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남궁한의 시신은 침상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네 사람.
남궁진과 남궁강, 그리고 고진유과 묵경을 제외하고는 전부 밖에서 기다리면서 안을 주시했다.
고진유는 방에 들어온 뒤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보시오! 살수의 흔적이 있소이까?”
“조용히 하시지요. 고인이 계시지 않소이까.”
남궁진의 거친 목소리에도 고진유는 신경 쓰지 않았다.
“허어, 뭣이라?”
남궁진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처억.
그의 어깨를 남궁강이 얼른 잡았다.
“잠시 조용히 하게.”
“형님!”
“어떻게 하는지 보고 결정해도 되지 않아. 수장이 너무 흥분하면 좋지 않다.”
“하아…… 알겠습니다.”
남궁진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실례가 안 된다면 시신의 팔을 만져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오.”
남궁강이 고개를 끄덕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외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내상이거나 독상일 수도 있겠지.’
스으윽.
남궁한의 육신은 차가웠지만, 몸속의 내부는 아직 굳어지지 않았다.
‘아직 죽은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았어.’
팔을 통해 남궁한의 몸을 살펴보았다.
‘몸속에 독기는 전혀 없어. 독상은 아니야.’
남궁한의 혈맥을 따라 고진유의 기가 움직였다.
그리고 심장에서 멈추었다.
‘그가 말한 대로 심장에 충격을 받았구나.’
익숙한 기가 틀림없었다.
화산파의 제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기본적인 내력.
고진유의 콧등에 미세한 주름이 생겼다.
‘화산파의 무공으로 죽은 건 맞군…… 하지만 화산파의 인물이 죽였다고는 확신할 수 없어.’
고진유는 다시금 인상을 편 뒤 남궁한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침상에서 돌아서며 남궁진과 남궁강을 마주 보았다.
“모두 확인했습니다.”
“…….”
“고인의 사인(死因)은 심장에 충격을 받은 게 맞소이다.”
“우리도 그것은 알고 있소! 대사 그대의 입으로 남궁한의 심장에 충격을 가한 내력을 직접 말해보게.”
“심장에 남아 있는 내력은 화산파의 내공인 매화기입니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우종성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사제, 그게 정말인가?”
“네, 호진 사형. 확인했습니다.”
“그 말의 진의는…… 정말로 비무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는 말이더냐?”
“사인은 화산파의 진기가 맞습니다. 하지만 원인이 비무는 아닙니다.”
그 말에 남궁진이 버럭 화를 냈다.
“화산대사! 분명 그대의 입으로 화산파의 진기가 맞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비무 중에 죽은 게 아니라니 발뼘을 하겠다는 것인가? 남궁세가를 하찮게 보는 것이 아니오?”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입에서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고진유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두 분은 비무를 보셨습니까?”
“봤다. 두 눈으로 똑바로.”
“그렇다면 잘 아시겠군요. 고인이 제게 어떻게 졌는지 모르십니까?”
“그게 무슨…….”
“검기였다면 고인의 심장을 단숨에 통과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즉사란 말입니다.”
“……!”
‘하아…….’
남궁강은 탄식이 나왔다.
‘바보같이…….’
남궁한의 죽음에 흥분한 탓에 너무나 간단한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하나 남궁강과 달리 남궁진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궁한의 심장에 남아 있는 매화진기는 무엇이냐? 화산파에서 몰래 들어와서 죽이고 간 게 틀림없다.”
“군장님, 바로 직전 목숨을 걸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살수가 절대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한 지 일각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남궁진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하지만 다시 고진유를 향해 소리쳤다.
“혹시나 우리가 실수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화산파에서 아니라는 증거는 없지 않느냐?”
사형제들 중 가장 냉정하다는 혁자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를 의심한다면 증거는 그대들이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오?”
“이놈들이…… 어디서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느냐?!”
“당신이 먼저 우리를 의심했소이다.”
혁자영은 한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고진유가 나섰다.
“호중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본 문인 화산파를 협박하고 싶다면 증거는 남궁세가에서 찾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은 내가 찾아드리지요.”
남궁강의 눈이 커졌다.
“증거를 찾아주겠다? 화산대사,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고진유를 향해 모든 시선들이 집중됐다.
그가 남궁세가의 인물들을 보며 물었다.
“우선, 고인의 죽은 시간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의원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시신의 굳은 것을 봐서 미시(未時)라 보인다더군. 우리도 그 정도로 보고 있지.”
“맞습니다. 사인의 시간은 오시에서 미시 사이입니다. 그때 화산파의 사형들께서는 어디에 계신 줄 아십니까? 비무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대광장에…… 있었다는 말인가?”
“한 명도 빠짐없이, 다섯 명의 특사들까지 무림대광장에서 비무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증인들이 확인을 해줄 것입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하네. 하지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지 않았나?”
“전 여기 묵경 형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건 둘이서 짰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묵경이 곧바로 반응을 보일 뻔했지만, 고진유가 손을 뻗어 막았다.
“남궁세가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요. 화산관에 돌아간 뒤 우릴 만난 사람도 없으니 믿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스윽.
고진유는 손을 내밀었다.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 손을 잡고 진기를 확인해 보십시오.”
“……!”
남궁강은 고진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무인마다 같은 내공을 익혀도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그 또한 알았다.
고진유의 손을 잡은 뒤 내력을 확인했다.
곧바로 남궁강의 눈이 커졌다.
‘이건…… 매화진기가 아니다. 아니, 매화진기는 맞지만…….’
남궁세가의 무인들과 싸워 이긴 이유를 알았다.
‘매화에…… 무종(武宗)의 기운이 들어 있어.’
무인에게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오랜만이었다.
남궁세가주이며 천하오무의 검황인 남궁천문에게 느꼈던 감정이 올라왔다.
“……미안하게 됐소.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시끄럽게 해서 실례했소이다.”
“혀, 형님.”
남궁진은 한발 물러난 남궁강의 모습에 당황했다.
“아닙니다. 저 또한 이런 상황이었다면 남궁대사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남궁강과 달리 남궁진은 여전히 승복할 수 없었다.
“화산대사, 그대가 아니라고 해도 화산파의 내력이 사인이지 않소? 이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고인의 심장에 가해진 매화진기는 누구든지 흉내내어 펼칠 수 있습니다.”
“하, 흉내를 낼 수 있을 만큼 화산파의 무공이 하찮은 모양인가 보지?”
“말을 함부로 하시는군요.”
휘리리릭!
고진유는 손을 뻗어 남궁진의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앞으로 검을 뻗었다.
‘허억.’
검을 빼앗긴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크게 놀란 이유가 있었다.
고진유가 펼친 단순한 동작에 남궁진의 눈이 커다래졌다.
섬전기에 의한 일검.
“이걸…… 어디서 익혔느냐?”
“따로 익히지 않았습니다. 제법 그럴듯하게 보인 모양이군요. 남궁한과 서너 번 싸우면서 본 걸로 흉내를 냈는데.”
“…….”
남궁진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그의 비웃음이 그대로 되돌온 셈이었다.
“이제 된 듯하니 전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인을 죽인 살수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고진유는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그들 앞으로 지나갔다.
우종성과 혁자영은 당당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는 고진유의 뒷모습을 보았다.
‘세상에 이보다 든든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짜릿한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당우희와 연자련도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사저들. 가시죠.”
“가자!”
고진유의 곁으로 바짝 붙어선 당우희의 발걸음이 총총 뛰는 듯 가벼웠다.
그 뒤를 장두총과 곽우가 뿌듯한 얼굴로 따랐다.
“저런 녀석을 내가 이기겠다고 발광한 게 이젠 웃기는구만.”
“후후, 그런 면에서 보면 호경, 너도 대단해.”
* * *
흑룡전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림맹 전체로 알려지면서 화산대사 고진유에 대한 명성은 한층 더 올라섰다.
“허어…… 자꾸 일이 엉뚱하게 흘러가는군.”
이군사 사마추는 보던 서책을 덮고 옆으로 흘러내린 흑발을 뒤로 넘겼다.
그의 앞에는 신무선단을 담은 병이 놓여 있었다.
‘두 배의 내력을 끌어냈는데도 이기지 못하다니.’
남궁한 정도의 무공에 신무선단을 복용하면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여겼건만.
‘성과는 그나마 하나 정도 있었군.’
비무에서 보인 고진유의 무공은 예상보다 강했다.
“어떻게 된 녀석인지…… 파해도에 갈 때까지는 무공을 익혔던 것도 아니라고 했거늘.”
파해도에 함께 표류했던 오청석에게 배운 것이 처음으로 무공을 접한 순간이라 했었다.
“쯧, 파해도가 가라앉지만 않았어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이 가능했을 텐데…… 아쉬운 일이야.”
툭.
사마추는 병뚜껑을 연 뒤 신무선단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두두둑.
뼈와 근육에서 힘이 가해지는 소리가 났다.
“크크…… 이 소리가 너무 좋아.”
신무선단은 그에게 더 이상 내력을 증강시켜 주지 못했다.
하지만 뻐근해진 몸을 가볍게 풀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앞으로 애매한 놈들에게 신무선단은 필요 없겠어. 남궁세가라 기대했건만. 한 번 쓰고 버려야 하는 놈들은 중독성이 강한 공마신단이 좋겠군. 자…… 다음에는 누구를 건드려 볼까?”
단숨에 내력을 다섯 배 늘릴 수 있는 공마신단(功魔神丹)은 단점은 결국 이성을 잃는다는 것이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무림맹에 실험체는 무궁무진했다.
무인이라면 강한 무공을 마다할 인물이 없었다.
“무영일수.”
휘익.
사마추 앞에 인영이 내려섰다.
비맹군 소속 살수 집단 무영조의 수장이었다.
“화산관에 철갑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조용히 물건을 찾아와라.”
“존명.”
사마추의 명령에 토를 달 수 없었다.
명령을 내리면 죽음조차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다.
무영일수의 신형은 나타났을 때와 같이 곧바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 사마추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영사님을 뵙습니다.”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극일천에 있어야 할 사내.
“주군께서 보내셨습니다.”
“천주님께서?”
‘아직 폐관하기에 이른 시간일 텐데.’
사내는 허리에서 자줏빛 신패를 꺼냈다.
자주색 국화 모양에 사마추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천주가 건네준 신패가 확실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기를 철갑의 존재에 대해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
철갑을 찾지 못하면 극일천의 가장 큰 비밀이 알려질 수 있음을 천주가 모를 리 없다.
“정말로 그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나?”
“결국 중원 무림에 알려지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흐음……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 전에 알려지면 곤란하기 때문에 다급하게 찾고자 하는 것이지 않는가?”
“주군께선 그 또한 이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하고자 먼 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방금 전한 이야기는 서신으로 충분히 전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주군께선 직접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극일천에 과연 적수가 될 만한 인물인지, 아닌지 궁금하시다고 말입니다.”
극일천의 천주가 호기심을 가질 만할 인물.
고진유를 말함이었다.
“천주님께서 신경 쓰실 정도로 큰 인물은 아니다. 중원에는 천하오무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어.”
“주군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중원에서 그의 진정한 본 모습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설마 화산도협이 그 정도의 인물이라고? 천하오무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무림맹주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화산도협을 만났다.
젊은 나이에 비해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권왕 황보강을 뛰어넘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였다.
‘주군께서 말씀하신 것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겠지.’
사마추 또한 스스로의 생각 속에 갇히고 말았다.
중원 최고의 무인이 될 자질이 있지만, 당장은 아니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와 싸우는 것인가?”
“아닙니다. 만나서 몇 마디만 나누다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나.”
사마추는 귀찮은 듯 그를 물렸다.
‘영사도…… 그저 그런 인물이군. 예전에는 작은 일이라도 살피고 살폈던 인물이었거늘.’
천주가 한 말이 맞았다.
“세월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법이지.”
* * *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화산지 앞에 멈췄다.
건장한 체격에 얼굴의 윤곽이 크고 각지게 보이는 탓인지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그가 화산지 않에서 말없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군성창이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범상치 않은 기운.
사내의 전신에서 흐르는 기의 느낌이 고진유를 보았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내가 안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
“나에게 물은 것이오?”
“그렇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화산대사의 소문을 들었소. 혹시 만날 수 있겠소이까?”
“저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누구시라고 전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하늘의 끝에서 왔다고 전해주시게. 그러면 알 것이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군성창은 다급히 화산관으로 향하면서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하늘의 끝? 그런 곳이 있나?’
그는 정원을 지나 화산관으로 들어섰다.
‘안 계시나?’
화산관 문 옆에 걸린 팻말 조각에 그가 어디에 갔는지 행선지가 적혀 있었다.
‘집무실에 계시는구나. 물어보지 않고 바로 가면 되니 편하군.’
처음엔 도움이 될까 의문이 들었던 물건이었다.
“화산대사님. 군성창입니다.”
“들어오세요.”
군성창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고진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온 것을 보니 누가 찾아온 모양이군요.”
“처음 보는 인물이었습니다. 하늘의 끝에서 왔다고 하면 아실 거라더군요.”
‘극일천……? 의외인데?’
신분을 밝히고 찾아온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시하고 있으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 온 건가?’
화산지에 찾아온 극일천의 인물을 만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아 참, 매화정은 어떻게 되었나요?”
“열심히 공사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게 더 좋을 듯해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잘했어요, 그렇다면 손님을 매화각으로 데리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곧장 매화각으로 움직였다.
극일천의 인물이 좋은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 협박을 해올지 기대가 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