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호북 무한이라…… 무림맹에 들어오면 사부님이 숨긴 철갑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군.’
고진유는 묵경과 함께 황와정에 왔다.
정자에 올라선 그가 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하필이면 보수공사를 할 건 뭔지.”
“무슨 말이냐?”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묵경이 고개를 돌렸다.
“금관정이라고 해서 소문 듣고 왔더니 소리도 안 나길래요.”
“그 말이 아니잖아. 귀신은 속여도 난 못 속인다니깐.”
“후후…….”
“네가 웃는 걸 보니 찔린 모양인데. 음, 보자. 뜬금없이 금관정을 보고 싶다고 한 걸 보면…… 여기에 철갑을 숨겨놓았어. 맞지?”
고진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하튼 이젠 형은 못 속이겠네요. 저를 너무 잘 알아요.”
“부처님 손바닥이야.”
“사부님께서 저기 위 대들보에 숨겨놓으셨던 모양입니다.”
“……이런!”
천장은 너무나 깨끗하게 교체되어 있었다.
“여기를 고친 목수들을 빨리 찾아야겠는데.”
“인양이 벌써 목수들을 확인했어요.”
“아하, 그래서 인양을 무림맹에 두었구나.”
안 그래도 허창으로 가는 길에 인양을 두고 간다는 것이 이상했었다.
“하긴 인양이라면 잘 처리했겠지? 똑똑한 녀석이거든. 그래서 어떻게 됐냐?”
“여기서 보수 작업을 한 목수들은 총 네 명으로, 그중 세 명은 여기 근처에 살고 있는 걸로 확인했어요.”
“나머지 한 명은?”
“대목장 이춘광이란 사람은 호북 무한으로 갔다고 하더군요.”
“흐음…… 그들이 공사하던 도중 철갑을 찾아서 무림맹에 줬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제가 보기에 그럴 확률은 전혀 없습니다. 만일 무림맹에 철갑이 들어갔다면 우리 주위를 맴돌지 않을 겁니다.”
“맞군. 그들 손에 들어갔다면 우리 주위를 감시하지 않았겠지. 그들 중 수상한 인물은?”
“보수 공사가 끝난 직후 대목장은 곧바로 가족들과 함께 떠났다고 하더군요.”
“음. 수상하지 않아?”
“그렇긴 하죠. 갑자기 떠났다는 게.”
“누가 그 물건을 가지고 갔는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없다…….”
묵경이 보기에, 이젠 고진유가 무림맹에 온 이유가 사라진 셈이었다.
“이제 어떡할 건데? 그 물건을 얼른 찾아야지.”
“그렇긴 한데…… 주위에 날파리들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 됩니다.”
고진유는 정자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에고, 그렇구만.”
묵경도 함께 따라 누웠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시선들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선 대목장인 그자의 행방부터 찾아야 하지만요.”
“무한이라고 해도 정말 그곳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지? 내가 하오문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한번 부탁해 볼까?”
“화산도협이 사람을 찾기 위해 하오문에 의뢰했다고 소문이 나면 곤란합니다.”
“확실히…… 그 방법도 어렵군.”
“지금은 인양과 파 특사를 보낼까 싶습니다.”
“음, 개중 나은 방법인 것 같다.”
게다가 파숙은 포쾌 출신이니 사람 찾는 일에는 경험이 많을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중원에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심지어 철갑을 찾는 일이잖아. 두 사람만으로 괜찮겠어?”
“인양은 잘할 겁니다. 그리고 파 특사가 옆에서 도와주잖아요.”
고진유는 인양을 믿었다.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이제 중원에서 신법으로 인양을 따라올 자는 없을 터였다.
고진유는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볼까요?”
“그러지.”
황와정에서 나온 두 사람은 화산지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무림맹 팔군 대연무장 옆을 지나던 중.
헉헉-
무림맹 팔군 중 흑룡군 소속의 무인들.
흑룡군에 갓 들어온 무인들이 무리를 지은 채 달리고 있었다.
몸에는 무거운 훈련용 철갑의를 걸치고서 말이다.
“강하게 키우는군요.”
“무림맹이니까.”
묵경의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무림맹이기에 강해야 했다.
사파와 마도를 견제하기 위한 무림맹은 정파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분명했다.
고진유와 묵경은 흑룡군의 무인들이 지나갈 때까지 제자리에 멈췄다.
그들의 얼굴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때,
“겨우 산적 나부랭이를 이긴 것밖에 없는 놈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건들건들 돌아다니는군.”
두 사람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비꼬는 말투.
“귀에 익은 목소리군요.”
흑룡군 부군장 창천무룡 남궁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지 않아도 어떤 놈인지 단번에 알았다.
“쓸데없이 시비 걸다가 얻어터지지 말고 조용히 가라.”
묵경이 그를 보며 휘휘 손을 내저었다.
‘저자까지……!’
남궁한의 콧등에 진한 주름이 생겼다.
예전 같았으면 묵경의 존재는 자신과 격조차 맞지 않았다.
“풍류미군,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서문세가와 의를 상할 수 있소이다.”
“걱정도 팔자군. 그저 본 가일 뿐 난 서문세가와 상관없는 인물이니 굳이 연관시키지 마시게. 아, 서문세가 때문에 참는다는 말도 하지 말고 말일세. 맘대로 하셔도 되니깐.”
묵경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하, 십가 출신이라 좋게 봐주고자 했더니 매를 버는군. 그 잘난 얼굴 괜히 다치기 싫으면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가 말끝마다 반말이네. 야, 내가 후진하고 친구야. 얼마 전에 밥도 같이 먹었다고.”
묵경이 말하는 후진은 남궁 가주의 둘째 아들이었다.
“너도 그 친구 성격 알지?”
“…….”
남궁한은 부끄럽게도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다섯 형제 중 둘째인 남궁후진은 가주가 내놓았다는 소문이 들 정도로 무공 수련에는 관심이 없었다.
남궁세가에서는 포기한 인물이었지만, 사실 남궁한에게 가장 겁나는 인물은 아버지, 가주 남궁천문이 아니라 남궁후진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잘난 체한다면서 처맞은 적이 많았으니까.
지금이야 그보다 무공이 뛰어나다고 자신하지만,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둘째 형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남궁한의 표정에 고진유의 입가에서 실소가 나왔다.
“당신, 묵경 형의 말을 잘 들었으면 그냥 가시오.”
“크읏, 화산도협!”
슈우우욱-
순간, 호탄신(虎彈身)이 펼쳐진 동시에 고진유가 남궁한의 앞에 불쑥 다가섰다.
타악!
고진유가 남궁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지만, 공개된 장소에선 서로 예를 지키는 게 좋겠소. 존중이 중요하니까. 안 그렇소?”
‘언제…… 손을…….’
내력을 실은 눈빛이 남궁한을 쉽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오.”
“…….”
그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가는 고진유의 뒷모습.
남궁한은 곧바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비참해졌다.
‘열심히 했건만…… 어째서…….’
고진유에게 당했던 그날 이후 모든 시간을 수련에 매진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운이 빠졌다.
‘저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인가.’
그 순간,
피이이잇!
뒤에서 무언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남궁한이 회전하는 동시에 손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이건…….’
비검에 천이 묶여 있었다.
빠르게 주위를 살폈지만 십 장 주위로 어떠한 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지닌 자다.’
남궁한은 비검에 묶인 천을 풀었다.
-복수를 원한다면 교동으로 오너라.
천에 쓰여진 글자.
‘교동이라면…… 무림맹의 수련생들이 기거하는 건물인데…….’
남궁한은 천에 적힌 글을 한 번 더 읽으면서 결심했다.
‘그놈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할까.’
* * *
사패천 녹림.
현재 녹림에선 역사상 가장 강한 녹림인이 나타났다.
그는 녹림칠십이채의 녹림인들을 모두 꺾었다.
뿐만 아니라 장강수로사십팔채와 동정호 십팔채까지 한 자루 천녹도(天綠刀)로 모두 제압했다.
그렇게 녹림대존의 명호를 물려받은 그는 당당히 녹림궁으로 들어섰다.
그날 이후 녹림대존 독영한은 사파무림의 하늘, 사파총련의 수장으로 올라섰다.
이제 중원무림인들은 녹림궁을 가리켜 천하제일요새라 불렀다.
십만대산의 마교보다 녹림궁을 점령하기 더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그곳의 사방은 천길 낭떠러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외부에서 이어진 녹림교뿐이다.
저벅저벅.
그리고 지금.
녹림대존의 거처인 녹천(綠天)으로 들어서는 중년인의 걸음걸이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돼지와 같았다.
‘이거…… 죽을 맛이군.’
녹검당의 당주 채마현의 넓은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녹검살형 예향의 죽음에 대해 보고한 후, 한 걸음씩 녹천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의 작은 눈 속 갈색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정문에서 녹천의 가장 안쪽 건물인 대존원까지 가기 위해서는 곧장 똑바로 걸어야 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들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찌르는 듯했다.
성인의 두 배 정도 높은 입구.
잔뜩 긴장한 채마현이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구우우우우우웅-
문의 크기에 맞게 열리는 소리 또한 우렁찼다.
번쩍!
순간, 강렬한 붉은빛이 쏟아져 나오자 채마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크윽…… 점점 강해지고 있어.’
녹림대좌에 앉아 있을 뿐이거늘, 독영한의 적광기(赤光氣)는 녹천 전체를 밝히고도 남을 정도였다.
채마현은 곧바로 부복을 했다.
“녹림대존님을 뵙습니다.”
“일어나게.”
중후한 사내의 목소리.
바닥을 울리는 저음에서 강한 힘이 뻗쳐 나왔다.
“무림맹에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쫓겨났다더군. 사파가 수모를 당한 것 같지 않나.”
“송구하옵니다. 녹림대존님의 명이 떨어지면 지금 당장에라도 녹검야검이 움직일 것입니다.”
“녹검야검 홀로 말인가. 무림맹을 공격하는 게 아니었던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앞서 혼란을 일으키면 상황이 더 유리해질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겨우 녹검야검으로 혼란을 만들 수 있을까?”
불쾌한 기가 느껴졌다.
“죄, 죄송합니다. 소신은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무림맹 안으로 살수를 들여보내자는 결정이 진심이었군. 본 존이 지금까지 채 당주를 잘못 본 모양이야.”
“…….”
채마현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예전의 채 당주가 아니구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견이라 불릴 정도로 앞만 보고 가던 사람이었는데.”
“소신은…… 단지…… 무림맹과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하긴 무림맹과 전면전을 붙기에는 부담스럽겠지. 아니 그런가?”
“녹림대존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소신은 목숨을 다해 무림맹과 싸울 것입니다.”
“후후…… 당연히 앞장서서 싸울 사람이지. 내가 그대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네.”
독영한은 녹림좌에서 일어난 뒤 아래로 내려섰다.
한 계단씩 내려오는 거인의 걸음.
‘주…… 군.’
녹림대존이 걸었던 길을 뒤에서 따라 걸은 지 삼십 년이 지났다.
오늘 본 그의 뒷모습은 예전처럼 변함이 없었다.
‘내가…… 변한 것이었던가?’
젊은 시절의 그는 오로지 지키기 위해 안일하게 행동했던 선대의 녹림도들을 경멸했다.
새로운 녹림을 보여주겠다며 일어났던 자신도 어느덧 그들과 같아져 있었던가.
채마현은 그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주군, 소신이 멍청했습니다.”
뚝.
독영한은 돌아서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주군이란 말이 듣기 좋군. 오랜만에 자네다운 목소리였네.”
“감사합니다.”
“잠시 밖으로 나가세나. 쥐새끼들이 숨어 있는 것 같군.”
“…….”
채마현의 작은 눈이 단숨에 커졌다.
“소신이 당장 그놈들을 잡겠습니다.”
“자네는 느끼지 못할 거야. 어디에서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놈임에는 틀림없으니. 마치 유령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더군.”
“녹림비를 당장 풀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고생할 필요 없네. 녹림비로 잡을 수 있다면 모를까.”
“…….”
“심각한 표정 짓지 말게. 상황은 심각하지 않아.”
대존원은 녹림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채 당주, 우리가 만든 것들을 보게.”
녹림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난 말이지. 지금 너무 기분이 좋다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멀리서 바람이 불고 있어. 열기가 가득한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가?”
녹림대존 독영한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바람을 맞이했다.
“채 당주, 일단 그 녀석에게 한번 보내봐. 예향을 죽일 정도의 실력이 확실한지 궁금하군.”
“명을 따르겠습니다.”
* * *
화산관으로 돌아온 고진유는 인양과 함께 파숙을 찾았다.
“저희들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자리에 앉도록 하죠.”
고진유는 이미 준비된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물었다.
“파 특사는 지낼 만합니까?”
“넵. 많은 분들이 잘해주셔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한 잔 드세요.”
“고맙습니다.”
“다행히 무림맹의 물이 맞는 모양입니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고진유는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았다.
“파 특사에게 임무를 맡기고자 합니다.”
“말씀하시지요.”
“무림맹에 온 지 이틀도 안 됐는데 외부에 다시 나가야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근데 제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이번 일은 어느 사람보다 잘할 수 있을 겁니다.”
화산관에는 그보다 뛰어난 무인이 많았다.
그들보다 잘할 수 있다는 말에 파숙은 내용이 궁금해졌다.
“인양과 함께 호북으로 가서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파숙은 함께 들어온 인양을 보았다.
평소라면 바로 물어봤을 텐데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인 듯했다.
“사람 찾는 일이라면 제가 예전에 하던 일이라서 자신 있습니다.”
“허창에서 파 특사를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때마침 사람 찾을 일이 생기네요.”
“대사님, 찾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건 인양이 가는 길에 가르쳐 줄 겁니다.”
“네에.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진유는 말을 잠시 끊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 임무는 사람을 찾는 일이지만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될 만큼 중요합니다.”
‘목숨까지? 사람을 찾는 일인데?’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훔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극비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묵경 형과 인양, 파 특사가 전부입니다.”
‘목숨에? 극비까지?’
그저 사람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