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화산파 일행은 회남을 지나지 않고 곧바로 합비로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한때 노주(蘆州)라 불린 합비는 교통의 요지, 더구나 성도답게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넓은 대로에서 서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바쁘게 움직였다.
“먼저 쉴 곳을 찾아야겠어요.”
“저희들이 객잔을 찾아보겠습니다.”
고진유의 명에 다섯 명의 특사들이 움직이려 할 때, 일행과 함께 움직이던 반의중이 나섰다.
“제가 조용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오, 좋은 곳을 알고 있소?”
“안가(安家)입니다.”
“안가라면…… 남궁세가의 인물들이 아는 곳이 아니오?”
“그곳은 특별한 곳입니다. 호천수호대가 모시는 분의 신상에 이상이 있을 시 조용히 모시는 장소지요. 그곳은 대주와 제가 알 뿐 세가의 다른 인물들은 전혀 모릅니다.”
“오, 잘됐군요. 부탁하겠소이다.”
일행은 반의중을 따라 마을 외곽으로 움직였다.
마치 산속에 들어온 듯 한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폭이 이 장 정도의 실개천이 흐르는 돌다리를 건너자 장원이 나타났다.
입구에 심안장원(心安莊園)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곳입니다.”
“와…… 합비 안에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때애앵.
반의중이 현판 옆에 놓인 쇠종을 가볍게 치자, 문 앞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노인의 목소리가 바로 들렸다.
“어디서 오셨소?”
“창천의 벽이 뚫렸소이다.”
“…….”
드르르륵.
장원의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일행을 맞이했다.
“그대들은 남궁가의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휘익.
고진유는 얼른 말에서 내려가 허리를 숙였다.
“화산파 제자 고진유라 합니다.”
“허허…… 매화 향에 패성이 진동을 하는구나.”
단번에 고진유의 내력을 알아보았다.
예사로운 노인이 아니었다.
고진유의 행동을 보면서 일행도 전부 말 위에서 내려섰다.
마차 안에 있던 여인들도 밖으로 나왔다.
“호천수호대의 인물이 끌고 왔으니 들여보내기는 하겠네. 들어오게나.”
“고맙습니다.”
노인은 뒷짐을 지며 안으로 먼저 움직였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였지만 노인의 걸음을 이 보 안으로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았다.
모두가 보폭을 겨우 맞추며 노인의 뒤를 따랐다.
“젊은 녀석이 대단하구나. 세상에 재미있는 물건이 나타났도다.”
정원을 지나자 오래된 목조 건물이 나타났다.
“그대들은 여기에서 쉬도록 하게.”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땔감을 팰 녀석이 한 명 필요했는데 마침 잘 왔어. 자네가 나를 따라오게나.”
* * *
휘이익!
쩌억.
일부일절(一斧一折).
가볍게 내린 한 번의 도끼질에 땔감이 절반으로 쪼개졌다.
“화산파에서 도끼질도 잘 배운 것 같구먼.”
“고맙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가?”
“허자배이신 허민 사부님께서 무공을 사사하셨습니다.”
“허민이라…… 나이가 들었나, 잘 모르겠구먼…… 혹시 자네 사조는 어떻게 되는가?”
“도자배로 진(眞) 자를 사용하십니다.”
“도진이라…… 그도 처음 듣는 이름이구먼.”
고진유는 살짝 당황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사신 분이지?’
“흐음…… 화산파에 공 자를 쓰는 놈은 아느냐?”
“서(犀) 자를 쓰시는 분이 계십니다.”
“클클클…… 공서가 아직도 살아 있는 모양이구나. 천방지축 같은 녀석이었지.”
“다행이네요. 아시는 분이 계셨어요.”
“허허허, 내가 오래 살긴 살았나 보이.”
쩌어억.
고진유는 대답하면서도 연신 멈추지 않고 장작을 쪼갰다.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제가 무식해서 무림에 대해 모릅니다. 괜히 어르신을 몰라뵙는 무례함을 보일까 싶어 묻지 못하겠습니다.”
“허허허! 잘했도다. 난 이미 이름을 버렸고 성도 버렸도다. 굳이 알 필요도 없느니라.”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마지막 남은 장작도 마저 쪼갰다.
“더는 없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저기 안에 놓아두면 되느니라.”
“예.”
고진유는 바닥에 흩어진 장작들을 주운 뒤 창고에 쌓기 시작했다.
“젊은 녀석이라 일도 금방 끝나는구먼.”
이각이 되기도 전에 쪼갠 장작들을 모두 옮겼다.
“아이고…… 자네가 할 일을 다 했으니 노인네가 선물을 하나 줘야겠구먼.”
“아닙니다. 이곳에서 쉬도록 해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했던 약속이 있느니라. 그놈이 장작을 대신 쪼개주는 녀석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라고 했었지.”
“…….”
“보아하니 네가 익힌 정도의 무공이라면 더 새로운 것을 익힐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내력도 끝을 알 수 없어 보이니 필요 없겠군. 흐음…… 무엇이 좋을꼬.”
노인은 똑바로 고진유를 바라보았다.
“오라, 그놈의 거칠어진 패성을 문제가 없도록 부드럽게 해야겠구나. 내 눈을 똑바로 보아라.”
그 순간, 흑색이었던 노인의 눈동자가 점점 백색으로 변했다.
스르르르-
그때였다.
노인의 눈동자에서 백색의 기류가 빠져나오더니 고진유의 눈을 향해 들어갔다.
번쩍!!
눈부신 섬광이 터지고, 고진유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 순간, 노인의 눈동자는 이미 흑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허허허, 잘 받아먹은 모양이군. 앞으로 패성이 폭발할 일은 없을 게야.”
‘머릿속이…… 깨끗해졌어.’
고진유는 아주 오랜만에 머릿속이 청명하게 변한 것을 느꼈다.
가끔 흐릿하게 무거워진 느낌을 받으면서 내력이 강해졌기에 생긴 반응이라 가볍게 지나갔다.
무공이 강해질수록 패성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그저 원래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띠며 고진유의 눈동자를 보았다.
‘후후후. 이젠 괜찮군.’
세상이 투명하게 반사될 정도로 맑았다.
“난 그만 쉬어야겠다.”
“어르신께서는 어디에서 주무십니까?”
“저기 보이는가?”
노인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작은 오두막처럼 지어진 전각이 보였다.
“너무 좁지 않습니까?”
“누울 자리만 있으면 그곳이 내 집이라네. 그만 동료들에게 가보도록 해라.”
“나중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허허허. 알아서 하게나. 혹시나 내가 없다면, 좋은 곳에 갔다고 생각하게.”
고진유는 깊게 포권한 뒤 장원의 전각으로 물러났다.
홀로 남은 노인은 바람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천황검신. 우리가 약조한 대로 백 년 뒤 이곳에 찾아온 인물에게 제일 필요한 것을 주었다네. 후후후…… 그대는 몰랐겠지. 아쉽게도 남궁가의 아이가 아니더군.”
노인의 입에서 나온 인물.
천황검신(天皇劍神)은 남궁세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인이었다.
그리고,
스르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인의 몸이 점점 투명하게 변해갔다.
* * *
전각에 들어선 후, 화산파 일행은 일사불란하게 각자 알아서 행동했다.
반의중은 그때서야 면사를 거둔 설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아아…….’
그제야 그녀가 한미화라는 사실이 믿겼다.
중원 오미화의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 부대주도 알아서 쉬시오.”
“알겠소이다.”
대답은 했지만 어떻게 할지 몰라 반의중이 멀뚱히 서 있을 때,
스윽.
녹림야검이 다가왔다.
“당황스럽겠지만 정말 그냥 편히 쉬면 되오.”
“…….”
한미화도 한미화지만, 그가 자신을 스스로 소개할 때도 믿을 수가 없었다.
녹림야검이라면 녹림에서도 유명한 살수였으니까.
“저기요?”
그때, 화산파의 여제자가 손짓을 하며 불렀다.
“예?”
“식사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반의중도 안가의 위치만 알 뿐 안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주방에 가면……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여긴 처음이라서…….”
“아! 당신도 잘 모르는 모양이군요. 그럼 우리가 알아서 찾아볼게요.”
설미가 당우희에게 다가섰다.
“언니, 제가 할 일은 없나요?”
“흠, 일단 주방부터 찾아보면 할 일이 있겠지!”
후다다닥!
반의중은 아주 빠르게 그녀들 곁으로 다가섰다.
“혹시 무거운 물건이 있을지 모르니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 * *
장원 지붕 아래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저녁식사를 하기 전, 잠시 밖에 나갔던 고진유가 돌아왔다.
“왜 그래?”
“그분이 어디에도 계시지 않아요.”
장원이 넓다고 하나 빠르게 움직이면 모든 곳을 돌 수 있었다.
“반 부대주, 혹시 그분에 대해 아시오?”
“저도…… 오늘 처음 뵌 분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진유 아우, 잠시 밖에 나가신 건 아니고?”
“문은 안에서 닫혀 있었어요.”
고진유는 모든 경우의 수를 확인했다.
“완전히 사라졌어요. 그분께서 계시던 전각에 가 보니 오랫동안 사람이 산 흔적이 없더군요.”
“음…… 그럼 혹시 혼령이 아닐까?”
“……혼령이요?”
“무림에는 신기한 일도 많이 일어난다고 하잖아. 내력이 높은 고인들께선 내력으로 혼령을 만들 수 있다는 글을 본 적 있어.”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분이라면…….’
스윽.
고진유는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모두 식사하죠.”
합비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소호에서 노산도로 들어가는 지옥혈림의 흑선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곳에는 포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러 포구 중에서 노산도로 들어가는 흑선을 운영하는 포구는 한 곳밖에 없었다.
지옥수는 지리적 조건상 흑선을 타고 가지 않고서는 몰래 침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옥혈림은 철저히 일반 백성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지옥수는 소호에 위치했지만 소호를 기반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어민들에게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
노산도 근처에 다가서지 않으면 소호에서 어업을 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펄럭.
흑색의 마차 위로 혈림기가 바람에 흔들렸다.
흑마차 한 대가 포구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철갑으로 둘러싼 흑마차에는 창문이 달려 있지 않았다.
그 안에 의뢰를 받아 지옥혈림이 납치한 인물들이 갇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흑마차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흑나찰 두견이 그를 보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대들에게 볼일이 있다.”
두견은 단번에 사내의 복장인 매화도의를 알아차렸다.
“그대는 화산파의 제자이오? 본인은 지옥혈림의 흑나찰이다.”
“알고 있다.”
혁자영의 대답은 여전히 짧았다.
흑나찰 두견은 그들이 결코 좋은 뜻으로 앞을 막아섰다고 여기지 않았다.
한 손은 이미 허리에 찬 검을 잡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볼일이라는 게 무엇이지?”
“마차 안을 확인하겠다.”
“…….”
두견의 이마에 주름이 진하고 두껍게 만들어졌다.
그는 긴장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혼자군.’
화산파 도사라 해도 한 명 정도는 충분히 흑귀들로 상대할 수 있었다.
두견은 결심이 서자 뒤에 따르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이놈을 치워라!”
흑나찰 두견의 명령이 떨어지자 동시에 흑귀들이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흑귀들이 펼치는 흑살검법은 경검이며 독검이었다.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큰 부상을 당할 수 있기에 항상 조심해야 했다.
혁자영은 다가오는 흑살검을 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기다렸다.”
단절향이 피어올랐다.
스걱.
추화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동시에 흑살검기를 정확히 일 장 앞에서 끊었다.
흑귀들이 펼친 검기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온다면 팔이 사라질 것이다.”
“미친…….”
혁자영의 경고를 흑귀들은 간단히 무시했다.
팟, 파파팟!
동시에 다섯 명의 흑귀들이 혁자영을 공격하기 위해 튀어나왔다.
스걱.
“아아아악!!”
혁자영의 경고는 사실이었다.
검을 든 그들의 팔이 동시에 잘려 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아아악!! 내 팔이!!!”
흑귀들은 바닥으로 잘려 나간 팔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혁자영의 검은 고요히 움직이지 않았다.
흑나찰 두견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두려움이 솟구쳤다.
“이게 무슨…… 사, 사술인가?”
사술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혁자영은 제자리에서 추화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이놈!! 화, 화산파 제자가 사술을 익히고도 정파라 할 수 있느냐?!”
“사술이라. 겨우 이 정도를 가지고 혼비백산하다니 지옥혈림의 흑나찰도 별 볼 일 없군.”
“본 림을 얕보지 마라!!”
타아앗!
두견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전력을 다해 일검을 날렸다.
챙!
하지만 그의 검 또한 일 장의 거리 앞에서 끊어졌다.
“대체…… 어떻게…….”
“일장단절(一丈斷絶)이라는 것이다.”
혁자영은 매화절검의 극의를 깨달았다.
그 또한 고진유와의 비무를 겪으면서 매화절검의 무리를 깨우치며 변후단검(變後斷劍)의 무리(武理)를 완벽히 몸에 익혔다.
화산지검 중 매화절검은 실전에서 반복하면서 익혀야 가능한 화산파 최고의 실전 무공.
매화절검을 펼칠 비무 상대로 완벽한 무인이 혁자영의 곁에 존재했다.
고진유는 한 초식을 겨룬 뒤 곧장 매화절검의 초식에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주었다.
수없이 수정하고 반복하던 어느 날. 혁자영은 문득 한 가지 들었다.
‘내가 펼치는 매화절검이 예전의 그 검법이 맞는가?’
그때 고진유가 말했다.
“뭐 어때요. 곧이곧대로 따를 필요 있나요?”
그리고 지금,
고진유의 말이 맞았다.
의심하지 말라.
내가 펼친 무공이면 그것으로 족했다.
‘고수다…… 죽을 수 있어.’
두견은 잘려 나간 반검을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수하들처럼 팔이 잘려 나가기 싫었다.
툭.
반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더는 싸울 의지가 없음을 알려야 했다.
“약았군. 자신은 다치기 싫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지옥혈림을 얕보지 말라 소리치던 패기는 어디로 갔지?”
“…….”
“수장으로서 책임이 없군. 목 대신 그대의 팔을 거두겠다.”
스윽-
텅 빈 공간에서 무형의 검날이 두견의 두 팔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