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고진유가 십문의 대기석으로 내려오자, 곧바로 중원대사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종남대사는 표정만큼 목소리에도 짜증이 묻어났다.
“화산대사!”
“상의도 없이 함부로 나서게 되어 죄송합니다.”
소림대사가 둘 사이에 얼른 나섰다.
“이번 일은 이미 벌어진 일이지 않소. 하지만 화산대사께서 실수를 한 듯하오. 이런 일은 미리 상의했으면 좋겠소이다.”
“소림대사님, 알겠습니다.”
소림대사 공요는 의문이 들었다.
‘함부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거늘…… 특히 손해 볼 일은 하지 않지.’
고진유는 화산파의 도사라 하나 절대로 도사가 될 인물은 아니었다.
그동안 만나면서 알게 된 점은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것.
“화산대사.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이까?”
이번 일도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화산지로 남궁한이 찾아왔습니다.”
“남궁세가의 창천무룡인 그자가?”
“그렇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화산파의 대표로 제가 나오지 않는다면 십문의 참가자 중 누군가가 비무에서 죽게 될지도 모를 것이라 협박했습니다. 물론 그가 원하는 건 화산파의 참가자일 테지만, 상대가 어떻게 정해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게…… 정말이오?”
그 말을 똑똑히 들은 십문의 대사들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감히 비무대회에서 살인을 하겠다고 하다니…… 이 일은 남궁대사에게 필히 따져야겠소이다!”
“그런 말을 안 했다고 하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제가 참가자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방식대로라면 상대를 제비뽑기로 결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공연하게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 것이고요.”
“나 이런,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소이다.”
십문의 대사들은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선봉으로 나서면 십가에서는 분명 남궁한이 나올 겁니다.”
“그렇겠지요. 화산대사께서 십문을 위해 나서주니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최소한 남궁한은 제가 알아서 상대하도록 할 테니, 그 외의 상대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알겠소이다. 잘 부탁하겠소이다.”
모두가 자리로 돌아간 후, 비무가 시작되기 전 약간의 여유가 남았다.
고진유는 대기석에 앉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비무대 위에 누군가 올라서서 관중석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 * *
둥둥둥-
와아아아아!!!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관중석에서 함성이 울렸다.
묵경이 고진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진유 아우.”
“시작됐네요.”
“너어…… 설마 혼자서 끝낼 생각은 아니겠지?”
툭툭.
고진유가 미소를 지으며 주먹으로 툭 쳤다.
“형은 내 속을 너무 잘 안다니까요.”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깐. 괜히 남궁한 핑계를 댄 거잖아.”
“그 이유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근데 저 녀석만 이기고 내려와야죠. 전부 이기도 싶어도 너무 표 나게 튀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이 맞다. 잘 생각했어.”
둥둥둥둥-!!
다시금 비무대 위로 네 번의 북소리가 울렸다.
“올라가야 할 시간이네요.”
고진유는 일어나면서 사형제들을 향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웬만하면 살살해라. 분위기 안 좋아질 수 있어.”
장두총은 고진유가 다치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상대방이 심하게 다칠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호경 사형은 제 걱정이 안 되는 모양이군요.”
“우리 중 사제를 걱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후훗, 그 말이 맞지. 빨리 시작해!”
당우희는 언제 간식을 챙겼는지 연자련과 함께 베어 먹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휘이이익!
고진유의 신형이 단번에 비무대 위로 날아올랐다.
* * *
십문에서 선봉으로 고진유가 올라오자 의외인 듯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열 명 중 최고의 강자는 마지막 순번이 보통이니까.
십가의 대기석에서도 고진유가 먼저 나올 줄 몰랐는지 술렁였다.
황보유는 비무대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먼저 올라가겠소?”
화산도협의 명성에 선뜻 도전자가 올라서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면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스르르륵.
남궁한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떠오른 뒤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남궁한 또한 십가에서 출전한 도전자 중 무공이 가장 강했다.
“오오오!!!”
“와아아아아-!! 십가에서는 창천무룡이 나섰어!!”
관중석 사이에서 남궁한의 신법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중앙관중석에 앉아 비무대를 노려보는 인물, 이군사 사마추는 노기를 참았다.
‘저놈을 이기라고 했던 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다니…….’
비무대회를 무림대광장에서 열도록 한 이유는 화산대사의 무공이 어떠한지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남궁한에게 원한 것은 화산도협을 조용하게 처리해 달라는 뜻이었다.
절대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싸우라는 뜻이 아니었다.
‘끄응…… 나중에 한마디 해야겠군…….’
고진유와 남궁한이 비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남궁한의 목적은 간단했다.
십가가 이기고 지는 건 상관없었다.
그가 고진유를 꺾으면 된다.
“화산도협, 이렇게 소란을 피운 이유가 뭐지?”
“어차피 당신은 나하고 싸울 목적이 아니오? 첫 번째 대결에서 깔끔하게 끝을 냅시다.”
“흥, 시원해서 좋군.”
둘 사이에 할 말은 더 없었다.
슈우우우욱-!!
우우우우웅-!!
고진유와 남궁한의 기세가 세차게 부딪쳤다.
검을 뽑기도 전에 두 사람의 비무는 시작됐다.
파앗!
스걱-
동시에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상대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뻗었다.
채앵!!
그들의 눈앞에서 검이 교차하며 쇳소리를 냈다.
남궁한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번과는 다를 것이다!”
그는 전과 달리 고진유의 힘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내력이 강해지긴 했는데…… 너무 인위적이야.’
“어떤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몸에 좋지 않을 것이오.”
“하, 질투라니 부러운 모양이군. 내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
타아아앗!!
“질투라…….”
고진유는 사의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강하게 밀쳤다.
남궁한은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다가 발바닥에 힘을 주며 멈춰 섰다.
파아아앗!!
그와 동시에 섬전검에서 광명이 폭발했다.
뇌강참(雷降斬).
내력이 두 배 이상 강해지며 섬전십삼검뢰의 초식이 변했다.
쏴아아아---
고진유를 향해 쇄도하는 백광의 검뢰.
‘위력이 장난 아니군.’
사의검을 앞으로 세우며 내력을 일으키자 반원의 검막이 생겨났다.
호충신법으로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관중석에 피해를 줄 순 없지.’
쿠우우웅-!!!
또 한 번의 부딪침.
이번에는 고진유의 몸이 힘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섬전검의 위력은 분명 예전보다 강했다.
짧은 두 번의 부딪침이었지만, 비무를 지켜보는 군중들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잊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자신만만하게 나올 정도로 대단하군요.”
“겨우 이 정도에 놀라면 안 되지. 아직 멀었다.”
남궁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삼 초의 대결이 빠르게 지나갔다.
싸우면 싸울수록 단전에서 끌어낼 수 있는 내력이 많아졌다.
단전에서 끌어 올린 내력은 무궁무진 한 듯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 싸우고 싶지만 이젠 끝을 내야겠지.”
‘네놈에게 당했던 치욕을 고스란히 되갚아주마!’
천하검뢰(天下劍雷).
남궁한의 내력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내기의 흐름에 비무대마저 흔들거렸다.
그의 모습을 보던 수많은 이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중앙 관람석에서 남궁한의 변화를 읽은 무림맹주 황보강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직 이기기 위해 한 가지에만 집중하고 있어.’
급격하게 늘어난 내력에 가공할 위력의 무공이 펼쳐질 것이었다.
폭주하는 남궁한을 다치지 않도록 하면서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최소한 큰 부상을 입힐 수밖에 없겠는데…….’
그렇게 되면, 화산파와 남궁세가의 사이가 완전히 벌어질 것이다.
‘하…… 하지만 어쩔 수 없나. 일부러 질 수는 없을 테니…….’
순간, 고진유의 사의검이 움직였다.
샤아아아-
탈형검인의 단계에 들어선 뒤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화산파의 현기(玄氣)가 깃들었다.
사의검이 움직이는 검로를 따라 매화 향이 흐르며 붉은빛을 띠었다.
한 명은 극강의 기.
반대편은 극유의 기였다.
관중석의 무인들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한 채 비무대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쿠구구구궁-
그들의 머리 위에서 벼락이 울리는 동시에 비무대 위로 검뢰가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비무대가 산산조각 부서지면서 그 사이로 먼지가 솟구쳤다.
‘예전보다 공격이 서너 배 강해졌어.’
검뢰를 막아내야 했다.
고진유의 신형을 둘러싼 진매화강막.
검뢰와 강막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남궁한의 공격은 아쉽게도 강막을 뚫지 못했다.
“이번에는 내가 공격하겠소.”
타아아앗-!!
고진유는 호탄신(虎彈身)을 펼치는 동시에 사의검을 뻗었다.
‘우욱. 이 기운은…….’
남궁한의 눈이 커졌다.
단순하게 뻗어낸 초식이 아니었다.
고진유의 탈형일검에는 매화광일(梅花光日)과 매화자명(梅花紫明)의 무리가 담겨 있었다.
“남궁한, 좋은 공격이었지만 아쉽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어.”
“……!!!”
핏핏핏핏!!!
‘말도 안 돼…….’
고진유의 한마디는 남궁한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그가 비웃었던 많은 무인들의 눈빛이 현재 자신과 같지 않을까.
사의검에서 피어오른 매화 잎이 남궁한의 몸을 통과했다.
“우욱!!”
육체적인 충격과 심적인 충격을 더하자 남궁한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이…… 녀석은…… 괴물이야. 절…… 대로 이길 수…… 없…….’
휘이이이잉-
비무대가 부서지며 시야를 잠시 가렸던 먼지구름이 사라졌다.
“나타난다!!”
“창천무룡이 이번에는 이겼을 게 틀림없어!”
“아니, 화산도협께서 이번에도……!!”
흥분한 관중들이 손에 땀을 쥐고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관중석에서 천둥 소리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아!!!”
“화산도협, 만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승패를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궁한과 그 앞에 선 고진유의 당당한 모습.
남궁대사의 얼굴은 창백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중앙 관중석에 있던 사마추는 손에 힘을 꽈악 쥐었다.
‘저…… 멍청한 놈이…….’
젊은 녀석이라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안 되겠군…… 초장부터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녀석이야. 지금이야 별일 없겠지만 나중에 큰 사고를 친다면 피곤해지겠지.’
사마추는 아쉽지만, 손에 든 패를 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둥둥둥둥!
승패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십문과 십가의 대기석 분위기는 반대였다.
남궁한은 정신을 잃은 채 업혀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고진유도 십문의 대기석으로 내려왔다.
다음 비무를 이어가지 않고 바로 기권한 것이다.
십문의 대사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미타불. 화산대사, 무슨 일이 있소?”
“공요 대사님, 방금 비무로 몸이 좋지 않습니다. 화산지로 돌아갈까 하니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고진유의 몸 상태는 전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알겠소이다. 먼저 들어가서 쉬고 계시지요.”
공요 대사는 거짓인 줄 알면서도 그의 뜻대로 하게 두었다.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십문의 건투를 빕니다.”
고진유는 그들을 뒤로한 채 화산파 대기석으로 다가섰다.
우종성이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이냐?”
“설마요.”
“…….”
“사형들은 남아서 응원을 해주세요. 전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여튼…… 희한한 녀석. 먼저 가서 쉬어라.”
“네. 구경 잘하고 오세요.”
“나도 같이 가자. 아프다는 사람이 혼자 갈 수 없잖아.”
“그러죠.”
고진유는 묵경과 함께 무림대광장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 뒤로 함성이 들렸다.
나머지 십문십가의 비무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묵경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궁금하면 돌아가서 보고 오세요.”
“아니, 됐어. 어차피 재미있는 구경은 이미 했잖아. 남궁한은 어떻게 됐어?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던데?”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큰 부상은 아니겠지?”
“보름 정도만 조용히 지내면 완전히 나을 겁니다.”
“보름이라면…… 남궁세가에서도 큰 문제는 삼지 않겠군.”
묵경은 안심이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긴 하지만, 비무 중에 죽거나 중상을 입는다면 귀찮은 문제가 되고도 남았다.
또한 상대는 남궁세가 인물이었다.
“그리고…….”
“물어볼 게 있어요?”
“음…… 남궁한 말이야. 단숨에 강해질 수도 있을까?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녀석을 보니 너무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느낌이라서. 영약이나 내공을 전수받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잖아.”
“맞아요. 정상적이지 않죠. 상대해 보니 내공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킨 뒤 부풀어 오르게 만든 것처럼 보이더군요.”
“뭔가 있는 것 같지 않아?”
개운하지 않은 느낌.
묵경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찝찝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면 무림에 큰 문제가 될 것 같은데.”
“후후…… 형은 정말 협객이 어울리네요.”
“내가?”
고진유의 칭찬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은 추측이잖아요. 그리고 남궁한은 귀찮긴 해도 나쁜 놈은 아니고. 인위적으로 내력을 올렸다고 해서 꼭 나쁜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아직 확신할 순 없어요.”
“남궁한, 그 녀석이 밥맛없기는 하지만 나쁜 놈은 아니지.”
휘익.
묵경은 한 팔을 뻗어 고진유의 어깨를 감쌌다.
“왜 그래요?”
“네가 신기해서. 남궁한도 괴물인데 넌 그런 놈도 이긴 걸 보면 진짜 사람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다.”
“뭐…… 저도 가끔 내가 정상이 맞나 생각이 들긴 합니다.”
“에라이,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 얄밉게 말을 한다니깐.”
묵경은 기분 좋게 나란히 화산지로 향했다.
문득 멀리 떠난 인양이 보고 싶어졌다.
“그 녀석은 잘하고 있겠지?”
“잘할 겁니다. 똑똑하잖아요.”
“게다가 성격도 좋고 착하잖아. 근데 악덕 형님을 만나서 고생하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나중에 형이 좋은 배필을 소개해 주세요.”
“야, 그건 아니지 않냐? 일은 네가 다 시킨 걸로 아는데?”
“내가 아는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건 형이 전문가잖아요. 군 특사 말로는 하루에도 십문지 입구에서 수백 통의 연서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부럽냐? 안 그래도 연서를 읽느라 너무 피곤해. 난 왜 인기가 많은지 모르겠어. 너무 힘들어.”
“……그걸 전부 읽는다고요? 대단합니다.”
“짜식, 성의를 무시하면 쓰냐? 후후후. 난 만인의 연인이잖아.”
스윽.
묵경이 머릿결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