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황금정에서 가벼운 수다를 가진 지 반시진이 지났다.
“일공자, 잘 마시고 가네.”
유하랑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벌써 가시는 것입니까? 더 계시지 않으시고?”
“클클. 아닐세. 오랜만에 잘 놀다가 가네.”
“유 숙부께서 오셔서 오히려 제가 더 좋았습니다.”
조여하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 잘 마셨어요.”
“하하하! 종종 놀러오도록 해라. 아무리 다 컸다고 하지만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서야 되겠느냐.”
“알겠어요. 다음에도 뵈러 올게요.”
그녀는 황금정을 돌아서며 고진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옆으로 돌린 고진유의 모습에 시선은 마주치지 못했다.
유하랑은 밖으로 나가기 전 잠시 멈췄다.
“화산도협. 언제 무림맹으로 떠날 것인가?”
“오늘 떠날 생각입니다.”
고진유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조천항의 아쉬운 목소리가 나왔다.
“어허. 너무 빨리 가는 게 아니오? 혹시 지내는데 불편한 것이 있소?”
“전혀 없소이다. 너무 편안한 게 불편할 정도이외다.”
그때, 조여하가 나섰다.
“그래요. 좀 더 계시면 좋겠어요. 두 분 언니를 수화궁으로 초대하고 싶거든요.”
고진유가 연자련과 당우희를 보았다.
그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도록 하죠.”
“고마워요.”
그렇게 조여하와 유하랑이 황금정 아래로 완전히 내려설 때였다.
고진유의 머릿속으로 전음이 들렸다.
[나중에 수화궁으로 조용히 찾아오게나.]
유하랑의 전음.
‘이 말을 하기 위해 여기에 왔군.’
그렇다면 자신이 쫓던 인물은 조여하임에 틀림없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한데.’
* * *
수곡자는 천문전으로 들어서기가 두려웠다.
그가 모시는 주인, 나하중의 심기는 요즘 들어 매우 좋지 않았다.
화산도협에 대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휴우…….’
결국 그는 천문전으로 들어섰다.
백사건의 쓴 사내, 윤여림이 얼른 그를 맞이했다.
“수곡자님, 오셨습니까?”
“전주님께서는 어떠하신가?”
“…….”
윤여림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천문전에 계십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겠나. 알겠네. 혼자 가겠네.”
소와 달리 나하중은 여의정이 아닌 천문전 전각에 머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 사방이 흑색으로 된 복도를 지났다.
“전주님, 부연덕입니다.”
스르르르-
문이 저절로 열렸다.
‘으윽.’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짙은 사기(邪氣)의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가라앉는 듯했다.
“전주님을 뵙습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중원상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화산도협이 그곳에 있는 모양입니다.”
스윽.
나하중은 그림을 그리던 붓을 내려놓았다.
“그 녀석이 중원상국에 간 이유가 있을 텐데?”
“서협상단의 일 때문에 일공자가 초대를 했다고 합니다.”
“흐음…… 다른 일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나하중이 안심한 듯 목소리가 조금 편해졌다.
“중원상국에서 뭘 하고 있지?”
“보고에 의하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별궁에서 쉬고 있다고 합니다.”
‘쉬고 있다…….’
나하중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도협, 그 녀석이 중원상국에 간 것도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인가? 그들과 이어진다면 피곤한 일이 계속 생길 수 있겠군.’
“한시라도 놓치지 않도록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한동안 화산도협을 지켜볼 계획이었지만, 수정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지옥혈림은 어떻게 되었는가?”
“앞으로 본 천과의 거래는 받지 않을 것이라, 지옥혈존 혈성존의 명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슈우우우우-
나하중의 전신에서 살형기가 퍼져 나왔다.
“혈성존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올챙이 시절을 잊은 것이지요.”
“허허허, 쓰레기 같은 놈을 키워놓았더니 반항을 한다? 우리가 제 놈들을 치지 못할 것임을 안다는 것인가?”
“혈성존은 본 천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가 아는 정도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원에 본 천의 존재가 알려지기에는 이르지 않겠습니까?”
“쯧쯧, 예전부터 상대의 약점만 파고드는 야비한 녀석이었지.”
나하중의 표정은 불쾌했다.
“너무 안일하게 놓아두었어. 중간에 제재를 하지 않은 게 실수였군. 그러고 보니 지옥혈림 이놈들 때문에 곤란한 일만 생기지 않는가?”
“…….”
수곡자는 고개를 숙였다.
지옥혈림에 의뢰하자는 제안을 한 인물이 그였다.
“소신이 지옥혈림에 직접 찾아가 면담을 해보겠습니다.”
“자네 뜻이 그러하다면 알아서 해야지. 수고하게나.”
“고맙습니다.”
“중원상국의 일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차질 없이 계획대로 되고 있습니다.”
“알겠네. 먼 길을 가려면 바쁠 텐데 그만 가보지.”
스윽.
수곡자는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휴우…….’
복도를 지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윤여림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그런 듯 보입니다.”
“후, 지옥혈림에 가야 하니 당분간 보지 못할 걸세.”
“직접 가시는 것을 보니…… 담판을 짓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결정을 내려야지 않겠나. 이젠 뒤편에서 지내시는 것도 지겨워하시는 듯한데.”
“그렇습니다. 만월이 지나면 신월로 돌아가듯, 무림도 마찬가지겠지요.”
“후후후, 그게 본 천이 해야 할 일이지 않는가. 무림이 잘 돌아가기 위해 수백 년 동안 우리들이 해온 일이지.”
수곡자는 돌아서며 천문전을 나섰다.
그의 뒤를 보며 윤여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외다.’
* * *
고진유는 별궁을 나온 뒤 수화궁으로 내려섰다.
한낮이지만 어느 누구도 수화궁에 들어선 고진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왔는가?]
곧바로 그의 전음이 들렸다.
[안으로 들어와 흑색 손잡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게.]
고진유는 전음에서 가리키는 대로 움직였다.
건물 안에는 많은 방들이 있었다.
‘여긴가?’
다른 방과 달리 흑색 손잡이가 달려 있는 방.
스윽.
고진유는 문을 안으로 밀며 들어섰다.
‘흐음.’
방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비밀 문이 있는 모양이군.’
주위를 둘러본 고진유는 곧바로 한 방향으로 걸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동경 앞에 섰다.
번쩍.
손바닥을 펴자 빛이 짧게 나왔다가 사라졌다.
‘이 뒤에서 나를 보고 있군.’
고진유는 동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구우우웅-
그러자 동경 옆으로 벽이 열리며 통로가 나타났다.
‘이거 진짜 궁금한데?’
굳이 숨겨진 비밀 방으로 초대하는 이유가 뭘까.
고진유는 열린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화산도협, 어서 오시게.”
“잘 만든 곳이네요.”
“후후후. 쉽게 찾지 못할 것이라 여겼는데 금방 찾는군.”
“제 전직 덕분이죠.”
“그런 것 같군. 안으로 들어오게.”
유하랑이 동경 뒤로 연결된 방으로 안내했다.
“어서 오세요.”
“조 소저.”
고진유는 일어서는 조여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능청스러운 분이시군요.”
“황금정에서 나를 알아보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소저에게서 흐르는 향은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최대한 지운다고 했는데 실패한 모양이군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후각이 꽤 뛰어나서.”
“화산도협의 말씀을 들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네요.”
유하랑은 자리를 가리켰다.
“앉게.”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의자에 앉았다.
“화산도협, 본인이 그대를 부른 이유가 있네.”
“말씀하십시오.”
“음…… 그대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니네.”
“알겠습니다. 제가 봐도 나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고맙네. 그래서 하는 말이네. 그대의 사부인 검절이 가져간 물건을 알 수 있겠는가?”
순간, 고진유는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마디를 툭 던졌다.
“지옥혈림과 연관이 있습니까?”
“전혀 아닐세.”
중원에서 사부가 숨긴 물건의 존재를 아는 곳은 극일천과 지옥혈림밖에 없다.
하지만 극일천과 지옥혈림이라면 이런 식으로 조용히 물어보진 않았을 것이다.
‘대체…… 이들은 또 누구지?’
고진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소이까?”
유하랑과 조여하가 시선을 마주쳤다.
“그대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신분을 가르쳐 주겠네. 우린 무구천(武求天) 소속이라네.”
“처음 들어봅니다.”
“당연하네. 중원 무림에서 무구천으로 활동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지.”
“조 소저도 같은 소속이오?”
“맞아요. 유 숙부님과 함께 무구천의 사람이에요.”
“두 분이 무구천 소속인 것을 알겠습니다. 그럼 무구천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건…… 무림을 누군가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세력이라네.”
“그 누군가가 어디입니까?”
조여하가 대답을 했다.
“극일천이라는 곳이에요.”
“……소저의 말로는 극일천이라는 곳이 무림을 멸하게 만든다는 뜻입니까?”
“그래요. 그들의 목적은 무림의 멸살이에요.”
고진유는 두 사람을 보았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우리가 한 말은 사실이네.”
“사실인 것은 알겠습니다.”
“정말인가? 우리의 말을 믿는 겐가?”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사부가 숨겼던 물건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무구천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
유하랑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방금 믿는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하지만 무구천의 존재는 믿는다고 해도, 실제 어떤 곳인지는 제가 알 수가 없지요. 두 분의 말만을 듣고 믿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고진유의 말이 맞았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믿겠는가?”
“사부님께서 숨겨놓았다는 물건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이해가 되도록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허허…… 그대는 우리를 믿어야 하네. 우린 극일천에 대항하는 무구천이라네.”
“극일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무구천을 믿으라는 말이 우습지 않습니까?”
“이런 답답한 사람이 있나.”
“믿을 만한 증거를 내보일 수 없다면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전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원한다면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오십시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산도협……!”
“먼저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유하랑과 조여하는 동경을 통해 바밖으로 나가는 고진유를 보았다.
“허어…… 곤란해지는구나.”
“숙부님, 그를 설득하려면 무구천에 함께 가는 수밖에 없겠어요.”
“외부인을 함부로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않느냐? 만약 그를 통해 본 천의 위치가 극일천에 알려진다면 위험할 수 있지. 그가 우리를 믿지 못하듯 우리도 그를 믿지 못하니 말이다.”
“아쉽네요…… 그 물건을 우리가 얻을 수만 있다면 유리했을 텐데요.”
“그러게 말이다. 우선 상부에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해야겠다.”
유하랑은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수화궁을 나온 뒤 별궁으로 움직였다.
‘무구천이라…….’
새로운 세력이었다.
‘대체 내가 모르는 곳이 얼마나 많은 건지.’
눈에 보이는 무림의 세력보다 숨어 있는 세력들이 더 많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바로 죽이겠다고 나대진 않았으니 나쁜 곳은 아닌 듯하지만…… 당장은 모두 거르고 봐야겠군. 중요한 건 사부님이 숨겨놓으신 물건을 먼저 찾는 거니까.’
고진유는 시간이 갈수록 숨겨놓은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모든 세력들이 그 물건을 가지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휙휙.
그때, 별궁으로 빠르게 움직이던 고진유의 걸음이 멈췄다.
“헉, 헉, 허억.”
힘들게 내뱉는 숨소리.
한 청년이 목검을 왼손으로 들고 계속해서 내리치고 있었다.
‘좌수검인가?’
고진유는 멈춰 서서 청년을 지켜보았다.
‘오른팔이 불편한 모양인데.’
청년의 오른팔이 좌우로 흐느적거렸다.
“에이……!”
청년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목검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그대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망할 놈의 몸.”
수백 번 수천 번을 휘둘렸지만 원하는 대로 목검이 움직이지 않았다.
“병신…….”
태어날 때부터 오른팔이 불편했다.
강천(强天). 아버지께서 강한 사내가 되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거기에다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중원상국의 둘째 공자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오직 남들처럼 정상적인 신체였다면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한 팔이 불편해도 그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뒤에서 속닥거렸다.
“병신 새끼가 돈은 많아서 좋겠네.”
조강천은 그들을 스스로 상대하고 싶었다. 부모의 힘, 돈의 힘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힘으로 싸우고 싶었다.
한 팔이 부족하다고 해서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무공 사부를 구해주었지만 자신은 내공을 익힐 수 없는 신체였다.
하단에 단전을 모울 수 없는 체질.
“젠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신 같은 몸이다니…….”
주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왼손으로 눈물을 가린 순간,
“누가 병신이라는 것이오? 한눈에 봐도 튼튼하건만.”
“……!”
조강천이 왼손을 내려 위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내려다보는 사내.
‘누구……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