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하아…….”
허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이면 지부에서 그가 도망간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언젠가는 스스로 화산의 도의를 벗을 거라 생각했음에도, 마음이 마냥 편하진 않았다.
“아니지. 황금 오십 냥 정도면 멀리 가서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어. 당분간 조용히 지내다 무관이나 여는 거야.”
한데, 진작 도착했어야 할 우충이 아직 소식이 없었다. 천천히 걸어도 충분히 다녀올 시간이었다.
‘반시진이나 지났다. 이 야비한 놈이…….’
이를 갈며 허궁이 옆에 내려놓은 검을 잡은 순간, 가옥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곧바로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잠시 밖으로 나와게.”
우충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이 새끼가 마음이 변했군. 죽여 버리겠다.’
콰아앙!!
허궁의 발길질에 방문이 부서지면서 날아갔다. 그가 살기를 내뿜으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충, 방금 나에게 한 말인가?”
“그렇소이다. 당신에게 한 말이외다.”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우충의 뒤로 세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허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갈색 도의에 그려진 학.
화산파와 함께 섬서성의 패자인 종남파였다.
“그대들은…… 종남파의 도우들인가?”
“맞소이다. 본도는 종남의 양경이라 하오.”
종남의 양자배는 화산의 허자배와 같은 배분이었다.
허궁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종남오검의 양일검……!’
허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양경 도우께서 저자와 어쩐 일로 함께 오셨소이까?”
“때마침 유성순가에 머무르던 중에, 우 부총관께서 본도에게 도움을 청했소이다. 누군가 트집을 잡아서 협박한다고 말이오.”
“……협박이라고?”
우충을 노려보던 허궁의 인상이 굳어졌다.
‘죽일 놈. 이들을 끌어들여 내 돈을 주지 않고 삼키겠다는 심보군.’
허공의 살기가 솟구쳤다.
“우충!! 오늘 네놈의 제삿날이 될 줄 알아라!!”
우충은 종남파의 도인들 뒤로 재빨리 빠졌다.
‘종남파라면 충분히 화산파를 상대하고도 남지.’
종남파 또한 정파 무림의 구파 중 한 곳.
최근 섬서성에서 종남파의 성세는 점점 높아져 가는 중이었다.
현 무림에서 사일검성으로 추앙받는 운소진인의 존재만으로 종남파는 어느덧 화산파의 위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허궁은 저들과 무공으로 싸워 이길 수 없었다.
‘이대로 혼자 죽을 수는 없어. 이판사판이다.’
허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우충, 똑바로 들어라. 난 화산파에 가서 모든 사실을 밝힐 것이다. 네놈들이 수년 동안 내지 않았던 상납금에 대해 알게 되면 그들이 가만히 있을까?”
“그렇게 되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하! 어차피 받지 못할 돈. 네놈들도 똑같이 당해야지.”
허궁의 말대로 된다면 유성순가의 입장에서는 피곤해질 게 당연했다.
“아이고, 양경 도인님.”
“알겠네.”
그때, 양경과 함께 세 명의 종남파 도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허궁 도우,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오?”
“종남파에서 관여할 일이 아니오! 이 일은 저기 우충과 본인의 일이니 그대들이 물러나시오!”
“허허, 허궁 도우께서는 지금 어떠한 상황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구려. 여기서 물러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그대이지 않소?”
“하! 종남파가 예전부터 임위까지 노린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여긴 화산파의 영역이외다!”
“화산파의 영역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오? 무림은 강자의 세계. 강한 자가 가지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구파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야 하는 법이오!”
“그건 서로 힘이 있을 때 하는 말이외다.”
허궁은 점점 다가오는 세 명의 기세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순간,
“종남파의 도사들이 이리 현실적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매화도의를 입은 젊은 도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허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뒤로 허묵과 함께 화산파의 도사들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여기를?”
“간단합니다. 유성순가에서 급히 나오는 저자를 따라왔지요.”
고진유는 종남파 도사들 뒤에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우충을 가리켰다.
‘저 공자는…….’
우충도 고진유를 알아보았다.
‘화, 화산파 도사였어?’
상황을 주시하던 양경은 젊은 도사가 두른 매화도의 끝자락에 그려진 세 개의 매화 문양을 발견했다.
‘삼매화라고 하면…… 매화검인이군.’
약관의 나이에 매화검인의 수준에 이른 화산파 제자가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그대는?”
“화산파 제자인 호정이라 하오.”
“도명이 호정이라면 삼대제자인가?”
양경은 슬쩍 말을 낮추었다.
“그렇소.”
“말이 짧군. 난 종남파 이대제자인 양경이라 한다.”
“지금 내게 예를 받고자 하는 것이오? 이거 방금까지 하던 말과는 다르군. 예를 받으려면 서로 힘이 대등해야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상당히 건방진 녀석이군. 무림의 예도 똑바로 가르치지 않다니, 그대의 사부가 누구이더냐?”
“당신들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소.”
“이놈이…….”
“이곳은 화산파의 영역이오. 당장 물러가지 않는다면, 어떤 불상사가 생겨도 종남파는 따질 수 없소이다.”
양경은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채애앵!!
허리에 찬 검을 뺐다.
한눈에 봐도 묵직한 중(重)의 묘리를 담은 검.
스륵.
‘쾌와 환이 기본 묘리인 화산의 검과는 성격이 반대로군.’
사의검 또한 검집을 빠져나왔다.
“감히 못 하는 말이 없군. 오늘 화산파의 어린 제자에게 따끔하게 훈계해주마.”
양경이 익힌 종남의 검은 대천중검법(大天重劍法).
중검 중에서도 진정한 종남의 중검이라 할 수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죄송하다고 사죄를 해라!”
“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군.”
“어린놈이……! 다쳐도 할 수 없는 노릇이로구나!”
양경이 검을 휘둘렀다.
중검답게 묵직하고 패도적인 기운!
하지만,
채애앵!!
사의검에 의해 양경의 검이 가볍게 튕겨 나갔다.
“종남의 검은 중검이라 들었거늘, 이래서야 어디 중원에 명함이라도 내겠소?”
양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허, 안 되겠군. 정녕 피를 보고자 함이구나!”
그는 십 성의 내력을 끌어 올렸다.
천중하강(天重下降).
마치 하늘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압박.
무거움 그 자체인 공격이 고진유를 향해 떨어졌다.
‘강해. 하지만 상대를 잡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지.’
타탓!
비류신(飛流身)의 가벼운 움직임만으로 고진유는 간단히 양경의 압박을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매화일지의 초식으로 사의검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피피핏!
사의검 끝에서 매화가 피어올랐다.
양경이 검을 끌어들여 목을 겨눈 사의검을 막아내려는 순간,
휘리릭!
‘변했어?’
한 척(尺) 앞까지 접근한 사의검이 변화를 일으켰다.
사의검 끝에서 피어오른 매화가 양경의 눈앞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쏟아졌다.
‘본도 또한 종남오검의 일인이다!’
퍽퍽퍽퍽!!
양경이 벽중검막(壁重劍膜)으로 호신강기를 일으키자 수십 개의 매화가 부딪치며 꽃잎을 흩날렸다.
“…….”
그 모습을 보던 고진유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놈! 왜 공격을 멈췄지?”
양경은 고진유를 보며 인상을 썼다.
그건 마치 하수를 가르치는 듯한 자의 표정이었다.
“이미 실력 차이를 느꼈을 것 같은데, 그만 물러가지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난 네놈의 검을 모두 막아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
“양경 사숙님!!”
“사숙님, 괜찮으십니까?”
그의 곁으로 종남파 삼대제자인 소양과 소무가 다급히 다가섰다.
양경은 가슴에 내려다보았다.
매화 모양이 정확히 박혀 있었다.
‘어, 언제……? 분명 막았는데.’
상대가 봐주지 않았다면 단번에 즉사를 당했을 정도로 정확한 공격.
“……몸에는 이상 없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가슴팍을 내려다보던 양경은 결국 삼대제자들을 물리고 고진유를 쏘아보았다.
그의 반경 주위로 기가 솟구쳤다.
선천공(先天功)의 내력을 끌어 올리자, 대천중검법의 최강의 초식 중천극멸(重天極滅)이 그의 검에서 펄쳐졌다.
웅웅웅웅-
대지가 흔들리고 사방에서 무거운 압박이 쏟아져 내렸다.
‘고집이 센 사람이군.’
고진유는 사의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번쩍!
매화검법의 초식 중 가장 빠른 매화광일(梅花光日).
두 개의 검이 중간에서 부딪히면서 굉음을 터뜨렸다.
“커억!”
충격에 의해 양경의 손이 튕겨 올라가면서 가슴에 허점이 생겼다.
고진유의 사의검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색빛을 띠며 가슴을 향해 찔러왔다.
푹!
“우욱.”
사의검이 정확히 가슴을 한 치 정도 찌른 뒤 다시 빠졌다.
양경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화산에서…… 중검을……?”
“종남의 검만의 중검일까? 쾌를 중시하는 화산검으로도 무한의 중(重)을 만들 수 있소.”
후다다닥!!
두 명의 종남파 제자들이 그를 다시 부축했다.
“여기까지 할 테니 그만 물러나시오.”
양경은 부축을 받으며 뒤로 물러났다.
“잘 생각했소.”
“……호정이라 했나?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이외다.”
그 말에 허묵이 앞으로 나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게요? 호정 사질이 마지막에 손을 거두지 않았다면 그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나무라고 있는지 모르겠군. 오히려 화를 낼 곳은 화산파, 본 문인데 말이오! 내 필히 종남파의 잘못을 따지겠소이다!”
‘어어……? 이러면 망하는데……?’
모든 싸움을 지켜보던 우충은 눈치를 보면서 그들을 따라 슬금슬금 게걸음을 쳤다.
“우 부총관, 우린 서로 볼일이 있으니 거기 멈추시오.”
“고, 공자님, 아니, 도사님. 저는 무슨 일로……?”
“무슨 일이기는. 거기서 잠깐 기다리시오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
고진유는 허묵에 의해 잡혀 있는 허궁의 앞으로 다가섰다.
“도망을 가려면 잡히지나 말 것이지.”
“할 말이 없다. 모두 내가 못난 탓이다.”
“무공을 임시적으로 폐하도록 하겠습니다.”
핏핏핏.
고진유는 중단전의 기운으로 그의 혈을 눌렀다.
다리에 힘이 풀린 허궁은 주저앉을 뻔했다.
“그대가 한 일에 대해서는 본 문에서 판단을 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부터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고진유는 허묵과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곧바로 본 문으로 이송 준비를 하겠네.”
허묵은 허궁의 팔을 잡은 뒤 지부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
고진유가 우충을 가리키며 불렀다.
“이제 당신과 우리 차례요.”
털썩.
우충은 바닥에 풀썩 엎드렸다.
“도사님,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객잔에서 부탁한 금액은 준비했소?”
“예? 아, 예예, 그렇습니다만…… 저, 정말로 환전을 하실 것입니까?”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오?”
“아이고, 아닙니다. 언제라도 환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유성순가가 확실히 능력이 좋은 모양이외다. 하루 만에 황금 오백 냥 전표를 환전할 만큼 돈을 가지고 있다니.”
“……저…… 그게…….”
“아 참,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인데, 그때 객잔을 나간 후 내게 다시 누군가를 보내지 않았소?”
“제, 제가 말입니까? 전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기는. 흐음, 그럼 그놈들이 지금 어디에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내 돈을 슬쩍할 생각이던데.”
꿀꺽.
우충은 마른침을 삼켰다.
‘큰일 났다. 양경 도인까지 꽁무니를 빼게 만든 실력인데…… 그놈들 정도는…….’
“맞소. 내가 잡아놓았지요. 심문은 아직이지만, 언제라도 의뢰를 맡긴 사람을 알아낼 수 있지.”
‘분명 거짓말이야!’
우충은 심장이 덜컹거렸다.
아직 조사를 안 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우충은 여전히 미소를 띤 고진유와 시선과 마주쳤다.
“우 부총관.”
“넵!”
우충은 단번에 기합이 들어갔다.
“본 문과 관련된 업무 담당자는 누구지요? 혹시 당신인가?”
“절대 아닙니다! 화산파의 일은 총관께서 모든 업무를 처리하십니다.”
“총관이라면, 순노정이란 인물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가주님의 동생이지요…….”
“좋소. 그럼 지금 바로 유성순가로 갑시다.”
“예? 그, 지금 바로 말입니까?”
처억.
고진유가 우충의 어깨를 잡았다.
“으아악!!”
어깨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머리 굴릴 생각은 안 했으면 하는데. 당신은 내가 말하는 대로 하면 될 뿐이외다.”
“……!!”
“화산파를 농락한 죄를 물어 유성순가를 멸문시키기 전에 말입니다.”
고진유가 중단전에 든 사기를 뿜어냈다.
덜덜덜.
우충은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든 떨려오기 시작했다.
“갈까요?”
“알…… 겠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호도는 고진유의 뒤를 따라 유성순가로 향했다.
급작스러운 일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흥분되기 시작했다.
‘소문과는 완전히 달라.’
건방진 듯하나 예를 지녔고, 막무가내인 듯하나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였다.
‘내가 이렇게 멍청하다니.’
호도는 스스로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본 문에서 삼대제자를 혼자 보냈다는 것만 봐도 능력이 뛰어나다는 간단한 사실을 잊었다.
휘익, 휙!
호도는 올 때와 달리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이제부터 유성순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호도는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는 듯 고진유의 뒤편에 바짝 붙어 섰다.
* * *
‘지, 진짜 괜찮을까…….’
일행이 접객원에서 기다리는 동안, 유성순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신나서 따라오던 호도는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우린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어요. 임위에 오기 전, 장문인께서도 화산파의 위엄을 제대로 알려주라 말씀하셨지요.”
“아, 알겠습니다.”
“만약 이들이 우리에게 적대감을 보인다면 화산파와 끝장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화산과 싸우지 들겠습니까.”
“그래도…… 유성순가는 종남파와 손을 잡지 않았습니까?”
“아, 여기 셋째 아들이 종남파에 입문했다고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종남파도 유성순가의 일로 화산파와 척을 지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그걸 어떻게…….”
“그들에게는 본 문과 싸울 명분이 없습니다. 임위는 화산파의 영역이죠. 종남파에서 나선다면 그건 화산파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들이 호시탐탐 엿보고 있긴 했었습니다. 이 기회에 세력을 넓히기 위해 도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고진유가 입매를 올렸다.
“종남파의 뜻이 그러하다면 원하는 바입니다.”
“네에? 그건 또 무슨……?”
“사조님께 듣기로, 최근 종남파에서 선을 넘는 행동을 많이 한다지요? 이번 기회에 화산파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두근. 두근.
호도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한 문파 전체를 대하는 일인데…… 무섭지도 않나?’
이게 천하를 담고자 하는 인물의 그릇인가?
‘분명 두려운 일인데…… 기대가 돼.’
호도는 고진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