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부혈당에서 나온 세 사람, 문주를 포함한 두 명은 고진유를 믿게 되었다.
고진유는 그들이 아는 정파 소속의 무인과는 달랐다.
조의문과 부혈당의 인물들은 고진유가 어떤 말을 할지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여러분들을 모이게 한 이유는 이번 사건에 대한 모든 조사를 마쳤기 때문입니다. 본도의 조사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끝까지 들어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우선 사건이 일어난 시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꿀꺽.
긴장감이 두 진영 사이에 감돌았다.
고진유는 사건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조의문 소속의 다섯 명은 길을 가는 도중 여자를 끌고 가려는 사내를 보았소이다. 무슨 일인지 가까이 다가서자 사내가 부혈당의 무인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들로서는 당연히 여인을 구하기 위해 부혈당의 무인과 시비가 붙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것 중 틀린 게 있다고 생각하시면 말씀하시지요.”
“없소.”
“맞소이다.”
감천욱과 임추묵은 고진유의 말을 동시에 인정했다.
“다만 조의문 소속의 다섯 명이 취한 행동은 매끄럽지 못했던 것이 맞습니다.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폭력을 쓴 건 분명히 잘못한 것이지요. 비록 그 여자가 구해달라며 도움을 청했다곤 하지만, 사실 확인을 한 뒤 행동하는 게 올바른 방법이니까요. 더구나 문제가 될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도 곧바로 확인했어야 했습니다.”
그녀만 남아 있었다면 간단한 다툼이 두 문파간의 문제로 확대될 이유도 없었을 것이었다.
“물론 그 여자가 있든 없든 먼저 폭력을 취한 건 조의문이지요. 사과를 하면 끝날 일이었습니다.”
고진유가 말한 대로 사실 간단한 문제였다.
부혈당에 정식으로 사과했으면 될 일이 아니었나.
문제는 정파와 사파 간의 자존심이었다.
그 중간에 여러 사람들의 감정까지 섞이자, 점점 화염이 퍼져 나가듯 감정싸움으로 변해간 것이다.
“두 분께서는 이 일이 문파 간에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큰일이라 봅니까?”
“그건…… 아니지만…… 부혈당에서 너무 과하게 반응을 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어허! 감 문주. 우리가 과한 반응을 보인 게 아니라 그대들이 본 문의 수하를 타이르면 될 것을 때려죽이지 않았소이까?”
“우린 죽일 정도로……!”
척!
“잠깐. 두 분께서는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습니다.”
고진유는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말렸다.
“아직 본도의 말이 끝나지 않았소이다. 다시 조사한 내용을 알려 드리지요. 두 분께서 싸움이 일어난 원인에 주목했다면, 이상하다고 느끼셨을 것입니다. 사라진 여인은 찾아보셨습니까?”
“화산도협께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소이다. 하나 가장 큰 문제는 본 문의 인물을 죽였다는 것이외다!”
임추묵도 사건의 발단이 된 여인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굳이 찾지 않았다.
본 문의 인물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결과가 더 중요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 장면을 봤더군요. 목격자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혼을 내준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종합하면, 특히 무공을 익힌 인물이 그 정도에 맞아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의미로 말하는 것인지?”
그 순간, 임추묵은 고진유의 말속에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았다.
“부혈당에서 죽은 자의 시신을 어떻게 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담 총관이…….”
임추묵은 옆에 앉은 총관 담여진을 돌아보았다.
“화…… 장을 했습니다.”
담여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임추묵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담 총관, 화장한 이유가 있는가?”
“장례를 간단히 처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고진유는 담여진을 보며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로 그 이유였습니까?”
“그렇소이다.”
담여진은 안정을 찾았는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알아낸 사실과는 다르군요. 시신을 빨리 화장한 이유는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담여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주님,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화산도협도 역시 정파의 인물. 모든 책임을 본 문에 전가하려고 하고 있군요!”
“담 총관, 잠시만 기다리게.”
“문주님!”
임추묵이 흥분한 그를 말렸다.
화장한 이유가 따로 있다면 부혈당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화산도협께서는 방금 한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소이까?”
“난 책임지지 못하는 말을 하지 않소.”
슈우우우욱---!!
고진유는 내력을 끌어냈다.
‘우우우욱.’
임추묵은 물론, 담여진과 금도엽 또한 온몸을 짓누르는 매화 향의 기운에 주저앉을 정도였다.
‘엄…… 청난 내공이다. 우린 상대가 되지 않아…….’
“임 문주님. 본도가 증거도 없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맹주님께선 본도를 조의문에 내려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 알겠소이다. 그렇다면 화산도협, 증거를 보여주시오.”
고진유는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부혈당의 무인은 조의문의 무인들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여인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녀가 그를 중독시킨 후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꾸며 조의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지요.”
“그, 그런……! 독살이라면 흔적이 보였을 것이외다!”
“죽은 그날에는 독살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독에 중독된 시신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처리하려면 화장시키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겁니다.”
담여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화산도협,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그건 단지 그대의 추측이지 않소이까? 독살을 당했다는 증거가 없소이다!”
“그렇지요. 증거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증거를 보여주고자 이곳에 모인 것이지.”
고진유의 걸음이 향한 곳은 한 바위 앞.
우우우웅-
그의 손에 내력이 맺히고,
콰아아아앙!!
바위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뒤로 날아갔다.
“파 특사.”
휘이익!
파숙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사라진 바위 아래 땅을 팠다.
“임 문주님, 저기 그 시신이 있을 것입니다. 확인을 해보시지요.”
“그게 무슨…… 흐읍!”
임추묵은 가까이 다가가다 코를 막았다.
중독에 의해 썩은 냄새가 진동했지만, 시신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담 총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문…… 주…….”
담여진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거렸다.
화장시킨 시신이 바위 아래에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여기서…… 도망…… 을…….’
하지만 그보다 빠른 움직임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어딜 가려고 하시나?”
묵경이었다.
핏핏핏!
바로 점혈을 누르자 담여진이 그대로 쓰러졌다.
감천욱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며 얼굴이 굳어졌다.
총관 담여진은 모든 내용을 알고 있었다.
“네놈이…… 감히…… 본 문을 멸문시키고자 해?!”
배신감에 의해 그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고진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모두 놀랐을 것이라 봅니다.”
“허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외다. 부혈당에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본인도 조의문에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임추묵은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슬렀다.
“두 분의 잘못은 없소이다. 이번 사건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중독시킨 뒤 사라진 그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알아냈습니다.”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짓을 한 겁니까?”
“절강비독가(浙江秘毒家)의 인물이더군요.”
암살독가(暗殺毒家)로 알려진 무림의 문파.
고진유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그 멀리서 대체…… 무슨 이익이 있어 싸움을 붙였단 말이오?”
“임 문주의 말씀이 맞소이다. 우린 그리 큰 문파도 아니지 않소이까?”
“그건 알 수 없지요. 그대로 흘러갔다면, 이번 사건이 과연 두 문파에서 끝이 났겠습니까?”
“…….”
“…….”
감천욱과 임추묵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는 말이 있다.
“절강비독가를 이용한 세력이 있다는 뜻이군요.”
그들이 원하는 게 무림의 전쟁이라면, 조의문과 부혈당의 갈등은 그 시발점이 되기 충분했다.
“저놈을 당장……!”
임추묵은 점혈을 당한 담여진을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목을 베고 싶었다.
“화산도협, 이자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겠군요.”
“누가 있다는 것인지……?”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황장곡으로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인상이 강렬하고, 스쳐보는 눈빛만으로 사람의 목을 벨 듯했다.
“하하하, 화산에서 또 한 명의 인물이 무림에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거짓이 아니군.”
‘헉…… 저분은…….’
사파오패천의 사패천, 녹림의 인물.
녹검살형(綠劍殺刑) 예향이었다.
현 사파총련의 총련주가 녹림의 주인 녹림대존인 만큼, 현재 녹림은 무림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곳 중 하나였다.
임추묵은 경기를 일으킨 듯 자리에서 일어난 뒤 허리를 숙였다.
“예향 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그렇사옵니다.”
임추묵의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었다. 그만큼 예향의 존재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예향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못하는 담여진 앞으로 다가섰다.
번쩍.
그의 손이 움직이자 혈광이 사방으로 퍼졌다.
투우욱…….
담여진의 머리가 순식간에 잘려 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사파의 자존심을 잃은 놈은 숨을 쉴 가치가 없다.”
고진유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예향이 말했다.
“별로 인상이 좋지 않구려.”
“굳이 이 자리에서 죽일 필요는 없지 않았소?”
“후후후, 필요가 없으니까.”
“당신을 보니 정파에서 사파, 사파 노래하는 이유를 알겠소이다.”
“크하하하하!!”
예향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대는 재미있는 사람이로군. 내 앞에서 당당하게 사파를 욕하다니.”
“욕은 아니오. 혈사천주도 만나봤지만, 사파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더군요.”
“혈사천주님을 만났다니 영광이었겠소.”
“뭘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영광까지.”
예향은 흥미롭다는 듯 고진유를 훑어보았다.
“바쁘지 않다면 술이라도 한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싶군.”
“난 혈향을 피우는 사람과는 같이 앉고 싶은 생각이 없소이다.”
‘이 녀석 봐라.’
고진유의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날카로운 예살기를 쏟아냈지만, 너무나 간단하게 막아냈다.
“이번 사건은 모든 게 끝이 났소이다. 서로 볼일이 없으니 그만 물러나도록 하지요.”
“무림맹에서 일을 잘 처리하는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것을. 그래도 화산도협, 그대를 만나게 돼서 나쁘지는 않은 것 같소. 다음에 마주치면 한바탕 검무를 펼칠 수 있겠지?”
“얼마든지.”
“크큭, 조만간 빠른 시일 내에 만났으면 하는 바이네.”
“때가 되면 만나지 않겠소? 굳이 바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고진유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우린 돌아가도록 하죠.”
“아, 알겠소이다.”
조의문의 인물들은 얼른 고진유를 따라나섰다.
이후, 황장곡에서 밝힌 사건의 전말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조의문과 부혈당이 싸우지 않고 해결된 것은 화산도협 고진유가 사건의 전말을 밝혔기 때문이다.
또 한 번 고진유에 대한 소문이 허창을 넘어 중원으로 퍼지고 있었다.
* * *
좌탁에 앉은 채 눈을 감은 중년 사내.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에 가느다란 눈썹과 얇은 입술이 조화를 이룬 탓에 첫인상은 깔끔한 모습이었다.
우문전의 전주 시도정.
올해 나이 사십오 세이지만 여전히 삼십 대 초반으로 볼 만큼 동안의 얼굴이었다.
스윽.
하지만 그가 눈을 뜨자 단번에 인상이 바뀌었다.
공막의 붉은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다.
“실패했다?”
“송구하옵니다.”
“무림맹과 사파총련이 부딪히도록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나?”
“계획대로 되었다면 부딪혔을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지?”
“무림맹주가 팔군이 아닌 특사조를 보냈습니다. 특사조가 화산대사였습니다.”
“요즘에는 곰도 머리를 쓸 줄 아는군. 제법이야.”
시도정은 무림맹주 황보강을 무시했다.
그가 올라온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화산대사가 화산도협이란 놈이었군. 최근에 나하중 님을 꽤나 귀찮게 만들었던.”
“그렇사옵니다.”
“육십사괘무장 천무괘가 당할 정도면 무공도 상당히 뛰어나다는 뜻이고.”
“그건 천무괘장 사가 방심을 한 탓이라 했습니다.”
“자네는 그걸 믿나? 무인에게 방심이란 있을 수 없다. 멍청한 놈.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실력이 없다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소신이 모자랐습니다. 본 천의 일을 방해한 화산도협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괘씸하긴 하지만 그 녀석은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철갑을 찾는 게 우선이지.”
“…….”
“머뭇거리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철갑의 존재를 찾기 위해 놈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압니다만…… 본전에서 화산도협을 먼저 잡아 철갑의 행방을 물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천문전에서 철갑을 찾을 때까지, 화산도협을 건드리지 않고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
파앗---!!
시도정의 붉은 홍살기가 명주공의 이마에 뻗쳤다.
“……!!!”
한 치라도 더 뻗었다면 절명했을 것이다.
“죽고 싶은가?”
덥석.
명주공은 그 자리에서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아니면, 본 천에 분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모양이군.”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단지 주공께서 천주님께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으시길 바랐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지낸 정으로 한 번은 용서하겠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명주공은 떨며 몸을 일으켰다.
두려움에 고개를 들어 시도정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명주공, 물어보지. 놈을 잡을 방법은 생각했나?”
“…….”
스윽.
명주공이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네가 조용히 움직인다면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문전의 뜻이 아니라 자네 혼자서 한 짓이지 않는가?”
“……주공, 그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처억.
명주공은 허리를 숙인 뒤 우문전을 나섰다.
‘……주공께서도 은근히 천문전을 견제하고 계신 것 같군.’
극일천의 차기 후계자 자리.
시도정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철갑은 당연히 중요하지. 하나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어.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다는 것.’
명주공은 놈을 잡는다면 철갑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좋았어. 이번 기회에 주공께 점수도 따고 내 존재까지 천주님께 보여줄 수 있다.’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