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고진유는 중원상국에서 이틀을 더 보냈다.
대부분의 시간은 조강천과 보냈다.
무림맹으로 떠나기 전에 그를 위해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의 혈맥에 흐르는 탁기를 조절하고 신단전의 기초를 쌓기 위해 준비해야 했다.
혼자서 일화단심공의 구결을 외우며 운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이틀이 되어서야 운기를 스스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만일 고진유가 앞장서며 그의 운기를 도우지 않았다면 절대로 스스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사부…… 사부…… 됐습니다. 드디어…… 저도…… 운기가 가능해졌습니다.”
“잘했습니다.”
조강천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겨우 한 걸음 일어난 것이오. 지금부터 중요하외다. 무리한다면 모든 게 사라질 수 있소. 막 일어선 아이가 걷기도 전에 뛰어다닐 수 없지 않소이까.”
“흑……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항상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단전의 위치에 한 시진 동안 운기가 가능해질 때까지 계속하세요. 그리고 그때가 되면 무림맹에 찾아오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자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조강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절을 했다.
“사부, 만나뵐 때까지 늘 건강하십시오.”
* * *
화산파 일행은 조용히 중원상국을 나서겠다고 했다.
별궁까지 찾아온 조천항은 정문까지 따라 나온 뒤 직접 배웅을 하겠다는 것을 말렸다.
“허허. 화산도협, 섭섭하구려.”
“대접 잘 받고 갑니다.”
“담에 지나갈 일 생기면 꼭 들르게나.”
“그렇게 하지요.”
조천항은 고진유와 인사를 나눈 뒤에도 일일이 한 명씩 나누기 시작했다.
고진유의 앞으로 수한이 다가섰다.
“수한 선생께서는 어째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그렇게 보이오?”
“눈가에 푸른빛이 보이는 걸로 봐서 잠을 못 주무신 듯한데…….”
“후후…… 그럴 일이 생겼소이다. 아마 그대가 국주님을 만난 뒤에 일어난 일인 것 같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니외다. 이번 기회에 주위를 살펴보는 것도 좋지 않겠소이까.”
수한은 시선을 돌려 묵경과 환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조천항을 보았다.
“뭐랄까. 일공자가 조금 변했소이다.”
“그런가요?”
“예전에는 사람을 대하면서 웃는 모습이 없었지요. 오직 황금 이외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근데 이번에 황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고 생각한 것 같소이다.”
스윽.
조천항이 쳐다보는 느낌을 받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수한 선생, 무슨 할 말이라도 있소이까?”
“아닙니다. 그만 떠난다고 하는군요.”
일행은 낙양을 지나 무림맹이 있는 정주로 길을 나섰다.
장두총은 괜히 몸이 무거웠다.
“하아…… 며칠 동안 너무 편하게 지냈다.”
“나도 그래. 놀고먹는 팔자는 아닌가 봐.”
“본 문에 있을 땐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자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는데. 이것도 어렵구만.”
일행도 장두총과 곽우의 말처럼 같은 생각이었다.
“묵경 형. 무림맹까지 얼마 정도 남았지?”
“여기서는 금방이야. 중간에 별일 없으면 칠주야 내에 도착하겠지.”
“흐음…… 무림맹에 간다고 하니 좀 떨리긴 하네요.”
“어머나, 호정 사제도 떨려?”
연자련이 신기한 듯 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본 문에서 나올 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떨리네요.”
“후훗, 사제도 사람이긴 하구나. 난 심장이 철로 된 줄 알았지 뭐니.”
“호화 사저, 제가 뭐 괴물입니까?”
“맞아. 난 네가 워낙 겁이 없어서 심장이 없는 줄 알았다.”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는 혁자영도 의외인 듯 한소리 했다.
“제가 무슨 괴물이라뇨…… 심장이 없거나 철이라니…….”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니 그러는 거 아냐. 가끔 생각 없이 나서는 걸 보면 네놈은 나보다 더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후후, 호경 너도 스스로 생각이 없다고 여기기도 하는 모양이구나.”
앞서가던 우종성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호진 사형, 그래도 요즘은 예전과 달리 호경 사형이 많이 좋아졌잖아요!”
그 말에 장두총이 아닌 당우희가 톡 튀어나오자, 우종성이 바로 옆에 곽우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뭘까?”
“음, 제가 연애론적으로 연구를 한 서책을 봤을 때 좋아하는 사람이 공격당할 때 은근슬쩍 좋은 말을 하는 것은…….”
“호민 사형,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전부 들리는데요!!”
곽우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멈췄다.
“아니…… 그냥 책이 그렇다고.”
“그런 서책이 어디 있어요? 말도 안 돼.”
“본 문에 가면 내 서재에 있거든.”
“그래요? 나중에 돌아가면 보여주세요. 실제로 그런 내용이 있나 보게요.”
“…….”
곽우는 고개를 돌려 우종성에게 속삭였다.
“뭔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다.”
그때 다시 당우희의 말이 뒤에서 쏟아졌다.
“두 분 지금 속닥거리는 것도 다 들리거든요!”
“어…… 미안.”
* * *
정주로 향하는 길은 심심할 정도로 순탄했다.
그리고 정주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 관문.
웅성웅성.
협곡 사이에 지어진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무림맹으로 가려면 저곳을 지나가는 모양이군.”
“우리도 줄을 서야겠어요.”
인양은 빠르게 움직이며 줄 뒤로 섰다.
“빨리들 오세요!”
일행도 먼저 줄을 선 인양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 후 이각이 지났지만 길게 늘어선 줄은 전혀 줄어들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장두총은 연신 관문 방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뭐 하는지 모르지만 관문 앞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일행이 줄을 서지 않고 관문으로 다가섰다.
“저것들은 뭐야?”
묵경도 기다리느라 짜증이 났는지 곧바로 통과한 일행을 흘겼다.
“도사님들, 저들은 무림맹의 무인들입니다.”
묵경의 앞에 있던 중년 사내가 대답했다.
“무림맹의 무인이라면 줄을 서지 않고 바로 통과하는 겁니까?”
“원래 이곳에서는 검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주성에 들어갈 때 검문을 하기 때문에 따로 필요가 없었거든요.”
“그럼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왜 지금은 합니까?”
“오 년 전, 정주성에 사파나 마도의 인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무림관문을 세웠기 때문이지요. 정파 무림의 성지라면서요.”
“무림관문을 세운 이유는 알겠지만, 모두 동등하게 대해야 할 텐데요? 무림맹의 사람이라 특혜를 주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저희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림맹의 무인들인데요…….”
“그건 맞는 말이군요.”
일반 백성들이 무림인을 상대로 시비를 따질 수 없었다.
묵경은 대답하며 고진유를 슬쩍 쳐다보았다.
‘의외인걸?’
바로 나설 줄 알았건만, 특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
‘성격상 부조리하면 바로 움직였을 텐데. 이상한데?’
고진유가 가만히 있자 일행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금 이각 정도가 지나고, 드디어 일행 바로 앞에 선 백성들이 검문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두두두두-
또 다른 무리들.
이번에는 마차 한 대가 빠르게 그들을 앞질렀다.
마차 위로 무림맹기가 펄럭거렸다.
“또 무림맹이야?”
마차는 관문을 통과한 뒤 빠르게 사라졌다.
고진유는 여전히 별말이 없었다.
“다음!”
드디어 무림맹의 관문 위사가 손짓했다.
고진유는 앞장서며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관문 위사 척소양은 도착한 일행을 살폈다.
도복을 입은 도사들과 안 입은 사내 둘.
‘처음 보는 얼굴들이군. 어디 출신이지?’
도복 끝에서 매화 문양이 보였다.
‘삼매화? 상당히 젊은데?’
화산파 매화검인을 가리키는 문양이다.
“화산에서 오셨소이까?”
정파의 수장격인 화산파의 도사들이니 척소양은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소이다.”
“저기 두 사람은?”
그는 묵경과 인양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본도의 의형과 의제이외다.”
“혹시 신분을 알 수 있겠소이까?”
고진유는 이미 손에 들고 있던 신패를 보여주었다.
매화신패가 확실했다.
뒤편에는 ‘호정’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호정이라면…… 그대들이 화산칠협이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호정이라는 도명에 뒤로 화산파 제자들이 일곱 명.
척.
척소양은 바로 포권을 했다.
“화산칠협을 만나서 되어 영광이외다. 척소경이라 하오.”
고진유도 가볍게 포권을 받아주었다.
“화산칠협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본 문인 화산파를 대표해서 대사직으로 오게 되었소.”
“예? 혹시 십문십가의 중원 대사…… 를 말…… 하는 것입니까?”
“맞소이다.”
“그렇지만 그대는…… 화산파의 삼대제자가 아니오?”
중원대사를 맡는다는 말에 놀랐는지 목소리가 더듬거렸다.
“맞소. 무슨 문제가 있소이까?”
“그건…… 아니지만…….”
“본도가 그걸 당신에게 알려줘야 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중원대사직은 각 문파의 당주급에 해당하는 인물이거나 일대제자의 신분이 보통이다.
삼대제자가 맡은 적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소?”
“드, 들어가십시오.”
척소양은 슬그머니 말을 올렸다.
중원대사직은 무림맹에서 중요한 보직이기에 관문 위사가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없었다.
“고맙소이다.”
고진유와 함께 일행이 정주로 향하는 관문을 넘어섰다.
‘허어…… 화산파에서 무슨 생각으로 삼대제자를 보냈는지 모르겠군. 본 맹이 한바탕 소란스럽겠어.’
* * *
무림맹 중원십문십가.
구파일방의 십문(十門)과 열 개의 가문을 가리켜 십가(十家)라 했다.
십가의 한 곳 남궁지(南宮地)로 한 인영이 빠르게 들어섰다.
드르륵.
그리고 두 명의 사내 앞에 부복했다.
“어허. 보고도 없이 들어오다니.”
“죄송합니다. 다급한 일이라 보고할 틈이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정문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화산파에서 중원대사가 도착했습니다.”
남궁강은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화산파에서 사람이 온 게 무슨 대수라고 호들갑인가?”
“화산파에서 보낸 중원대사가 바로 화산도협이라 합니다.”
벌떡!
남궁강과 함께 앉아 있던 청년이 자리에서 다급히 일어났다.
청년은 창천무룡 남궁한이었다.
“방금 화산도협이라 했소?”
“그렇습니다.”
“중원대사를 따라 그자가 동행을 했다는 거요?”
“그게 아니라, 그가 화산파의 대표로 왔다고 합니다.”
“하.”
남궁한은 숙부 남궁강이 있는 자리 앞이라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허, 화산파에서 너무 장난이 심하군. 화산도협이라면 삼대제자로 알고 있거늘. 무림맹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가!”
“숙부님, 화산파의 기세가 떨어진 듯합니다. 얼마나 이곳에 보낼 인물이 없으면 중원대사로 삼대제자를 보내겠습니까?”
“후후후, 그렇군. 당장 십문에서도 말이 많겠어.”
남궁강은 남의 집에 불난 것을 구경하는 맛이 있을 듯싶었다.
“여하튼 화산도협을 한번 만나보고 싶긴 했는데 잘됐군. 창천기검이신 남궁허 형님의 칭찬을 받은 인물이지 않으냐?”
“…….”
“이 년 전 비무에서 너를 이겼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떠한지 궁금하군.”
“숙부님, 그때는 제가 방심을 했습니다. 당장 그와 비무를 하게 된다면 제게 십초지적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호, 자신이 있다는 말이구나. 하긴 지금 너의 무공은 나를 능가하지 않느냐.”
남궁한이 사내를 보며 물었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소?”
“십문지로 가는 중일 것입니다.”
‘화산도협. 드디어…… 그날의 복수를 할 때가 왔다.’
남궁한의 눈동자가 점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주위에 모여드는 시선들이 따가웠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맹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런 눈길을 받을 것을 알았다.
장두총은 주위 시선들을 살폈다.
“쳇, 우릴 이상한 시선으로 보고 있군.”
“예상했던 일이 아니더냐. 삼대제자가 중원대사로 왔다고 하니 이상할 수밖에. 신경 쓸 필요 없다. 당사자도 아무렇지 않으니.”
우종성의 말처럼 고진유는 편안한 걸음으로 안내하는 인물을 따라 화산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일행의 안내는 무림맹의 금천당 소속 단영이 맡았다.
그는 궁금한 게 많은지, 안내하는 도중에도 중간중간 고진유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저어…… 근데 정말로 화산파의 대사로 오신 게 맞습니까?”
“이상합니까?”
“이, 이상한 게 아니라 다른 십문십가의 대사들을 보면 거의 일대제자들이거나 그곳의 장로분 중 한 분이 오셨었습니다.”
“삼대제자가 오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는 것을 압니다.”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통례적으로 일대제자가 대사직을 맞으니까…….”
“아하, 그래서 저 사람들도 이상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군요.”
일행이 가는 주위에 많은 무림맹 무인들이 나와 구경을 했다.
“그렇습니다.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
“전혀. 그냥 조용히 가면 안 됩니까?”
“죄송합니다. 저곳을 지나면 십문의 관할지에 들어갑니다.”
“고맙소이다.”
그렇게 화산대사에 대한 소문은 짧은 시간에 무림맹 전체로 퍼져 나갔다.
십문지에도 당연히 화산파에서 온 일행의 소문이 알려졌다.
화산지의 전각 앞에 아홉 명의 중원 대사들이 모여 들었다.
“이크, 진유 아우. 저기 우글우글한데.”
“난 아무렇지 않은데 저들에겐 큰일인 모양입니다.”
고진유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며 간단하게 생각했다.
“호정 사제. 괜찮겠어?”
우종성은 긴장이 되었는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뚝.
고진유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섰다.
“어디 죽으러 갑니까? 장문인께서 지금 우릴 보면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
“사고를 쳐도 제가 치는 것이니 얼굴들 펴세요.”
“알았다, 인마. ……근데 너 진짜로 사고를 칠 건 아니겠지?”
장두총이 살짝 겁이 났다.
고진유 성격에 친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칠 수 있다. 것도 아주 크게.
“사고 쳐도 뭐, 별게 있으려고요.”
“…….”
휘익!
고진유는 다시 돌아서서 화산지 앞에 기다리는 인물들을 향해 당당히 걸었다.
“호중 사형, 만일을 위해 준비해야겠어요.”
“……그래야겠다. 모두 호경 말처럼 똑바로 호정을 지켜봐라. 여차하면 말려야 한다. 알겠지?”
일행은 화산지에서 기다리는 인물들보다, 저 멀리 앞서가는 고진유가 훨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