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임위지부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고진유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평소에는 누우면 바로 잤다.
‘이 찜찜한 기분은 뭐지?’
해결했는데 뭔가 뒤끝이 좋지 않은 이 느낌.
“허허. 녀석. 의적 흉내를 내겠다는 것이더냐?”
“아!”
고진유는 벌떡 일어났다.
‘맞아. 이거였어. 우리가 받을 건 받았을 뿐이지, 그동안 마음 고생한 대가를 못 받았잖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유성순가는 분명 화산파를 기만했다.
‘상납금은 상납금이고, 기만한 대가는 따로 치러야 하는 법이지.’
고진유의 입가로 살짝 사악한 미소가 나타났다.
* * *
휘이익!
유성순가의 건물 위로 내려선 그림자가 경내를 살폈다.
유성순가의 분위기는 이미 침울할 상태였다.
경내를 순찰하는 무사들도 힘이 빠진 채 대충 움직였다.
‘완전히 정신줄 놓고 있군. 하긴 일하기 싫겠지.’
스으으으으-
무음무형의 무존신(無存身).
고진유는 곧장 총관동으로 움직였다.
어둠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다.
‘옛날에 이 정도 안력이었다면 도굴도 많이 했었겠는데.’
총관의 개인 집무실로 들어서며 순찰 도는 무사 바로 옆을 지나갔지만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밀 금고는 무조건 여기 있다.’
유성순가의 자금 관리는 총관 순노정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충은 상납금을 총관이 관리하던 금전당 금고에서 꺼내 왔었고.
‘장사꾼들이 어떤 놈들인데…… 따로 뒷주머니를 차게 마련이지.’
고진유는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거 제법 신경을 썼네.’
집무실로 들어가는 문에 세 개의 기관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이 정도면 안에 꽤 중요한 게 있는 모양인데.’
예전이라면 세 개의 기관 장치를 해체하기까지 반시진 정도가 걸렸겠지만.
‘이거 너무 쉬운데.’
무공을 익힌 뒤부터 기관 장치는 손쉽게 벗겨낼 수 있었다.
‘이러다 세상 돈을 전부 훔칠 수 있겠어.’
가느다란 흑색 실에 연결된 소리 장치와 동시에 침이 발사되는 걸쇠를 풀었다.
마지막으로 문 아래 바닥에 설치한 세 번째 기관 장치를 푼 뒤 안으로 들어섰다.
고진유는 주위를 둘러보며 머릿속에 방 전체의 구조를 파악했다.
숨기고 찾는 것은 심리전이었다.
‘어디에 있을까나?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있겠지.’
비밀 금고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방 밖에 설치된 장치를 믿고 있는지 책상 바로 아래 바닥에 숨겨져 있었다.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소리가 다른 한 위치에서 멈추고 자세히 살폈다.
툭.
손바닥으로 건드리자 바닥이 살짝 올라왔다.
‘성공. 아직 감각이 살아 있네.’
열린 바닥을 들어 올리자 철 상자가 딸려 올라왔다.
“자, 여기에 뭐가 있을까.”
자물쇠 구멍 안으로 철심을 밀어 넣었다.
샥샥샥.
딸각.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철 상자 안에서 딸깍 소리가 나며 뚜껑이 열렸다.
‘오호…… 좋은데…….’
서너 개의 금원보와 보석들.
그 아래로는 중원상국과 더불어 중원이대상국인 천하상국과 섬서성 최대 상국인 서안상국의 전표들이 수십 장 들어 있었다.
우선 전표부터 먼저 챙겼다.
“이건 기부한 것으로 생각하시오. 잘 사용하겠소이다.”
전표를 챙긴 다음 보석들도 품에 넣었다.
‘이 정도는 봐주지.’
무거운 금원보는 굳이 가지고 갈 필요 없었다.
‘후, 이제야 가슴이 시원해지네.’
고진유는 철 상자를 잠근 뒤 비밀 장소에 원래대로 넣어두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해체한 장치까지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책상 바닥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전혀 도둑맞았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이만 안녕이외다.’
고진유의 신형이 총관실에서 사라졌다.
* * *
‘나 참, 형님도…….’
찌푸린 얼굴.
순노정의 표정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었다.
‘그냥 가만히 계시지 않고…….’
가주 순요청은 장사꾼보다 무인의 성격에 가까웠다.
어제저녁, 두 사람은 단둘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살수에게 의뢰해야겠다.”
“네에?”
“이대로 물러날 수 없어. 이 치욕을 참을 수 없다.”
“혀, 형님. 그냥 이대로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상대는 화산파입니다.”
“화산파 도사라고 해서 칼이 안 들어가냐? 잔소리 말고 청부할 테니 살수들을 구해봐!”
‘겨우 한 놈 죽이는데 황금 이십 냥이라니!’
섬서성에서 활동 중인 살수 조직 야혈문(夜血門)에 전갈을 보냈다.
상대가 화산파 제자라고 해도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
하지만 가주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까운데…….’
집무실로 도착한 그는 기관 장치부터 풀기 시작했다.
‘후…… 여기에 함부로 들어오다간 독침과 염강수(鹽强水)에 즉사를 면치 못하지.’
자신 있게 설치한 암기들이었다.
스윽.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그가 책상 바닥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바닥이 올라오면서 비밀 금고가 나타났다.
‘멍청한 화산파 놈들. 어제 가지고 간 돈이 전부라고 생각하겠지? 그건 여기에 있는 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
순노정은 철 상자를 꺼낸 후 열쇠를 밀어 넣었다.
딸깍.
철 상자가 열리는 소리가 나고, 그가 미소를 띠며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그를 덮쳤다.
스르륵…….
온몸에 힘이 빠진 순노정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없…… 어…… 없어졌다……!”
그의 목소리가 울음이 섞인 듯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도둑이 들었다고 소리도 칠 수 없었다.
“아아…… 어떤 놈이…… 이것을……!”
* * *
순요청은 안으로 들어선 총관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 전 가주전을 나갈 때와 전혀 다른 얼굴.
”아우, 대체 무슨 일인가?”
“형…… 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설마 화산파에서 다시 온 건 아니겠지?”
“……우리 금고에 숨겨놓았던 전표들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쿠우웅.
순요청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전표가 사라지다니. 똑바로 말하게! 누가 훔쳐갔단 말이냐?!”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철 상자 안에 전표들과 보석들이 들어 있었는데……!”
“어제 있던 전표와 보석들에 발이 달렸다는 말이더냐!!”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저히…….”
“이미 야월문에서 의뢰를 받아 움직였어!! 그들이 오면 당장 의뢰비를 반이라도 내야 한다고!”
“가주 형님, 취소할 수 없겠습니까?”
“이미 승인이 난 청부 건이야. 중간에 취소할 경우 무조건 위약금을 내야 해.”
“하아…….”
순노정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야월문의 살수들이 움직였다면 물릴 수도 없는 일.
그대로 의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우선 급하게 돈을 구해서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요청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깊은 늪에 빠진 듯 숨을 쉬기조차 쉽지 않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 * *
똑똑.
임위지부를 떠날 준비하는 고진유의 방으로 허묵이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쉽네. 너무 빨리 가는 게 아닌가?”
“제가 할 일이 많아서요.”
“그렇구만. 혹시 필요한 건 없고?”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사숙, 잠시 앉으시지요.”
스윽.
그리고 허묵은 자리에 앉자, 품 안에서 둘둘 말린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건네주었다.
“받으세요.”
“하하, 선물인가? 제법 두꺼운데?”
멈칫.
그의 눈이 커지면서 고진유의 얼굴과 두루마리를 번갈아 보았다.
“이…… 게…… 무슨……?”
“어제저녁에 잠이 안와서 잠시 유성순가에 들렀다가 왔습니다. 사숙께서도 그냥 넘어가기엔 그들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떠나기엔 괜히 아쉽더군요. 저들에게는 이게 가장 큰 벌입니다.”
허묵은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았다.
“……도협(盜俠)이라 하더니…….”
그는 피식 웃어버렸다.
“가지고 계시다가 임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해 주세요. 이 정도의 돈을 모을 정도면 나쁜 짓을 많이 했을 겁니다.”
“크, 크하하하! 알겠네. 그들을 위해서 한 푼도 빠짐없이 쓰도록 하마. 이 일은 혼자 알고 있지.”
허묵은 얼른 전표들을 품 안에 넣었다.
“우리야 좋지만 유성순가는 안 봐도 난리가 났겠군.”
“조용히 구경만 하시면 됩니다.”
“크큭, 그리하겠네.”
“사숙, 이젠 진짜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고맙네. 고마워!”
허묵은 고진유를 껴안았다.
* * *
임위를 벗어난 뒤 화산으로 향하는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마치 춤을 추는 듯 어깨가 들썩거리며 가볍게 걸었다.
그런 고진유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죽을지도 모르고 신이 났군.’
목표는 화산파의 삼대제자.
다른 곳도 아닌 구파의 한 곳이지만 삼대제자 한 명이기에 청부를 받아들였다.
고진유가 좁은 폭에 나무도 없는 취령곡(醉嶺谷) 절벽 사이를 들어선 순간.
핏! 핏! 핏! 핏!
수십 개의 날카로운 비수들이 전방에서 허공을 찢는 소리를 냈다.
‘암기?’
고진유는 순식간에 호충신법의 탈각신(脫殼身)을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비수들이 절벽에 맞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크큭, 어린 도사 놈이 제법이군.”
“또…… 복면이군.”
흑의 복면을 쓴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에 비하면 내력들이 영 작네.’
극일천에서 나온 복면인들과는 달랐다.
“어디서 왔소?”
“죽을 놈이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피식.
고진유는 실소가 나왔다.
“왜 웃지? 지금 비웃는 것이냐?”
“너무 자신 있게 말을 하길래. 누가 죽을지는 모르지 않나?”
“어린놈이 함부로 말을 하는군. 두렵지 않은 모양이지?”
“글쎄? 당신들을 보니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네놈이 화산파의 제자라고 해서 우리가 죽이지 못할 듯싶으냐?”
“꽤나 자부심이 강해 보이지만, 보아하니 지옥혈림처럼 개망나니 같은 짓을 하는 곳이지 않소?”
“이 호랑말코 도사 놈이 어디서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느냐? 당장 그 입을 찢어버리겠다.”
복면인의 신분은 아혈문의 십이지살수 축살인(丑殺人) 황장.
“축살조는 이놈을 목을 잘라라!!”
이십 명의 살수들이 살기를 내뿜으면서 달려들었다.
“난 당신들 같은 인간쓰레기들을 보면 화를 참을 수 없더군.”
채앵!
고진유가 사의검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하늘을 날았어?!’
축살조의 살수들이 계곡 옆 허공을 밟으며 날아올랐다.
팟! 팟! 팟! 팟!
“큭!”
비수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생각지 못한 살수들의 공격에 고진유는 호탄신을 펼치며 비수들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어떻게 된 거지?’
살수들의 경지는 허공답보를 할 만큼 내력이 높지 않았다.
‘그렇다면 뭔가 있다는 건데.’
계곡 주위에서 그들만의 장치를 이용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고진유는 살수들이 지나온 곳을 향해 최대한 안력을 올렸다.
반짝!
‘저건…….’
계곡 사이에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투명한 줄이 엮여 있었다.
‘재미있는 놈들이군. 내가 이곳을 지나갈 걸 미리 알고 기다렸어.’
스걱.
사의검의 검기가 뻗어 나가면서 투명 줄을 잘라냈다.
“어어어?!! 아아아악!!”
투명 줄을 밟고 있던 세 명의 살수가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복면을 쓴 황장의 표정이 변했다.
‘이걸 단번에 알아내다니…… 보통 놈이 아니다.’
수하들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축살진을 펼쳐라!”
부우우웅.
황장의 명에 흑의살수들이 양쪽으로 대열을 정렬했다.
쉬이이익-
고진유의 허리와 목을 자르기 위해 원형 검날이 양쪽에서 시퍼런 예기를 뿌리며 날아왔다.
‘이런 건 처음이군.’
고진유는 몸을 튼 뒤 가볍게 피했다.
위이이잉-
이번에는 수평이 아닌 열십자의 모양으로 네 개의 원형 검날이 쏟아졌다.
‘귀찮군. 이것들을 먼저 치워야겠어.’
매화자명의 초식을 펼치자 사의검에서 자줏빛 폭광이 번쩍거렸다.
까아앙!!
산산조각으로 쪼개진 원형검날의 파편들이 흑의살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으아악!!”
흑의살수들의 고통에 잠긴 비명.
그들의 전신에 파편들이 꽂혔다.
‘화산파의 고수다.’
축살진조차 가볍게 파훼한 고진유의 무공을 보면서 두려움이 생겼다.
야혈문에서 청부 의뢰를 받기 전에 상대를 똑바로 파악했어야 했다.
“으으으악!!”
취령곡의 계곡을 따라 수하들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사…… 신…….’
화산파 도사가 너무나 쉽게 수하들을 죽이는 모습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다가오는 상대의 검에 수하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졌다.
‘허억. 벌써…….’
황장은 검을 쥐고 있던 손이 떨렸다.
“살수들은 목숨이 끊어져도 누가 청부를 했는지 말하지 않는다지.”
“…….”
“대신 다른 질문을 하겠소. 살인 청부가 실패하면 살수들은 상대가 죽을 때까지 보내는 것이오?”
‘큰일이다.’
황장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살수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다.”
“……잘 알겠소. 그렇다면 오는 대로 전부 죽이는 수밖에 없겠군. 내가 살아야 하니까.”
스걱.
사의검이 그의 눈앞으로 움직였다.
매화 향이 흐르면서 매화 잎이 휘날렸다.
그리고 따뜻한 느낌이 목에서부터 아래로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더구나 난 복면을 쓰는 놈들이라면 짜증이 나서.”
“커어어어……!”
황장은 두 손으로 목을 감싸며 무릎을 꿇었다.
“당신들이 계속해서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게 될 뿐이오.”
고진유는 서서히 쓰러져 가는 황장을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