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눈앞에 보인 청년의 뒷모습.
태산도 이보다 더 넓고 크게 보일까.
반의중은 침을 삼켰다.
‘이 청년이 화산도협이란 말인가……?’
짧은 시간 동안 중원 무림에서 수없이 그의 명성을 들었다.
그가 모신 대주가 무림맹에 간 이유도 화산도협과 연관이 없지 않았다.
“괜찮소이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괘, 괜찮소이다. 고맙소.”
죽음 직전에 화산도협의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다.
휙! 휙! 휙!
곧이어 뒤에서 신형들이 나타났다.
매화도의를 입은 남녀들과 유난히 용모가 눈에 띄는 사내였다.
‘이들이…… 화산칠협과 풍류미군…….’
무림맹에 있어야 할 이들이 안휘성 합비에 나타났다.
반의중에 반해 남궁조후의 표정은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그 또한 나타난 일행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화산파는 물러나시오. 이 일은 본 세가의 개인적인 일이외다.”
남궁조후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은 안휘성. 남궁세가의 땅이었다.
“본도가 무공을 익힐 때 사부님께서 가르치셨소. 무림에 나가서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다만 한 가지, 측은지심으로 사람을 대하라.”
“화산도협, 이건 측은지심과 상관이 없소!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인가? 남궁세가와 원한을 더 만들 생각이오?”
“…….”
고진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견대복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킨 반의중에게 물었다.
“그대 또한 남궁의복을 입고 있군요.”
“저, 전 호천수호대의 부대주였던 반의중이라 합니다.”
“호천수호대라. 남궁무명이란 분의 수하겠군요. 그런데 왜 쫓기고 있었소?”
“세가에서 대주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고진유는 화산관에서 만났던 남궁무명을 바로 기억했다.
남궁세가에 무슨 사건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남궁세가의 인물이 남궁세가 휘하인 호천수호대의 대주와 부대주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이라니.
“이해가 안 되는군. 그 또한 검황의 아들이라 들었는데.”
“…….”
“보아하니 남궁세가도 상당히 복잡한 모양이외다.”
고진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궁조후와 다시 마주 섰다.
“귀문에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이만 물러가시지요. 본도가 자세히 알아본 후 이자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직접 포박한 뒤 보내 드리겠소이다.”
“하! 어찌 타 문파의 인물이 본 문의 일에 관여하려 하는가? 그를 두고 물러난다면 그대와는 없던 일로 하겠네.”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군요.”
“화산도협, 다시 한 번 잘 생각해야 할 걸세. 여긴 안휘성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가?”
“그런 협박은 본도에게 통하지 않소이다.”
파아아앗!
남궁조후의 전신에서 살성이 일어났다.
“화산도협, 그대들도 정녕 이 자리에서 화를 당하고 싶은 것인가?”
그의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양 진영에서 내력을 끌어 올릴 준비를 하며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남궁세가에서 원하는 게 이런 것이라면 죽을 각오도 되어 있겠지요?”
고진유도 그의 살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전신의 내력을 완전히 개방했다.
산 전체로 매화 향이 진동했다.
“본도가 그대의 협박을 두려워할 것 같소? 정녕 피를 보고자 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리다.”
“…….”
고진유의 눈빛에서 쏟아진 안광.
정파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렬했다.
꿀꺽.
‘어, 어떻게 저런 애송이가 마치 검황과 같은…….’
마주친 것만으로도 온몸에 긴장된 듯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기회는 본도가 주겠소. 싸울지 물러날지, 그대가 결정하시오.”
고진유의 신형에서 여전히 내력이 흘러나왔다.
‘무, 물러나야 한다. 저자의 기운은 패도(霸道)가 틀림없어.’
저자는 상대가 누구인지 상관없는 것이 확실했다.
남궁조후는 확실히 이기지 못할 상황이라면 싸우지 않았다.
“……좋소. 일단 물러가지. 하지만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것이오.”
남궁조후는 뒤를 돌아섰다.
그와 함께 제왕군의 남궁 무인들이 또한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한바탕 소란스러움이 지나고.
고진유와 반의중은 화산파 일행과 삼 장 정도 떨어진 장소에 따로 앉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대의 일은 본 문과도 연관이 없지 않은 듯하니 마음에 담지 않아도 되오.”
호천수호대의 부대주가 쫓기게 된 이유는 검황의 죽음과 연관 있음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소?”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말해보시오.”
“대주님을 만나보셨습니까? 대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에게서 연락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무림맹에 가실 때 제게만 귀띔한 뒤 세가에서도 모르게 가신 것입니다. 돌아오실 때 분명 연락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남궁세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인 것 같소.”
“……그럼……? 대체 어디에 가셨다는 것입니까?”
“혈사천.”
고진유는 왠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분명 자신과 닮았다.
남궁무명은 세상 그 누구보다 아버지인 검황을 사랑했다.
“설마…… 혼자서 원수를 갚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반의중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고진유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갈 것이오?”
“대주님께서 혼자 혈사천에 가고 계십니다.”
“그를 찾아간다면 당신이 도움이 될 거라 보시오?”
반의중은 정곡을 찔린 듯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분 혼자서…….”
“무림맹에서 그를 보았소. 절대로 허무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소. 그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하오. 하지만 정말로 그의 사람이라면 믿으시오. 멍청하게 아무 계획도 없이 혈사천에 쳐들어갈 인물은 아닐 것이외다.”
“그분을 믿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요.”
반의중의 몸이 떨려왔다.
‘이분의 말씀처럼 대주님을 믿어야 한다. 세상에 그 어떤 이보다 강한 분이시니까.’
척.
반의중은 고진유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취했다.
“송구한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잠시 대협께 몸을 의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당장 갈 곳이 없었다.
고진유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그렇지 않아도 지옥혈림과 한판 붙을 생각이라서 말이오. 사람이 부족한가 싶었는데 잘됐군요. 호천수호대의 부대주라면 제법 싸움도 잘할 것 같고.”
“……예?”
반의중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포함하여 화산칠협과 풍류미군, 그리고 다섯 명의 특사들. 그 옆에 면사를 쓴 여인과 두 명의 사내가 전부였다.
“이…… 인원으로…… 지옥혈림과 붙는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도 제법 많지 않소? 이젠 당신도 합류했으니 우리가 이길 확률이 더 높아진 것 같소이다. 후후후.”
반의중은 미소를 짓는 화산도협의 모습을 보며, 살아서 대주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툭. 툭.
고진유의 손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함께 지내는 동안 잘 부탁하겠소.”
“아…… 네에…….”
* * *
남궁세가의 비대위는 총 여섯 명의 인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가주 남궁형소, 일공자 남궁영운, 남궁삼천검의 남궁허, 남궁도, 남궁파, 마지막으로 일장로 남궁삼까지.
긴급하게 전해진 한 장의 서신에, 남궁세가 비대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제왕군 부군장 남궁조후가 보낸 전서였다.
<부대주 반의중 포박 실패>
하지만, 반의중을 잡고 놓치는 문제보다 비대위의 관심은 따로 있었다.
“화산도협이 합비 인근까지 들어왔소이다. 화산관의 전 인원과 함께 말이오.”
“무림맹에 있어야 할 그들이 안휘성까지 오다니…… 분명 우리가 모르는 일이 생긴 것 같소.”
“그렇지 않아도 무림맹에서 연락이 왔소. 맹주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더군.”
남궁허가 나섰다.
“화산도협에 관한 일은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겠소이다.”
그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제왕군이 물러나면서, 남궁조후는 세가 내에서 위신이 떨어졌다.
“제왕군장께서 직접 나서주신다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소이다.”
다섯 명의 비대위원들 또한 남궁형소와 생각이 같았다.
최근 제아무리 화산도협의 무공이 이름을 떨친다 해도, 남궁허는 오랫동안 중원오기로 불리지 않았던가.
스윽.
이번에는 남궁영운이 손을 들었다.
“숙부님들. 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있지 않습니까?”
“호천수호대주를 말하는 것인가?”
남궁형소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연군에서 보낸 본 가의 무인들을 상대로 무공을 펼쳤습니다. 그건 명백한 반역입니다.”
“일공자의 말이 맞소이다. 민망합니다만, 검황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잖소이까. 남궁무명을 잡아서 확실하게 물어야 할 것이외다!”
“음…… 그는 지금 어디로 움직이고 있소?”
“외남당의 보고에 따르면 저주(滁州)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저주? 그곳으로 가면…… 설마 혈사천이 있는 낭사산으로 가는 겐가?”
“어허…… 맞는 듯합니다.”
여섯 명의 비대위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둘 중 하나겠군. 혈사천과 싸우러 가든지, 아니면 혈사천에 합류를 하든지.”
“숙부님들. 혼자서 혈사천과 싸우러 간다는 것은 믿기지 않습니다. 그의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일공자의 말이 맞소. 그가 분명 혈사천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외다.”
남궁도 또한 남궁영운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
“흠…… 아직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소만…… 그렇다고 해서 혈사천에 홀로 가도록 놓아둘 수는 없을 것 같군.”
“본인이 나서겠소.”
남궁파가 내력을 끌어 올렸다.
대연군의 수장이자 남궁제일검.
수하의 실수를 수장으로서 책임져야 했다.
“남궁제일검께서 맡아주신다면 안심이 되겠소이다.”
세가에서 가장 냉철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다행이군.’
이에 남궁영운은 안심했다.
‘남궁무명만 잡는다면 나머지 녀석들은 있어도 상대가 되지 않지.’
* * *
후다다닥!
청의무인이 호청정으로 다급하게 들어섰다.
대청 바닥에는 태평스럽게 청년이 누워 있었다.
‘비대위 긴급 출동…… 그럼 지금쯤 올 때가 됐는데…….’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대청 앞으로 청의무인이 날듯이 내려섰다..
벌떡.
호청정의 주인 이공자 남궁후진이 대청 바닥에서 일어났다.
“역시 더운 날은 시원한 바닥이 좋지. 그래, 비대위에서 무슨 말들이 오고 가던가?”
“제왕군의 부군장께서 반 부대주를 놓친 모양입니다.”
“그래? 의외인데? 남궁조후 숙부가 움직였다면 당연히 잡힐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부대주의 능력이 뛰어났군?”
“합비 인근에서 그를 잡기 직전에 화산도협이 나타나 방해를 했다고 합니다.”
화산도협이란 말에 남궁후진의 눈이 빛났다.
“화산도협이 그를 구해줬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가 합비까지 왔다고?”
“그렇습니다.”
“혹시 묵 형도?”
“무림맹 화산관에 있던 모든 인원들과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흐음, 묵 형이 와서 반갑기는 한데…… 뭘까?”
남궁후진은 바짝 당겨 앉았다.
그들 모두가 안휘성까지 올 정도면 어디선가 큰일이 난 게 확실했다.
“그렇게 됐다면 반 부대주는 그들과 함께하겠군. 내가 한번 만나러 가봐야겠어.”
대청 바닥을 짚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 더 보고할 게 있습니다.”
“음?”
“호천수호대주에 관한 일입니다.”
“무명의 일이라고?”
“홀로 혈사천으로 가는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비대위에서는 혈사천과 내통했기 때문이라 판단한 듯합니다.”
“하, 결국…… 형님도 너무하시는군. 무명이 세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아시면서 굳이 내치고자 하시다니…….”
남궁영운이 남궁무명의 진면목을 본 순간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조차 인정했던 남궁무명의 무공은 일공자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분명 충분했다.
세가의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남궁무명이 그 대신 세가주의 자리에 추대되지 않을까 두려워진 것이다.
“대연군장께서 직접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허얼. 난리도 아니네. 남궁제일검이 직접…….”
남궁무명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대연군장 남궁파는 냉철한 성정을 지녔다.
서로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힘으로 싸우게 될 것이다.
남궁파와 싸우게 되는 순간, 남궁무명은 파문당할 것이 확실했다.
“휴우…… 제길…… 막아야겠어. 그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궁세가의 미래를 위해서…….”
돌아가신 검황 남궁천문이 부탁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없어지면 무명을 부탁한다. 그놈은 내가 완성하지 못한 창천황신공(蒼天皇神功)을 이룰 수 있는 놈이다.”
검황조차 마지막 순간을 넘기지 못했던 남궁세가의 신화를 이룰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남궁무명, 그라고 말이다.
“젠장, 그 말만 듣지 않았어도 신경 안 썼을 텐데.”
남궁후진은 몸을 추슬렀다.
“아이고…… 이제부터 바빠지겠군. 그동안 재미있게 잘 놀았네.”
다급한 일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특검단을 풀어 무명을 찾아라.”
“존명.”
청의 무인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오랫동안 세가가 안하무인에 빠졌다고 하셨었지. 뭐, 나도 썩 바람직한 아들은 아니었지만.”
남궁후진은 히히 웃으며 대청 끝으로 걸어갔다.
육척(尺)의 장검이 길게 놓여 있었다.
청옥빛의 검집에 새겨진 백색의 검명.
척인검(滌人劍).
스윽.
“네놈을 잡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는 육 척의 척인검을 가볍게 들어 등 뒤로 묶었다.
휘익!
호청정에서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