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치욕.
세상에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었다.
창천무룡의 별호는 젊은 무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낱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남궁한은 멋진 복수를 원했다.
남궁세가의 무공으로 화산파의 무공을 익힌 화산도협을 발밑에 쓰러뜨린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는 남궁세가의 뛰어남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화산도협 고진유, 그 자체를 이기고 싶었다.
좋다.
누군지 모르나 교동으로 가주마.
세상에 공짜가 없음을 잘 안다.
분명 원하는 게 있을 터.
모두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화산도협을 무릎 꿇게 만들 것이다.
* * *
수련관의 정문이 커다란 타원이라 교동(敎洞)으로 불리는 곳.
웅성웅성.
그곳이 순간 한 인물의 등장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창천무룡이라 불리는 무인은 무림맹 수련생들에게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남궁한은 수련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연무장 안으로 움직였다.
“흑룡군 남궁 부군장께서 여기에 무슨 일이시오?”
수련생들 사이에서 삼십 대의 사내가 남궁한을 부르며 나섰다.
남궁세가와 동향인 안휘절검가 출신인 허지홍.
“허 형이군요. 교동에 있다는 것을 잊었소이다.”
“괜찮소. 여긴 다들 수련에만 매다려 워낙 조용한 곳이니.”
“허 형의 실력이라면 팔군에 올라갈 수 있지 않소이까?”
“내가 지원했네. 가르치는 게 재미있거든. 근데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무림맹 수련관에서는 어떻게 수련하는지 궁금해서 왔소이다.”
“……그렇군.”
허지홍은 대답을 했지만 믿지 않았다.
남궁한의 성격을 모를 수 없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수련하시지요.”
남궁한은 그를 뒤로한 채 수련관으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뒤 기(氣)를 따라 오라.]
남궁한의 머릿속으로 전음이 울렸다.
끼이익-
수련관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저곳인가?’
많은 방들 가운데 전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기가 느껴졌다.
‘정파의 기가 아니다.’
남궁한의 눈매가 매서울 정도로 가늘어졌다.
기가 흘러나오는 장소 앞에 멈추자, 방과 방 사이의 벽이 나타났다.
‘비밀 방이군.’
드르르륵-
그 순간, 벽이 위로 올라가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이 짙은 지하 계단.
‘여기에 들어선다면…….’
남궁한은 느낌으로 알았다.
지하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지금까지 지내왔던 세상은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망설이는가? 두렵다면 여기에서 물러나라.]
다시금 전음이 울렸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이미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남궁한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 * *
고진유는 저녁 식사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계절도 완연한 봄을 넘어섰다.
“매화는 완전히 졌겠군.”
이 년 동안 화산에서 지낸 생활이 그리웠다.
“사부님이 그렇게 그리워하신 게 이제야 이해가 되네.”
사부께서는 파해도에 있을 당시 항상 봄이 오면 매화 향이 그립다고 하셨다.
“여기서 뭐 하냐? 전부 모여 있잖아.”
묵경이 다가왔다.
“그냥 밤공기가 좋아서 잠시 나왔습니다.”
“인양과 파 특사가 나가기 전에 한 잔 부을 모양이던데.”
“사형들이 궁금해하지 않던가요?”
“속으로는 궁금하겠지. 그래도 물어보지는 않더군.”
고진유는 화산관을 돌아보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
고진유의 얼굴에도 미소가 나타났다.
“……이젠 모든 사실을 함께해야겠지요?”
“믿어야지 않겠어? 지금부터 시작이라면 우리 세 사람으로 힘들어. 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해.”
“네. 인양과 파 특사가 떠나기 전에 사형들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야겠어요.”
“철갑까지?”
“그래야지 않겠어요?”
“잘 생각했다. 믿고 가는 수밖에.”
가벼운 연회가 끝난 뒤 고진유는 따로 사형제들만 따로 모았다.
여섯 명의 화산파 제자들.
“제가 사형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소 회의에는 묵경과 인양도 늘 함께했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우리만 모이게 한 걸 보니 중요한 이야기가 있느냐?”
“네, 호진 사형.”
“그렇군.”
우종성은 물론 나머지 다섯 명의 사형제들도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모든 내용들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외에는 알아서는 안 될 극비에 해당합니다.”
“…….”
고진유의 무거운 표정이 그들에게 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장두총이 손을 들었다.
“사제, 본 문의 장문인께도 비밀로 하는 건가?”
“장문인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다만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는 장문인님도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
장문인까지 모르고 있다는 비밀.
그동안 고진유와 함께 생활하면서, 묻진 았았어도 비밀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화산검절이신 사부님을 죽인 세력이 어디라고 보셨습니까?”
“지옥혈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들이 사부님을 죽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사부님을 지옥혈림에 넘긴 세력이 있습니다. 극일천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극일천?”
처음 듣는 세력이었다.
무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곽우조차 생소한 곳이었다.
“저 또한 극일천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두려운 이유는…… 극일천에서 보낸 간자들이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본 문에도.”
우종성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본 문에 극일천에서 보낸 간자가 숨어 있다니?”
“허주 사숙과 허서 사숙입니다.”
고진유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사형제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분…… 들이 변절을 했었다고?”
“차라리 변절했다면 좋았겠지만, 본 문에 들어올 당시부터 극일천의 인물이었습니다.”
여섯 명의 화산 제자들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고진유가 이런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그…… 렇군. 그래서…….”
본 문에서 갑자기 화산권절 유형지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장문인께서는 알고 계시겠지?”
“각 당의 당주분들만 알고 계십니다.”
장문인까지 안다면 고진유의 말은 확실했다.
곽우가 물었다.
“사제, 극일천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 곳이지?”
“제가 아는 건 그들의 목적이 무림의 영원한 지배라는 것…… 그들은…….”
극일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방 안의 공기는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워졌다.
중간중간 한숨 소리만이 나올 뿐.
장두총은 어이가 없었다.
“철혈궁도 극일천의 하부 세력이라고? 이게 말이 돼? 지금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미 무림을 지배하고 있잖아.”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겠다는 말이군.”
혁자영이 간단하게 정의했다.
극일천의 존재는 대단했다.
우종성은 고진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호정은…… 그런 엄청난 놈들을 지금까지 혼자 상대했단 말인가?’
“미쳤군.”
“맞습니다. 호진 사형 말처럼 그놈들은 완전히……!”
“아니. 그놈들은 대단한 놈들이고. 그런 놈들을 혼자서 이겨보겠다고 뛰어다니는 누군가가 미쳤다는 것이다.”
우종성의 손가락이 고진유를 가리켰다.
“어어,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호정 사제는 미친 것도 있고, 간덩어리가 부은 게 아니라 아예 튀어나온 것 같아요.”
“아하하…… 호청 사저, 별말을 다 하십니다.”
혁자영이 살짝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숨긴 이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군.”
“호중, 어쩔 수 없었을 거다. 허주 사숙이 간자였는데 누구든 쉽게 믿을 수 있었겠느냐?”
우종성은 현 상황을 이해했다.
“죄송합니다. 지금까지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 시기가 되었다는 말이군.”
“네. 그리고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은 장문인께서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고진유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사부님께서 극일천에 수모를 당하신 후 지옥혈림에 의해 지옥도로 끌려가게 된 이유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물건 때문이었습니다.”
사부 오청석을 생각하자 순간 흔들렸던 마음을 안정시키며, 고진유는 천천히 사부가 겪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섯 명의 사형제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빠져들었다.
철갑의 존재.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나 온 무인도를 뒤져 파해도까지 찾으러 나선 지옥혈림.
중원에 나온 뒤 고진유의 존재가 알려지자 나타났다는 극일천의 신비 인물들.
“……그 안에 중원인들이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 들어 있다는 뜻이군.”
“진짜 궁금하네. 검절 사숙께서 철갑을 무림맹에 숨겨 놓으셨단 말이지?”
“그럼 그 물건을 찾았겠네?”
사형제들은 한마디씩 했다.
“무림맹에 들어왔지만 쉽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주위에 저를 지켜보는 시선들이 너무 많았고…… 지금도 화산관 주위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놈들을 잡지 못했어? 사제라면 잡을 수 있지 않아?”
당우희가 물었다.
“놈들을 잡는다고 해도 또 다른 놈들이 나타날 겁니다.”
“그럼 물건을 찾지 않았다는 거야? 아직도?”
“호청 사저, 제가 허창에 가면서 그들의 시선이 분산될 때를 노렸습니다. 인양에게 부탁했지요.”
“그래서 인양을 두고 갔구나.”
“장소를 알고 있으니 인양이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사부님께선 그 물건을 황와정의 대들보에 숨겨 놓으셨는데, 그곳이 그동안 보수 공사를 했더군요.”
“…….”
고진유의 말에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냐?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럼 보수 공사를 한 인물들을 찾아야지.”
“인양이 황와정을 보수했던 목수들을 조사했습니다.”
“아…… 인양이 목수 일을 배운다고 나돌아 다녔던 게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그렇습니다.”
“어떻게 됐지?”
“보수 공사를 한 목수들은 전부 네 명이었고, 그중 철갑을 발견한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대목장입니다. 보수 공사를 한 후 곧바로 호북으로 떠났더군요. 인양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무한에 그의 친척이 있다고 합니다.”
인양과 파숙이 무림맹을 나서게 된 이유까지 알게 되었다.
“인양의 능력은 알지만…… 혼자서 힘들지 않겠니?”
“철갑을 찾는 게 아니라 우선 대목장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 사람을 찾는 일이라면 덜 위험하겠지.”
우종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의 말을 했다.
“모두 호정의 말을 잘 들었겠지? 무림맹에서의 행동에 좀 더 주의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사형!”
* * *
인양은 파숙과 함께 무림맹을 나섰다.
누구도 두 사람이 나간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양은 잘할 거야. 이 년 동안 지켜봤잖아. 똑똑한 녀석이야.”
고진유의 심란한 표정을 보며 묵경이 말했다.
“……그렇죠.”
무림맹에 들어서면 어렵지 않게 철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극일천을 상대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놈들을 끌어내려면…….’
고진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형.”
“왜?”
묵경이 입에 화과를 한 입 베어 문 채 고개를 돌렸다.
“철갑을 하나 만들어야겠어요.”
“무슨 철갑?”
“그들이 원하는 게 있잖아요.”
“……!”
와싹.
그가 입에 넣었던 화과를 빠르게 삼켰다.
“위험하지 않겠어?”
“그놈들을 끌어내기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청 달려들 텐데.”
“위험을 감수해야죠.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을 잡을 수 없어요. 그리고 인양이 움직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고진유의 말이 맞았다.
숨어 있는 극일천을 끌어내야 했다.
“좋아. 한번 해보지. 내가 도울 일은?”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화산지의 담을 넘어 하늘 높이 솟아오른 나무를 가리켰다.
“저기 나무 아래를 보면 돌들이 많이 쌓여 있어요. 그 아래에 가면 철갑처럼 만들어놓은 목갑이 있을 겁니다.”
“그건 또 뭔데?”
“인양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목수 일을 배웠다고 잘 만들더군요.”
“후후후, 그 녀석 손재주가 많아서 뭘 해도 잘하지.”
“인양이 떠나기 전에 방금 말한 장소에 숨겨놓았어요. 저녁에 가서 찾아오면 될 겁니다.”
“큭, 빠르네. 극일천 녀석들을 끌어내려고 이미 생각해 둔 거구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인양이 있을 때 혹시 몰라 준비는 했죠.”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지. 그럼 내가 그 물건을 가지고 오면 되는 건가?”
“화산지를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으니, 내가 가는 것보다 형이 복면을 하고 가면 더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하하, 잘 보여주고 오마.”
* * *
화산지 아래로 어둠이 밀려왔다.
묵경은 밖으로 나오기 전 얼굴에 복면부터 뒤집어썼다.
‘후후후, 이렇게 나가면 바로 따라붙겠지?’
휘익!
묵경은 신법을 펼치며 화산관을 나섰다.
화산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거리.
십문지의 정문 옆에 솟구친 고목으로 시커먼 이영이 최대한 내력을 숨긴 채 다가갔다.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묵경을 노려보는 시선들.
‘역시 철갑을 무림맹에 숨겨놓았어.’
묵경은 복면을 쓴 채 고목 아래로 몸을 숨겼다.
십문지 위사는 묵경의 기척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스으윽-
묵경이 천천히 각진 돌들을 위에서부터 치워냈다.
어느 순간, 돌을 치우던 손이 멈췄다.
손을 깊숙하게 넣은 묵경이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정확히 모양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한 자 정도의 크기의 상자가 분명했다.
묵경은 천을 펼친 뒤 상자를 싸서 묶었다.
그러고는 치운 돌들을 원래대로 놓은 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빛이 번쩍거렸다.
‘찾았다.’
칠 년 전에 잊어버린 물건.
드디어 철갑의 행방을 찾았다.
휘익!
다섯 방향에서 동시에 흩어지며 기가 사라졌다.
“얼씨구, 또 한 곳이 늘었네?”
고진유의 신형이 고목 아래에 나타났다.
‘한 곳은 또 어디지? 참 관심들도 많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