

그의 몸이 중간에 멈췄다.

“가주님, 그만 일어나시지요.”

‘내, 내력으로 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정도라면.’

고진유야말로 최고의 적합한 인물이었다.

“무릎을 꿇지 않아도 가주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앉으세요.”

“아아……! 고맙소이다, 화산도협……!”

악진경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아…….’

고진유는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해 봉황정 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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