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노을이 붉게 물든 시간.
비맹전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모양이지?’
고진유가 접객실로 들어서자, 비맹전에서 온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화산대사님을 처음 뵙소이다. 비맹전 부총관입니다.
비맹전 부총관 청윤.
둥근 얼굴에 코가 유난히 커 보였다.
“비맹전에서 무슨 일로 화산관까지 왔소이까?”
“이군사님께서 만나 뵙고 싶다는 전언이 계셨습니다.”
“지금 말이오? 늦은 시간에 가는 건 실례가 될 것 같은데, 내일 일찍 가도록 하겠소이다.”
“아닙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맹전까지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사건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남궁세가와 연관된 일이라 하셨소이다.”
“……알겠소이다. 잠시 밖에서 기다리면 바로 따라 나가겠소이다.”
청윤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고진유는 그를 따라나서기 전에 곽우를 찾았다.
그와 사전에 세워둔 계획.
“호민 사형, 부탁하겠어요.”
“걱정 마.”
곽우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충분히 자신 있었다.
화산대사의 접객실과 침실 주위로 완벽하게 진법을 설치했다.
고진유가 화산관을 나가면, 그들은 곧장 철갑을 찾기 위해 움직일 것이 확실했다.
묵경은 고진유가 홀로 비맹전에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
“별일 있겠습니까? 제가 비맹전에 간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잖아요.”
“마음이 안 놓여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고 오겠습니다.”
“조심해. 그가 주는 것은 함부로 먹지 말고.”
“네.”
문밖에서는 먼저 나간 부총관 청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 안 나오지?’
청윤이 고개를 들어 화산관 안으로 들여다보려는 그때, 문을 열고 고진유의 모습이 나타났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청윤은 바로 비맹전으로 향했다.
화산지를 벗어나는 그의 발걸음이 마치 도망치듯 빨랐다.
“급한 일이 있소? 천천히 걸어도 되지 않소이까?”
“아, 죄송합니다. 군사님께서 기다리실 것 같아서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빨리 움직여도 도착하는 시간은 별반 차이가 없소. 천천히 갑시다.”
“네에……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평소 걷는 속도보다 반 정도 늦게 걸음을 움직였다.
청윤은 느릿하게 걷는 걸음에 답답했다.
‘원래 이렇게 걷나? 아니면…….’
하지만 보기에는 고진유가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이 아니었다.
걷는 모양이 평소보다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비맹전까지 도착하려면 아직 반 정도 더 남았다.
혼자 걷는 걸음이라면 비맹전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청윤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대사님, 조금만 더 빨리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누가 쫓아오기라도 한답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흠, 알겠소이다. 보아하니 늦게 가면 부총관께서 곤란한 모양이군요. 조금 빨리 걷겠소이다.”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걸음 속도를 좀 더 올렸다.
그래도 별반 차이는 없었지만.
‘하, 진짜…… 화산대사만 아니었으면…….’
비맹전에서 화산관까지 빠르게 움직이면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휴우우우우.”
청윤은 크게 호흡을 했다.
“이런, 부총관께서 속이 답답한 모양이구려.”
“아, 아닙니다. 저곳만 지나면 비맹군의 영역에 도착합니다.”
“비맹전은 어디에 있소이까?”
“그곳 안에 있습니다.”
“알겠어요. 얼른 가시죠.”
* * *
비맹군은 이군사 사마추의 친위 세력이었다.
대외 활동을 목적으로 한 부서로, 전령과 명령을 무림팔군에 보내는 역할과 함께 살수의 특이한 임무를 담당했다.
비맹군의 영역에 들어서자 삼 층으로 된 건물이 나타났다.
‘저곳이군.’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크고 화려한 게 지어진 비맹전이 보였다.
입구까지 환하게 불이 길게 켜져 있었다.
그곳에 중년 사내가 나와 있었다.
“저분이 비맹전의 총관이십니다.”
“그렇군요.”
총관 범유.
새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스윽.
범유가 다가온 고진유를 향해 두 손을 올렸다.
그의 손도 얼굴만큼이나 새하얬다.
“화산대사, 처음 뵙겠소이다. 비맹전의 총관 범유라고 하외다.”
“고진유라고 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여기부터서는 청윤을 대신해서 제가 군사님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고진유는 청윤에 이어 범유를 따라 비맹전으로 들어섰다.
* * *
슥슥슥.
고진유가 비맹관으로 향하는 동안, 화산관으로 두 명의 복면인이 몰래 숨어들었다.
그들의 목표는 화산대사의 침실과 집무실.
그들은 이미 화산관의 건물 구조를 눈을 감아도 찾을 수 있도록 머릿속에 외워두었다.
어둠에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머뭇거리지 않았다.
각자 한 명씩 침실과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찾아야 물건은 철갑.
두 사람은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침실과 집무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곳을 뒤져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겨놓은 거지?’
숨길만 한 위치를 모두 살폈지만 철갑의 존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집무실에 갔던 복면인이 침실로 들어섰다.
[찾았나? 집무실에는 안 보여.]
[여기도 없다.]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 같군. 그만 철수하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겠다.]
다시금 철갑을 찾아보았지만 비슷한 상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찾았는데 안 보인다면 이곳엔 철갑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그들이 화산관을 물러나려는 순간,
우우우웅-
귓가에 진동 소리가 멍할 정도로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바닥과 사방의 벽, 그리고 천장까지 마치 녹아내리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아악!”
갑자기 바닥이 사라졌다.
털썩.
아래로 떨어지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복면인이 그 자리에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집무실에 있던 복면인 또한 같은 현상에 겪고 있었다.
핏! 핏! 핏! 핏!
이번에는 사방에서 빛이 쏟아지며 온몸을 찌르기 시작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수백 개의 광침이 몸을 통과했다.
그들의 정신은 이미 혼돈에 빠져들었다.
“으…… 윽…… 진법……?”
복면인은 점점 정신이 잃어가기 시작했다.
* * *
사마추는 신기한 시선으로 마주 앉은 고진유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이 상식을 벗어났다.
지옥도로 가는 배에서 살아남은 것부터 천운이 따르고 있었다.
이런 인물들을 잡기 위해서는 초장에 끝을 냈어야 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만일 그대로 놓아둔다면 나중에는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철갑인데…….’
천문전주 나하중의 뜻을 어길 수는 없었다.
철갑을 찾지 못한 이상 함부로 눈앞에 앉아 있는 고진유를 건드릴 수 없었다.
“무림맹 생활은 할 만한가?”
“딱히 어려운 건 없습니다.”
“다행히 체질에 맞는 모양이구려. 젊은 사람이 중원대사의 직책을 맡아 무림맹에서 가만히 지내기만 하면 심심할 텐데.”
“그래서인지 맹주님께서 일거리를 만들어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후후후. 본래 중원대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네.”
“상관없습니다. 무림맹에서 괜히 밥을 축내고 있는 게 미안해서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했습니다.”
“그대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다행이지만, 화산파의 장문인은 다르게 생각하지 않겠나? 황보세가의 말은 잘 듣는다고 말일세.”
“생각하기 나름이지 않겠습니까.”
사마추는 말끝마다 대답하는 고진유의 말투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본인에게 기분 나쁜 것이 있는가?”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듯해서 묻는 말이네.”
“물어봐서 대답한 것밖에 없습니다만…… 그게 싫으시다면 가만히 있겠습니다.”
사마추는 황당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앞에서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무조건 내뱉는 인물은 없었다.
“보아하니 그대 성격에 화산파에서 오래 생활하지도 못하겠군.”
“…….”
‘왜 말이 없지?’
바로 반박을 할 거라 예상했다.
“이런, 내 말이 맞는 모양이라 대답을 못 하는 모양이군.”
“…….”
고진유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화산대사, 지금 본인과 장난하는 것인가?”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답하면 말대꾸한다고 나무라고, 대답을 안 하면 장난하냐고 하시지 않습니까?”
“……하아.”
사마추는 그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상대하기 피곤한 부류의 인물이 틀림없었다.
“저를 오늘 만나고자 하신 이유가 뭡니까?”
“최근에 일어난 일 때문에 불렀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남궁한과 검황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네.”
“그들의 죽음과 제가 무슨 연관이 있다고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둘의 죽음에 화산파가 관련되었으니 행동에 신중을 기하라는 말일세.”
고진유는 피식 웃었다.
“왜 웃지?”
사마추는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짓는 고진유를 보면서 기분이 나빠졌다.
“굳이 비맹전까지 불러 말씀하시는 이유가 짐작 가지 않는군요. 하도 급하게 부르기에 큰일이 터졌나 했습니다. 이런 일이라면 굳이 비맹전까지 오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무림맹의 군사로서 재차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해했습니다.”
“화산파 일에 남궁세가의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조심했으면 하는 바이네.”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전과 달리 반박하지 않고 수긍하는 것이 이상했다.
“다른 말씀이 없으시다면 그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는가? 비맹전에 처음 오지 않았나. 차라도 한 잔 마시지 않고 간다면 섭섭하네.”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게. 차를 준비시키도록 하겠네.”
“아랫사람에게 시키지 않으시고 군사님께서 직접 하십니까?”
“차의 향기는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다고 하지. 다른 건 몰라도 차는 내가 직접 끓인다네.”
사마추는 일어난 뒤 밖으로 나갔다.
건너편 방으로 들어서자 부총관 청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송구…… 하옵니다. 실패했습니다.”
“녀석들은 어디에 있지?”
“…….”
청윤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게…… 화산관에 잡혔다고 합니다.”
“약은 놈. 함정을 팠군. 철갑을 훔치러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인가?”
상황이 곤란해졌다.
잡힌 수하들이 말을 하지 않을 것은 확신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를 일이 아닌가.
“구할 방법이 없겠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만일을 위해 대비해 두었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겠나?”
“그놈들이 비맹전 소속임을 아는 인물은 없습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게.”
“소신이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윤의 신형이 밖으로 사라졌다.
‘제 놈 사부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군.’
사마추는 차를 준비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많이 기다렸나?”
“아닙니다.”
“한 잔 마시게.”
그는 고진유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손등에 새겨진 국화 문신.
사부님의 사지를 자른 인물의 손이었다.
계속 보고 있자니, 참고 있던 인내심이 무너질 듯했다.
고진유는 시선을 돌려 떨어지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또르르르-
찻잔 가득 차가 채워지고, 상큼한 향이 올라왔다.
“차 향이 좋군요.”
고진유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 감도는 향과 맛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지만, 사부에 대한 생각에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앞으로 그대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하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인가?”
“사실 제가 무림인이 된 건 사부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사부를 죽인 지옥혈림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인가?”
“맞습니다. 제가 복수할 곳은 지옥혈림과…… 사실 한 곳이 더 있지요.”
사마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한 곳이 더 있다는 게 무슨 말인가?”
“지옥혈림에게 사부님을 넘긴 자들이 있더군요. 그곳을 극일천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극일천? 중원에 그런 곳이 있었나?”
“군사님께서도 모르시는 게 당연할 겁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이라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군.”
“지옥혈림과 극일천에게 복수하는 것이 앞으로 제가 할 일입니다.”
“그렇군. 제자라면 당연히 사부의 복수를 하는 게 맞지. 근데 그들이 왜 자네 사부를 죽였는지 알고 있는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처리할 문제라서요.”
“그런가…… 내가 혹시 도울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한 말이니, 본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부탁하게.”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탁하겠습니다.”
고진유는 찻잔에 든 차를 비웠다.
“좋은 차, 잘 마셨습니다.”
“한 잔 더 하지 않겠나?”
“아닙니다. 시간도 늦은 듯하니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추는 비맹전 밖까지 고진유를 직접 배웅했다.
한 걸음 앞서가는 고진유의 뒷모습이 보였다.
‘으음…….’
손만 뻗으면 당장에라도 죽일 수 있다.
‘전주님의 명을 어긴다면…….’
굳이 철갑을 찾을 필요는 없다.
이미 안에 어떠한 내용이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철갑에 든 비밀들이 중원에 알려지기 전에 전부 없애면 될 뿐이었다.
극일천의 힘이 삼 할 정도가 사라진다고 해도 화산도협을 잡는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추의 손이 꿈틀거렸다.
스윽.
그때, 앞서가던 고진유가 돌아서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끝까지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귀한 손님을 함부로 보낼 수 있나.저기 앞까지만 배웅하겠네.”
“아닙니다. 그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차 잘 마시고 갑니다.”
고진유는 짧게 포권을 한 뒤 빠른 걸음으로 비맹전을 나섰다.
‘이런…….’
사마추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멀리 사라지는 고진유의 뒷모습을 보면서 좋은 기회를 놓쳤음을 알았다.
뚝.
고진유는 비맹군의 영역을 빠져나온 뒤 걸음을 멈췄다.
비맹전에서 함께 나올 때, 뒤에서 순간 살기를 느꼈다.
“분명 나를 죽이려고 했어. 무림맹 한복판에서…… 대단한 사람이야.”
무림맹이라고 해서 살수를 뻗치지 않으리란 생각을 지워야 했다.
‘좋은 경험 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