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다.
‘분명 움직일 게 틀림없어.’
미끼를 던졌다.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화산관에서 검은 인영이 빠져나갔다.
그가 덥석 물었다.
* * *
휘이릭!
화산관의 집무실로 바람 소리가 들어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검은 그림자는 대낮처럼 집무실 안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툭툭.
검은 그림자가 가구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살폈다.
‘화산파에 도둑이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본데. 더구나 수련생들이 수련하는 곳이라면…….’
검은 그림자, 고진유는 주위를 살폈다.
퉁퉁.
고진유의 손짓이 멈추었다.
‘여기 있군. 이 정도 장치는 애들 수준이네.’
화산파 경내에 물건을 훔치러 올 간 큰 도적이 있을까.
‘하긴, 비밀 장소를 따로 만드는 게 더 이상하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군.’
고진유는 서랍을 잡아당겼다.
안에는 붓과 백지의 종이가 들어 있을 뿐 별다른 물건은 없었다.
‘꽤 잘 만들었는데.’
고진유는 서랍을 원래대로 밀어 넣고, 이번에는 손가락 끝으로 서랍 밑을 만져 보았다.
툭.
튀어나온 부분을 건드리자 잠겨 있던 장치가 열렸다.
재차 서랍을 당기자,
드르륵.
조금 전과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달라졌다.
이 중 서랍.
‘제법인데. 뭐, 실력은 좋았지만 내게 걸리다니 운은 없네.’
다시 열린 서랍 안에는 붉은 주머니와 둥근 모양으로 된 백색 패가 들어 있었다.
극일천.
앞면에 적혀 있는 뚜렷한 붉은 세 글자.
뒷면을 돌리자 백색패의 주인을 적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유형지.’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화산관의 관장이자 화산권절인 그가 변절자였다.
유형지가 처음부터 본 신분을 속이고 화산파에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변절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붉은 주머니 안을 살피자, 작은 옥병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손에 느껴지는 탁한 기운들.
‘좋은 물건들은 아닌 모양인데.’
붉은 주머니를 원래 자리에 둔 고진유는 한참 백색 패를 들고서 고민에 잠겼다.
사부에게서도, 묵경에게서도 중원 무림에 극일천이란 세력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
‘극일천은 그놈들이 확실해.’
당장 백색 패를 들고 상부에 알릴까 고민했지만,
‘아주 어릴 때 화산에 입문하여 지금까지 신뢰를 쌓아온 자야. 위에서 이 말을 믿어줄까?’
고진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그냥 물러나는 수밖에. 때가 아니야.’
더구나 극일천이란 세력에서 유형지 혼자만 화산파로 보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겨우 이대제자밖에 없을까? 무림맹에서까지 활동하던 세력이라면 보통 세력이 아니야.’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움직이도록 만들어야겠지. 표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저놈들이 밖으로 기어 나오도록 만들어야 해.’
극일천의 백색 패를 품 안에 넣었다.
‘패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든 움직일 거다.’
고진유는 서랍을 가만히 그대로 두었다.
‘유형지. 그대는 사부님을 죽인 원수로 인정하겠소.’
스르륵.
고진유의 신형이 집무실에서 사라졌다.
* * *
‘흐음, 이 시간에…….’
양군경은 침상에서 눈을 떴다.
어둠 속 침상 끝에 서 있는 인영.
“사조님, 늦은 시간에 송구합니다. 목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았습니다.”
“허허…… 이미 소리까지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내력을 지녔다는 말이냐? 최소한 절정에 들어서야 가능한 것을.”
양군경은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더냐?”
“우연히 본 문의 변절자를 알아냈습니다.”
“뭣이?”
양군경이 놀라 신형이 튕길 정도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일이더냐?”
고진유는 화산관장 유형지와 술자리를 가진 것부터 시작해, 술병에 약을 탄 뒤 그가 질문했던 내용들, 그리고 야밤에 그가 어디론가 사라진 뒤 집무실에 잠입하여 찾아낸 신패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이것이 그 패인가?”
양군경은 백색의 패를 만졌다.
극일천이란 백색패.
뒤편에는 유형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 듣는 세력이군.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그들이 움직이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 본 문에 변절자는 그 혼자가 아닌 듯합니다.”
“하아…… 그래, 그렇겠지. 그 녀석이 화산관을 나섰다면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물이 또 있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한 녀석을 수상하다고 여기던 중이었다.”
“누구입니까?”
“식영전의 허서라는 녀석이다. 경내에서 떨어져 있으니 외부와 쉽게 연락도 가능하지. 일단 그의 주위에 눈을 심어놓았으니 만일 식영전에 허주가 나타난다면 두 놈 모두 변절자가 틀림없느니라.”
“사조님, 저는 그들이 전부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흐음…… 하긴, 그 녀석들이 전부라고 하기엔 그놈들은 확실히 본 문에서의 비중이 적은 편이다.”
“유형지는 분명 이 패를 찾기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양군경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더욱더 조심해야겠구나.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것으로 해야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부님의 원수인 그놈들을 필히 잡을 겁니다.”
착잡함 속에서도 고진유의 강인한 표정에 양군경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허허, 허진아. 네가 보내준 이 아이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 * *
화산관의 수련장은 열기로 가득했다.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수련생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창가에서 수련생들을 지켜보던 화산관장 유형지의 표정이 애매했다.
‘쓸데없이 더 강해지는 건 좋지 않은 일인데…….’
유형지의 시선이 고진유에게 향했다.
‘저 녀석인가?’
그에게서 차가운 살기가 번뜩이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외부에 나갔다 들어온 뒤, 누군가 집무실에 몰래 침입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
의심은 갔지만, 고진유가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상당히 곤란한 일이야. 이 일을 그분께서 아신다면 화를 내실 텐데…….’
얍! 얍!
유형지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수련생들의 기합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목검을 내리치는 기세에서 힘이 느껴졌다.
고진유가 한 일은 첫날 비무를 한 것 외에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수련생들 사이로 지나갈 뿐.
“집중해. 무작정 생각 없이 휘두르지 말고.”
“옙. 알겠습니다.”
“매화는 화려하나 화산의 매화는 강맹하다. 무슨 말인지 알지?”
“잘 알고 있습니다!”
“검절이신 사부님께선 화산의 기개는 중원의 모든 산 중에서 최고라 하셨지. 화산의 검은 화산을 닮아야 한다. 검을 휘두르는 데 두려움을 가지지 말고.”
고진유는 목검을 들고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봤느냐? 동작은 더 크게, 더 넓게, 웅장하게. 그렇게 초식을 펼쳐라.”
“옙! 알겠습니다!”
고진유가 펼친 목검을 보며 수련생들이 일제히 따라 했다.
고진유의 수업은 오늘이 마지막.
휘이익!
쉬이이익!!
목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수련장을 울렸다.
“모든 초식의 움직임이 완전히 익숙해지는 순간까지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 한 달이 걸리든, 반년이 걸리든 시간은 의미 없어. 완벽하게 익히면 되는 거다.”
고진유는 뒤로 물러나 수련생들 수련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때, 유형지가 집무실에서 나와 그의 뒤에 섰다.
“사질이 계속 이 녀석들을 가르친다면 모두 금방 화산관을 통과하겠는걸.”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건 아쉬운 말이군.”
“제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종종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하긴, 멀리 가는 것도 아니지. 경내에 있으니 가끔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하세나.”
“권공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아니라도 사질 실력이라면 상관없었을 게야. 화산파는 검공뿐 아니라 권공 또한 뛰어나다고 만천하에 알려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검수암에서 수련을 할 모양이지?”
“아닙니다. 사조님께서 홍매단으로 가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홍매단? 도조 사고께 지공을 배우는 것인가?”
고진유의 눈이 순간 커다래졌다.
“저, 사고(師姑)라 하심은…… 전 도조 사조시라고만 들었습니다. 지공(指功)으로는 난화일지(亂花一指)가 화산의 일절이라며 견식을 해보는 것도 좋다고 하시면서요.”
“집법전주님께서 그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셨군.”
사조님께서 또 추가 설명 몇 가지를 빼먹으신 모양이다.
‘다음에는 내가 잘 알아봐야겠네…….’
고진유가 속으로 피식 웃는 사이, 유형지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아 참, 호정 자네, 혹시 어제저녁에 어디에 있었는가? 잠시 검수암에 들렀더니 안 보이더군.”
“아, 사조님께 갔을 때 오신 모양이로군요.”
“늦은 시간에?”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 갔습니다.”
“그런가?”
유형지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집법전으로 가 알아봐야겠군.’
* * *
‘화산파 특수매화단 중 홍매단 단주 무심매화 가여희.’
그녀는 일대제자이며 화산 지공(指功)의 최고라 할 난화일지를 익힌 도고(道故)였다.
화산파 경내 북서쪽 끝에 자리를 잡은 홍매단 근처에는 화산파의 여제자들이 기거하는 매화여관전(梅花女冠殿)도 함께 있었다.
금남의 장소는 아니나, 사내가 혼자 지나가기엔 조금 껄끄러운 장소.
그곳을 고진유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본 문에 이 정도로 많았었나? 괜히 신경 쓰이네…….’
화산파에 여제자들이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매화여관전으로 가까워지자 점점 눈에 띄게 수가 많아졌다.
벽화당에서부터 그가 지냈던 곳에는 전부 사내들밖에 없었다.
‘홍매단은 매화여관전 뒤로 가면 된다고 했는데.’
그러다, 순간 지나가던 도고들과 시선이 마주친 고진유는 고개를 숙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호기심 어린 눈빛들을 뒤로한 채, 고진유는 빠른 걸음으로 홍매단을 향해 갔다.
매화여관전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홍매단의 정문이 보였다.
붉은 매화의 문양이 강렬했다.
‘여기군.’
홍매단의 정문에 다가섰다.
‘두드려야 하나?’
고진유는 잠시 망설이다 바로 문을 두드렸다.
끼이익-
이십 대 후반의 여도사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밖에 선 고진유를 살피던 그녀의 눈에 삼매화가 먼저 띄었다.
화산파 경내에 있는 젊은 도사 중 삼매를 단 인물은 한 명밖에 없다.
“홍매단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호정이라 합니다. 홍매단의 단주이신 도조 사조님을 뵙고자 합니다.”
“화산도협……?”
“맞습니다. 집법당주이신 사조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 알겠어.”
화산파에서 집법당주의 영향력은 장문인과 거의 비슷하다.
고진유는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난…… 호화라고 해.”
“호화 사저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소를 짓는 고진유를 본 그녀의 얼굴이 조금은 편해졌다.
“나, 나도 반가워. 사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제가 유명인사라도 된 모양이군요.”
“응. 맞아.”
“…….”
농담으로 말을 한 건데 그녀가 진심으로 대답하자 고진유는 조금 머쓱해졌다.
복도를 지나 내원의 정원으로 향하자 중년 여도사와 함께 여노도가 다정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호화야, 같이 온 도우는 누구더냐?”
“사부님, 집법전주님의 명으로 호정 사제가 찾아왔습니다. 단주이신 사조님을 뵙고자 합니다.”
호화가 중년 여도사 명주란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스윽.
여노도가 찻잔을 내리며 관심을 보였다. 회색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묶어 올린 모습.
그녀가 바로 홍매단의 단주 무심매화 가여희였다.
‘나를 찾는다? 음, 이 아이가 검절 그 아이의 제자인 모양이구나.’
“사형이 왜 너를 보냈느냐?”
“도조 사조님께 인사 올립니다.”
고진유는 먼저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찾아온 용건에 대해서 밝혔다.
“사조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화산일절 난화일지의 무공을 견식하도록 하셨습니다.”
“나와 비무를 하고자 함인가?”
“비무가 아니라 지공에 대해서는 본 문에서 최고라 하시면서 직접 보고 오는 게 좋을 듯하다고 하셨습니다.”
“후후, 그게 그 말이 아니더냐. 너희 사손지간은 똑같구나. 시키는 사람이나 그대로 따르는 것이나. 이래서 사내들이 단순하다고 하는 것이지.”
고진유는 가만히 선 채 그녀의 뜻을 기다렸다.
“일단 올라오너라. 만나자마자 싸울 수는 없지 않겠느냐.”
“감사합니다.”
고진유가 두 사람의 곁에 올라섰다.
“이런, 멀뚱히 쳐다보지 말고 앉도록 해라.”
빈자리에 앉는 고진유를 본 가여희가 말을 이었다.
“일 년 전에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느냐?”
“어찌 화산파의 제자가 되어 함부로 허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사 년도 남지 않았다.”
“삼 년보다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시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호오…… 멋진 대답이군.’
조용히 듣고 있던 명주란이 미소를 지었다.
사내다운 패기가 느껴졌다.
“후후, 맞네.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혹시 지공에 대해서는 아는 게 있느냐?”
“사조님께 어떠한 무공인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권공과 또 다른 무공이라 하시면서 본 문에서 상대하기에 가장 까다롭다고 하셨습니다.”
“흥, 사형의 엄살은 여전하시구나. 하나 그 말대로, 지공은 파괴력이 약하게 보일지 몰라도 살상력은 가장 높은 무공이라 할 수 있다네.”
스윽.
도조 노도는 정원 끝에 보이는 고목을 향해 손을 올렸다.
핏!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지공이 뻗어 나가고.
한 자 정도 크기의 고목 정중앙에 구멍이 뚫렸다.
‘저게 사람의 심장이었다면…….’
즉사를 벗어나지 못할 만큼의 살상력이다.
“어떠냐?”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지공을 펼치는 적을 만났을 때는 순간의 방심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느니라. 특히 중원오대지공으로 알려진 다섯 지공들을 만날 때는 필히 조심해야 된다.”
“중원오대지공이라면……?”
“소림의 탄지, 마교의 마영, 혈사의 혈혼, 단가의 육맥, 하오의 광섬이 있다. 오대지공 중 하나라도 극성으로 깨우치게 된다면 가히 천하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테지.”
“죄송한 말씀이지만 본 문의 지공은 그들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하는 바이네. 자, 여기 허유가 지공이 무엇인지 보여줄 걸세.”
“알겠습니다.”
가여희는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심하게나. 그녀의 지공은 나 못지않게 뛰어나니.”
명주란과 고진유가 정원으로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