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83화 (83/425)

83화

고진유는 집무실에 앉아 묵경에게 받은 보따리를 풀었다.

철갑처럼 만든 사각형의 목상자.

‘다섯 곳 정도면…… 이제 내가 철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곳은 거의 알겠군.’

이제 해야 할 일은 철갑을 노리는 놈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빠각.

손에 힘을 주며 목상자를 눌렀다.

증거 인멸.

상자가 곧 여섯 개의 목판으로 부서지며 분리되었다.

철갑이 가짜라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되니까.

‘흐흥, 네놈들이 여기를 아무리 뒤져도 찾지 못해서 환장할 것이다.’

고진유는 웃음이 나왔다.

“과연 누가 먼저 연락을 보낼지 궁금한데.”

상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고진유는 집무실을 나섰다.

마침 집무실로 군성창이 다가왔다.

“대사님.”

“군 특사. 무슨 일인가요?”

“화산지 입구에서 형산파의 인물들이 만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굳이 만나야 할 일이 없을 텐데. 무림관문 일 때문에 마음이 상했나? ……뭐, 한판 붙자고 하면 상대해 주면 되겠지요.”

형산파가 무림맹주와 만나 무림관문에서의 일을 하소연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 뒤로 맹주전에서 별다른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쪽은 어물쩍 넘어가려는 심산인 듯했다.

“매화정으로 데리고 오세요.”

“넵. 알겠습니다.”

군성창은 고개를 숙인 후 곧바로 돌아갔다.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한 번 정도는 예의겠지.’

그리고 매화정으로 가는 길에 묵경을 만났다.

묵경이 고진유를 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가는 길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형산파에서 왔다고 들었거든.”

“그렇지 않아도 매화정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나도 참석해도 되나?”

“괜찮아요.”

고진유와 묵경은 함께 매화정으로 걸었다.

“그들이 왜 오는지 알지?”

“모르겠는데요. 형이 물어보는 걸 보니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형산파를 지지해 달라는 부탁 때문에 왔을 거야.”

“무슨 지지요?”

“차암, 너도 가끔씩 보면 신기하다. 남들은 죽어다 깨어나도 알기 어려운 비밀은 턱턱 알고 있고, 남들 다 알고 있는 소문은 몰라?”

“내 일도 바쁜데 남의 일까지 어떻게 신경을 씁니까? 그리고 그 분야는 형이 있으니 상관없죠.”

“허얼…… 하긴 이게 날 잘 챙겨야 하는 이유지. 넌 운이 너무 좋아. 무림에 나 같은 사람 없거든.”

“푸흣, 맞습니다.”

“한마디로, 점창파를 밀어내는 데 한 표를 부탁한다는 말이지.”

“흐음, 꿈도 야무지군요.”

“그러게 말이다. 여하튼 그 일 때문에 온 것이니 알고나 만나라고.”

“역시 형이 있으니 좋네요. 이런 소식까지 알려주고.”

“그러니깐 나한테 앞으로 더 잘하란 말이다.”

묵경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 * *

여섯 개의 기둥으로 세워진 정자.

매화정으로 올라오는 계단 옆에 있는 기둥에는 화산대사를 지낸 역대 인물들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매화정에 먼저 도착한 고진유와 묵경은 형산파의 인물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일각이 지나기 전.

매화정으로 호천검 가웅과 그의 제자 이역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들 오시지요.”

고진유와 묵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화산대사를 뵙소이다.”

가웅 혼자만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에 반해 이역봉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서 있었다.

“본도를 만난 게 기분이 나쁜 모양이군. 싫으면 그만 가보시오.”

“그게! 아니라…….”

이역봉은 똑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 녀석이…… 싫어도 싫은 표정을 짓지 말라고 했건만…….’

가웅은 제자를 노려본 후 다시 돌아서 얼른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화산대사.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본인이 제자 교육을 잘못한 모양입니다. 큰 아량으로 봐주시면 고맙겠소이다.”

“호천검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앉으시지요.”

“고맙소이다.”

가웅은 자리에 앉기 전 이역봉을 한 번 더 노려보았다.

매화정에 서로 마주 보며 앉은 네 사람.

“오랜만에 뵙는 듯합니다.”

묵경은 이미 가웅과 안면이 있었다. 직접 만난 지는 오 년 이상 넘은 듯했지만.

“풍류미군. 자네 소문은 많이 들었네. 호남무림의 자랑이라고 서문 가주께서 좋아하시더군.”

“에…… 그분이 설마 자랑까지 했겠습니까. 이름 좀 날린다고 지나가는 말에 한마디 했겠지요.”

“…….”

묵경의 말이 정확히 맞았다.

서문세가주 서문당소에 대해 묵경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인사는 대충 했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죠.”

고진유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호천검께서는 본도를 만나고자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최근 본 문의 기세는 호남무림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소이다. 구파일방의 힘에 필적한다고 볼 수 있지요.”

“구파일방에 맞먹는다고 하니 대단하군요.”

“맞소이다. 이는 무림맹에서 본 문이 입맹하도록 권유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진유가 문득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말이오?”

“형산파는 호남오대명문에 들 만큼 대단한 문파라지요.”

“화산대사께서 잘 알고 있군요. 맞소이다.”

“그 정도로 대단한 문파가 왜 여즉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았던 것인지요?”

“…….”

가웅은 순간 머뭇거렸다.

스스로 그 이유에 대해 말하기 애매했다.

옆에서 묵경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내가 알기로는 십문에 들어가지 못해 가입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십문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의미다.

“묵경 형이 말한 이유가 맞습니까?”

그때, 조용히 있던 이역봉이 불쑥 중간에 끼어들었다.

“본 문이 십문에 가입하든 안 하든 그대가 무슨 상관입니까?”

고진유는 그를 보며 살짝 미소를 띠었다.

“당연히 상관없소. 그저 호남오대명문에 드는 대단한 문파가 여태까지 맹에 가입하지 않다 갑자기 들어오겠다고 하니 궁금했을 뿐. 당신 같으면 궁금하지 않겠소?”

“난 쓸데없는 일은 궁금하지 않소이다.”

“아, 사실 나도 예전엔 내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소이다. 지금은 화산대사의 직분을 맡은 터라, 책무상 궁금한 게 많아진 것 같군요. 다음부터는 당신에겐 굳이 묻지 않겠소이다.”

매화정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가웅은 화가 난 얼굴로 이역봉을 다그쳤다.

“지금 화산대사께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이더냐? 똑바로 사과를 하지 못하겠느냐?”

그의 눈빛은 정말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결국 서슬 퍼런 사부의 기세에 이역봉은 고진유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주제넘게 나선 듯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됐소. 그럴 수도 있지요.”

고진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역봉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화산대사, 제자의 무례에 다시 한 번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무례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이해합니다. 본 문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본도라도 당연히 한마디 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역시 소문대로 대협이외다.”

“그럼, 이제 무슨 일로 본도를 만나고자 왔는지 정확히 말해주시지요.”

“본인이 온 이유는 이후 십문십가 회의가 열리면 본 문에 한 표를 주십사 부탁을 하러 왔소이다.”

“흐음…… 어떤 안건에 대한 표인지 알 수 있겠소이까?”

“점창파 대신 본 문인 형산파가 십문에 들어서야 한다는 안건이외다.”

“점창파 대신…… 그게 가능하겠소이까? 점팡파의 역사와 전통을 쉽게 밀어내지 못할 텐데요.”

“그건 본 문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외다. 화산파에서 본 문에 힘을 실어주시면 나중에 중원대사가 되었을 때 꼭 보답하겠소이다.”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왔군요.”

“그렇소이다.”

“……알겠소. 하나 본도도 화산파의 뜻이 어떠한지 물어봐야겠소이다. 여하튼 회의한다면 형산파의 뜻을 생각해 보리다.”

“고맙소.”

가웅은 다행이라 여겼다.

‘잘하면 우리 쪽으로 넘어오도록 할 수 있겠어.’

“여기 풍류미군의 본 가인 서문세가와도 본 문은 친하게 지내고 있지요. 본 문이 십문이 된다면 화산파의 일도 마치 본 문의 일처럼 나서서 도움을 드리겠소이다.”

“그렇습니까? 고맙소이다.”

처음과 다르게 매화정의 분위기가 좋게 흘러갔다.

이각이 지난 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본인이 좋은 자리를 만들어 보겠소이다.”

“그렇게 하지요.”

* * *

화산관 중앙 회의실에 모두가 모였다.

안건은 오후에 찾아왔던 형산파가 제시한 내용.

“형산파에서 진심으로 나올 모양이구나.”

우종성은 형산파에서 점창파를 진심으로 밀어내려 한다는 것이 지나가는 소문일 줄 알았다.

“우리한테까지 왔을 정도면 이미 어느 정도 밑밥은 깔아두었을 거야.”

곽우의 예상은 정확했다.

“호민 사형의 말에 동감합니다. 그들이 무작정 나올 리가 없습니다.”

“하하! 별일이 다 있군. 이런 식으로 점창파의 뒤통수를 치기도 하네.”

장두총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스윽.

당우희가 손을 들었다.

“호민 사형, 형산파가 십문에 들어오려면 과반수가 되어야 하는 건가요?”

“글쎄다. 만일 그렇다면 십가에서도 십문을, 십문에서는 십가를 마음대로 넣고 뺄 수 있다는 말인데…… 하지만 이건 중원대사를 인정하고 안 하는 것 같은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곽우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고진유가 손을 들었다.

“형산파와 점창파의 일은 십가에서 관여할 수 없어요.”

“정말이냐? 어떻게 알았어?”

“형산파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맹주님께 물어봤습니다. 형산파가 십문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십문의 나머지 아홉 문파들이 만장일치돼야 합니다. 한 곳이라도 반대하면 불가능하다더군요.”

“그럼 형산파는 한 곳이라도 반대하면 십문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거야?”

“만장일치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죠. 아홉 문파에서 한 문파라도 찬성하면, 정식으로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하더군요.”

우종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다면 싸울 명분을 얻을 목적이었구나. 무림맹까지 와서 문제를 삼은 건 십문에서도 형산파를 인정하는 문파가 있느니 싸우자, 만약 싸우기 싫으면 점창파는 알아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주려던 게야.”

이번에는 연자련이 물었다.

“점창파가 물러나지 않으면 싸우게 되잖니. 무림맹에서는 보고만 있는 거야?”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점창파와 형산파가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없어요.”

“서로 붙어야 한다는 말이구나. 하지만 정파 세력들끼리 치고받는다면…… 누군가에게 유리할 상황이 되지 않겠어?”

“극일천.”

연자련의 물음에 혁자영이 한마디 했다.

극일천의 존재에 알게 된 사형제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무림 전체를 놓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놈들 뜻대로 되지 않으려면 싸우지 못하도록 말려야 하지 않겠니?”

“어렵지 않을까요? 개인이 싸우는 것도 아니고 문파 간의 전쟁입니다.”

무림맹주처럼 영향력이 강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개인이 그들을 말릴 수는 없을 터였다.

“……최대한 노력은 해봐야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싸운다고 우리가 직접 나설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더 신경 써야 할 곳은 극일천을 상대하는 것이니까요.”

고진유의 말이 옳았다.

우종성이 결론을 내렸다.

“호정 사제의 말이 맞다. 이번 일은 두 곳에서 결정하는 대로 지켜보자꾸나.”

“사형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알겠어요.”

“무림은 약육강식의 세상이야. 점창파에서 틈을 보였기에 형산파에서 달려들고 있는 것이지.”

“호진 사형, 우린 다릅니다. 대화산파를 절대로 넘보는 놈이 없도록 천하제일문으로 만들 겁니다.”

그 말에 화산의 제자들이 미소를 지었다.

화산파를 천하제일문으로 만들겠다는 고진유의 포부는 들을 때마다 항상 가슴이 떨렸다.

* * *

십문십가의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의 안건은 형산파가 점창파를 대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

점창대사 소화 진인의 표정만으로도 모든 상황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하나둘씩 대전에 들어서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퉁퉁!

의장인 황보대사 황보유가 의장봉을 바닥에 두드렸다.

“그만들 자리에 앉으시지요.”

중원대사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 오셨소이까?”

총 열아홉 개의 자리 중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저기 빈자리는 어느 분이오?”

“아미타불, 화산대사가 잠시 늦는 모양이구려.”

건너편에 있던 악가대사 악양이 투덜거렸다.

“젊은 사람이 이렇게 시간 개념이 없어서야 되겠소이까. 제때 와서 기다려야 하지 않겠소.”

“허허, 악가대사. 아직 진시가 멀었소이다. 좀 더 기다려 보는 게 좋겠소.”

무당대사 청유도인이 미소를 지었다.

“같은 십문 출신이라고 편을 드시는 겝니까? 우리도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지 않소이까? 건방지게 기다리게 만들어서야…… 쯔쯔.”

악양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휘이이익-!

그때, 바람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회의장으로 빠르게 들어섰다.

고진유가 얼른 자리에 앉았다.

중원대사들 중 제대로 그의 신형을 본 인물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화산대사! 분명 진시에 회의를 한다고 알렸거늘. 지금 뭐 하다 이제 왔소이까?”

악양이 손으로 그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스윽.

고진유는 그에게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노여움을 그만 푸시지요.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쳇. 화산파에서는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어린 사람을 보내 가지고…….”

악양은 결국 혼잣말처럼 구시렁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황보유가 다시 물었다.

“화산대사, 아직 시간이 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늦지 않도록 하시게.”

“명심하겠습니다. 변명은 아니지만, 회의를 마친 후 맹주님께 가서 악가대사께 혼이 났다고 따져야겠군요.”

“화산대사, 그게 무슨 말이오?”

“맹주께서 회의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의장이 동생이니 시간에 맞춰 가도 된다며 붙잡으셔서 말입니다.”

“맹주님과 함께 있었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차를 마시고 가라는 바람에…… 선배님들께서 싫어하시니, 다음에는 맹주님과 차를 절대로 마시지 않겠다고 단속을 하겠습니다.”

“…….”

악양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고진유도 혼잣말처럼 다시 투덜거렸다.

“맹주님은 일부러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니까…… 진짜 싫은 소리 해야 하나.”

“허허허, 이보게. 화산대사, 여기 누가 화를 냈다고 하는가. 당연히 형님과 차를 마신다면 늦을 수도 있지. 늦은 것도 아니네만.”

“의장님께서만 그리 생각하시면 됩니까. 다른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고진유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악양을 쳐다보았다.

‘저…… 녀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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