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끼이이이-
흑마차의 철문이 열렸다.
“으…… 으…….”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괜찮으니 밖으로 나오시오.”
십여 명의 손과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옛날 생각 나는군.’
지옥도로 끌려가던 때가 떠오른 고진유가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군 특사, 이들을 풀어주시오.”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지옥혈림에 의해 잡혀 왔는지 알 필요도 없었다.
이들 중 천인공노할 자도 있을 터.
하지만 묻지 않고 모두 풀어주었다.
“고맙습니다.”
“대인…… 감사…… 합니다.”
그들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지옥혈림에 잡힌 순간 살아서 중원 땅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여겼으니 천운인 셈이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이렇게 생긴 사내를 본 이가 있소?”
고진유는 그들에게 한 장의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중간쯤에 있던 사내가 나섰다.
“저…… 소인이 그를 보았습니다.”
“어디서 봤소?”
“회남에 있는 중간 감옥에 갈 때까지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꺼번에 모인 죄수들을 태워서 지옥수에 보낸다구 했습죠. 우린 하루 동안 전부 모일 때까지 기다렸는데…… 근데 그 혼자만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바로 떠났습니다요.”
“혼자서 말이오?”
“그때 간수들이 하던 대화를 엿들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중요한 인물은 신속히 보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이미 여기에 도착해 지옥수로 들어갔을 수도 있겠군요.”
“죄송합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요…….”
아쉽게도 한 발 늦은 것 같았다.
‘오라버니…….’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설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좀 더 빨리 무림맹에 연락했으면 지옥수에 들어가기 전에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고진유가 설미의 앞으로 다가섰다.
“우리가 조금 늦은 것 같소. 미안하게 됐소이다.”
“아니에요. 대협께서는 최선을 다하셨는걸요.”
묵경이 물었다.
“진유 아우, 이젠 어떻게 할 거야?”
“뭐…… 지옥수에서 가서 그를 데리고 나와야죠.”
“……그럴 줄 알았다.”
그냥 물어본 말이었다. 지옥수든 지옥도든 고진유가 중간에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다.
이번에는 우종성이 물었다.
“지옥수 근처는 지옥혈림이 아니면 가지도 못한다고 들었다. 어떻게 들어갈 생각이지?”
“후후, 간단합니다. 흑선을 타고 가는 거죠.”
“어떻게?”
“흑선이 오기 전에 우리가 흑귀로 변장하는 겁니다.”
“변장했다고 해도 흑선에서 우리를 알아보지 않겠느냐?”
“그건 이자가 알아서 해줄 겁니다.”
고진유가 널브러져 있는 흑나찰 두견을 가리켰다.
* * *
포구로 향해 흑선이 다가왔다.
호수를 건너는 흑선이라 지옥도로 향해하는 흑선보다 크기가 작았다.
‘쯧, 혈림기는 언제 봐도 거슬리는군.’
흑선이 점점 가까워지며 상판 위에 흑귀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팟팟!
흑선 상판에서 흑귀가 붉은 깃발을 두 번 흔들었다.
“저게 무슨 뜻이지?”
“저건 저희들의…… 수신호입니다.”
“어떻게 하지?”
“배, 백기를 네 번 흔들면 됩니다.”
고진유는 군성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퍽퍽퍽퍽!
군성창은 백기를 들어 네 번 흔들었다.
잠시 멈춰 있던 흑선이 포구로 다시 들어왔다.
서로 얼굴을 확인할 정도까지 가까워진 거리.
흑선 책임자인 흑나찰 옥규가 정박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견, 손이 왜 그런가?”
“……그럴 일이 있네.”
“……?”
의아해진 옥규가 두견의 옆에 선 흑귀들을 살폈다.
“두견, 저놈들은 처음 보는데? 누구인가?”
그때였다.
휘이이익!!
흑귀로 변장한 우종성, 혁자영, 장두총, 곽우, 냉풍과 마지막으로 반의중이 흑선으로 날아올랐다.
“적…… 적이다!!!”
옥규는 재빨리 검을 뽑았지만 이미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냉기를 느꼈다.
“커억!”
냉풍의 한빙도가 단번에 옥규의 검을 잘라냈다.
곧바로 이십여 명의 흑귀들이 여섯 명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아아아악!!”
“고, 고수다!”
흑선에 있는 모든 흑귀들이 단번에 제압당했다.
우종성의 검이 옥규의 목에 닿았다.
“다, 당…… 신들은……?”
“굳이 알 필요 없고, 일단 배를 대라.”
흑선 탈취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훗날 지옥수대전이라 불린 싸움의 서막이 올랐다.
* * *
끄으응.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퀴퀴한 냄새에 눈을 떴다.
주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일각이 지난 후에야, 조금씩 주위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망할…….’
지하에 있는 감옥이 틀림없었다.
빙우검룡인 자신이 어이없는 술수에 잡힐 줄은 몰랐다.
여인이 내민 물잔에 산공독이 들어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확인하지 못하고 의심 없이 마신 자신을 원망해야 했다.
‘설미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중원에 함께 나온 여동생 설미가 걱정되었다.
옆에 냉풍이 있으니 큰 화는 당하지 않겠지만, 넓은 중원에서 혼자 어떻게 하고 있을지 가슴이 아팠다.
‘……여기가 지옥수라는 곳인가.’
북해빙궁까지 지옥혈림에 대한 소문은 흘러 들어왔다.
사파오패천의 한 축을 이룬다고 하지만 그들이 하는 짓은 늘 거부감이 들었다.
‘지옥혈림은 의뢰를 받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지.’
설강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중원에 나온 사실은 북해빙궁의 인물들도 알지 못했다.
유일하게 아는 인물이라면…….
‘작화의(作化醫).’
멍청했다.
빙궁주를 중독시킬 수 있는 인물은 항상 건강을 돌보는 그밖에 없을 터인데.
‘그가 반중파의 인물일 줄은……!’
퍽! 퍽!
설강은 앉은 자리에서 바닥을 쳤다.
당장 북해빙궁으로 달려가 그놈들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 * *
지옥수로 향해 가는 흑선의 분위기는 긴장으로 가득했다.
“도착하는 즉시 포구를 먼저 장악할 겁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호청 사저는 곧바로 계획대로 움직여 주세요.”
“알았어. 시원하게 날려줄게.”
당우희는 허리에 묶어놓은 커다란 가방을 가볍게 두드렸다.
무림맹에서 한가득 챙겨 나온 물건들.
당문에게 주고 오라는 장두총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가져온 것들이었다.
흑귀로 변복한 여섯 명은 흑선의 선두로 나와 노산도 정박장에 도착하는 순간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노산도 정박장에서는 흑귀들이 많이 있었지만, 다가오는 흑선을 보며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흑선의 선두에 선 옥규가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쿠우우웅!
흑선의 선측이 정박장에 살짝 부딪치면서 멈추자, 아래에 있던 흑귀 하나가 밧줄로 흑선을 고정시키며 옥규를 향해 물었다.
“이번에도 많이 싣고 왔습니까?”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자,
휘이이익!
흑선에서 뛰어내리는 흑귀들이 보였다.
“어이쿠, 뭐가 급하다고 뛰어내려?”
“어…… 처음 보는 녀석들인데?”
장두총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나도 네놈들을 처음 보거든.”
“허억, 적이……!!”
퍼어억!!
장두총은 그대로 날아올라 오른쪽 무릎으로 흑귀의 얼굴 정면을 그대로 찍었다.
“커어어억!!”
비명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흑귀로 변복한 나머지 일행이 검을 치켜들고 달려오는 흑귀들을 가볍게 제압하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고진유의 뜻에 의해 목숨은 빼앗지 않고 기절시키거나 당분간 움직이지 못하도록 상처만을 입혔다.
“입구를 확보한다.”
우종성과 혁자영은 흑귀들을 뛰어넘어 곧바로 정박장 입구를 확보하기 위해 달렸다.
타아앗!
파아아앗!
두 사람이 순식간에 인공 정박장을 떼어놓으려는 흑귀들 앞에 내려섰다.
“그건 안 되지.”
십여 명의 흑귀들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우종성의 화무검에서 매화가 피어올랐다.
“아아악!!”
순식간에 흑귀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우종성이 펼친 오행매화검은 뇌전화검처럼 강맹하지도, 매화절검처럼 날카롭지도 않았다.
하지만 화산지검 중 가장 조화로운 검이었다.
그의 사부인 화산군자검처럼, 평온하며 상생할 수 있는 검공.
오행매화검의 무리는 오행의 기가 조화롭게 상생하지 않으면 절대로 완성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형, 화자결과 목자결을 동시에 펼치면 서로 모자란 부분을 상생할 것 같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
물론 두 개의 초식을 동시에 펼칠 수는 있었지만, 오행매화검의 경우는 달랐다.
성질이 다른 두 내력을 동시에 펼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두 개의 내력을 끌어내는 방법.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그게 가능할까?”
“무당의 양의심공은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무당도 하는데 우리도 못할 게 없지 않습니까?”
말이야 쉽다.
남들이 하니 우리도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인데 단전을 나누는 틀을 만들 예정입니다.”
“단전을 나눈다…….”
“일단 믿고 따라와 보세요.”
“그러마.”
그리고,
우종성은 결국 단전에 두 성질의 내력을 만들 수 있도록 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겨우 오성으로 펼친 화목결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실전에서는 처음으로 펼친 오행매화검의 위력에 우종성 본인 또한 놀랐다.
단번에 정박장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후훗, 이젠 내 차례인 모양이네.”
당우희의 뒤를 다섯 명의 특사들이 따랐다.
“우리가 타고 온 배만 두고 시작하죠.”
“넵!”
군성창은 가방 안에서 조심스럽게 벽력탄을 꺼내 들었다.
한 손 안에 들어오는 크기지만 경천동지의 위력을 지닌 물건이었다.
“자! 시작해 볼까요?”
휘이이익!
군성창을 비롯한 다섯 명의 특사들이 정박한 흑선들을 향해 벽력탄을 던졌다.
쉬이이이익-
시원한 소리를 내며 벽력탄이 흑선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노산도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 * *
지옥수 전체가 울렸다.
정박장 하늘 위로는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솟구쳤다.
“저놈들이 누구냐?!”
정박장에 도착한 북흑명오군의 일군 축여서가 노기를 터뜨렸다.
화르르르-
흑선들이 화염에 잠겨 타고 있었다.
“처음 보는 놈들입니다.”
스무 명도 안 남은 흑귀들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축여서가 멀리 보이는 일행을 향해 다시 내달렸다.
두두두두두-
고진유도 전방에서 다가오는 무리들을 보았다.
“제법 강한 인물이군요.”
“저 정도면 흑명군이 맞을 거야.”
묵경이 그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십여 장 거리에 멈춘 축여서가 소리쳤다.
“네놈들은 어디서 왔느냐?”
“본도는 화산파 제자 고진유라 하오.”
“고…… 진유? 혹시 화산도협이란 말인가?”
지옥혈림에서 고진유의 이름은 절대로 모를 수 없었다.
“당신이…… 왜?”
“그 이유는 이곳 수장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소이다. 가능하겠소?”
“…….”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다시 한 번 더 보았다.
“이게……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자가 할 짓인가?”
“이렇게라도 안 하면 만나주지 않을게 아니오. 부득이하게 된 점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이런 미친놈이……!”
남흑명군의 추관동이 그에게 당했음은 익히 들었다.
“그대의 무공이 강하다고 들었지. 본인은 북흑명군 축여서라 한다. 내 꼭 오늘 화산도협의 무공이 견식하고자 하는 바인데, 본인의 도전을 받아주겠는가?”
스윽.
그때, 고진유의 앞으로 우종성이 나섰다.
“당신은 본도가 상대해 주겠소.”
“네놈은…… 누구냐?”
“우종성이라 하오.”
“크하하하! 화산도협 혼자만 미친 줄 알았거늘, 보아하니 화산파의 젊은 도사 놈들이 모두 미쳤구나. 좋다. 네놈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보마!”
패애애앵!!
축여서의 허리에서 흑색의 구절편이 뱀처럼 휘어져 나왔다.
“사제, 저자는 내가 맡겠다.”
우종성은 신법을 펼치며 흑사구절편을 휘두르는 그의 앞으로 나아갔다.
쌔애애애액-
좌우로 흔들리며 흑사구절편이 어지럽게 허공을 날아다녔다.
흑사구절편의 공격에는 굳이 변초와 허초가 필요 없었다.
우종성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오는 흑사구절편의 공격이 바로 변초이며 허초이고 실초였다.
‘절편의 공격은 어지럽게 움직여 쉽게 잡아낼 수 없다. 하지만…….’
화산파의 사형제들이 고진유와의 비무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곤란했던 점은 내공도 내공이지만 바로 신법이었다.
이미 이 정도 빠르기는 눈에 익숙했다.
‘중심이 되는 한 곳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팟팟팟!
흑사구절편이 공간을 뚫고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했지만, 우종성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크윽!!”
축여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하는 수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서너 걸음 물러나는 순간, 흑사구절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우종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화검을 찔렀다.
금자결의 금쾌일파(金快一破) 초식을 펼쳐지며 흑사구절편을 잡은 손목을 향해 검을 빠르게 찔렀다.
푹!
“악!”
축여서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손에서 흑사구절편을 떨어뜨렸다.
만일 십 성의 내력으로 초식을 펼쳤다면 단번에 그의 손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스으으윽.
멈칫거리는 사이, 날카로운 검기가 축여서의 목에 닿았다.
“계속하겠소?”
완벽한 패배였다.
“……졌다.”
그 순간, 축여서가 모든 내력을 풀었다.
핏핏!
우종성은 순식간에 그의 혈을 눌러 점혈했다.
흑귀들은 수장이 잡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옥수를 향해 도망쳤다.
화산군협 우종성의 명성이 중원 무림에 퍼져 나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