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끙끙.
동우는 점혈을 당했다.
“저번에 나를 기습한 살수도 아혈문인 걸 보면 누군가 의뢰를 한 게 분명한데.”
스윽.
묵경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잠깐만. 이 년 동안 화산파에서 수련한 거 아니냐? 지옥혈림도 아니고…… 아 참.”
순간 묵경이 눈치를 보며 주위를 살폈다.
“제가 도둑인 것도 아는데요.”
“그래? 다 아는구나. 여하튼 야월문이 왜 네가 화산을 나오자마자 나타난 건데?”
“별일은 아니고 잠시 임위에 간 일이 있습니다.”
고진유는 묵경에게 유성순가에 관한 사건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답은 나왔네. 유성순가에서 아혈문에 의뢰를 했군. 말만 들어도 인간이 덜된 놈이잖아.”
“저도 그런 듯합니다. 야월문에선 포기할 생각은 아닌 모양이네요.”
“포기는 안 할 거야. 살수들이 청부의뢰를 그만두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어. 의뢰자가 청부를 그만두게 하거나, 아니면 살수들이 위약금을 물고 포기를 하거나.”
“음…… 의뢰자는 그만둘 생각은 없을 테고, 야월문도 그만둘 생각이 없다면 살수들은 계속 나타나겠군요.”
“아마도.”
고진유는 일행과 시선을 마주 보았다.
“대충 어떤 상황인 줄 아시겠죠?”
장두총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얼굴을 보니 이미 결정을 내렸구만.”
“이거 참. 어떻게 알았습니까?”
“심각한 척하는 주제에 입은 웃고 있잖아.”
“사형은 정말로 도사가 맞습니다.”
“됐어. 계획이 뭐야?”
“이자를 돌려보낼 겁니다.”
“……뭐…… 네가 책임자이니 뭐라고 말을 하지 않겠다만, 살려 보내면 또 오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픽픽.
고진유의 손가락에서 기가 뻗어 나왔다.
“우욱…….”
동우의 굳어 있던 점혈이 풀렸다.
“당신을 풀어주겠소. 단, 야혈문에 돌아가면 이번 일은 없던 청부로 하자고 전해주시오. 우리 일행 중 다친 사람이 없으니,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겠소.”
“…….”
“혹시나 내 뜻을 무시하여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거외다.”
고진유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동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흠. 그냥 보내줘도 되겠어?”
묵경이 물었다.
“당연히 안 되죠.”
“저기 벌써 갔는데?”
“보름 뒤에 혈맥이 터져 죽을 겁니다. 내게서 점혈을 똑바로 풀지 않는다면요.”
“어쩐지. 그냥 보내준다니 이상하더라.”
고진유는 밖의 상황을 내다보았다.
“인양아.”
“네, 말씀하세요.”
“밖에 나가면 여기 주민들이 피해를 많이 봤을 거다. 한 번 알아봐.”
“알겠습니다!”
인양은 밖으로 나가 시장에서 피해를 보았던 주민들을 찾아 나섰다.
* * *
야혈문.
섬서성 산양에 위치한 살문의 문파.
야혈문주 마원은 다급하게 날아온 소식을 받았다.
십이지살수 자살인 동우의 실패.
화산파 제자에게 두 명이나 당했다.
“그놈이…… 화산도협이었다니…….”
이 년 전 화산검절의 제자에 대한 소문이 기억났다.
창천무룡 남궁한을 비무대에서 이긴 화산파의 고수.
남궁한은 그 뒤, 중원무림에서 차기 검황이라 부를 만큼 남궁세가의 절대 무인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하필이면 그런 놈인 줄도 모르고 의뢰를 받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똑바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마원의 앞으로 야월문의 총관이 고개를 숙였다.
화산파의 제자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거절하기엔 의뢰금이 짭짤했다.
“혹시 그들이 도협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의뢰한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아닐 것입니다. 화산도협에 의해 유성순가가 박살이 난 건 맞습니다만.”
“휴우…… 이젠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는 이미 우리에게 경고했네.”
마원의 물음에 인살인 채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문주님, 의뢰를 철회하려고 했다면 축살인이 당한 뒤 바로 해야 했습니다. 그때는 중원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일어난 일은 지금쯤이면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망할…….”
“본 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의뢰받은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인가?”
“만일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청부에 대한 본 문의 신용이 떨어질 것입니다.”
채장의 말처럼 야월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처지에 빠졌다.
“화산도협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화산파에서 가만히 있겠는가?”
“화산파와 싸울 수는 없습니다. 당분간 무림에 나오지 않고 숨어 있으면 됩니다. 본 문의 신용만 살아 있다면 어디서든지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채장, 그대가 맡도록 하게.”
“문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 * *
무림맹으로 가는 여정은 평온했다.
며칠 지나면서 묵경과 인양은 마치 화산파에 속한 듯 편안하게 지냈다.
특히 연자련과 당우희는 묵경의 옆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쳇, 뭐가 저리 좋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장두총의 투덜거림에 고진유도 동의를 해주었다.
“웬일이냐? 어디 아파?”
“뭐가요?”
“내 말이 맞다고 해주잖아.”
“아니라고 할까요?”
“됐다. 그건 그렇고, 시간이 애매한데 어떻게 할 테냐?”
산을 넘어가기에는 밤이 걸릴 듯했다. 그렇다고 해가 지지 않았는데 객루에서 지내기에는 너무 빨랐다.
“야숙을 해볼까요?”
“알겠다. 산으로 가기 전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야겠네.”
스윽.
고진유는 전표 한 장을 꺼내서 장두총에게 내밀었다.
“무림맹에 갈 때까지 이 정도 금액이면 충분할 겁니다.”
“화, 황금 오십 냥?! 그것도 천하상국에서 발행한 전표잖아! 너 이걸 어디서, 아니지, 장문인께서 주신 거야?”
“제가 부자인 줄 모르셨군요.”
“……아…… 맞네.”
이 년 전 함께 화산파에 가는 길에서도 거액의 돈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필요한 물건들은 사형이 알아서 사세요.”
“주니까 받긴 하겠지만…… 네놈, 이거 진짜 이상한 돈은 아니겠지?”
“후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불신의 눈으로 고진유를 바라보던 장두총은 결국 서너 명과 함께 야숙을 위한 물품을 사러 시장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러 간 사이, 나머지 인원들은 객잔에서 잠시 쉬었다.
고진유는 인양에게 길을 걷는 동안 가르치던 손동작을, 객잔에 앉아 쉬면서도 계속 알려주었다.
“이번에는 무영도수를 보여줄 거다. 상대방에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움직여야 해. 잘 봐라.”
고진유는 오른손을 올려 인양의 가슴 앞에서 멈췄다.
인양은 숨을 죽이며 손을 똑바로 보았다.
‘전혀 움직이지 않아.’
고진유는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손을 내렸다.
“잘 봤어?”
“……?”
인양은 무엇을 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움직이는 걸 못 봤습니다.”
“맞아. 이 손은 안 움직였지.”
스윽.
고진유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을 올렸다.
손바닥 안에는 성녀곡에서 받았던 비취색의 신패가 들려 있었다.
“앗……?! 언제?”
“푸훗, 이해가 됐어?”
무영도수의 전설.
인양에게 고진유는 하늘 위의 존재였다.
“너도 알겠지? 상대의 눈을 속여라. 이게 기본이지.”
“아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사람의 시야는 한없이 넓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집중하면 한 점밖에 볼 수 없거든.”
“아하…….”
인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주위를 산만하게 만드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야. 고수는 딱 한 순간에 딱 한 번만 시야를 돌리게 만들면 돼.”
“알겠습니다.”
“열심히 연습해 봐. 이걸 익히면 무공에도 응용할 수 있어. 상대가 어떻게 공격을 받는지 모르지.”
“정말입니까?”
“한번 보여줄게.”
화산파 제자 중 우종성을 불렀다.
“호진 사형, 잠깐 몸 좀 풀 수 있을까요?”
“알겠다.”
우종성은 거부하지 않았다.
고진유의 무공 실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니, 오히려 비무는 환영할 일이다.
그들은 객잔 뒤로 자리를 옮겼다.
“호정, 난 진지하게 한다.”
“알겠어요.”
차앗!
우종성은 화산군자검(華山君子劍) 허송 도인을 사부로 섬긴 뒤 오행매화검을 익혔다.
초식을 시전하자 우종성의 화무검에서 오행의 기가 퍼져 나왔다.
‘정말로 진지하게 하는군.’
고진유는 양손을 올려 화산복호권의 권식을 준비했다.
두 사형제의 비무가 시작되자 일행은 곧바로 집중하며 지켜보았다.
패애애앵!!
우종성의 화무검이 먼저 움직였다.
수자결의 오행매화검이 거센 파도를 일으키며 밀려왔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 고진유는 일권을 내질렀다.
화산복호권의 기세는 오행매화검에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부딪침에 정신이 팔린 다른 일행과 달리, 인양의 시선은 일권을 펼친 고진유의 오른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유 형은 한순간만 상대를 속이면 된다고 했어.’
오행매화검과 화산복호권이 부딪치는 순간,
꿈틀.
‘분명 진유 형의 왼손이 움직였어.’
우종성은 천수검향(天水劍香)을 맞받아치는 화산복호권을 향해 정면으로 부딪쳤다.
‘사제가 팔 성 정도만 끌어 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해!’
그때.
‘옆?’
팟!!
순간 옆에서 날아오는 기에, 그는 일단 무화검을 거두며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된 거지? 전혀 볼 수 없었어!’
그대로 공격했다면 전방에서 오는 화산복호권을 밀어냈겠지만, 옆에서 날아온 상대의 일권에 당했을지 몰랐다.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화산복호권엔 분명 그런 초식이 없을 텐데…….”
“제가 살짝 추가했습니다.”
“……하하.”
우종성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동안 질투가 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미천한 신분에, 제대로 화산파에서 수련도 하지 않은 녀석의 무공이 누구에게나 인정받았다.
자괴감이 들 정도로 한동안은 수련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부로 모신 화산군자검 허송이 찾아왔다.
“그래. 화가 나겠지. 나 또한 검절과 화산제일검을 마주하며 같은 감정을 느꼈으니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이것 또한 즐겁지 아니하더냐? 앞을 바라보고 넘어설 수 있는 상대가 가까이 있는 것은 행운이다. 더욱더 열심히 수련하면 되느니라.”
앞선 자를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의 옆에 서게 될 것이다.
‘사부님. 이놈은 괴물입니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그런데…… 사부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겠습니다. 제 목표는 이제 다른 자가 아닌 이 녀석입니다.’
명확한 목표가 없던 그에게 확실한 삶의 동기가 주어진 순간이었다.
“호정, 한 번 더 부탁한다.”
“아, 오늘은 그만하면 안 될까요? 인양에게 가르칠 게 있어서요.”
“시끄럽다. 네가 부탁했으니 끝은 내가 낼 것이다.”
타앗!
화무검을 펼치는 우종성의 입가에 미소가 보였다.
오물오물.
묵경은 육포를 씹으면서 비무를 구경했다.
‘우 형의 기세가 변했는걸.’
* * *
부우우우엉- 부우우우엉-
모닥불이 주위를 밝힐 뿐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했다.
일행은 야숙이 거의 처음이었다.
걱정한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야숙도 재미있네요, 언니.”
“응, 모닥불 앞에 앉아서 술 한잔 마시는 게 운치가 있구나.”
두 여인도 기분이 좋은지 잘 마시지 않던 술까지 마셨다.
고진유는 옆자리에 떨어져 있는 장두총을 불렀다.
“호경 사형.”
“왜?”
귀찮은 듯 고진유를 보며 소리쳤다.
“준비가 완벽하네요.”
“놀리냐?”
“그게 아니라 사형의 일 처리가 세심해서요. 우리들 중에 최고입니다.”
“…….”
장두총은 기분은 나쁘지 않은 듯, 슬쩍 주위에 앉은 일행과 눈을 마주쳤다.
“농담하지 마. 나보다 잘난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데…….”
“최고가 꼭 무공만 강하다고 되나요. 붙임성도 제일 좋고 일 처리도 빠르게 잘하잖아요.”
“……흥, 난 일하느라 바쁘니 말 걸지 마라.”
장두총의 목소리가 어느덧 부드러워졌다.
‘훗.’
우종성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진유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지닌 사형제 일 순위가 장두총이었을 텐데.
‘특이한 녀석이야.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있어.’
슥슥슥.
고진유는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그 옆에 인양이 바짝 당겨 앉았다.
“대충 자물쇠는 기본적으로 이런 구조로 되어 있어. 여기에서 단수가 높아지면서 풀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지.”
“단이 높을수록 어렵지만, 너무 커지지 않습니까?”
“맞아. 그래서 대부분 구 겹을 넘기 힘들어. 두껍게 하면 커지고 얇게 하면 부서지기 쉬우니까.”
툭툭.
고진유는 걸림쇠 부분을 가리켰다.
“자물쇠를 열기 위해서는 여기 이 부분을 젖히면 돼. 한 개든 두 개든 상관없어. 대충 이해는 되겠지?”
“넵……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자물쇠를 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런 도구가 있어야 하지.”
고진유는 혁대에서 가느다란 철심을 꺼내 들었다.
티이잉!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우선 먼저 해야 할 건 손끝에 미세한 걸림을 느끼는 초감각을 익히는 거다. 오늘부터 그 연습을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내밀었다.
“이걸로 연습하도록 해. 나뭇가지를 통해 손끝에 모든 감각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하면 된다.”
인양은 나뭇가지를 잡았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두 사람을 보던 시선들.
“묵경 오라버니. 호정 사제가 저걸 왜 가르치나요?”
“음…… 그게 인양을 전설의 대도(大盜)를 만들겠다고 하더군.”
“인양 아우를 무공 고수도 아니고 하필이면 대도를 만드는 이유가 있어요?”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 아니라 세상을 훔치는 대도라고 하던데.”
“세상을요?”
“그렇다고 하니깐 알았다고 했지만, 저 녀석의 꿍꿍이를 어떻게 알겠어? 그건 물어도 말을 안 하니…….”
당우희는 다시 궁금한 게 생긴 듯 물었다.
“세 사람이 서로 형 아우 하는 사이이잖아요.”
“맞아. 우린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거든.”
“호정 사제는 무공으로 천하제일인이 된다고 하고, 인양 아우는 전설의 대도라면. 묵경 오라버니는요?”
“나? 당연히 중원 모든 여인들에게 사랑받는 사내가 되는 게 목표지.”
“에게, 너무 욕심이 없는 거 아닌가요?”
묵경은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욕심이 없다고? 저 둘에 비하면 과한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