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북소연은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뜻하지 않은 두 명의 인물이 그와 함께 찾아왔다.
게다가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뭐야? 왜 노려보는 거야?’
고진유의 옆에 바짝 붙은 채 눈빛만 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북소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혼자 오지 않으시고.”
“그렇게 됐소. 여긴 무림맹 일대라 주위에 남들 시선도 많은데 오해할 수 있다고 조언을 주셔서.”
북소연은 두 여인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대의 두 사저께서는 어떻게 될까 걱정이 많으신 모양인가 봐요.”
당우희가 슬쩍 끼어들었다.
“당연하지 않나? 지옥혈림을 만나는데, 사저인 우리가 아니면 누가 사제를 챙기겠어요?”
“화산도협께서는 좋으시겠네요. 든든한 사저들이 계셔서.”
“맞는 말이오.”
고진유는 연자련과 당우희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쳇.’
북소연은 그 모습을 보자 괜히 짜증이 났다.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걱정된다고 하니 빨리 본론만 이야기하겠어요.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그렇게 하죠.”
“물건을 찾은 것으로 아는데 우리가 약조한 것을 잊었나요?”
“약조는 잊지 않았소이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찾았다는 말입니까?”
고진유는 정말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모를 것 같아요? 그 물건을 직접 찾아 간 것을 보고받았다고요.”
“누가 무슨 물건을 찾아갔다는 말인지 모르겠군. 혹시 무림맹에 사람을 심어놓았소?”
“이봐요. 우릴 너무 무시하는 것 같네요? 풍류미군이 야밤에 화산관에서 몰래 복면을 쓰고 나왔잖아요.”
“그래서?”
“하아, 진짜…… 그가 십문지 정문 옆에 있는 고목 아래 돌덩어리 사이에서 철갑을 꺼내는 모습을 정확히 확인했어요. 거짓말할 생각인가요?”
“그렇다면 묵경 형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니오? 난 모르는 일입니다.”
고진유는 여전히 발뺌했다.
‘이 사람이 진짜…… 모르는 척하네?’
화가 머리끝까지 나자 목소리 끝이 올라갔다.
“지금 우리와 한번 해보겠다는 건가요?”
북소연의 물음에 이번에는 당우희가 맞받아쳤다.
“참 나,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거야. 우리 사제가 모르겠다고 하잖아.”
“그래요. 우리 호정 사제는 거짓말을 못하죠. 맘이 착한 아이라 진짜 모르겠다고 하면 모르는 거랍니다. 목소리 낮춰주시죠.”
연자련도 나서며 북소연을 향해 동시에 쏟아부었다.
“으윽…… 당신…… 나한테 이러려고 다 같이 온 건가요?”
“북 소저, 내가 분명 이야기하지 않았소이까. 모른다고.”
“…….”
북소연은 고진유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러다…… 문득 거짓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진짜 모른다는 거야? 분명 그 물건을 찾았다고 했는데?’
북소연은 수하의 보고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묵경이 물건을 찾는 모습은 지옥혈림에서만 본 것은 아니었다.
당시 주위에는 숨어 있는 기가 많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묵경이 꺼낸 그것이 철갑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정말…… 인가요?”
“난 사실대로 말했소. 믿고 안 믿고는 그대가 판단하시오.”
북소연은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지 망설였다.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알려주지 못하겠다고 말할 사람이야.’
“그럼…… 풍류미군이 가져간 그 물건은 뭔가요?”
“알려줄 이유는 없습니다.”
“…….”
“알고 싶다면 그에 상응할 만한 정보를 주시오.”
“……지금 나하고 흥정하자는 건가요?”
“하면 안 되나?”
고진유는 극일천에 대한 정보를 원했다.
지옥혈림에서 극일천의 정보는 극비 중에서도 서너 명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옆에 두 분은.”
북소연이 두 사람을 보며 눈짓했다.
“얘 뭐야? 우리가 자리를 피해도 어차피 사제가 다 말해준다구.”
“혹시 우리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당우희와 연자련의 대화를 듣자 그녀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졌다.
“참 나, 알겠어요. 한 가지만 알려주죠. 무림맹에 극일천의 세력이 숨어 있어요.”
“그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소.”
“쯧…… 그대의 사부를 본 림에 의뢰했던 인물에 대해 알고 있어요.”
파앗!
싸늘한 기가 순식간에 솟구쳤다 이내 원래대로 돌아갔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조절했어. 역시 대단해.’
“그 사실을 예전에도 알고 있었소?”
고진유의 목소리는 싸늘할 정도로 담담했다.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그들의 정보를 찾는 도중에 알아냈거든요.”
“방금 한 그대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믿어주셔서 고맙군요. 내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의뢰자는 복면을 쓰고 목소리를 변조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도 몰랐던 부분이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간과했던 부분. 의뢰했던 복면인의 오른손 등에 국화 문신이 보였다고 하더군요.”
‘국화 문신이라…….’
좋은 단서가 될 만했다.
“고맙소. 도움이 되겠소이다.”
척.
이번에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찰싹!
그러자 당우희가 그녀의 손바닥을 내려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디서 사제 손을 잡으려고 해?”
“아 진짜!! 누가 손을 잡는대요?”
“너. 지금 손을 내밀었잖아.”
“그게 아니라, 좋은 정보를 받았으니 그 물건에 대해 말을 해달라는 거잖아요.”
“아, 그럼 말로 하면 될 것이지 손을 왜 내밀어? 오해하게. 미안해!”
당우희는 입을 가리며 눈꼬리를 휘었다.
‘하아…….’
북소연은 소리를 내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앞으로 여인 만나기는 힘들겠군요.”
“할 일이 많아서 누굴 만날 처지도 안 되오.”
“잘났군요, 정말.”
북소연의 말에 연자련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제야 알았군요. 우리 호정 사제가 조금 잘났답니다.”
‘아 진짜…… 쌍으로 지랄들이야.’
그녀는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뭐 해요. 빨리 말해봐요.”
“혼자만 알고 있을 겁니까? 만일 이 비밀이 새어 나간다면 우리 계약은 당신의 잘못으로 파기하겠소이다.”
“당연하잖아요. 왜 다른 데 가르쳐 주겠어요?”
“손바닥을 펴 보시오.”
북소연은 손바닥을 펴면서도 이제 연자련과 당우희의 눈치를 보았다.
슥슥.
고진유가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가(假).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놈들을 끌어내서 잡아야 하니까.”
“……미쳤네요.”
“미쳐야 그놈들을 상대할 수 있소. 지옥혈림 또한 마찬가지지.”
“아직까지 본 림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나요?”
“사부님을 죽였소이다. 내가 보는 눈앞에서.”
“복수했잖아요.”
“맹세한 게 있소. 지옥혈림이 죽든 내가 죽든,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것이외다. 아니면 상대에게 굴복하든지. 하지만 난 죽으면 죽었지 지옥혈림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본 림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건가요?”
“언제 내가 혼자 싸운다고 했나? 내 뒤에는 화산파가 있소이다. 당장에라도 움직일 수 있지만, 지금은 극일천이란 놈들이 먼저라서. 지옥혈림은 아쉽게도 다음이오.”
“흥. 그래도 첫 번째가 아니라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이번에도 당신의 말을 믿어주죠. 이른 시일 내에 그 물건을 꼭 찾기를 바랄게요.”
“약속한 건 꼭 지키겠소. 그러니 방으로 위험한 물건은 더 이상 안 던졌으면 좋겠군.”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저들. 볼일 다 봤습니다. 들어갈까요?”
“사제, 오랜만에 나왔는데 야시장 구경이나 하고 가자. 재미있는 게 많다고 하더라.”
“좋습니다. 잠시 구경하고 가죠.”
“앗싸!”
당우희는 짧게 주먹을 쥐며 좋아했다.
그러고는 고진유의 팔을 잡고 객잔 밖으로 끌고 나갔다.
스윽.
당우희는 나가는 도중 고개를 돌려 북소연을 보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북소연은 얼른 이곳을 뜨기로 했다.
‘사내가 줏대 없이 하자는 대로 다 하고 있어. 저런 남자 만나면 인생 피곤해서 안 돼.’
* * *
‘내가 운이 좋다고?’
남궁한은 붉은 병에 든 선단(仙丹)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무림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신무림의 질서를 관리하는 무인이 되기 위한 선단이 남궁한의 손에 있었다.
‘이걸 먹으면 신무자(新武者)가 될 수 있단 말이지…….’
한 달에 한 번 복용하면 될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신무선단.
이것을 받아 온 이상 도망친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
남궁한은 그가 만난 인물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복면에 목소리까지 변조했으니까.
분명 무림맹의 인물임엔 틀림없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정체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그자가 원하는 것은 화산도협과 싸워 이기는 것.
그 후 자신들이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지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악귀일지라도, 목적이 같다면.
티익!
남궁한은 붉은 병의 마개를 뽑았다.
그러고는 정확히 여섯 개의 선단이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복용하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을 거라 했지.’
신무선단 특유의 독한 향기가 온몸을 타고 번져 나갔다.
‘아무렇지 않은데.’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장난인가?’
그때였다.
“커어억-!!”
순간, 가슴을 압박하는 통증이 일어났다.
남궁한은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짜며 허리를 숙였다.
‘망…… 할……!!’
두두둑. 두둑. 두두둑.
이번에는 관절이 꺾이는 고통이 이어졌다.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남궁한은 두꺼운 서책을 입에 물었다.
부풀어 오른 혈맥이 점점 검게 변해갔다.
‘운…… 기를…….’
남궁한은 이를 악물고 운기를 시작했다.
전신에서 새어 나오는 흑색의 기가 다시금 백회를 통해 흘러들어갔다.
쿠우우웅!!!
백회혈이 부풀어 오르면서 터지는 듯한 충격.
남궁한이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 * *
‘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변후공은 심란했다.
무구천이란 신분을 밝혔지만 무시당했다.
화산도협은 분명 자신에게 그 물건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얼마 전 십문지 정문에 나타난 복면인.
극일천이 잃어버린 철갑을 고진유가 찾은 듯했다.
화산지 입구에서 군성창과 견대창이 위사를 서고 있었다.
‘맹주전 총관이?’
군성창은 단번에 변후공을 알아보고 포권했다.
“변 총관님을 뵙습니다.”
“자네들이 특사조이군.”
“네. 그렇습니다.”
“화산대사를 긴히 만나고자 하네. 들어가도 되겠는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사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허허…… 내가 누군지 알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대사님께서 맹주님이 찾아오더라도 들여보내지 말라 하셨습니다. 빨리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허어…… 이거 참…….”
“대창이, 얼른 다녀오게.”
견대창은 빠르게 화산관으로 향했다.
스윽.
군성창이 입구 옆에 놓여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금방 나오실 것입니다. 앉아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됐네. 서서 기다리겠네.”
변후공은 헛기침을 하며 밖을 향해 뒤를 돌아섰다.
일각이 지나가기 전에 견대창이 빠르게 돌아왔다.
“대사님께서 매화정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매화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네. 자네들은 여기에서 볼일이나 보도록 하게.”
불쾌한 표정을 지은 변후공이 곧바로 매화정으로 향했다.
고진유는 의자에 앉아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올라오시지요.”
“…….”
그의 표정은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어디 안 좋은 일이 있습니까?”
“화산대사는 몰라서 묻는 것이오? 본인은 무림맹에서 어딜 가더라도 푸대접을 받지 않소이다.”
“맹주전의 총관이시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당연한 것이 왜 여기서는 안 되는지 모르겠소.”
“여긴 특별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화산지가 특별한 이유가 뭔지 알려주시오.”
“모르고 계셨습니까? 본인이 특사조의 수장이기 때문이지요.”
“…….”
“특사조는 조금 특별한 직책이라 맹주님께서, ‘화산도협, 자네는 항상 맹주인 나와 동급이라 생각하면서 지내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아…….”
변후공은 긴 한숨을 쉬었다.
“맹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런 식으로 행할 줄은 몰랐군요.”
“그런가요? 음…… 그럼 맹주님께 한번 여쭈어보겠소이다.”
“화산대사,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외다.”
“하하하, 얼굴 좀 펴시지요. 너무 심각하게 보입니다.”
“…….”
변후공은 그냥 본론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여기보다 조용한 곳으로 가세나.”
“우리 목소리는 매화정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겁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소리까지 제어할 수 있군.”
“변 총관께서도 그 정도는 가능하시지 않습니까?”
고진유가 말한 대로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제어할 순 있다.
단 사방이 막힌 공간이어야 했다.
매화정 주위에는 소리를 막을 수 있는 벽이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그 물건을 무구천에게 맡겨주었으면 하네.”
변후공이 고진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