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고진유와 북소연은 서로 말없이 주시했다.
북소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들의 조직은 극일천이라 해요.”
“…….”
고진유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놀라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알고 있소.”
오히려 북소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저들은 무림에 단 한 번도 이름을 드러내고 활동한 적이 없다.
“이거 인상 깊은데요?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니.”
“세상일을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오. 그게 다요?”
“그럼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아나요?”
“쥐구멍에 숨은 쥐새끼들이 하는 짓들이 뻔하지.”
“호호호.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 쥐들은 큰 것들을 빼앗을 힘이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소?”
“당사자들 외에는 본 림에서 가장 그들을 많이 알고 있을 거예요. 극일천을 알고 있다고 하니 한 가지만 더 알려 드리죠. 극일천의 세력 중 한 곳이 사파오패천의 철혈궁이랍니다. 놀랍지 않나요?”
사파오패천(邪派五霸天).
중원 사파 무림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다섯 문파를 일컫는 말.
지옥혈림 또한 사파오패천의 한 축을 맡고 있었다.
“철혈궁이 극일천이라는 증거가 있나?”
“본 림의 혈성존께 들은 말이에요.”
“당신이 그에게 직접 들었다고? 지옥혈림의 수장이 추혼대 인물에게 그런 말도 친절하게 해주는 모양이지?”
“호호호, 하지만 난 분명히 그분께 들었으니 믿든지 말든지 그건 알아서 하세요.”
북소연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추혼대가 아닌 또 다른 신분이 있는 모양이군.”
“왜 그렇게 보죠?”
“당신이 추혼대의 대주라 해도 흑명군보다 더 높은 지위는 아니니까.”
“후훗, 예리하시네요. 그것까지 봤어요?”
“사실인 모양이군.”
철혈궁이 극일천의 세력이라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놀랍지 않나요?”
“딱히. 그들이라면 그 정도는 될 줄 알았소.”
화산파에도 극일천의 인물이 숨어 있다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어떤가요? 극일천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맞지요?”
“그런 것 같군.”
“우리들의 제안이 어떤가요? 괜찮지 않나요? 사실 그대 사부의 진짜 원수는 극일천이 맞는 것 같은데.”
“지옥혈림도 맞소.”
“좋아요. 그래도 당분간 우리와 휴전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물건이 뭔지만 가르쳐 준다면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겠어요.”
“당신들을 어떻게 믿지?”
“그건 그대의 자유지만, 그래도 지옥혈림은 신용이 꽤 좋답니다.”
고진유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사부 오청석의 사지를 자른 곳은 극일천.
보이지 않는 원수를 찾는 것이 앞선 순서라고 판단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혈림은 항상 내 원수임을 잊지 마시오.”
“그럼 서로 동의한 걸로 하겠어요. 이제 그럼 그 물건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그건 나도 모르오.”
“…….”
고진유의 표정은 진지했다.
“……당신이 정말로 모른다고 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없던 걸로 하고 싶다면, 그건 그쪽의 자유요.”
북소연은 미소를 짓는 고진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정말로 모르나요?”
“지금은.”
“……하, 알겠어요. 하긴 당신은 육지에 온 뒤 곧장 화산파에 갔으니 그대 사부가 숨긴 물건을 찾을 시간이 없었던 건 맞겠군요.”
“모르는 게 없군.”
“당연하잖아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은 본 림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당신이 그 물건을 찾았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죠?”
“보아하니 내 주위에 있을 게 아니오. 내가 왼팔에 붉은 띠를 두르면 그때 찾아오시오.”
“그렇게 하지요. 그때까지는 서로 동업자로 지내도록 하죠.”
고진유와 북소연은 가볍게 포권을 했다.
그들 사이에 당분간 휴전이 이루어졌다.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군요.”
“무엇이오?”
“흑명왕께서 그냥 물러가지 않을 거예요.”
“싸우겠다는 말이오?”
“그는 그대에게 진 이후 이 년 동안 폐관 수련을 했어요. 아마 최소한 비무라도 원하겠죠.”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
그녀는 짐짓 걱정된다는 듯 덧붙였다.
“그분의 무공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어요.”
“내가 그와의 대결에서 죽기라도 할 것 같은 모양이군.”
“당신이 원한다면 그분을 말릴 수 있는데요?”
“됐소. 그만 갑시다.”
고진유는 먼저 일행의 곁으로 다가갔다.
* * *
화산파 일행은 다가온 고진유를 반겼다.
“어떻게 됐어?”
장두총은 건너편에 흑귀들을 계속 주시했다.
“당분간 휴전하기로 했습니다.”
“휴전을? 접땐 앞뒤도 안 보고 달려들었잖아.”
“이제야 본 문과 싸우는 게 두려워진 모양이죠.”
“하긴 계속해서 우리를 건드리면 윗분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겠지.”
장두총은 당연하다는 듯 수긍했다.
‘이상해. 저 녀석이 그걸로 휴전할 성격은 아닌데.’
묵경은 고진유에 대해서 잘 알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부의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겨우 그런 이유로 휴전을 한다고? 분명 뭔가 있어.’
묵경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잘됐어. 앞으로 지옥혈림과 싸울 일은 없겠네.”
“묵경 형, 그건 아닙니다.”
“……그래?”
“당분간입니다. 그때가 되면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그때가 언제인데?”
“때가 되면요. 아직 몰라요.”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휴전을 한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후후, 그러게 말입니다. 여하튼 당분간은 지옥혈림과 부딪힐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때, 흑귀들 사이에서 추관동이 살기를 보이며 다가왔다.
고진유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 세상에 예외는 있는 법이죠.”
“이건 뭐야? 휴전한 의미가 없잖아.”
“괜찮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내가 허락했어요.”
고진유는 중앙에 멈춘 추관동을 만나러 나갔다.
“부대주에게 들었겠지?”
“폐관을 좀 더 하지 않고. 너무 빨리 나온 게 아닌가 싶은데.”
“…….”
추관동의 신형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건방진 놈. 내가 폐관 수련을 해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뜻인가?”
“원하는 게 싸움이라면 도전을 받아주겠소. 끝나면 알게 되겠지.”
“크크크, 도전이라…… 하긴 저번에는 네놈에게 졌으니 이번엔 본인이 도전하는 처지겠군.”
쉬이이익-!!
추관동은 기습적으로 흑무장법을 펼쳤다.
독사가 혀를 내밀며 내쉬는 섬뜩한 소리를 시작으로, 고진유의 가슴을 향해 추혼혈장(追魂血掌)이 뻗어 나갔다.
검을 뽑은 뒤 반격하기엔 그들의 간격이 좁았다.
‘뒤로 물러날 때를 노린다!’
하지만…….
퍼어어어엉!!
“……!!!”
고진유는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화산복호권으로 맞받아쳤다.
‘우우욱.’
강한 충격이 혈장과 부딪혔다.
‘검이 아니라 권공을?’
추관동은 허점을 피하기 위해 서너 걸음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고진유는 그런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타아앗!!
호충신법의 호탄신.
화살처럼 튕겨 나간 몸이 추관동 앞으로 바짝 붙어 섰다.
풍강(風剛)의 두 요결이 하나로 섞인 채 펼친 만강호천(萬降虎天)의 초식.
퍽퍽퍽퍽퍽퍽!!!
수십 연발의 공격이 추관동의 전신에 끝없이 쏟아졌다.
뒤로 물러나고 싶어도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호신강기를 일으킨 채 오직 상대의 주먹이 끝이 나기를 바랄 뿐.
정신이 거의 사라져 갈 것 같은 상황.
‘이게 무슨, 이대로 또다시 당할 수는……!!’
일장필살(一掌必殺).
폐관 수련을 하면서 익힌 흑무장법 최후의 초식.
우우우우웅-
추관동의 단전에서 진동이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받아라아아아!!!!!”
흑천혈무(黑天血武).
그가 괴성을 지르듯 소리쳤다.
검게 변한 양손에서 수십 개의 흑빛의 장강(掌罡)이 쏟아져 나갔다.
찰나의 순간,
“후우.”
고진유는 양팔을 앞으로 모으며 호흡을 최대한으로 들이마셨다.
쿠아아앙!!!
화산복호권의 필살권.
고진유의 어깨 위로 복호가 솟구치며 검은 장강을 하나씩 날카롭게 찢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흑강이 하나씩 부서지면서 추관동은 몸의 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허어어억, 헉.”
그는 힘들게 숨을 내쉬었다.
‘복수를 위해 이 년의 수련을 했건만…….’
완벽하게 졌다.
휘이익.
고진유의 마지막 일권이 그의 얼굴 앞에 멈췄다.
“운이 좋은 줄 아시오.”
물러난 두 사람 사이로 북소연이 얼른 끼어들었다.
“손속에 사정을 봐주셔서 고마워요.”
“분명 말했지만 이번 한 번뿐이오.”
“알겠어요. 우린 그때 보도록 하죠.”
그녀는 뒤로 돌아섰다.
흑귀들도 추관동의 패배에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돌아간다.”
“네…… 알겠습니다.”
흑귀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북소연은 마지막으로 뒤를 짧게 돌아본 뒤 안동포구에서 사라졌다.
* * *
일행은 낙양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낙하에서 곧장 수로를 따라 낙양으로 가는 대형선이었다.
“와아…… 이런 큰 배는 처음입니다.”
인양은 배에 올라타자마자 단번에 탄성을 질렀다.
배는 사람만 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래 중앙에 마차와 홍기단의 기마들이 실려 있었다.
휘익!
인양은 배에서 제일 높을 곳으로 날아가듯 올라갔다.
수십 리 앞까지 탁 트인 풍경.
“저 녀석이 제일 신났네.”
고진유와 묵경은 선미로 가 난간에 기댄 채 바람을 맞았다.
따뜻한 봄바람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저 공자님이 풍류미군이라더군.”
“하아아아…… 너무 잘생겼다…….”
“한 번이라도 저분의 손을 잡아보면 소원이 없겠어…….”
웅성웅성.
일부러 선미로 왔건만, 함께 배를 탄 여인들이 한 번이라도 묵경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묵경은 그녀들을 보며 짧게 손을 흔들었다.
“까아아악!!”
순간 비명에 가까운 그녀들의 탄성이 배를 울렸다.
묵경은 익숙한 듯 옆에 선 고진유를 보았다.
“어때? 내 인기는 하남성에서도 통하지?”
“푸흡, 그러네요. 묵경 형이 워낙 잘생기셔서.”
“부러우냐?”
“이왕이면 못생긴 것보다 훨씬 낫죠.”
“내 미모를 나누어줄 수 있다면 진유 아우에게도 주겠지만 어쩔 수 없군.”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스으윽.
묵경은 한 팔을 올려 고진유의 어깨에 올렸다.
“그건 그렇고…… 나에게 할 말은 없는가?”
“…….”
“이 형은 너무 섭섭한 게 있는데?”
“뭐가 섭섭해요? 저기서부터 다들 넘어가고 있는데.”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 하지 마라. 내가 모르는 일이 있지?”
“무슨 말을 하시는지.”
“하하하, 이런 능청스러운 녀석이 있나.”
묵경은 어깨를 올린 팔로 고진유의 목을 감았다.
“빨리 불어라. 귀신은 속여도 난 못 속인다. 아마 중원에서 네 녀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다.”
“으으, 알았으니까 이거 놔요.”
“진짜지?”
“진짜.”
스윽.
묵경은 목을 감았던 팔을 풀었다.
“지옥혈림과 무슨 이야기를 했지?”
“극일천. 들어본 적 있어요?”
“극일천? 그게 뭐야?”
묵경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무림에 대해 많이 아는 그도 극일천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단어였다.
“혹시나 아는가 싶어서요.”
“무슨 얼렁뚱땅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똑바로 이야기해 봐.”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력으로 막아, 인마. 이게 말해주기 싫으니 또 핑계를 대네?”
“……극일천이 사부님을 잡은 뒤 사지를 자른 놈들입니다.”
묵경은 다시 목을 조르기 위해 팔을 뻗다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지? 지옥혈림에서 가르쳐 준 거야?”
“아닙니다. 그 전에 알고 있었어요.”
고진유는 다른 사람이 아닌 묵경에게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무림에서 극일천과 홀로 싸울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묵경만은 믿고 싶었다.
이후 그는 이 년 동안 화산파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었다.
충격적인 사건.
묵경을 만난 후 이 정도로 굳게 변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형, 괜찮아요?”
“하…… 이건…… 세상 뒤집어 정도로 엄청난 일이잖아. 네 사형들도 알고 있어?”
“당분간 극비로 했습니다. 각 당의 당주급인 분들만 알고 계십니다.”
“하긴…… 정확히 그들의 존재를 모르니…… 무턱대고 알리기엔 심각한 일이지.”
화산파에 잠입한 극일천의 존재들.
더구나 화산파 도사들을 포섭한 게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처음부터 화산파에 잠입을 시켰다.
“네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화산파에만 그 짓을 했겠어? 전 무림의 문파에 그놈들의 세력이 숨어 있다는 뜻이라고.”
“그렇다고 봐야겠죠?”
“진짜 심각하군. 그렇다고 어디에 가서 말도 못하는 상황인 데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니.”
묵경은 상황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러다 갑자기 뜬금없이 물었다.
“난 믿어?”
“후훗.”
“어……? 그렇게 웃는 이유가 뭐야?”
“그냥 웃음이 나와서요.”
“확실히 난 아니니 믿어라.”
“도둑질하다가 잡힌 놈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뭐야? 안 믿는다는 거야?”
“안 믿었으면 어떻게 말해줬겠습니까.”
“이거 참. 그럼 지옥혈림은 왜 온 거지?”
“사부님께서 숨기신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건……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씨익.
고진유는 슬쩍 미소를 보였다.
“이 자식이!”
휘익!
고진유는 묵경의 팔을 피하며 얼른 옆으로 물러났다.
“이리 안 와?”
“그땐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아, 알겠다, 알겠어. 와서 끝까지 이야기해야지. 안 그래?”
고진유가 다가서자 묵경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며 목을 끌어 잡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그 물건이 뭔지 알려주면 극일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놈들을 믿을 수 있나?”
“철혈궁에 대해서 잘 아세요?”
묵경은 손을 풀며 고진유를 보았다.
“갑자기 철혈궁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극일천의 세력들 중 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
고진유는 가볍게 말했지만 묵경의 충격은 심했다.
“사파오패천이……? 하아, 엄청난 놈들이잖아. 그래서 휴전한 거야? 그 물건이 뭔지 알려줬어?”
“아직. 나도 그게 뭔지 몰라요. 사부님이 숨겨놓았거든요.”
“……그걸 찾기 위해 무림맹에 가려고 했었군.”
묵경은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근데 지옥혈림은 그 물건이 왜 궁금한 거야?”
“글쎄요? 극일천의 비밀을 손에 넣고 싶겠죠.”
“흐음…… 또 숨기는 건 없겠지?”
“제가 무슨 양파인가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고진유는 뒤를 돌아서며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사부님께서 목숨을 걸고 숨기신 물건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