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신주로 들어선 인양과 파숙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단번에 알아챘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주민들이 웅성거리면서 모여 있었다.
“파숙 형님, 마을에 일이 생겼나 봅니다.”
“우선 무슨 일인지 알아보자.”
파숙은 주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이보게. 잠시 실례하겠네.”
사각형의 턱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사내가 돌아섰다.
“뭐, 뭐요?”
“마을에 사고가 생겼나?”
사내는 파숙의 모습을 살폈다.
마을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외지에서 왔소?”
“그렇네.”
“어제저녁에 마을에 불이 났소. 거의 십여 채가 완전히 탔소이다.”
“이런…… 큰일이 났었군. 사람들은 괜찮은가?”
“불이 번진 집들은 재빨리 피해서 괜찮은데, 처음 불난 집에서 한 명이 죽었다더군.”
“쯔쯔…… 안됐군. 그래도 피해가 적어 그나마 천만다행이지 않은가.”
“그렇긴 한데…… 죽은 자가 먼 곳에서 일하러 온 목수라서 안타깝소이다.”
‘목수?’
파숙은 느낌이 이상했다.
“방금 목수라고 했소? 혹시 사당에서 일하는 이춘광이라는 사람이 맞는가?”
“어떻게 알았소? 그 사람을 아시오?”
‘제기랄…….’
휘익!
파숙이 돌아섰다.
“인양아, 큰일 났다. 마을에 불이 났는데 죽은 사람이 이춘광이라고 하는구나.”
“……!”
어딜 가더라도 간간이 화재는 일어나게 마련이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우연히 불이 난 사고인지 확인해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가서 알아보죠.”
“그렇게 하자.”
두 사람은 화재가 난 현장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화재 현장이 가까워지면서 코를 찌르는 냄새가 강해졌다.
웅성웅성.
많은 사람들이 화재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파숙과 인양은 그들 사이에 들어가서 현장을 살폈다.
시커멓게 탄 집들의 흔적들 사이에서 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저어…… 아주머니, 불이 어떻게 났어요?”
중년 여인이 옆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젊은 총각은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닌가 봐?”
“네에, 지나가는 길에 큰불이 났다고 해서요.”
스윽.
그녀는 손을 들어 불에 탄 집 중 한 집을 가리켰다.
“어제저녁에 웬 두 놈이 저기 보이는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하더라구.”
“방화라고요? 정말인가요?”
“옆집에 사는 오씨라고, 볼일을 보다 문틈으로 봐버렸다지 뭐냐. 어두워서 얼굴은 못 봤는데, 확실히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고 했어.”
“사람은 죽지 않았나요?”
“안 그래도 딱 그 집에서 죽은 시신이 나왔어. 마을 사당을 짓는 목수인데, 타지에서 온 사람이라 불쌍해.”
“그러게요. 멀리서 일하러 왔는데 사고를 당하다니…….”
인양과 파숙은 곧 구경꾼들 사이에서 슬쩍 물러났다.
대목장 이춘광이 죽었다.
“황당하군.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는 두 놈이 수상해요. 사람들만 없어도 조사하면 뭐라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저벅저벅.
마침 사고 현장에서 병사들과 포쾌들이 조사를 마친 뒤 나오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파숙의 눈이 빛났다.
“잠시만 기다려 봐.”
파숙이 다가서더니 손가락으로 포쾌들만의 수신호를 보냈다.
단번에 그들 중 한 명이 반응을 보였다.
“전직이시오?”
“하하, 하남에서 포쾌 생활을 했네.”
포쾌란 직업은 힘든 생활이었기에, 그만두었다고 해도 동료들끼리 서로 도울 일이 있으면 항상 도움을 주는 편이었다.
“이 멀리까지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저기 불에 탄 인물에게 볼일이 있어 만나러 온 참이었어.”
“역시. 하남에서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나쁜 짓을 한 인물이 맞군요.”
‘나쁜 짓이라고?’
첫 마디부터 이춘광이 나쁜 짓을 했을 거라니?
단순하게 죽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쁜 짓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에게 물어볼 게 있어 찾아온 걸세.”
포쾌는 눈치를 본 뒤 파숙의 얼굴 가까이 다가섰다.
“불에 타기 전에 목을 찔린 검상이 보였습니다.”
“살인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불은 그 뒤에 살인을 감추기 위해 지른 듯했습니다.”
“……그렇군. 고맙네. 자자, 여기…… 나중에 동료들과 술이나 한잔들 하시게나.”
포쾌는 무심결에 받은 은전 한 냥을 들고 멍해졌다.
“너무…… 큰…… 돈…….”
“어허, 그냥 받게. 우린 영원한 포쾌이지 않는가.”
“고, 고맙습니다, 선배님. 혹시 제가 더 도울 일이 있습니까?”
“충분함세. 얼른 들어가 보게.”
병사들과 포쾌들이 돌아가자 화재 현장에 모여 있던 주민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
“전문가 솜씨는 아닌 것 같다.”
파숙은 포쾌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우를 서너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 우발적으로 죽인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다급히 불을 지른 거야.”
“그 두 사람은 누구일까요?”
“대체로 이런 경우는 가까운 놈들이 범인이지.”
“대목장은 사람에게 원한을 살 정도로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던데요?”
이춘광을 조사하면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는 악한 인간은 아니었다.
“사람이 악하지 않다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지.”
“돈이군요.”
“평판 중에 구두쇠란 소리가 있지 않았더냐.”
“음…… 그럼 그가 일하던 사당으로 가볼까요?”
파숙과 인양은 지나가는 주민에게 사당 짓는 곳이 어디인지 물어본 뒤 곧장 현장으로 향했다.
* * *
추당과 광동은 불을 지른 후 곧바로 마을을 떠났다.
이춘광에게 빼앗은 목상자 안에는 두 사람이 몇 년 동안 놀고먹어도 충분한 돈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뱃길을 이용해 사천으로 가기로 했다.
포구에서 배가 떠나자 요동치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하아…… 이제 살 것 같네.”
“그러게 말일세.”
두 사람은 난간에 멍하니 앉았다.
하루 만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추당은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았다.
이춘광의 피가 아직도 벌겋게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젠장…… 이게 뭐라고?’
그는 천에 싸여 있는 철갑을 꼭 안았다.
포구로 오는 길에 몇 번이나 열어보려고 했지만 열쇠 없이는 열 수 없는 모양이었다.
‘분명 안에 엄청난 보물이 들어 있는 거야.’
추당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이건 나 혼자…….’
옆에 앉은 광동은 저녁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인지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이보게, 한숨 자라고. 도착하려면 한 시진이나 더 남았어.”
“……그럴까?”
눈만 감으면 잠이 쏟아질 듯했다.
광동은 결국 목상자를 꼭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툭.
주변의 공기가 부산하게 움직이며 그의 발을 건드렸다.
“어…… 어…… 도착했는가?”
광동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응?”
손이 허전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눈이 번쩍 뜨였다.
‘없…… 어…… 목상자가 없어!!’
휙!
‘이놈이……!!’
추당도 보이지 않았다.
‘몽땅 혼자 차지하려고……!! 설마 방금 지나친 포구에 몰래 내린 거……!’
배는 포구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풍덩!!
광동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강에 뛰어들었다.
웅성웅성.
배 안에서 있던 사람들이 놀라 포구로 헤엄치는 그를 가리키며 웅성였다.
‘크크크…… 멍청한 놈.’
그들 사이에서 추당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광동, 잘 가라.”
추당의 양손에는 묵직한 상자들이 들려 있었다.
* * *
남궁무명은 눈을 뜬 채로 침상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흑룡전으로 가 남궁한의 방을 조사했다.
그리고 그의 시신까지 확인한 뒤 남궁관으로 돌아왔다.
‘화산도협이 말한 대로 화산파의 내공은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
범인이 익숙하지 않은 화산파의 내공으로 그를 죽인 게 문제였다.
또한 남궁한의 방과 시신에는 살수에게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범인은 가까운 사람이거나 안면이 있는 자다.’
그는 남궁한의 성격을 잘 알았다.
남궁세가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강한 녀석이라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
‘만일 본 가의 인물이 범인이라면 남궁한을 죽일 이유가 있어야 해.’
남궁한은 본 가에서 큰 영향력은 없었다. 세가주의 지위에 올라서기에도 순번이 너무 낮았다. 그의 위로 네 명의 형제들이 존재했으니까.
남궁한 스스로도 세가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권력 다툼이 아니라면…… 대체 동기가 뭘까.’
굳이 꼽자면 한 가지 이유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화산파와 본 가 사이에 문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인가?”
그의 죽음을 발단 삼아 화산파와 남궁세가 사이에 전쟁을 일으킬 목적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문파의 싸움으로 이익을 보는 곳은 어디인가?
‘사파? 아니…… 화산과 본 가는 그 정도에 함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야. 정말로 움직이면 멸문까지 고려해야 하니까.’
그가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부의 세력이 개입됐다는 말이군.”
남궁무명은 사건과 화산파가 연관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를 만나봐야겠군.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때, 문밖에서 남궁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드르륵-
남궁강과 함께 십여 명이 함께 들어섰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긴장한 채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군.’
심상치 않은 분위기.
“세가에서 연락이 왔네.”
“…….”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세가로 복귀하라는 명일세.”
“어느 분께서 연락을 보내신 것입니까?”
“부가주께서 명을 내렸네.”
남궁무명의 표정은 담담했다.
부가주, 그는 남궁천문의 앞에서는 좋은 사람처럼 행동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 사실은 세가의 사람 중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호천수호대는 세가주의 명만을 받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나 부가주께서 자네의 직위를 해제시켰어.”
“호천수호대주의 직위는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닐세. 세가에서 비상대책위가 발족되었어. 당분간은 비대위의 결정대로 돌아갈 거야. 그만 돌아가서 무림맹으로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게.”
“…….”
남궁무명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만일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난 그대가 돌아갈 것이라 믿네. 비대위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알지 않은가.”
남궁무명은 알고 있었다.
복귀하라는 명이 주는 의미.
비대위의 결정을 무시하는 순간, 그가 세가주가 죽음에 연관이 있다고 판단할 것이었다.
“숙부님께서도 제가 아버님을 죽였다고 보십니까?”
“아니다. 하지만…… 세가의 뜻을 어길 수는 없지 않으냐?”
그의 말이 맞았다.
결국 남궁세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그 전에 화산관에 한 번 다녀오도록 해주십시오.”
“화산관에는 왜?”
“화산도협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남궁한을 이겼다는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이라면…… 알겠다. 다녀오도록 해라.”
남궁지를 나선 남궁무명의 가슴이 무거웠다.
‘……웃기는군.’
남궁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의 주위를 몰래 따르는 기척.
‘내가 세가의 감시를 받게 되는 날이 오다니.’
화산지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화신지의 입구가 나타난 순간,
스르르-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야야압!!”
군성창이 검을 내리치자 강한 힘이 느껴졌다.
콰아아앙!!
견대창이 떨어지는 검을 노려보며 끝까지 막아냈다.
화산관이 울릴 만큼 커다란 소리가 터졌다.
그들의 매화육검에서 나온 위력은 이십사수매화검법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헐, 속가에서 익히기에 너무 강한 무공 아냐?”
“호정 사제가 창안했으니 당연하긴 하다만…….”
장두철의 말에, 우종성도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중원에 매화육검이 함부로 나돌아 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하, 오히려 더 좋지 않습니까? 속가의 힘이 강하면 중원 무림은 본 문을 더욱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에 비무를 구경하던 사형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이이익-
바람이 불어왔다.
고진유는 고개를 돌려 바람 속에 깃든 기척을 느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스으윽.
그 순간, 남궁무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존재를 들킨 적이 없었다.
“……그대가 화산도협인가?”
“남궁세가의 내력이군요.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소이다.”
남궁무명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고진유 또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궁지에 이런 인물이 있었나?’
남궁무명의 신형에서 뿜어져 나온 기는 과연 주위를 압도할 정도였다.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직접 보고 싶었소. 확실히…… 그동안 본 가의 무인들을 모두 이길 만한 실력이 맞군요.”
“칭찬이라면 고맙소이다.”
고진유를 보는 순간 알았다. 남궁한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를 이기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세가에서 이자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몇 없겠어.’
남궁무명이 고진유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화산도협,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말해보시오.”
“남궁한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모르오.”
고진유의 대답은 간단했다.
“가벼이 답한 것은 아니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오. 우리 또한 범인을 찾아내고 싶은 마찬가지니, 알게 되면 연락을 주겠소이다. 이제 그대의 신분을 알고 싶소만.”
“……얼마 전까지 호천수호대주를 맡은 남궁무영이오.”
“이제는 아니라는 말이군요.”
“천살지인에게 돌아가신 가주님의 곁을 지키지 못해 자리를 내려놓게 되었소.”
그의 말이 끝나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소.”
“그대의 말대로 몸이 고생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자책감은 참기 힘들더군. 하지만 어쩌겠소. 천살지인을 내 손으로 죽일 때까지 죽을 수 없소이다.”
“행운을 빌겠소.”
이미 천살지인이 화산파 제자라는 소문이 온 중원에 나돌고 있었다.
화산관에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천살지인의 신분을 알고 있지 않소? 내 말이 달갑지 않을 터인데.”
“본 문과 천살지인을 연관시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매정하군. 그는 화산파의 제자이자 화산제일검으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던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소. 조만간 본 문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이외다.”
남궁무명은 그 순간 오해를 했다.
화산파에서 그를 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망이군. 대명문이라는 화산에서 사람을 쉽게 버리다니.”
“오해를 하는 모양이오. 우린 그분을 버리지 않소이다.”
“화산이 그를 버리든 아니든 달라지는 건 없을 거요. 내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원수를 갚을 것이니.”
남궁무명의 뜻이 강렬했다.
“대주로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책임감 때문이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버지는 절대 죽지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라 하셨소?”
“그렇소.”
“……그렇군요. 그대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본분을 다하면 됩니다.”
고진유는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자식의 도리로 검황 남궁천문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이…… 사부 오청석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