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남궁천문의 첫째 아들 일공자 남궁영운.
정상적이었다면 남궁세가의 차기 수장이 될 인물이었다.
하지만 남궁세가에서 검황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검황이 세가주의 지위에서 물러나도 그의 존재를 이을 수 있는 인물은 남궁세가에 없었다.
남궁영운에게 물려줘야 할 시간이 점점 뒤로 밀려났다.
처음에는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형제들이 점점 부각되기 시작했다.
창천무룡 남궁한의 무공은 뛰어났다.
남궁한이 가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세가의 관심이 조금씩 그에게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날, 결국 남궁영운은 면경에서 조급한 표정을 짓는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때, 누군가 그를 찾아왔다.
환하게 미소를 띤 그는 창법전주 남궁당요였다.
* * *
툭.
옥병을 열고 붉은 환단을 꺼냈다.
‘최근에 새롭게 만든 신무선단이라.’
입에 넣은 뒤 단번에 삼켰다.
쏴아아아-
식도로 내려가기 전 단번에 녹으면서 환단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처억.
남궁영운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한 뒤 몸속으로 퍼져 나간 환단의 기운을 단전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단전으로 급격하게 들어서는 기운에 복부가 부풀어 올랐다.
“크으으으…….”
고통을 참아내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상태 그대로 반각이 지났다.
쉬이이이이…….
신음과 함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부풀어 올랐던 복부가 가라앉았다.
“좋군.”
등 뒤에서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도 없이 들어오는군.’
“……오셨습니까?”
남궁영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축하하네. 드디어 극성을 넘었군.”
“고맙습니다.”
“신무선단이 대단하긴 하지? 이번에 나온 선단은 예전 것보다 내력의 힘을 곱절로 끌어 올릴 수 있다고 하더군.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는데 너를 보니 사실이었어.”
“하지만 그만큼 복용해야 할 시간 간격이 줄어들었습니다.”
“후후후. 귀찮더라도 그만큼 내력이 늘어나면 좋지. 아니 그런가?”
남궁당요의 표정은 마치 사악한 미소를 짓는 악마처럼 보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방금 연락을 받았다. 그에게 갔던 일이 실패했다더군.”
남궁영운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대연군의 일대주 육홍이 이끄는 자들은 남궁세가 최고 살수들이었다.
충분히 그를 잡을 수 있다고 여겼건만.
“더 큰 문제는 육홍, 그 녀석이 입을 놀렸다는 것이네.”
“제기랄…….”
남궁무명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했던 계획이 틀어졌다.
남궁세가의 차기 세가주는 검황의 자식 중 비대위가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남궁한이 사라진 지금, 무공으로 자신의 앞을 막아설 걸림돌은 남궁무명 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일.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무엇입니까?”
“그를 검황을 죽인 배신자로 몰아가는 수밖에 더 있느냐?”
“…….”
“가능하지 않겠느냐. 본 세가에서 그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얼마 없다. 세가로 복귀하라는 대연군의 말을 무시하고 그들을 죽였다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해라. 지금 바로 비대위에 함께 가야겠다.”
* * *
날은 따스했다.
어느덧 오월 중반에 들어섰다.
아침을 먹고 배가 부르자, 녹림야검의 눈꺼풀이 처졌다.
‘아 씨…….’
갑자기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지만 왜 자신이 이들과 함께해야 하는지 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나마 매화정을 작업하던 말을 트게 된 군성창과는 좀 편해졌지만.
이제 객잔 밖에 혼자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쳇. 내력에 제재를 가했으니 도망 못 칠 거라 생각하나 보지.’
삼 일 마다 혈을 눌러야 살 수 있다고 했다.
‘어…… 어라? 그러고 보니 어제가…….’
어제가 삼 일째였다.
객잔에 온 뒤 다섯 명의 특사들과 술을 마시느라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삼 일이 지나면 모든 구멍에서 피가 나온다고 했는데?’
녹림야검은 조심스럽게 단전에 힘을 준 뒤 내력이 움직이는지 보았다.
“……?”
너무나 생생하게 단전에서 내력이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
분명 좋아해야 할 일이지만 당황스러웠다.
‘왜…… 어떻게 된 거지?’
그동안 화산관에서 지켜본 바, 고진유는 일반인들과 생각이 달랐다.
‘내력이 돌아왔다면 신법을 펼칠 수 있어. 지금 당장? 아, 아니지. 이건…… 일부러 내가 도망가도록 함정을 판 게 틀림없다.’
황금 천 냥이 도망가도록 놓아둘 리가 없다.
‘어쩌면 나를 데리고 다니기 귀찮아서 도망가는 즉시 죽일 생각일지도 모른다. 정파인이라 바로 죽이지는 못하고…… 죽일 명분을 만든 것이 분명하군! 제길, 악독한 정파 놈이야.’
녹림야검은 도망갈 생각을 버렸다.
“쯧, 긁어 부스럼보다는 그냥 여기에 있는 게 낫겠군. 지금도 안 보는 척하면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게 확실해.”
녹림야검이 몸속으로 돌리던 내력이 거둔 순간,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림 씨.”
“흡!”
이 층 창문가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고진유가 보였다.
“객잔 앞에 있다가 나를 찾는 사람이 오면 데리고 오시오.”
고진유는 할 말만 하고 머리를 다시 넣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도망 안 가기 잘했군.’
녹림야검은 어쩔 수 없이 객잔 앞을 지켰다.
‘어제 나타났던 지옥혈림이 다시 온다고 했던가? 지옥혈림과도 친한 모양이지?’
화산도협과 지옥혈림은 철천지원수 사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객잔 앞에 기다리고 있은 지 이각 정도 지났을 무렵.
‘지옥혈림이다.’
흑귀들 사이에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녹림야검은 일어난 뒤 목에 힘을 주었다.
“멈추시오.”
“화산도협을 만나러 왔어요.”
“알고 있소이다. 따라오시오.”
북소연은 안내하는 그를 힐끗 보았다.
“내기를 보아 사파인 같군요.”
“맞소이다. 녹림 출신이오.”
“녹림의 인물이 왜 여기…… 아, 혹시 얼마 전 화산관에서 기습하다 잡혔다는 녹림야검이 그대인가요?”
“…….”
“흐음, 도협이 그대를 데리고 다니기까지 하는 모양이군요.”
정확히 자신을 알고 있었다.
‘망할…… 소문이 완전히 퍼졌군.’
“도망 안 가나요?”
“내 몸값이 황금 천 냥이오. 그가 보낼 줄 것 같소이까?”
“아하…… 어쩌나요? 하필이면 그에게 걸리다니 더럽게 재수 없네요.”
“…….”
녹림야검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객잔으로 들어갔다.
“이 층으로 올라가시오.”
“힘내세요, 호호.”
* * *
객잔 이 층으로 올라서자 고진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여기서 이야기해도 괜찮나요?”
“하루 빌렸소이다. 다른 손님들은 없소.”
“도사가 돈도 많군요.”
“내 제자가 제법 있는 집 자식이라 본의 아니게 돈에는 구애받지 않아도 되지.”
“그런 분이 저기 황금 천 냥이라며 사람을 끌고 다니나요?”
“본인에게 관심이 많군.”
“…….”
“자리에 앉죠.”
고진유와 북소연은 텅 빈 객잔의 자리 중 가운데에 앉았다.
먼저 고진유가 말문을 열었다.
“그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보셨소이까?”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옥수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인 게 맞더군요. 하지만 의뢰를 받은 인물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어요.”
지옥혈림의 중원사대지옥 중 한 곳.
지옥수(地獄水)에서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채 움직인 것이었다.
지옥수의 수왕은 사대흑신왕 중 일인인 북흑신왕 구종부.
북소연은 심각함을 알리며 곧바로 상부에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상부에서 연락이 왔다.
“그를 구출하는 데 상부에서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게 무슨 뜻이오?”
“지옥혈존이신 혈성존의 명을 거역한 사건이에요. 그들이 단독으로 의뢰를 받았으니, 해결도 그들 스스로 하도록 둔다는 뜻이지요.
본 림에서 직접 나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면책당하지 않기 위해 살인멸구를 해서 증거를 없앨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분께서도 이번 일에 관심이 많으세요.”
“우리들이 직접 그를 찾아 알아서 하라는 뜻이군.”
“맞아요.”
“말 안 듣는 수하를 대신 처리해 달라는 것 같은데.”
“뭐, 정확해요. 대신 그 과정에서 생긴 여러 일은 개의치 않겠다고 하셨어요.”
“그와 관련된 지옥혈림의 인물들을 모두 죽여도 상관없다?”
“괜찮아요. 혈성존께서 모든 것을 허락하셨어요.”
“대단하군. 같은 식구들 아니오?”
“혈성존의 명을 어겼다면 배신자이지요. 본 림에 상부의 명을 따르지 않은 수하는 필요 없어요.”
그러면서 북소연은 설강에 관해 확인된 상황을 알려주었다.
“빙궁의 후계자는 현재 지옥수로 가는 중이라더군요.”
“지옥수는 어디에 있소?”
“합비의 소호(巢湖)에 있어요. 지금쯤이면 회남에 도착했을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그녀 차례였다.
지옥혈림에서 이유 없이 도와줄 리가 만무했다.
“제 도움이 없었다면 위치를 쉽게 알아내지 못했을 테죠? 그럼, 그건 어떻게 됐나요?”
그녀가 묻는 것은 철갑에 대해서였다.
“기다리시오.”
“아직 찾지 못한 모양이군요.”
“열지 못한 것이오.”
“……그것을 지니고 있나요?”
“오는 길에 숨겨놓았소. 지옥혈림과 한바탕 하러 가는 길이니 계속 가지고 다닐 수 없겠더군.”
“사실인가요?”
믿음이 가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약속만큼은 절대로 어기지 않소.”
“……흠.”
북소연은 한 번 더 속는 듯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믿을밖에 방법이 없군요…… 한데 이대로 돌아가면 제가 상부에 보고할 내용이 없잖아요.”
“음…… 주기만 했다고 하면 좋아하지는 않겠군요.”
“제 체면도 생각해 주면 고맙겠어요.”
상황은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지옥혈림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들의 도움을 받고 무엇인가를 줘야 하는 상황이 우스웠다.
“저번에 손에 국화 문신이 그려져 있는 인물을 말하지 않았소?”
“그랬지요.”
“그가 누구인지 알았소.”
“누구인가요?”
“사마추. 무림맹의 이군사가 바로 그였소이다.”
무림맹에서 제법 영향력이 높은 인물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군사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놀랍네요. 무림맹 최고 인물이 변절자라니…… 혹시 무림맹주도 그 사실을 아나요?”
“아직 말을 안 했소.”
“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딱히 이유는 없소. 때가 되면 알려줘야겠지요.”
고진유의 대답은 애매했다.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혹시…… 무림맹주도 믿지 못하는 게 아닐까?’
고진유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괜찮지 않겠소?”
북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정보를 얻었네요. 고마워요.”
“그만 돌아가시오.”
“흐음, 우리 관계가 너무 사무적이지 않나요? 술은 바라지도 않지만 차라도 한 잔 준비해 줄 수 있을 텐데?”
“우리 관계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합니다. 차는 아래에서 드시고 가시오.”
“흥, 말이라도 고맙네요.”
북소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가려다 순간 멈칫했다.
“조심하세요.”
“말이라도 고맙소.”
스윽.
북소연이 객잔 아래로 내려가자,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사이에서 면사를 한 설미가 다가왔다.
“오라버니가 지옥혈림에 납치된 것이 맞군요.”
“급하게 됐소이다. 그를 납치한 흑귀들이 회남을 지나는 중이라 하는군요. 그곳에서 소호까지는 금방입니다.”
“우리도 빨리 가야 하지 않을까요?”
곽우가 나서며 대답했다.
“회남에서 잠시 머무른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지옥수에 도착하기 전에 그를 만났을 수 있었을 터.
“최대한 빨리 움직이도록 하죠. 하지만 지옥수에 들어가야 할지 모르니 미리 대비할 것 같습니다.”
“지옥수라…… 흑귀들이 제법 많이 있겠지?”
“두총 오라버니, 걱정 마세요. 저한테 좋은 물건들이 많아요. 쪽수는 전혀 상관없죠.”
“우, 우희야. 설마…… 또 그거야?”
그녀가 좋다는 물건은 하나밖에 없었다.
* * *
녹림의 이인자, 녹림대군.
중원 산적의 총 부두목이 바로 그였다.
가느다란 허리에 새하얀 피부, 하얀 치아 때문인지 붉은 입술이 더욱 진하게 보였다.
살랑.
비단으로 만든 백의가 바람에 날렸다.
“잘 놀고 있는데 귀찮게 하고 있어.”
녹림대존의 명에 의해 안휘성으로 들어섰다.
그의 표정은 어이가 없어 보였다.
‘세상에 독 형님을 상대로 협박하는 놈이 있다니.’
그놈이 바로 화산도협이라는 꼬맹이였다.
“소 아우, 일단 황금 오백 냥을 가지고 가서 그놈을 데리고 오게. 단 그냥 주지는 말고 자네를 이긴다는 조건하에.”
“황금 오백 냥을 주지 말라는 뜻이구려? 알겠소이다.”
“자신감이 있어 좋군.”
‘훗. 내가 지면 돈을 주라는 건 그냥 해본 소리일 테고. 혼쭐내서 그냥 데리고 오라는 뜻 아냐.’
녹림대군 소소경은 당연히 이길 것이라 자신했다.
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소문에 강한다고 한 것들은 전부 소문일 뿐.
겨우 약관에 든 인물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녹림대군님, 녹림조가 저기 하늘 위에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습니다.”
“후후, 드디어 잡았군.”
끼이이이-
녹림야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녹림조.’
녹림조의 정찰조에서 따라붙은 게 확실했다.
‘둘 중 하나겠군. 돈을 가지고 오든지, 아니면 나를 죽이든지.’
녹림야검은 심장이 뛰었다.
스윽.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고진유가 손을 들었다.
일행이 신호에 따라 곧바로 멈췄다.
“잠깐만 휴식하죠.”
“저것 때문에?”
장두총이 공중에 떠 있는 녹림조를 가리켰다.
새는 원을 그리며 계속 같은 자리에서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