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녹검살형 예향을 상대하는 고진유의 당당한 모습.
그에, 묵경 또한 물밀듯 밀려오는 산적들을 상대하면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훗.’
묵경은 피식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진유 아우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그를 보았을 땐 다듬어지지 않는 원석이라 여겼다.
잘 다듬는다면 빛을 뿌리는 보석이 되리라.
하지만 착각이었다.
‘아니, 이 녀석은 나를 만났을 때부터 이미 원석이 아니었어. 은은하며 고귀한 취옥(翠玉)……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몰라봤던 거야.’
파해도에 표류되기 전까지는 무공을 익힌 적이 없었다고 했다.
어린 고진유를 변화시킨 파해도에서의 수련.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물론, 그곳에서 고진유가 이룬 오 년의 짧은 수련이 중원에서 일백 년 동안 수련한 결과와 맞먹을 정도의 상황인지 그가 알 길은 없었다.
묵경은 결심했다.
‘난 그가 빛이 날 수 있도록 좀 더 닦아주기만 하면 돼.’
타아앗!
예향이 살녹검과 함께 앞으로 먼저 움직였다.
선수필승(先手必勝).
‘먼저 쳐야 한다!’
고진유는 강하다.
정면으로 맞상대하면 당한다.
이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선수로 움직이는 것.
두 사람의 간격은 짧았다.
녹검살형 예향의 검은 쾌(快)!
속전속결.
중원 무림의 쾌검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검이었지만.
‘빠르군. 하지만 전부 보여.’
상대가 고진유라는 게 운이 없었다.
그는 절대적 빠름에 이미 특화되어 있었다.
쉬익-!!
고진유가 허리를 숙이자, 무형의 살기를 감춘 녹살검이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반대로 예향의 눈엔 고진유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간을 뚫고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짧은 장면뿐.
‘빠, 빠르다!’
예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만히 당할 수 없었다.
“원강녹멸(圓降綠滅).”
전신의 내력을 끌어내며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초식을 펼쳤다.
예향의 주위로 녹색의 검기가 번쩍이며 퍼져 나갔다.
“피하라……!!”
복우산채 녹림도들이 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이미 예향에게 적과 아군의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
“화산도협!!!”
그의 눈에는 오직 화산도협만이 보일 뿐이었다.
“아아아악!!”
반응이 늦은 몇 명의 산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고진유의 사의검에서 열기가 흘러나왔다.
휘이이이익-!!
불꽃으로 승화한 매화 꽃잎이 휘날리며 그가 펼친 검기를 녹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원을 그리며 휘몰아친 화염의 꽃잎들이 예향의 주위를 둘러쌌다.
화르르르르-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불에 탄 뒤 사라졌다.
최후의 초식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허탈한 목소리가 나왔다.
“솔직히……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군.”
“살고 싶나?”
“내가 원한다면 살려주겠다는 것인가?”
“살기 싫소?”
“강…… 자의 자만심인가?”
“자만심은 무슨. 나를 죽이고자 하는 상대를 그냥 보내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사파와의 관계를 봐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이오.”
“하하, 하긴. 정파 놈들은 이래서 안 돼. 항상 뒷일을 생각하거든.”
예향은 살려주리란 생각이 들었는지 비꼬듯 말을 했다.
“……과연. 때로는 뒷일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군. 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다 일이 많아질까 싶어 머뭇거린 것인데. 도움이 되었소.”
고진유의 입가에 미소에 나타났다.
예향이 흠칫했다.
죽음의 미소.
그는 차라리 조용히 있었어야 했다.
“하나 한 가지는 똑바로 짚고 넘어가야겠지. 시작은 당신이 먼저였소. 난 말이오. 나를 죽이고자 한 사람을 살려줄 만큼 군자가 아니오.”
“자, 잠까……!”
쉬이이익-
예향의 눈앞으로 매화가 흐르기 시작했다.
매화영음(梅花影陰)의 초식.
고진유가 펼친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이미 탈형(脫形)의 경지에 들어섰다.
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하나의 초식만으로도 이십사수의 구결을 모두 펼칠 수 있었다.
사의검은 그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았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
완벽한 한 수에 예향은 사의검이 목을 지나갔음에도 깨닫지 못했다.
‘쓰러진…… 다.’
몸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그 순간.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
사방이 고요해졌다.
예향의 목이 떨어지자 복우산채주 방식후는 그 자리에서 무기를 바닥에 던졌다.
살아남은 녹림도들도 그를 따라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버렸다.
“헉…… 헉…….”
“허어어억…….”
군성창은 물론 나머지 다섯 명 또한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겼어…… 진짜…… 우리가 이길 줄이야……!!’
그들의 눈에 고진유의 뒷모습이 담겼다.
거대한 태산과도 같은 절대고수의 존재.
‘이런 것이었나?’
스윽.
고진유가 뒤를 돌아보자, 그의 환한 얼굴이 천천히 비치기 시작했다.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미소에, 여섯 명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 * *
복우산을 벗어난 뒤부터 일행은 평온하게 움직였다.
정주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 관문.
무림관문은 일 년 내내 많은 백성으로 가득했다.
“아아…… 이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빨리 줄을 서도록 하겠습니다.”
파숙은 다급히 무림관문으로 달려가고자 했다.
“파숙 형님, 뛰지 않아도 됩니다.”
“엉, 왜?”
무림맹으로 오는 사이 파숙은 기존의 특사조들과 친한 사이가 되었다.
“우린 무림맹 소속이라 그냥 통과하면 됩니다.”
“그래? 하아, 다행이네.”
파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줄만 보면 최소한 반시진 정도는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무림관문으로 가까이 가는 도중,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성창, 저기 싸우는데?”
“늘 있는 일입니다.”
군성창은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대답했다.
무림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지 않고 곧장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끝내는 뒤로 물러난 뒤 줄을 설 수밖에 없었다.
채애애앵!!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십여 명의 무인들이 무림관문 위사를 둘러싸고는 위협적으로 검을 뽑았다.
“우리한테 줄을 서라고? 겨우 위사 따위가 명령을 해? 죽고 싶나?”
“지금 무슨 짓이오?!”
“네놈이 본 문을 무시했으니 당연히 혼이 나야 마땅하다. 내가 형산파의 가웅이라고 신분을 밝혔거늘, 감히 뒤에 가서 줄을 서라고?”
“형산파를 무시한 건 절대로 아닙니다. 형산파의 무인이라고 해도 무림맹 소속의 무인이 아니면 줄을 서는 게 당연하외다. 제 임무가…….”
파앗!
중년 사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의 검이 관문 위사의 목에 닿았다.
“아직도 나불거리고 있군. 네놈이 무림맹 소속이니 내가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해 자신만만한가? 똑바로 들어라. 맹주가 본 문에 친히 무림맹에 합류를 부탁한다는 친서를 보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만큼 본 형산파를 모시고 싶다는 말이다. 조만간 중원대사가 될 것이란 뜻이란 말이다!”
“…….”
관문 위사 척소양은 검이 목에 닿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오늘 일진이 더럽군.’
형산파의 호천검 가웅.
소문에 의하면 성격이 급한 데다 손속이 맵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최근 무림에서 형산파의 위세는 구파일방에 육박할 정도로 대단했다.
점창파를 밀어내고 형산파가 십문에 들어갈 거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로 말이다.
“본인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당장 옆으로 물러나라! 물러나지 않겠다면, 죽이지는 않겠지만 팔다리 하나쯤은 사라지게 해주마.”
가웅의 눈빛은 협박이 아니었다.
정말로 팔다리를 자를 기세에, 척소양이 망설일 때였다.
“척 호위, 무슨 일이 있소이까?”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척호상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림관문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일행 사이에 선 젊은 사내.
허창으로 떠났던 화산대사 고진유였다.
‘아…….’
얼마나 반가웠으면 눈물이 핑 돌 뻔했다.
“화산대사님! 돌아오셨습니까?”
“오랜만이외다.”
“네에…….”
가웅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이 녀석이…… 화산도협이군.’
소문으로만 듣던 화산파의 젊은 도사.
최근 중원에서 무공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한 탓에,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이분들은 누구시오?”
척소양이 대답하기 전에 가웅이 먼저 나섰다.
“본인은 형산파의 가웅이라 한다.”
“……그렇습니까? 본도는 화산대사인 고진유라 합니다.”
“오호. 자네가 화산대사인가? 반갑네.”
그때, 척소양이 곧바로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
“호천검께서는 실례를 하는 것 같습니다. 화산도협께서 비록 한 배 아래지만 무림맹 중원 대사의 신분이십니다. 함부로 하대를 할 수 없습니다.”
“…….”
가웅의 표정이 굳어지며 척소양을 노려보았다.
“본인 또한 중원대사가 될 신분이다.”
“죄송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설령 중원대사가 되신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네놈이…… 겨우 관문 위사 주제에 본인에게 훈계를 하는 것이더냐?!”
쉬이익!
부지불식간에 가웅의 검이 척소양의 왼팔을 향해 떨어졌다.
‘피할 수 없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척소양은 피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짜아악!!
“……!!”
세상에 이보다 찰진 소리는 듣지 못했다.
‘뭐…… 지?’
척소양은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상황을 살폈다.
가웅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간 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왼쪽 뺨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 산…… 도…… 협.”
그가 이를 갈며 천천히 이름을 불렀다.
“화산대사라 부르시오.”
위엄이 실린 고진유의 음성에 그는 저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감히 무림맹의 인물을 해치려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화산대사, 본인은 무림맹주의 부탁에 의해 왔…… 소.”
“무림맹주의 부탁을 받았다고 해서 이런 짓이 괜찮았던가?”
‘망할 새끼가…… 사람들도 많은데…….’
가웅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무림관문에서 수많은 백성들의 시선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싸우지도 못한 채 제압당했다고 소문이 날 것이다.’
하지만 고진유와 싸워 지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있었다.
그는 철저히 실리를 따지는 성격이었다.
‘와신상담이라 하지 않았나. 때를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
“……알겠소. 뒤에 가서 줄을 서겠소이다.”
가웅이 줄을 서기 위해 그의 일행과 뒤로 물러났다.
고진유는 그 모습을 보며 실소가 나왔다.
‘이것 봐라. 상당히 약은 인물이잖아.’
그는 전혀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잠깐.”
“왜 그러시오? 무림맹에서 원하는 대로 줄을 서고자 하지 않소이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소?”
그냥 넘어가지 않을 듯 보이자, 형산파 일행 사이에서 젊은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화산대사, 너무하는 게 아니오? 사부님이 겨우 무림관문 위사에게 사과를 해야겠소?”
“그대는 누구인지?”
“형산파 제자 이역봉이오.”
“이거 참. 형산파는 무림의 예에 대한 교육은 따로 하지 않는 모양이군.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는데 함부로 불쑥 끼어들다니.”
“하! 그건 대체 무슨 말이오? 그대와 나는 같은 동배이지 않소?”
“아까 척 위사의 말이 들리지 않았나? 내 신분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고진유는 목소리의 음성을 높였다.
“그거야…… 화산대사이지…… 않소.”
“똑바로 다시 말해보시오.”
“……그, 그건…….”
이역봉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그리고 온몸을 죄어오는 무형기에 서서히 주저앉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상관이나 어른이 이야기할 때에는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것이오. 이번 한 번은 어른으로서 용서하겠소.”
스윽.
고진유는 천천히 내력을 거두어들었다.
‘하아아…….’
가슴을 누르던 압박이 사라지고 나서야 이역봉은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망신이야. 형산파의 위신이 떨어졌어.’
가웅은 빠르게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형산파는 화산파에게 안 되지. 안 그런가?”
“당연하지 않나. 얼마 전에도 화산도협님께서 녹림의 복우산채를 단번에 박살 냈다더군.”
“나도 소문을 들었네. 단칼에 녹검살형의 목을 베었다고 하던걸?”
소곤거리는 목소리들.
형산파는 완전히 화산파에 밀렸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인식을 바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도협과 싸워 이겨야 한다.’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필요 없었다.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 기회를 기다린다.’
가웅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무엇이 미안합니까? 정확하게 하시오.”
고진유는 여전히 두리둥실 그냥 넘어갈 것처럼 구는 가웅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짚었다.
‘이 자식이…….’
그냥 넘어가려고 해도 도저히 고진유에게서 피할 방법이 없었다.
가웅은 결국 척소양의 앞에 다가섰다.
“위사,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용서하시구려.”
“괜찮습니다.”
척소양은 진중히 가웅의 사과를 받았다.
결국 형산파 일행은 길게 이어진 줄 뒤로 갔다.
고개를 숙인 채 줄을 선 가웅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두고 보자…… 어쭙잖은 허명만 믿고 잘난 체하는 네놈에게 언젠가는 복수해 주마…….’
꽈악!
가웅의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무림관문을 통과한 일행은 곧장 무림맹으로 향했다.
정문에 가까워지자 정문 위사가 자세를 똑바로 하며 인사했다.
“화산대사님을 뵙습니다!”
“수고하시오.”
그렇게 일행이 문을 통과하려 할 때,
“대사님, 맹주님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곧장 찾아오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에이, 이제 좀 쉬려니까.’
화산지에 가서 잠시 쉬고 맹주전으로 갈 생각이었다.
“묵경 형, 안 되겠네요. 맹주전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화산지에 먼저 가 계세요.”
“알겠다. 우린 먼저 가 있을게. 갔다 와.”
고진유는 일행과 헤어진 후 혼자 맹주전으로 움직였다.
맹주전으로 가는 도중에도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