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홀로 침상에 누워 있는 사내.
남궁한은 일각 전에 정신이 깨어났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비무대에서 정신을 잃기 전 고진유의 눈빛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기랄…….’
또 한 번의 비참함이 온몸을 스쳤다.
남궁세가의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이기고 싶었다.
신무선단을 복용한 후엔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지?’
화산도협 고진유의 나이는 약관밖에 되지 않았다.
‘그처럼…… 절대로 넘볼 수 없다는 건가?’
남궁한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
호천수호대주 남궁무명.
그는 가주인 아버지의 자식이지만, 세가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에 무명(無名)이란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의 무공은 가늠조차 하지 못할 만큼 대단했다.
세가주 남궁천문의 그림자로 지내고 있는 그라면 화산도협과 동등하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스르르륵-
그때, 침실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조용히 있고 싶다.”
흑룡전 소속의 하인이라 여긴 그가 짜증스레 말했다.
“……?”
대답과 함께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야 했다.
“……어떤 놈이냐.”
남궁한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문 앞에 선 사내는 무림맹에서 본 안면이 있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멍청한 새끼.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해서 결국 이런 꼴로 누워 있군.”
남궁한의 인상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가 어디에서 온 인물인지 알았다.
“……죄송합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남궁세가에서도 제법 무공이 높다고 들었건만 그곳도 별 볼 일 없는 모양이야.”
울컥.
남궁세가를 버리겠다고 각서를 적었지만, 사내에게 가문이 무시당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화를 내는 것인가?”
“아…,아닙니다. 그냥…….”
“역시 멀었군. 그분의 말씀이 맞았어. 완전히 우리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라 하셨지.”
사내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남궁한이 곧바로 침상 옆에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당연히 놓여 있어야 할 검이 만져지지 않았다.
“크큭…… 검을 찾는 모양이지?”
“……!”
“그건 안 되지. 넌 조용히 죽어야 하니까.”
“뭐……?”
침상에서 일어나고자 했지만 상대의 내력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내력은……!’
매화 향기가 흐르는 내력을 펼치는 곳은 중원 문파 중 한 곳밖에 없다.
“당…… 신은…… 화산파의 인물이오?”
“얼추 흉내를 냈건만 믿는 것을 보니 제대로 펼친 것 같군.”
‘화산파 도사가 아니야?’
남궁한은 인상이 굳어졌다.
‘이들의 목적은 본 문과 화산파가 싸우도록 만드는 거였어……!’
화산파와 싸우게 된다면 남궁세가도 좋지 않은 상황이다.
천하오무의 검황 남궁천문이 건재하다고 하나 화산파의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화산도협의 무공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자네와 함께 잘 갈 수 있었거늘. 아쉽지만 우리의 인연은 여기가 마지막인 듯싶군. 잘 가게.”
남궁한의 가슴에 사내의 손이 닿았다.
쿠우웅-!!
심장에 만근추의 내력이 가해졌다.
“컥!”
남궁한의 허리가 위로 떠올랐다가 힘없이 침상으로 떨어졌다.
절명.
사내는 남궁한의 주검을 내려다보았다.
“킬킬…… 앞으로 남궁세가에서 어떻게 나올지,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겠군.”
휘이이익!
사내의 신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십문십가의 비무는 마지막 대결에서 승부가 결정났다.
무당파와 황보세가의 결승 비무.
십문의 마지막 도전자인 무당파의 현중은 십가에서 나온 세 명을 연이어 이겼다.
하지만 내력이 떨어진 그는 십가의 마지막 상대인 황보소와의 대결에서 아쉽게 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종 승리는 십가의 차지가 되었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화산대사가 기권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무대회가 끝난 후, 화산파의 사형제들은 화산관으로 돌아왔다.
“끝난 모양이군요. 결과는요?”
“졌다.”
우종성의 말을 받아 장두총이 아쉬운 듯 말했다.
“네가 남았다면 이겼을지도.”
“친선이잖아요. 이런 건 이겨도 의미가 없어요.”
“흥, 그래도 지는 건 기분이 나빠.”
사형제는 의자에 앉으며 비무에 대해 의논을 나누었다.
“그런데 오늘 비무를 보니 우리가 나갔어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장두총은 비무에 나온 참가자들이 강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혁자영과 우종성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들은 수련하며 고진유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받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부분들.
구결의 운영과 초식의 변화를 만들며 이어지는 연계 동작들을 익혔다.
그리고 이것보다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된 건 고진유와의 비무였다.
사형제들의 무공이 완벽해질 때까지 개선하고, 또 개선할 때마다 확인하기 위해 상대해 주었다.
절대고수와의 비무를 가지는 것은 행운이었다.
모두가 시간이 날 때마다 고진유가 비무를 가졌다.
고진유는 적당히가 아니라 매번 최선을 다해 빈틈을 노리며 상대해 주었다.
어떤 날에는 한 번도 검을 휘두르지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에라, 나쁜 놈아!! 그래도 최소한 한 수는 접어두면 어디 덧나냐?!”
장두총이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린 사이, 혁자영의 시선이 고진유를 향했다.
“우리가 그만큼 실력이 늘었다는 것이지.”
“호중의 말이 맞다. 호정 사제 덕분이지. 고마울 따름이야.”
“하하, 호진 사형, 제가 무슨 큰일을 했다고 하십니까. 사형들께서 열심히 수련했기 때문이죠.”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맙구나.”
그들에게 고진유의 존재는 스승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였다.
웅성웅성.
그때, 화산관 밖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가 찾아온 모양이군요.”
“화산대사는 밖으로 나오시오!”
화가 난 목소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묵경과 사형제들이 뒤를 따랐다.
화산관으로 몰려온 무리는 남궁지의 인물들이 틀림없었다.
‘비무에 진 것 때문에 찾아오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남궁대사인 남궁강의 얼굴에 노여움이 가득했다.
“화산대사! 본인에게 할 말이 없는가?”
“없습니다만. 바로 말씀을 하시지요.”
“하! 알겠다. 말을 하라고 하면 바로 해주지. 네놈이 그 아이를 죽였다!”
고진유는 눈을 깜박였다.
‘설마…… 남궁한이 죽었다는 말인가?’
남궁강이 분노한 상태로 찾아올 정도라면 남궁한밖에 없었다.
“……남궁대사께서 말한 인물이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뻔뻔하구나! 내 조카인 남궁한을 죽이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군.”
“그가 죽었다면 애도할 일이군요.”
“이노오오오옴!! 지금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인가?!”
스으윽.
그때, 묵경이 옆으로 나와 고진유를 비스듬히 가렸다.
“남궁대사님. 그가 죽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그를 화산대사가 죽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사자가 아니면 물러나라. 이번 일은 네가 끼어들 상황의 사건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개입해야겠습니다. 화산대사가 그를 죽였다는 근거를 말씀하십시오.”
“묵경, 이놈…… 서문세가를 생각해서 넘어가고자 했거늘, 계속해서 내 앞을 막을 생각이라면 화산파와 똑같이 상대해 주겠다!”
“서문세가와 저는 상관없습니다. 이유를 밝히십시오.”
묵경은 그의 협박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남궁강의 노기충천한 시선이 묵경의 뒤에 선 고진유를 향했다.
“화산대사, 비겁하게 숨을 생각인가?”
고진유가 옆으로 나섰다.
“전 숨지도 않고 앞으로도 숨을 생각은 없소이다. 그의 죽음에 왜 제가 연관되는지 가르쳐 주시지요.”
“오냐. 원한다면 가르쳐 주지. 한이가 비무에서 돌아온 뒤 침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
“알겠느냐? 한이 그 아이가 죽은 이유는 네놈이 비무에서 살수를 펼쳤기 때문이란 거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 정도로는 절대로 죽지 않아.’
남궁한이 정신을 잃은 이유는 고진유의 무공이 강한 것도 있지만, 그가 너무 극한의 내력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가 죽었다면…… 이건 살인이 틀림없어.’
남궁한을 죽인 인물.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느낌이 왔다.
남궁세가와 화산파의 격돌.
무림의 혼란을 가져올 목적이 분명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끈질기게 일을 만드는군.’
“본도가 죽였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죽은 그 아이의 심장에 화산파의 내력이 남아 있었다. 그것만 봐도 남궁한을 죽인 범인은 화산대사인 그대밖에 없지 않은가!”
‘심장에 화산파의 내력이라? 더 수상하잖아.’
남궁강의 흥분한 모습과는 다르게 고진유는 담담했다.
“화산대사. 할 말이 없는 모양이지? 왜 가만히 있지?”
“방금 남궁대사의 말씀을 듣다 보니 내가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뭣이라?!”
남궁강의 목소리가 화산지를 진동했다.
“조용하시지요. 여기는 남궁지가 아닙니다.”
“……!!”
차가울 정도의 무표정.
고진유는 순간 멈칫한 남궁강의 앞에 내려섰다.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조사했습니까?”
“조사? 그게 네놈이 할 말이더냐? 확실한 증거가 있거늘……!”
“안 했다는 말이군요. 겨우 심장에 남아 있는 화산파의 내력 하나만으로 무작정 이곳까지 달려와 본도에게 살인죄를 씌운 것입니까?”
“그 아이의 방에 침입한 흔적이 없었다. 만일 누가 칩입했다면 반항한 흔적도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건 제가 죽였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의 방에서 침입자의 흔적을 찾지 못했으니 비무 중에 당한 부상으로 죽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지 않습니까.”
“화산대사, 그럼 무엇이란 말이더냐? 한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겠지?”
“똑바로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의 방에 드나든 인물이 있는지 없는지, 조사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 몰래 들어갔다면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
“어불성설이군요. 확인도 못 하면서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게 웃기지 않습니까?”
“……!!”
남궁강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남궁한의 죽음은 안타깝습니다. 저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는 뛰어난 무림인이었으니까요.”
분노에 휩싸여 당장에라도 화산파와 싸울 기세로 찾아왔건만, 결국 남궁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남궁강은 그제야 조금 차분해졌다.
“가시지요.”
“……어딜 가자는 것인가?”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화산대사가 왜 그 아이를 시신을 보고자 하는 겐가?”
“남궁대사께서 확신하지 못하기에 함께 가보자는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서 증거를 없앨 목적은 아니겠지?”
“원하신다면 도착하는 즉시 허락 없이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남궁강은 잠시 망설였다.
‘정녕…… 아니란 말인가?’
눈앞에 선 고진유의 눈빛에선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죽인 게 맞다면 이렇게 냉정할 정도로 침착할 수 있을까?
“어떻게 증거를 보이겠다는 거지?”
“그의 방에 가서 가만히 서 있으면 됩니다. 만일 제가 딴짓을 한다면 제가 범인이라고 인정하겠습니다.”
“……알겠네. 가도록 하지.”
* * *
무림맹주 황보강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 받았다.
“화산지로 몰려갔다?”
“네, 그렇습니다.”
변후공은 고개를 숙였다.
‘남궁한이 죽었다고? 그것도 그의 침실에서?
고진유와 비무를 한 뒤 바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상황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군.’
이번에 터진 문제는 화산파와 남궁세가였다.
자고 일어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실체를 찾고자 했지만…….’
황보강도 무림맹에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았기에 친군 세력으로 잠영을 풀어 조사를 시켰다.
하나 그들의 실체는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변 총관이 보기에 그를 화산대사가 죽인 게 맞는가?”
“범인이 잡히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흑룡전으로 흔적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이 과연 무림맹에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자네는 화산대사가 죽였다고 믿는 모양이군.”
“그건 아닙니다. 단순히 의문이 든 부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황보강의 걱정은 남궁한의 죽음이 아니었다.
무림맹을 활보하는 외부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흑룡전으로 침입한 흔적을 찾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겠지. 아니면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의 고수라는 게 문제이든지.”
“…….”
“앞으로 피곤할 일이 많아지겠어.”
“좀 더 경계에 주의하도록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나.”
아직 문파간의 사건으로 번지진 않았다.
‘중재까지 필요할 정도.로 커지진 않아야 할 텐데.’
황보강은 당분간 두 문파에서 과연 어떻게 결정을 내릴지 지켜볼 뿐이었다.
* * *
고진유는 남궁강을 따라 흑룡전으로 들어섰다.
부군장 남궁한의 죽음으로 흑룡전 소속의 무인들이 건물 앞을 가득 메웠다.
흑룡군의 수장 제왕검수 남궁진이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남궁강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그 아이는 그대로 있는가?”
“형님 말씀대로 아직 그대로 두었습니다.”
“잘했네. 그리고…… 혹시 주변에 이상한 것들이 있던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알겠네.”
남궁진은 그의 뒤로 따라온 고진유를 바라보았다.
‘함께 오다니…….’
남궁강은 당장에라도 큰일을 칠 듯 노기를 끌어 올린 채 화산지로 갔었다.
“화산대사는 왜 같이 온 것입니까?”
“남궁한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다.”
“의문이라면…….”
“누군가 그 아이를 죽인 뒤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하더군.”
“그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흑룡전에는 살수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곳곳에 흑룡전의 무인들이 퍼져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부군장의 침실 주위에는 전혀 흔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살수가 침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제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절대’란 말을 쓰지 말라고 하더군.”
이는 흑룡군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남궁진은 결국 표정뿐 아니라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었다.
“알겠습니다. 화산대사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정말로 살수가 들어왔는지 똑똑히 확인해 볼 수 있도록 말이외다.”
흑룡전으로 들어선 네 사람이 남궁한의 개인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