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남궁지로 다가서는 청년의 모습.
멀리서도 느껴질 만큼 넓은 어깨에 당당한 체격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가 강렬했다.
청년을 맞이하는 두 명의 위사는 이미 기세에 눌린 탓인지 조심스러웠다.
“잠깐…… 만 멈추시오. 어디에서 오셨소?”
스윽.
청년은 대답 대신 손바닥 안에 신패가 보이도록 올렸다.
‘헉…… 호천수호대주……?’
둥근 모양의 물건은 직위와 이름이 새겨진 남궁세가의 신패였다.
척.
위사는 몸을 곧바르게 세웠다.
“호천수호대주님을 뵙습니다!”
“안에 들어가도 되겠는가?”
남궁무명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무림맹으로 오는 동안, 그는 수없이 울었다.
호천수호대주로서 가주이자 아버지의 안위를 지켜야 했는데.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어.’
남궁무명은 끝없이 자책하며 세가로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마지막 명을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그 끔찍한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뒤, 온 중원에 살수의 정체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천살지인…… 네놈의 목은 꼭 내 손으로 벨 것이다.’
남궁무명은 위사를 따라 남궁관으로 들어갔다.
이미 한발 빠르게 남궁대사 남궁강에게 보고가 전해졌다.
“뭣이? 호천수호대주가 왔다고?”
본 세가에서 호천수호대주에 대한 긴급수배령을 받은 상황이다.
“설마 무림맹에 나타날 줄은…… 무슨 일로 왔는지 만나 봐야겠군.”
호천수호대주가 그날 왜 검황의 곁에 없었는지 그 또한 궁금했다.
남궁강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 * *
“저기 오는군.”
남궁관으로 들어선 남궁무명.
‘흠…… 닮긴 닮았어.’
마치 검황의 젊은 시절과 마주친 듯했다.
검황 남궁천문이 그를 아꼈던 이유.
혼외자식이임에도 세가의 어느 아들보다 그를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무공뿐 아니라 감각 또한 타고났지…….’
남궁무명은 특히 비무 중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세가 안에서는 검황의 무공조차 약점을 파악하여 비무를 겨루었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
남궁무명이 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남궁강 숙부님을 뵙습니다.”
“대주, 어서 오시게.”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든 남궁무명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얼굴이…….’
잠시 울다 만 얼굴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눈물을 흘린 흔적이 틀림없었다.
그가 왜 울었는지 모를 리 없었다.
“휴우…… 서로 할 말이 많겠지만 우선 안으로 들어가세나.”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남궁무명의 목소리가 착잡했다.
일각 후.
접객실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중 먼저 남궁강이 말문을 열었다.
“소식은 들었겠지?”
“…….”
“안타까운 일이다. 중원에 검황이신 그분을 죽일 수 있는 살수가 존재할 줄은…….”
“제가…… 그분의 곁에 있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왜 자리를 비웠지?”
“……남궁한의 죽음에 관한 보고를 받은 뒤 무척 노하셨습니다.”
“하…… 당연히 그랬겠지. 아버지로서 화가 날 수밖에.”
“그분께서는 직접 범인을 찾아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럼 가주께서 자네를 직접 보내셨단 말이더냐?”
“……중원무림에 감히 검황을 기습할 수 있는 살수가 있겠냐면서…….”
“……그렇긴…… 하지. 설마 천살지인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느냐…….”
“그들은 제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발톱을 드러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남궁무명의 표정이 자책감으로 물들었다.
“대주의 말이 맞는 것 같군. 곁에 대주가 있었다면 천살지인이라도 나타나지 않았겠지. 놈들은 분명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게야.”
“천살지인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제 검으로 목을 벨 것입니다.”
남궁무명의 살기가 순간적으로 뻗어 나갔다.
숨 막힐 듯한 살기에 남궁강은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듯했다.
‘허어…… 과연…….’
죽은 남궁한의 무공도 분명 강했다.
차기 검황의 뒤를 이을 귀재라 칭송받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무명에 비하면 한은 그저 작은 반딧불이었군.’
남궁강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대주, 혹시 천살지인의 정체에 대해서 아는가?”
“얼핏 들었습니다만 화산제일검이라 한 것 같습니다.”
“맞네. 천살지인의 정체는 화산제일검 독소응이지.”
“남궁한도…… 화산도협과 싸운 뒤 살인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들었네. 비록 화산파에서 죽인 것은 아니지만, 화산파의 제자들과 연관이 없는 건 아니야.”
“……화산도협, 우선 그자를 만나볼 생각입니다.”
“그와 싸우겠다는 말인가?”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겠지요. 하지만 일단…… 남궁한의 죽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게. 아…… 미리 그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그자는 일반적인 사람은 아닐세.”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남궁무명도 화산도협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어 잘 알았다.
잠시 그를 보던 남궁강은 이른 아침에 받은 전서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아직 그는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대주, 본 세가에서 대주에게 긴급수배령을 내린 사실을 아는가?”
“…….”
남궁무명의 눈빛에 의아함이 서렸다.
긴급수배령이란 큰 잘못을 한 죄인을 잡는 일이 아닌가.
“제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잘못이라기보다는, 세가에 있는 분들도 대주의 상황을 모르고 있는 모양일세. 세가주가 죽은 마당에 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호천수호대주가 보이지 않았다면 전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
“우선 어떻게 된 일인지 세가에 대충 연락을 하겠네. 대주는 연락이 올 때까지 여기서 지내도록 하게. 어차피 남궁한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숙부님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내 뜻을 따라 준다고 하니 고맙네. 먼 길에 왔을 텐데 좀 쉬게나.”
“아닙니다. 여기 일을 마무리 짓고 빨리 본 세가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남궁한이 지냈던 방부터 조사하고 싶습니다.”
“……그래, 알겠네. 흑룡전에 가면 알려줄 걸세. 혼자 가지 말고 나와 함께 같이 가세나. 잠시만 기다려 주게.”
남궁강은 얼른 집무실로 돌아가 남궁세가에 급히 연락을 띄웠다.
* * *
덜컹!
화산관의 문이 벌컥 열리며 제갈양이 들어섰다.
“잘들 잤어?”
갑작스럽게 들어온 그를 보며 눈만 깜빡거릴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묵경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제갈 형이 꼭두새벽부터 여긴 무슨 일이오?”
“어허, 밖에 해가 중천에 떴다. 그리고 묵경, 내가 못 올 곳에 온 것처럼 말하는군. 나 갈까?”
제갈양이 눈에 힘을 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시간이 빠르지 않소? 원랜 이 시간까지 잠만 잘 자던 사람이?”
“그건 옛날이고. 현재 본인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털썩.
제갈양은 마치 자신의 집처럼 안으로 들어오더니 편하게 앉았다.
“아이고, 이제야 마음이 편안해지네.”
남의 집에서 거의 눕다시피 하는 제갈양을 보며 묵경이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딱 보니 각이 나오는구만.”
“뭐가, 인마.”
제갈양은 옆으로 누운 채 고개만 묵경을 향해 돌렸다.
“형처럼 자유롭게 지내는 사람이 제갈관에서 지내려니 불편했던 게지. 제갈대사께서 그 유명한 철냉선생(鐵冷先生)이 아니오.”
“……뭐어…… 그런 것도 없다고 할 수는 없지…….”
드륵.
그때, 문이 열리며 고진유가 나왔다.
제갈양은 반쯤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화산관의 수장이며 대사였다.
“오셨습니까?”
“대사, 일찍부터 미안하게 되었소. 내가 괜히 깨웠소이까?”
“아닙니다. 일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하하하! 역시, 화산도협의 넓은 아량은 천하를 담을 수 있다니깐.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지.”
“제갈 형, 여기서 잠깐만.”
“또 왜?”
“방금 함께하고 싶다는 말. 계속 우리 곁에서 지내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크크,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은. 맞다. 그런 의미야.”
[설마 그건 아니겠지?]
묵경은 미소를 띠며 제갈양에게 전음을 보냈다.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난 것이다.
“내 꿈이 뭔지 알지?”
“편히 죽는 거?”
“이 자식이 죽고 싶냐?”
“농담이오. 근데 뭐였더라?”
“이 자식이…… 난 말이야. 대대로 제갈세가의 어르신들께서 하신 것처럼 천하제일인 옆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게 꿈이다.”
[기억하고 있군.]
곧바로 그의 전음이 돌아왔다.
‘뭐…… 나쁘진 않지. 제갈 형이 곁에서 도움을 준다면. 다만…….’
제갈양의 능력이 뛰어남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현 무림에선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
“제갈 형이 정말 같이 지내고 싶은 모양인데?”
“방도 많으니 상관없습니다만, 사형들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화산관의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면 전 괜찮아요.”
묵경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제갈양을 돌아보았다.
“들었소? 화산관의 전 인원이 찬성해야 한다는데? 물론 나도 포함해서. 아하하!”
“너 웃음이 이상하다?”
“그런가? 난 정상적으로 웃고 있지 않은가?”
“……하여튼 네놈 반대하기만 해봐라.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지?”
“어라, 제갈 형. 지금 이거 협박이오? 이러면 곤란하지 않으려나?”
* * *
반 시진 후.
화산관 전 인원이 아침 식사 자리에 모였다.
“자아, 제갈양 대협께서 화산관에 쭈욱 함께 있어도 괜찮은지에 대한 찬반 투표가 끝났습니다!”
철저하게 이뤄진 비밀 투표.
잠시 후, 당우희 입에서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다.
“열세 표 중 가(可)는 한 표! 부(否)는 열 표! 그리고 기권 두 표가 나왔습니다.”
“……!!”
제갈양은 참담한 결과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소, 형. 다들 형을 잘 몰라서 그렇지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요.”
“됐다. 이 치사한 놈.”
“아 왜? 난 찬성했는데?”
“여인 글씨체잖아!”
“봤어? 그렇구나. 미안. 다음엔 찬성해 줄게.”
어깨에 올라간 묵경의 손을 툭 떨어뜨린 제갈양이 밖으로 나갔다.
묵경이 따라가며 물었다.
“아침 안 먹고 가려고?”
“…….”
저놈의 잘생긴 얼굴이 밉살스럽게 보였다.
화산관이 아니라면 바로 주먹부터 나갔을 거다.
“하긴 밥이 넘어가지 않겠구만. 내가 배웅해 줄까?”
“됐어, 인마. 오늘은 그만 물러간다. 내가 포기를 모르는 상남자인 거 알지?”
“어…… 그래. 그럼 멀리 안 나갈게. 잘 가슈, 형.”
망할 자식이다.
“하아…….”
제갈양은 크게 한숨을 쉬고 어깨가 축 늘어진 채 힘없이 화산관을 나섰다.
“괜히 미안하네요.”
묵경의 뒤로 고진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왔어?”
“방금요.”
“제갈 형이 능력은 진짜 뛰어나긴 한데, 역시 당장은 안 되겠지?”
“아직 그를 모르니까요. 당분간은 우리들끼리 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게 말이다. 배고프다. 들어가자.”
고진유와 묵경은 안으로 들어섰다.
사형제들은 이미 한창 식사 중이었다.
당우희가 묵경을 보며 물었다.
“갔어요?”
“혹시 우희가 찬성한 거야?”
“네, 묵경 오빠.”
“왜?”
“찬성이 한 명도 없을 것 같아서요.”
“아하, 착하네.”
“어머나, 난 기권했는데.”
연자련도 전부 반대가 나오면 어쩌나 고민하다가 기권으로 표를 냈다.
“호정 사제, 본 문에서 연락이 왔어.”
“아, 무슨 내용인가요?”
연자련은 서신을 꺼낸 뒤 간략하게 읽었다.
“장문인께서 중원 무림에 허민 사숙님에 대한 견해를 밝히시겠다고 하셨어. 요약하면 ‘화산제일검 독소응은 영원히 화산파의 제자이다. 하지만 천살지인은 허민 사숙님이 아닌, 혈사천의 인물이니 그와 관련된 사건들은 화산파와 별개의 일이다’.”
“맞는 말씀이시군요.”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화산파를 위한다면 분명 그와 이어진 선을 잘라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장문인은 그를 내치지 않고 안았다.
그만큼 화산파는 중원을 상대로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장두총이 입에 음식을 넣은 채 말했다.
“장문인께서 엄청나게 세게 나오시는구만.”
“음. 중원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군.”
“아마 호정 사제의 영향으로 자신감이 생기신 것 같구나.”
우종성은 확신했다.
화산파는 예나 지금이나 약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문파와 달리, 오랫동안 화산을 대표할 만한 존재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호진 사형의 말이 맞아. 장문인께서 자신감을 가진 이유는 호정 사제가 있기 때문이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고.”
“사제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일들은 알고 보면 사실 엄청난 사건들이야.”
당우희와 곽우가 거들었다.
“야월문을 박살 냈고, 중원상국과 연관된 사건들이 알려졌고, 종남파와 붙어 이겼고, 부혈당 사건뿐 아니라 녹림과의 혈전, 형산파도 눌러 버렸고…… 대충만 해도 이 정도니까.”
“후후후. 이렇게 보니 호정이 사고를 많이 쳤구나.”
직접 나열해 보니 결코 적은 일들이 아니었다.
“이러니 장문인께서 자신감이 생기지 않으실까?”
짧은 시간에 중원 무림에서 이보다 큰 행적을 남긴 무인은 없을 것이었다.
“아침부터 제 자랑을 해주시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걸요.”
“다른 것을 떠나 중원 무림은 앞으로 화산파라는 이름을 절대로 무시하지 못해.”
우종성의 목소리에도 힘이 붙어 있었다.
사형제와 대화를 나누며 식사하는 고진유의 표정이 환했다.
‘이 녀석이…… 우리의 사제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