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퉁퉁!
황보유가 의장봉을 두드리자, 회의가 시작됐다.
“이번 회의에 모이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는 모두 알 것이라 봅니다.”
“……어이가 없군.”
점창 대사 소화진인은 기분이 나빴다.
형산파의 야심을 알고 있었지만 무림맹에까지 치고 들어올 줄은 예상조차 못했다.
완전히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소화진인은 회의장 한편에 대기한 인물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호천검 가웅…….’
그를 보자 노기가 전신에 퍼졌다.
황보유는 십문 소속의 중원대사들을 보며 물었다.
“형산파에서 공식적으로 요구했소이다. 십문십가의 규칙에 의하면 세 문파에서 허락할 경우 회의에 상정할 수 있다는 법규가 있소이다. 점창대사께서도 아시리라 보오.”
“……알고 있소이다.”
소화진인은 이미 십문에서 허락한 세 문파가 어디인지 확인했다.
‘공동, 종남, 개방.’
공동과 종남파는 형산파와 평소에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하지만 개방까지 허락할 줄은……!’
“이젠 십문의 아홉 문파에서 내려야 할 결정이 남아 있소이다. 만장일치가 되지 않을 때는 이번 안건을 기각하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형산파의 뜻대로 만장일치가 될 리가 없었다.
‘이놈들…… 두고 봐라…… 본 문이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으냐?’
소화진인은 울컥하는 가슴을 겨우 참으며 십문의 중원대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바로 여기에서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소이다. 형산파가 십문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지요.”
번쩍.
황보유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고진유의 손이 올라갔다.
“전 반대입니다.”
만장일치가 되어야 하는 사항에 하나라도 반대가 나온 이상 다른 문파에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회의장에 들어선 후 소화진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황보유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물었다.
“화산대사, 반대하는 게 맞는가? 그냥 손을 든 건 아니겠지요?”
“맞습니다. 형산파는 점창파를 밀어내고 십문에 들어설 수준은 아닙니다. 점창의 사일은 중원 무공의 일절 중에서도 일절입니다. 뭐…… 형산파가 종남파와 상대하면 모를까?”
“화산도……! 대사!! 방금 뭣이라 했는가?!!”
종남대사 운정도인이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소화진인이 고진유를 대신하여 그를 향해 맞받아쳤다.
“종남대사. 왜 그리 화를 내시오? 당신도 본 문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소? 누구는 함부로 말을 해도 되고 누구는 하지 말라는 법이 있소? 화산대사도 할 말을 한 것뿐이지 않소이까?”
“…….”
소화진인의 노여움에 그는 조용해졌다.
운정도인은 눈에 쌍심지를 켜듯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고진유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무시했다.
십가의 대사들은 조용히 십문에서 일어난 상황을 지켜보았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하, 싱겁게 끝나 버렸군.”
“팽 대사, 그러게 말입니다. 화산대사가 종남파에 은근히 불만이 있는 듯하군요.”
“아마도 대사 임명 건에 대해서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 같소이다.”
“화산관에 있는 사질에게 들었는데 화산대사의 성격이 은원을 확실하게 따지는 편이라 하더군요.”
당하정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본인도 들었는데, 은혜는 열 배로 보답하며 원수는 백배 천배로 갚아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던걸요.”
“당문대사, 혹시 본인 들으라고 하는 말이오?”
남궁강은 기분이 나빴는지 목소리 끝이 올라갔다.
“어허, 이거 참. 누가 남궁대사라고 한 적 있소이까? 혹시 찔리는 게요?”
화르르-
남궁강은 노기가 솟구쳤다.
“지금…… 뭐라 했소? 방금 찔린다는 게 무슨 뜻이오?”
“몰라서 묻는 게요? 그럼 자세히 알아보든지 하시오.”
“당하정. 지금 뭐라고 했는가? 알아보라고?!”
“남궁강, 어디서 큰소릴 치는 게요. 여기가 남궁세가의 안방인 줄 아나 보오.”
순식간에 십문십가의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사람들이…….’
황보유는 사방에서 소란스럽게 변한 장면을 보면서 어이가 없어졌다.
퉁! 퉁! 퉁!
손에 들고 있던 의장봉을 강하게 두드렸다.
“지금 뭣들 하는 것이오?”
황보유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리자 소란스러웠던 상황이 겨우 진정되었다.
“신성한 회의장에서 이런 개판이라니. 보기 싫소이다. 그만 돌아가시오. 어차피 회의 안건은 더 이상 진행할 필요 없으니 말이오.”
황보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뒤 회의장을 떠났다.
“잠깐, 황보대사……!”
의장인 그가 먼저 나가자 가웅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회의장에 들어온 뒤부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이건…… 전부 저놈 때문이다.’
가웅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파장 분위기군. 어째 회의만 하면 이러나. 나도 가야겠네.”
고진유가 천연덕스럽게 회의장 밖으로 얼른 나섰다.
“잠깐만.”
고진유의 뒤로 점창대사 소화진인이 다가왔다.
“화산대사, 고맙소이다. 도움을 받았구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형산파가 이런 방법으로 나오는 것이 도리에 많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후후후, 여하튼 화산대사가 먼저 나서준 덕분이외다.”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바쁘지 않다면 점창지에 가서 차 한 잔 마시겠소?”
“음…… 회의도 생각보다 빨리 끝났는데 좋습니다.”
“가시구려. 본산에 일 년 중 딱 한 번 채취가 가능한 운남항류차가 있소이다. 향이 좋을 것이외다.”
“귀한 차를……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다다!!
회의장을 나서는 두 사람 뒤로 가웅이 빠르게 다가왔다.
“화산대사. 분명 어제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사람이 어째 속이 좁소?”
“미안하게 됐군요. 사실 제가 마음이 좁아 한참을 담아놓습니다. 진심이 아닌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면 그게 사과로 느껴지지 않아서요.”
“…….”
“다음에는 진정성 있게 사과하도록 하시지요. 그만 가보겠소이다.”
고진유는 더는 말하지 않고 돌아서며 걸음을 재촉했다.
회의장을 나오던 중원대사 중 당하정이 그 모습을 보며 한마디 했다.
“내 말이 맞지 않소? 젊은 사람이 상당히 뒤끝이 있지요?”
* * *
소화진인이 차를 따랐다.
“화산대사, 다시 한 번 더 고마울 따름이외다.”
“사석에서는 말씀을 놓으셔도 됩니다.”
“허허…… 그래도 되겠소?”
“대사께서는 사조님과 동배이시지 않습니까?”
“그대를 보니 양 형님께서 좋아하실 모습이 눈에 선하군.”
소화진인은 사조 양군경과 예전부터 친밀한 사이라 했다.
“본 문이 잠시 어지러운 탓에 어이없는 일에 휘말리게 되었구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점창파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내부는 거의 마무리가 되는 중이라네.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면 장문인께서도 형산파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지. 물론 본인 또한……!”
평소에 인자하다고 소문이 난 그이지만 이번 일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형산파의 기세가 강해졌다고 해서 그들만으로 점창파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보이지 않습니다.”
“화산대사. 그대가 말한 의미는 형산파 뒤에 누군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그렇습니다. 형산파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점창파를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긴…… 난 그놈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었네.”
“형산파도 결과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 문파의 존망을 걸고 싸우려는 결정을 내리려고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인가?”
“죄송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시간만 뒤로 연기해 달라는 것이지, 그들과 싸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형산파를 치는 걸 당분간 멈춰달라는 게로군.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네. 놈들은 형산파를 사주해서 무림을 시끄럽게 만들 목적인 듯합니다. 언젠가는 이번 일을 따지셔야겠지만 그들의 뜻대로 움직인다면 점창파도 이용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흐음…….”
소화진인은 고진유가 말한 것들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충분히 의심이 갈 만한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알겠네. 본 문이 이용당할 수는 없지. 그대의 뜻을 본 문에 전하도록 하겠네.”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소화진인이 다시 차를 한잔 따랐다.
“화산대사가 무림의 일에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네.”
“아닙니다. 제가 단지 형산파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아…… 하하, 그렇구만. 형산파가 괜히 그대와 같은 인물에게 미움을 샀군.”
“점창파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개인적으로도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화산도협이 나서준다면야 이보다 큰 도움이 어디 있겠는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네.”
소화진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하, 하하하!”
팔자 눈썹 아래 약간 처진 눈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입술.
가만히 있어도 항상 웃는 표정의 중년인은 소면인(笑面人)이라 불리는 이었다.
“화산도협이 방해를 했단 말이지?”
화를 내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이 기괴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방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소면인 앞에 허리를 숙인 인물은 형산파 장문인 좌극천이었다.
구파일방의 아성을 넘볼 만큼 형산파의 중흥기를 이룬 자.
좌극천의 무공인 승흑호무검은 호남 무공의 일절이며 중원무림의 일절이기도 했다.
과연 호남무림의 강자라 할 수 있을 만한 자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상관이 없다라.”
짜증이 섞인 목소리와 달리 소면인의 얼굴 표정은 여전히 웃음으로 가득했다.
“어차피 결과는 같습니다. 점창파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도전을 받았으니 본 문을 공격할 게 틀림없습니다.”
“후후, 점창파가 바보가 아닌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겠지.”
“그렇습니다. 점창파에서 움직인다는 정보가 올라오는 대로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형산파에서 알아서 처리해야 할 걸세.”
“감사합니다.”
좌극천은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그렇고…… 화산도협이 의도적으로 형산파에 적대감을 보인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하하하, 보아하니 우리와 천적인 모양이야. 항상 본 천의 일에 연관되어 있으니.”
여상하게 웃었지만, 그를 잘 알고 있는 자는 그 웃음 뒤에 섬뜩한 살인마의 눈빛이 숨어 있음을 잘 알았다.
“제게 맡겨주신다면 화산도협을 잡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화산도협의 실력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자네의 무공으로 잡을 수 있다고 보는가? 육십사괘무장의 천무괘장을 이긴 놈이야.”
“…….”
“형산파는 오로지 점창파를 잡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똑바로 들었겠지?”
“……알겠습니다.”
좌극천은 허리를 숙였다.
그 때무네 소면인은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다.
‘화산도협…… 감히 본 문을 무시하다니……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 * *
피피핏!
팍!
‘나 참…….’
창문을 통해 침실로 표창이 날아왔다.
탁자에 박힌 표창에는 서신이 묶여 있었다.
“조용히 가져다 놓고 가면 될 걸 굳이 위험하게 던지기까지…… 하긴 좀 더 가까이 오면 잡힐 걸 아는 것이겠지만.”
고진유는 탁자에 꽂힌 표창을 뽑아 끝부분에 묶여 있는 서신을 풀었다.
“흐음.”
<밖에서 한 번 볼까요?>
예쁘게 적힌 여인의 글씨체.
고진유는 서신을 보낸 인물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지옥혈림의 북소연.
‘능력도 좋군. 무림맹에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들키지 않는 인물이 있다라…….’
무림맹에는 뛰어난 무인들이 많았다.그들의 눈과 귀를 피하고 숨어들 수 있다면 잠입에 특화된 인물이 틀림없었다.
“만나고 싶다는데 안 나가면 계속 귀찮게 하겠지?”
이왕 만날 거라면 굳이 시간 끌 필요 없었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때마침 집무실 앞을 지나가던 연하련과 마주쳤다.
고진유의 외출 복장을 본 그녀가 물었다.
“호정 사제, 어디 가?”
달랑.
고진유가 손가락으로 비검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그게 뭐니?”
“지옥혈림에서 만나자고 하네요.”
“어머나…… 혹시 그 계집애?”
연자련의 낯선 말투에 고진유가 흠칫했다.
사형제들은 고진유가 지옥혈림의 북소연과 계약했던 부분까지 이제 모두 알고 있었다.
“안 돼, 사제. 지금 저녁이잖니. 만나더라도 내일 낮에 만나렴. 아니면 나하고 같이 가든지. 요새는 여우가 간이 크구나.”
“……어…….”
“여기 눈도 많은데 혼자서 만나려고 하다니, 사제가 큰일 날 일을 할 뻔했어. 화산대사가 지옥혈림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렴. 당장 어떤 말이 나올 것 같니?”
사뿐사뿐.
“언니! 호정 사제하고 뭐 하세요?”
처음 들어보는 연자련의 말투에 고진유가 당황한 사이, 기분이 좋아 보이는 당우희와 장두총이 함께 다가왔다.
두 사람의 사이는 어느덧 사형제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인정받고 있었다.
“우리 호정 사제가 그 불여우를 만난다고 하잖니.”
“어떤 년인데요?”
“지옥혈림의 그 애 있잖아.”
장두총이 얼른 끼어들었다.
“북소연.”
휘익!
당우희의 고개가 장두총을 향해 빠르게 돌아섰다.
“어떻게 단번에 이름을 알죠?”
“엉? 그, 그게…… 호정 사제가 저번에 말했잖아? 서로 계약을 했다고…….”
“왜 이름을 외우고 있어요?”
“음……? 잠깐, 갑자기 처리 안 한 일이 생각났어. 나중에 봐.”
휘이이익!
장두총은 도망가듯 뛰어갔다.
“흥, 나중에 봐야 할 거예요?”
당우희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언니, 그래서 걔를 왜 만난대요?”
“나도 몰라.”
스윽.
“아…… 그게.”
고진유가 그녀들이 눈빛에 곱다로 사정을 말해주었다.
두 사람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 소리씩 했다.
“또 위험한 짓을 했어!!”
“사제는 그런 행동을 할 때는 의논을 할 필요가 있어.”
“아…… 네에, 앞으론 그럴게요.”
“잠깐 기다려. 나도 갈 거야!”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만.”
“안 돼. 그년, 크흠, 아니, 그 애한테서 우리 사제를 지켜야지. 묵경 오라버니라면 모를까, 사제는 불여우 같은 그 계집애에게 홀랑 당할 수 있다구.”
그때 멀리서 지나가던 묵경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우희야, 나 불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