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제기랄.’
야월문주 마원은 밖에 나와 고진유를 기다렸다.
살수문이라 하나 문파의 수장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 것.
마지막 보루인 신살인 노지송의 불편한 걸음을 본 그가 물었다.
“괜찮소이까?”
“문주, 죽을 정도는 아니외다.”
마원은 수하 중 노지송에게만 유일하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문주, 이번 일은 본 문이 물러나야 할 듯합니다.”
“…….”
신살인 노지송은 누구보다 야월문을 아끼고 사랑했다.
마원은 시선을 돌렸다.
“화산도협, 그대의 호기를 인정하는 바이오. 본 문에 홀로 쳐들어올 줄 몰랐소이다.”
“좋게 봐주니 고맙소이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본인의 목이오?”
“목을 달라고 하면 줄 것이오?”
“…….”
고진유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냥 줄 수는 없으니, 본인과 싸워 가지고 가야 하지 않겠소.”
“싸워보겠소?”
이번에는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자가 화산파의 도사지?’
장난스러움이 아니었다.
웃음 속에 숨어 있는 기(氣).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패왕의 기가 느껴졌다.
‘나를 굴복시키려고 한다. 둘 중 하나다. 따르느냐. 아니면 싸우다 죽느냐.’
패왕기(霸王氣)를 지닌 인물은 절대로 도사가 될 수 없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말하시오.”
“무림에서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삼 년 내 화산천하제일문을 만드는 것.”
마원은 순간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패도를 원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삼 년 내에?’
하지만 고진유의 표정은 진지했다.
“내가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오?”
“그게…… 아니라.”
고진유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면 비웃는 것이오?”
“아니오. 단지 화산파의 제자가…… 패도를 원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생각한 것이오.”
“패도는 무슨. 난 그런 거 잘 모르오. 말 그대로 화산을 천하제일문으로 만들고 싶을 뿐.”
‘그게 바로 패도인데.’
패도를 추구하는 고진유에게 정사마의 구분은 의미 없을 것이다.
“그대에 대한 청부를 포기하겠소이다.”
“만약 내가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마원은 허리를 숙였다.
“본인은 그대의 뜻을 따르겠소. 목숨을 내놓으라 한다면 베시오.”
“문주의 뜻을 잘 알겠소. 하지만 사실 문주가 죽을 일이 아니지 않소이까? 의뢰를 받았을 뿐. 청부만 철회하면 되지 않겠소?”
“그…… 렇지…… 요.”
“산 아래에서 동문들이 싸우고 있을거요. 그들을 데리고 오시오. 그동안 조건을 말씀드리지.”
“알겠소이다.”
* * *
태행산으로 오른 일행은 하늘 위로 끝없이 솟구친 계곡 앞에서 멈춰 섰다.
호민 곽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좋겠어.”
적은 인원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가장 유의할 점은 하나.
‘포위당하지 않을 것.’
곽우는 곧바로 적은 인원으로 펼칠 수 있는 칠성검진(七星劍陣)을 떠올렸다.
묵경까지 포함해 일곱 명.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수많은 살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칠성검진의 묘리가 최상의 방법이었다.
“묵 형은 우리들 중 가장 화려한 움직임을 보여주니 세 번째 삼성인 녹존(祿存)을 맡아주세요.”
“알겠네.”
곽우는 이어 여섯 자리에 한 명씩 자리를 배치했다.
그리고 묵경에게도 칠성검진을 짧게 알려주며 움직임에 대해 설명했다.
“칠성은 선두에 선 사성들의 움직임에 뒤쪽 삼성이 함께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파군의 요광을 맡은 호진 사형께서 육성을 지휘하며 호위해야 하고요.”
“알았다.”
주섬주섬.
“호청, 뭐 하는 거야?”
칠성검진의 설명이 마무리되자, 당우희가 허리에 묶어둔 보자기를 풀었다.
“혹시나 해서 가지고 온 건데요. 오늘 여기서 쓰일 줄은 몰랐네요. 헷.”
“그게 뭐지?”
보자기 안에서 나온 물건은 그녀의 손바닥에 잡힐 정도로 작았다.
“소벽력탄!”
“야, 너어……! 미쳤어? 지금까지 이런 걸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장두총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왜요? 가지고 다니면 안 되는 거였던가?”
‘이, 이것들이…… 지금 보니 정상적인 놈들이 하나도 없잖아? 다 본색을 숨기고 있었어……!’
화산파에서 수련할 때는 까맣게 몰랐던 사형제들의 모습에 장두총이 입을 떡 벌렸다.
“그걸…… 어떻게 하려고?”
“에이, 당연히 저기 앞에 설치해야죠.”
당우희가 묵경을 보며 부탁했다.
“묵 오라버니! 저 좀 도와줄래요?”
“그래, 가자.”
묵경과 당우희가 계곡으로 향했다.
“저게…… 당문 출신 아니랄까 봐…… 본 문에 있을 때도 가지고 있었단 말이잖아.”
“후후.”
그때 혁자영이 웃음소리를 냈다.
“왜 웃어?”
“그냥…… 낯설어서.”
“저 녀석이?”
“아니. 네가. 본 문에 있을 때는 밉상이더니 여기서는 미운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군.”
“……뭐?”
장두총은 어이없어서 대꾸도 하지 못했다.
후다다닥!
곧바로 소벽력탄을 설치한 묵경과 당우희가 돌아왔다.
“제대로 해놨다.”
“헤헤, 조금 이따 아주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을 거예요!”
* * *
두두두두-
태행산 위에서 야월문의 살수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두에 선 해살인(亥殺人) 섭좌평이 계곡의 끝에 선 일행을 보았다.
“겨우 일곱 명으로 본 문을 쳐들어오다니 미쳐도 완전히 미친 모양이군.”
“그러게 말이오. 저들이 무공과 상관없이 그냥 밀어붙이면 될 것 같소.”
미살인(未殺人) 예공도 동의했다.
야월문 이백 명 대 묵경과 화산파 삼대제자를 포함한 일곱 명의 대결.
일곱 명을 상대하는 데는 전술도 필요 없었다.
“선봉은 본인이 서겠소이다.”
예공은 양손에 대겸(大鎌)을 들고 계곡을 향해 달렸다.
“저놈들을 쳐라.”
“와아아아아아!!”
“죽이자아아아아아!!!”
야월문의 살수들은 괴성을 지르며 계곡으로 들어섰다.
쿠우우웅!
계곡이 울리기 시작했다.
투욱.
그때, 선봉에서 달리던 예공의 발끝에 뭔가가 걸렸다.
‘설마……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함정이다!! 모두 피해라!!”
그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쾅, 쾅!! 콰아앙!!!
세 번의 폭음이 터졌다.
그리고 살수들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망할 도사 놈들이…… 벽력탄을 숨겨 놓다니……!!”
예공은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폭발 속에서 충격을 겨우 막아냈다.
소벽력탄에 의해 생긴 연기가 뿌옇게 앞을 가렸지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기가 조금씩 흩어지자 전방의 시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이건 무슨 소리지?’
예공은 눈을 크게 뜨며 앞을 자세히 보았다.
연기 속에서 흐릿하게 다가오는 인영.
“적이 다가온다. 준비하라!!”
여전히 백 명 이상의 살수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번에는 해살인 섭좌평이 선두에서 치고 달렸다.
까아아앙!!
검진의 일성, 탐랑(貪狼)에 위치한 혁자영의 추화검이 섭좌평을 막아섰다.
검의 세기는 내력의 차이에 영향을 받지만 검법의 위력에 따라 차이를 주기도 했다.
파아앗-!!
섭좌평은 혈인검법을 휘둘렸다.
살수의 검은 변화가 아닌 신속 정확하게 상대를 죽이도록 특화되어 있다.
혁자영의 빈틈을 노리며 살흔검이 목을 파고들었다.
“화산의 무공이 구파 중에서도 왜 최고인지 가르쳐 주마.”
지이이잉-
매화절검의 호신검막을 뚫기에 살흔검은 약했다.
“큭!”
손에 짜릿한 느낌을 받은 섭좌평은 뒤로 물러났다.
혁자영은 그와 동시에 한 발 내디디며 추화검을 그었다.
피이이잉-!
매화 잎이 추화검의 끝에 피어나면서 섭좌평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우우욱.’
한 치만 더 깊어서도 중상을 당했을 것이었다.
칠성검진을 유지한 채 살수들을 상대하면서 밖으로 밀어냈다.
장두총은 이성 거문(巨文)의 위치에서 살수들을 상대하며 구시렁거렸다.
“왜 자꾸 나한테 몰려오는 거야?!!”
최근에 뇌전화검(雷電花劍)을 새롭게 익혔지만 아직 그가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검은 이십사수매화검법.
채애애앵!!
그는 고진유의 움직임을 보며 깨달았던 미세한 동작들을 그대로 펼쳤다.
매화산우의 초식에서 예전과 다른 힘이 느껴졌다.
“커어억!!”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가볍게 움직였을 뿐인데……!’
흥분한 장두총이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순간,
“호경, 검진을 유지해라!”
멀리서 우종성이 소리쳤다.
우종성은 칠성 파군의 위치에서 살수들을 상대하며 검진이 흩어지지 않도록 조율했다.
“전체 우측으로 이동한다!”
우종성의 명에 칠성검진이 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야월문의 살수들은 죽을 맛이었다.
마치 철옹성과 같은 진법.
팟!!
십이지살수인 사살인(巳殺人)은 여인이라 가볍게 생각한 연화련을 공격하다가 난화일지에 가슴이 뚫릴 뻔했다.
‘젠장……!! 젠장!!’
휘이익!
데구루루루루-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검진 안에서 둥근 물체가 날아와 살수들을 향해 굴러갔다.
“헉……!!”
살수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도망치듯 물러났다.
푸시시시시-
김이 빠지는 소리.
“헤헷, 그냥 연막탄일 뿐인데. 다들 놀라기는~”
“…….”
그녀만 웃을 뿐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호청, 이상한 물건 꺼내지 마.”
“네, 사형~”
“또 있는 건 아니겠지?”
“…….”
당우희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방금 저 물건은 당문에서 만든 당문소탄이다. 어떻게 저 여도사가 가지고 있는 거지?’
당우희의 미소를 본 야월문의 살수들은 물러난 상태에서 쉽게 공격하지 못했다.
두 진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유지됐다.
그때,
휘이이익!!
살수들 뒤편에서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인양의 호충신법은 눈으로는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저 녀석도 보통이 아니야.’
장두총은 이보다 빠른 신법을 본 적이 없었다.
“인양아, 어떻게 됐지?”
“야월문을 발견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혼자서?”
“네. 충분히 야월문주를 잡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양의 말을 야월문의 살수들도 모두 들었다.
십이지살수들은 다급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화산도협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해살인, 본 문으로 빨리 돌아가야겠어. 문주께서 위험하다.”
“본 문에는 신살인과 오살인이 문주님을 지키고 있다. 혼자서는 절대로 문주님께 다가갈 수 없어.”
“지금 이 사태를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는 화산도협이야. 중원오기 창천기검인 남궁허에게 인정을 받은 무인이다.”
“…….”
“성동격서에 당한 거야. 그가 멍청해서 우리들을 여기에 몰아넣고 혼자 갔을 것이라 보는가?”
섭좌평은 얼굴이 붉어졌다.
이들 일곱 명을 운 좋게 죽인다고 해도 문주가 죽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본 문으로 돌아간다!”
야월문의 살수들이 계곡에서 순식간에 물러났다.
“휴우…….”
긴장이 풀린 장두총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우, 우리도 빨리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요?”
“호화, 괜찮아. 우리가 당장 올라가도 도와줄 일은 없어. 조금 휴식한 뒤 올라가도록 하자.”
우종성의 말은 정확했다.
일행은 각자 자리에 앉아 운기를 했다.
* * *
일각의 시간이 지났다.
인양을 선두에 세운 채 태행산을 올랐다.
귀혼곡 근처에 도착했다.
“묵경 형, 저기입니다.”
“수고했다. 뒤로 물러나 있어.”
묵경은 혹시나 모를 일에 앞장서며 귀혼곡으로 들어섰다.
일행은 얼마 들어가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야월문의 석문 앞에 살수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모여 있었다.
“흐응, 보아하니 일이 잘된 것 같군.”
묵경은 천천히 야월문의 석문으로 향해 걸었다.
“묵 형!”
뒤에서 우종성이 다급히 불렀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괜찮소, 사형. 저들이 들어가지 못한 걸 보니 이미 끝난 거 같구만.
묵경의 뒤로 장두총이 바로 따라붙었다.
‘투덜대면서도 진유 아우를 제일 잘 믿는 모양이군.’
우종성이 피식 웃고는 일행과 뒤를 따랐다.
석문으로 다가서자 살수들은 쳐다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스윽.
살수들 사이에서 노지송이 다가왔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화산도협께서기다리고 있소이다.”
“귀 문의 문주와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군요.”
“대충…… 그렇소이다.”
노지송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진짜 성공했어.’
장두총은 믿기지 않았다.
야월문과 싸웠던 일은 중원 무림에서 엄청난 사건이 될 게 분명했다.
‘내 이름이 중원에 퍼질 게 틀림없어. 나도 드디어 아버지께 인정받을 수 있는 거야!’
일행은 그를 따라 야월문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