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낙하를 따라 흐르던 배가 낙양의 초입, 의양포에 도착했다.
승객들이 하나둘씩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화산파 일행은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하선했다.
“속이 울렁거려서 죽을 뻔했다.”
배를 처음 타본 혁자영은 멀미라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운기를 하면 사라진다고 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정 사제, 다음에는 무조건 육로로 가지.”
“진짜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차라리 주화입마가 낫겠군.”
“하하, 알겠습니다. 다음엔 최대한 육로를 이용하죠.”
일행은 포구 밖으로 움직였다.
먼저 배에서 내린 홍기단의 기마 무사들과 백색 마차가 멈춰 있었다.
조현후까지 마차 밖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중년 사내가 백학선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딱 우릴 기다리는 것 같구만.”
“또 우리에게 볼일이 있나?”
“무슨 일인지 만나보면 알겠죠.”
고진유가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기분 나쁜 표정이군.’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못마땅한 듯한 조현후의 표정.
중년 사내가 다가오는 일행 앞으로 서너 걸음 나섰다.
척.
그러고는 백학선을 두 손으로 감싸며 포권을 했다.
“화산파의 젊은 영웅들을 뵙소이다. 본인은 중원 상국에 몸을 의탁한 수한이라고 하오.”
“혹시 중원상국의 우뇌, 수한 선생이오?”
묵경이 그를 알아보았다.
“오호, 풍류미군께서는 본인을 아시는군요. 영광이외다.”
“중원상국의 천기쌍뇌를 어찌 모르겠소이까.”
묵경은 일행에게 간단히 수한의 신상을 알려주었다.
중원상국의 천기쌍뇌.
두 명의 책사로, 좌뇌 신안(神眼) 제갈기와 우뇌 천영(天靈) 수한을 가리켰다.
“혹시 어느 분께서 화산도협이신지요?”
“본도이외다.”
수한은 고진유의 관상을 살폈다.
‘이마에 거대한 빛이 맺혀 있고, 양쪽의 검미가 또렷하군.’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왔다.
‘인중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은 콧등. 이건 패왕상의 관상이거늘. 화산파의 도사라니…….’
사람을 대할 때 가장 힘든 부류의 관상을 가진 인물이다.
“반갑소이다. 소문을 많이 들었소이다. 중원인들이 의적으로 칭송한다고 하지요?”
“중원상국만 하겠소이까.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듯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도움을 많이 준다고 들었소이다.”
고진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허허. 너무 말씀을 잘하시는구려.”
“어릴 때 배운 게 없다 보니 이해해주면 고맙겠소.”
수한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우린 바쁘니 그만 가보겠소.”
“잠깐만.”
“……내게 볼일이 있소이까?”
고진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렇소이다. 잠시 이야기라도 할 수 있겠소이까?”
“중요한 일이오?”
“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런 애매한 답을 원하는 게 아니오.”
“후후후, 맞소이다. 그대에게 애매한 문제이기도 하지요.”
“…….”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을 놀리는 듯한 말투.
또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간을 보고 있었다.
“본 문과 관련된 문제라면 나에게 물어도 답을 해줄 수 없소.”
“화산파와 연관되기도 하지만 그대와도 상관이 있는 문제이외다.”
“자꾸 말을 돌리는군요..”
“말을 꺼낸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오.”
“해결되지 않는다면 시간 아깝게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겠소이까? 우린 그만 가겠소.”
“도협께선 너무 급한 게 아니오?”
고진유의 대답에 수한은 살짝 당황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에이, 호정. 그냥 가자.”
장두총도 짜증이 났는지 한소리 했다.
“도협, 갈 땐 가더라도 말을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이까?”
“난 애매한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굳이 듣고 싶은 이야기도 아닐 것 같군요.”
“허허, 안하무인이 아닌가? 선배가 말을 하면 한 번 들어보겠다고 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하아…….”
고진유는 힘든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아주 뛰어나군요.”
“그대를 피곤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소이다.”
“그런 말을 하는 게 더 피곤한 것이외다.”
휘익!
고진유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갔다.
“도협? 도협!”
수한은 목소리를 높여 불렀지만, 고진유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멀어졌다.
‘저…… 녀석이…….’
상대가 의도한 대로 기 싸움에 전혀 말려들지 않았다.
간을 보려던 계획이 틀어진 수한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 * *
“허…… 참.”
수한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화산파 일행의 뒤를 계속 쫓았지만, 바로 따라붙을 거란 예상과 달리 도무지 거리가 줄어들질 않았다.
앞서가는 일행이 빨리 걷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차의 속도를 올렸는데도 여전히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이각이 지나고, 반시진이 가까워졌다.
‘저것들이 어디까지 가는 거지?’
휘이익!
오히려 화산파 일행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졌다.
그동안, 고진유는 일행 사이에서 움직이며 신법을 봐주고 있었다.
“신법의 운용은 내력이 우선이 아닙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은 몸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힘의 조절. 내 몸에 맞게 맞추는 것이지요.”
“신법을 일률적으로, 똑같은 방법으로 펼치는 게 아니라는 말이냐?”
“호경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신체적 구조가 상관없다면 같은 신법을 익혀을 경우 속도 또한 같아야 합니다. 물론 내력이 차이가 나면 다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나중 일입니다.”
고진유는 파해도에서 깨달은 부분을 알려주었다.
“사람마다 힘을 내는 부분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내력을 어디 부분에서 강하게 바닥을 밀어내야 할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속을 내기 위해 어느 한 순간 힘이 빠지는 부분이 나올 것입니다. 그 순간 내력을 이용해 신법을 폭발시키는 겁니다.”
“알겠어……!”
일행은 신법을 펼치면서 고진유가 말한 순간을 찾기 위해 집중했다.
뒤에 중원상국의 마차가 따라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만큼 집중했다.
‘다들 열심히 하는군.’
신법에 이 정도로 집중할 줄은 몰랐던 고진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이유는 간단했다.
다들 인양이 펼치는 경신법을 보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스스로 해결할 문제지.’
* * *
낙양의 들어서기 전 마을 초입에 도착했을 때가 돼서야 일행은 신법을 멈추었다.
두두두두두-
뒤에서 거친 소리가 다가왔다.
홍기단의 만호표는 죽을 맛이었다.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그가 말 위에서 소리치며 달려왔다.
다행히 화산파 일행이 눈앞에 멈추자 다급히 뛰어내렸다.
“수한…… 선생께서…… 만나시고자 하십니다.”
“진유 아우, 정말로 할 말이 있는 모양인가 봐. 이 정도로 급히 따라올 정도라면.”
“호정, 묵 형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무슨 말을 할지 들어보는 게 좋겠어. 수한 선생이라면 무림에서도 비중이 있는 편이지.”
“그렇게 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묵경과 우종성의 의견에 고진유가 길을 멈췄다.
잠시 후, 수한을 태운 마차가 일행 앞에 도착했다.
마차 문이 다급히 열렸다.
바닥에 내려선 수한은 표정이 차게 굳어 있었다.
“도협,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모양이오?”
“…….”
“왜 말이 없소?”
“다시 그냥 갈까 생각했소이다. 굳이 당신을 놀릴 이유도 없거니와, 놀리고 싶지도 않소. 여기 이분이 안쓰러워서 기다렸던 것이니까. 무슨 할 말이 있소?”
“화산도협. 중원상국의 일공자가 그대를 만났으면 한다는 전언을 가지고 왔소이다.”
“그 말을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소?”
“…….”
“그리고 중원상국의 일공자가 나를 만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게 아니오. 설마 내가 무작정 그를 만나러 갈 것이라 생각했소?”
수한은 대답이 없었다.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군요. 내가 만날 이유도 없고 당연히 아쉬울 게 없는데 왜 그를 만나러 갈 거라고 생각하시오? 필요한 사람이 와야지. 안 그렇소?”
“그는 중원상국의 일공자로서 중원상국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인물이오.”
고진유는 일행과 눈을 마주치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한 선생. 방금은 고 아우의 말이 맞다고 봅니다. 만날 이유도 모른 채 무작정 따라갈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까?”
“맞소. 중원상국이 대단한 줄은 알겠소만, 화산파는 중원상국에서 함부로 할 문파가 아니오.”
우종성도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말했다.
‘허허…… 중원의 문파들은 어떻게 하든지 본 상국과 인연을 맺고자 하거늘.’
화산파의 시야에서 중원상국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서협상단의 일 때문이외다. 이를 의논하고 싶어 붙잡은 것이오.”
“그 일은 이미 끝났소이다.”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소. 서협상단에서 일 할을 받기로 했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그렇소. 서로 협정을 맺었소이다. 그게 중원상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오?”
“문제가 된다면 어떻게 하겠소이까?”
“무슨 문제가 되는지는 모르나, 서협상단을 무력으로 건드린다면 화산파는 협정에 따라 움직일 것이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화산은 약속을 어기지 않으니까.”
고진유의 눈빛을 보면서 더는 말이 필요 없음을 알았다.
‘쯧, 이런 녀석들은 중간에 고집을 바꾸지 않아. 약간 시간을 두는 게 좋겠어.’
수한은 잠시 뒤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알겠네. 도협의 뜻을 이해했소. 우선 일공자에게 그대의 뜻을 알리겠소이다.”
“맘대로 하시오.”
“낙양에서 하루를 머물 생각이오?”
“그럴 예정이외다.”
“오늘 좋은 시간을 보냈소이다.”
수한의 마차는 빠르게 낙양으로 들어갔다.
* * *
“워어어어-”
객잔 낙하장의 입구에 사두 사륜마차가 멈췄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빛의 갈기를 가진 네 마리의 흑마에, 네 바퀴가 달린 황금 마차.
휘익!
마부석에서 금장 호위 무사가 빠르게 내려섰다.
“도착했습니다.”
“열어라.”
호위무사가 황금 마차의 문을 잡아당기자 안에서 황금의를 입은 사내가 내려섰다.
화려함의 극치.
이보다 화려한 옷은 없을 정도로 사내의 복장은 눈이 부셨다.
중원상국의 일공자 조천항.
객루를 보는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가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중년인을 보며 물었다.
“수한 선생, 그가 여기에 머물고 있단 말입니까?”
“그렇소이다.”
“돈도 많다는 놈이 이런 거지 같은 곳에 머물다니.”
그는 여전히 낙하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다다닥!!
낙하장의 주인, 황진은 다급하게 밖으로 나와 조천항의 앞에서 허리를 최대한 굽혔다.
“공자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보게. 좀 깨끗하게 장사할 수 없는가?”
“소, 송구하옵니다.”
수한이 대신 물었다.
“이곳에 화산파의 도사들이 머문다고 들었네.”
“아…… 네에. 그렇습니다. 반시진 전에 들어온 듯합니다.”
“일공자께서 그들을 만나 뵙고 싶다는군.”
“아아…… 알겠습니다. 소인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황진은 앞장서며 낙하장으로 들어섰다.
킁킁.
조천항은 안으로 들어서자 냄새를 맡았다.
“에이…….”
그러고는 단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입에 음식들이 들어갈 수 있지?”
“죄, 죄송합니다. 좀 더 청소를 깨끗하게…….”
“됐네. 여기에는 두 번 다시 올 이유가 없군.”
“아…… 네에…… 송구하옵니다.”
수한은 객잔을 살폈다.
“일공자님, 저 끝 창가에 있소이다.”
창가 끝자리에 모여 있는 화산파 일행.
일단, 그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인물이 먼저 보였다.
“저기 잘생긴 자가 풍류미군이라는 인물이오?”
“그렇소이다.”
“흥, 도협이란 놈은 누구입니까?”
“그 옆에 앉아 있는 도사가 도협입니다.”
수한은 고진유를 가리켰다.
“알겠소. 가봅시다. 얼마나 자부심이 강하기에 본인을 여기까지 부르는지 말이오.”
“생긴 건 젊지만 속에는 백 년 묵은 구렁이가 서너 마리 들어 있는 듯하더이다.”
“출신이 도둑이라서 그렇겠지.”
조천항은 앞장선 그의 뒤를 바로 따랐다.
“진유 아우, 진짜로 황금 공자를 데리고 왔어.”
조천항을 처음 보지만 중원상국 일공자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다.
“지저분한 곳을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어지간히 급한 모양인구만.”
“그래도 손님인데 앉아서 맞이하는 건 그렇겠군요.”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한과 함께 조천항이 다가섰다.
“도협, 그대가 원한 대로 본 상국의 조천항 일공자님과 함께 왔소이다.”
“화려한 분이군요. 좋은 물건들이 많이 달려 있소이다.”
황금의는 물론, 장신구들이 모두 보석과 금으로 치장이 되어 있었다.
스윽.
조천항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후후후. 이것들을 훔치고 싶지 않소?”
“……!”
화산파 일행 모두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하하하!”
고진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는 별다른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가지고 싶군요.”
“원한다면 줄 수 있소.”
“그럼 가져가리다.”
“하하하, 맘대로 하시오.”
고진유는 그와 시선을 마주친 후 미소를 지었다.
“인양아, 잘 봤지?”
“네, 형님. 정말 신의 한 수이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조천항은 뜬금없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슥슥.
고진유가 손끝으로 반짝이는 물건을 천천히 흔들었다.
‘저, 저건!’
조천항은 얼른 금장 요대를 내려다보았다.
전혀 손에 닿지 않는 거리.
양쪽으로 달려 있어야 할 금 장신구 하나가 없었다.
“좋은 물건만 보면 옛날 버릇이 나와서. 미안하군.”
휘익!
고진유가 금 장신구를 던졌다.
“당신 장난감 같은데 받으시오.”
“…….”
움직이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 하하하! 이거 엄청난데. 이건 가히 예술적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만해. 도협, 내가 도둑이라 해서 미안하오.”
“별말씀을.”
“하하하하! 정말로 신기해서 그러는데 한 번만 더 해보겠소? 이번에는 내가 확실히 알아차리겠소이다.”
그는 정말로 재미난 아이처럼 보였다.
“당신 웃긴 사람이군요.”
흔들흔들.
고진유의 손에서 또 다른 물건이 좌우로 움직였다.
요대 반대편에 달린 금 장신구.
짝짝짝!!
조천상은 낙하장에 왜 왔는지 잊을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도협, 그런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니 정말 부럽소이다.”
“온몸에 이런 물건들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부럽다고 할 말은 아니군요. 일단 왔으니 앉으시오.”
“고맙소.”
스윽.
조천항은 딱딱한 의자에 아무렇지 않게 앉았다.
평소에는 가죽으로 된 의자가 아니면 절대로 앉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훔치는 장면을 보여줄 정도의 인물이면 형식에만 치우치는 성격은 아니겠군.’
조건만 맞는다면 서협상단에 대해 충분히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을 듯한 인물이다.
“도협, 내가 찾아온 이유는 서협상단 때문이네.”
조천항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