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일행은 당장 북해빙궁으로 다급하게 움직일 준비는 하지 않았다.
안휘성으로 넘어올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중원인들의 시선은 이미 고진유를 비롯한 화산파 일행의 행적,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고 있었다.
“너무 유명해져도 이런 점이 곤란하군.”
지옥수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이 중원 무림에 퍼진 이후, 일행은 중원인들로부터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빙궁주를 중독시키고 지옥혈림에 의뢰를 한 놈들에게, 그들이 빙궁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장두총이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지옥수에서 설강 공자를 구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
“죽이고자 하겠지.”
“누구를?”
“당연히 설강 공자지. 그들은 이미 칼을 뽑았어.”
곽우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빙궁주를 중독시키고 설강을 지옥혈림에 의뢰한 자들.
계획이 틀어진 이상, 설강이 북해빙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을 것이었다.
묵경이 걱정스러운 듯 덧붙였다.
“설강 공자를 지옥혈림에 의뢰한 놈들이라면, 그사이에 중독된 빙궁주를 시해하지 않을까?”
“묵 형님, 그건 아닐 겁니다.”
곽우가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했다.
“이유가 있나?”
“설 공자를 의뢰한 인물은 작화의를 통해 빙궁주를 중독시켰습니다. 그건 설강 공자의 존재 때문이지요. 형님도 아시다시피, 차기 궁주로 예정된 인물은 설 공자입니다. 설 공자가 살아 있는 동안 빙궁주가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친중파라고 알려진 북해빙궁의 인물들은 모두 설 공자를 궁주 직에 올릴 것입니다.”
“그 말은 설 공자가 죽기 전까지는 빙궁주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군.”
“맞습니다. 후계자가 사라진다면 그 또한 중독된 상태에서 목숨을 잃게 될 테죠.”
“흐음…… 그럼 우린 설 공자와 함께 무사히 북해빙궁까지 가야 한다는 말이군.”
어려운 일이 될 것이 확실했다.
북해빙궁의 암중 세력은 이미 설강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을 터.
설강은 마음이 무거웠다.
‘나를 죽이고자 살수들을 보낸다면…….’
북해빙궁으로 가는 여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무조건 위험한 상황에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설 공자가 죄송할 건 없소. 탐욕에 빠진 인물들이 잘못한 것이지 않소이까?”
“정말 고맙습니다, 은공.”
“지금부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것입니다.”
고진유가 한 말의 의미.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한다.
앞으로 북해빙궁으로 가는 동안 죽여야 할 인물들은 그동안 함께 지내왔던 식구들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만…… 최소한…….”
하지만 설강은 결단을 내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들 중 살리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 죽일 수 있을까?
“두 분께선 제가 하는 말을 똑바로 들으세요.”
고진유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본도는 물론 제 사형들과 묵경 형, 그리고 본도를 따르는 제 가족들은 목숨을 걸고 두 분을 도와주기로 했소이다. 그런데도 두 분께서 피치 못할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독한 결단을 내릴 수 없다면, 우리가 한 결정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오랫동안…….”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미련이 있군요. 본도 또한 최우선은 제 가족들입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지요. 우린 바로 무림맹으로 돌아가겠소이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일행도 할 말이 없었다.
설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진유가 보여준 행동이 맞았다.
당사자인 그들이 단호하지 않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화산도협, 대단한 인물이야.’
확실하게 시작과 끝을 맺는 모습에 반의중은 감탄이 나왔다.
‘한 무리의 수장이라면 저 정도의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
그가 모신 남궁무명 또한 비슷했다.
고진유를 보면서 그가 생각이 났다.
‘대주께서는 어디쯤에…… 계실까?’
설강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정도까지 반응을 보일지는 몰랐다.
그는 내심 반중파의 핵심 인물만 해결하면 모든 게 끝날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묵경 형,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나에게 묻는 이유가 뭔가?”
묵경의 대답도 퉁명스럽게 들렸다.
“……그게…….”
“내가 설 공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어. 진유 아우의 말이 맞아. 당사자가 똑바로 결단이 서지 않다면 도와줄 수 없네. 잘 생각해서 결정하게. 설 공자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묵경은 더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돌렸다.
냉정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오라버니, 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죠.”
“……알겠다.”
설미가 먼저 일어나서 밖으로 나서자 그 뒤를 설강이 따라나섰다.
귀빈정의 난간에 선 두 남녀가 바람을 맞았다.
붉게 열이 난 그들의 얼굴을 바람이 시원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내가 못할 말을 한 것이더냐?”
“오라버니, 여전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시겠어요?”
“너까지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답답해서 하는 말이에요. 저분들은 따지면 빙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도 목숨을 걸고 싸우고자 하시는걸요.”
“나도 안다. 하지만 빙궁인들의 목숨을 아껴달라는 부탁에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하아, 오라버니…… 정말 모르시는군요.”
“…….”
“화산도협께선 오라버니의 결심이 어떠한지 보고자 하신 거예요. 그런데 오라버니는 너무나 어정쩡하게 대답하셨어요.”
설미는 그동안의 여정 내내 고진유를 지켜보았다.
고진유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일반 사람들과 달랐다.
“오라버니, 그분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눠요.”
“적과 아군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에요. 그분의 입장에서 지켜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지?”
“제가 한 말 그대로 생각하면 돼요. 그분에게는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어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지켜야 할 사람이라면 품는 분이에요. 정사마의 구분은 그분에게 의미가 없어요. 당연히 중원의 시선은 상관하지 않고요.”
“후우…….”
“그분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자 한 건, 본 궁이 저들의 손에 들어가면 무림에 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왜 우리를 도와준다고 했지?”
“그분에게 무림의 안위는 크게 상관이 없어요. 우리를 도와준다고 한 이유는 단지…… 측은지심일 뿐이었어요.”
“…….”
“우린 그분이 지켜야 할 부류가 아니라, 죽든 살든 상관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마당에 오라버니는 그분께 실례했어요.”
“아니…… 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셨어요. 너무나 명확하게. 오라버니는 우리를 죽이려는 적을 살려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전부 죽여야 한다는 말이더냐?”
“아이 참, 그 뜻이 아니잖아요. 여전히 오라버니는 모르고 계시네요.”
“정확히 말해봐라. 내가 무엇을 잘 못 말했는지.”
“오라버니의 우유부단한 결심으로 인해 앞으로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그분의 사람들이 다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신 겁니다.”
설미는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만큼 고진유란 인물이 어떠한지 잘 파악한 것이었다.
“오라버니는 이미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되었을지도 몰라요.”
설강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오라버니. 왜 자꾸 남한테 묻는 거예요?”
“네가 충고를 해줄 수 있지 않으냐?”
“정말로 충고를 원하시나요? 그럼 그분께 가서 결단을 내렸다고 하세요. 그리고 본 궁으로 가는 동안 오라버니는 그분의 뜻에 따르겠다는 맹세를 보여주시면 돼요.”
설강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 가서 모든 것을 맡긴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알…… 알겠다.”
* * *
남궁무명은 행적을 감추지 않았다.
죄를 지은 것이 없기에, 도망 다니거나 숨어 지낼 이유가 없었다.
당당했다.
남궁세가에서 대연군을 풀어 자신을 잡고자 했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는 남궁세가에서 배신자라는 누명을 받아 죽게 된다고 해도 겁나지 않았다.
오직 그가 두려운 것은 하나.
세가주를 죽인 원수가 아니라, 세상에 한 분밖에 없었던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남궁무명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혈사천이 있는 저주의 낭사산으로 움직였다.
뚝.
순간, 그는 걸음을 멈췄다.
관로를 막아선 수십 명의 인영들.
눈에 익은 모습들이었다.
‘그분께서 오셨군.’
인영들 뒤로 익숙한 기가 느껴졌다.
대연군장이며 남궁삼천검인의 일인.
남궁제일검 남궁파의 기가 확실했다.
‘남궁영운…… 이번 기회에 나를 완전히 내칠 생각이었군.’
어렸을 적 아버지 남궁천문을 따라 남궁세가에 들어왔지만, 세가의 가족들은 그를 정답게 반기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남궁무명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소박했다.
살갑게 대하지 않아도 되니, 형제로 인정해주 었으면 했다.
그들의 앞에서는 능력을 최대한 감추었다.
그러던 도중, 딱 한 번 남궁천문의 뜻에 남궁영운과 비무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자신을 멀리했다.
“조카라고 불러도 되겠는가?”
대연군의 무인들 사이에서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카.
남궁무명에게 아직 남궁세가의 인물인지 묻는 질문이었다.
“……남궁파 숙부님을 뵙습니다.”
“본인을 숙부로 여긴다면 조용히 세가로 가는 것이 좋겠다.”
“죄송하지만 당장은 어렵겠습니다. 소질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그분의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그 뒤에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남궁파의 날카로운 눈썹이 선명하게 짙어졌다.
“천살지인을 죽이고자 한다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네 뜻을 알겠다. 그렇다면 하나만 물으마. 육홍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냐?”
“……!”
담담하던 남궁무명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육 대주가…… 죽었단 말입니까?”
“너는 대연군 모두를 죽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수하 중 한 명이 겨우 목숨은 건졌다. 그가 말하기를 육 대주는 네가 죽였다고 하더구나.”
남궁무명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누명이었다.
“……그를 만나볼 수 있습니까?”
“아쉽게도 하루 뒤 목숨이 끊어졌다.”
“그들의 사인을 확인해 보셨습니까?”
“확인했다.”
“어떤 검이었습니까?”
“호천수호대의 독문검공인 창궁수호검이었다.”
“…….”
남궁무명은 입가에 애매모호한 웃음이 지나갔다.
‘멍청한 놈들. 네놈들이 내가 무슨 무공을 수련했는지 알 리가 없지.’
“숙부님께서도 소질인 제가 그들을 죽였다고 보십니까?”
남궁파는 똑바로 그를 노려보았다.
거짓이 보이지 않는 눈빛.
이렇게 마주 선 채 남궁무명을 똑바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세가에 있을 때는 짧은 순간 지나칠 정도의 만남을 가졌을 뿐이었다.
“네가 아니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느냐? 설령 내가 그 말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증거 없이는 주장할 수 없다.”
“증거는 언제든지 그분들 앞에서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이 가자.”
“죄송하지만 소질은 해야 할 일을 마쳐야 합니다.”
남궁파의 눈살이 다시 찌푸려졌다.
다시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혈사천에는 언제든지 갈 수 있다.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먼저 보여주면, 세가는 더 이상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남궁무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연군 일대를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줘도, 분명 다른 이유를 만들어 자신을 죽이고자 할 것이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숙부님께서는 소질을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세가에 돌아가겠습니다.”
“…….”
남궁무명의 강한 의지를 가진 눈동자가 빛났다.
순간, 남궁파는 그 모습이 누군가와 닮았음을 알았다.
‘형님…… 의 자식이…… 맞구나.’
남궁천문이 젊었을 때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그와 닮은 모습에 냉철한 그 역시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궁제일검이라 하나 그 또한 비대위의 결정을 어길 수는 없었다.
“나 또한 비대위의 일인이나 결정한 상황을 어길 수 없다. 소질이 이해하기 바란다.”
“저 또한 그럴 수 없습니다.”
남궁무명의 고집은 강했다.
‘이 녀석도 형님처럼 한 번 결정했으면 바꾸지 않는군.’
“하아…… 어쩔 수 없군. 끌고 가는 수밖에. 대연살검진을 펼쳐라!”
남궁파의 명령에 대연군의 무인들이 칠성좌형으로 검진을 펼쳤다.
중앙에 갇힌 남궁무명을 향해 검진에서 흘러나온 공력의 압박이 강해져 갔다.
‘할 수 없는 것인가?’
남궁무명의 손이 허리에 찬 창천황검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이들과 싸우는 순간 남궁세가와의 인연은 날카로운 검에 잘려 나가듯 끊어질 것임을 잘 알았다.
‘마지막이군. 남궁이란 성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우우웅-
단전에서 창천황신공을 일으켰다.
황금빛 신광(身光)이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갔다.
“이건……!”
남궁파의 눈이 커졌다.
남궁무명의 신광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창천…… 황신공…….”
육홍과 대연군 일대의 대원을 죽이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형님께서…… 이 녀석에게 남궁세가의 미래를 맡겼구나.’
창천황신공이 주는 무게가 무거웠다.
“모두 물러나라.”
남궁파의 명령에 포위했던 검진이 물러났다.
“……왜 진작 말을 하지 않았지?”
“그분의 명이었습니다. 십이 성의 공력을 이루지 못했다면 세가에 밝힐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지요.”
남궁세가의 전설.
천황검신(天皇劍神)의 독문무공이었던 창천황신공을 완벽하게 익힐 수만 있다면 천살지인과 충분히 겨룰 수 있었다.
“지금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느냐?”
“십 성까지 올라섰습니다.”
“아…… 벌써 십성이라니…… 엄청나구나.”
검황 남궁천문 또한 팔 성의 경지에 올라섰을 뿐이었다.
남궁무명의 무공은 이미 검황을 뛰어넘었다.
“복잡한 상황이구나. 비대위에 돌아가서 네가 창천황신공을 익혔다고 한다면 좋아하지 않겠느냐?”
“죄송합니다. 그분의 뜻을 어길 수 없습니다.”
“하아…….”
남궁파는 답답한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때였다.
휘이이익!
그들 곁으로 청의무복 차림의 청년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