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공터에 나란히 선 두 사람.
고진유는 슬쩍 독소응을 살폈다.
혈사천주가 누군가?
사무오패천(邪武五覇天). 사파의 다섯 하늘 중 일패천 혈사천의 주인임을 안다.
‘사숙님을 천살지인이라 불렀지.’
그런 그가 홀로 화산의 조양봉에 올라와서 독소응을 원하고 있었다.
“힐끔 쳐다보는 모양새가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구나.”
“방금 내려간 인물이 혈사천주라 들었습니다.”
“맞다. 그가 사무오패천의 혈사천주이지. 나를 만나러 일 년에 한두 번 방문하곤 한다.”
독소응은 사실대로 말을 했다.
화산파의 다른 도인들이라면 혈사천주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지 모르나, 고진유라면 다를 것이라 여겼으니까.
“그가 사숙님과 함께 화산을 내려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랬지.”
독소응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함께 혈사천으로 가자더군.”
“사숙님께서 천살성이기 때문입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난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더냐.”
고진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혈사천주가 했던 말 중 넘어가선 안 될 것이 있었다.
“사숙님, 그의 말이 사실입니까?”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 말입니다.”
‘생이라…….’
독소응은 시선을 돌려 화산을 올려다보았다.
“별거 없다. 난 살 만큼 살았으니라.”
그는 평생 천살성의 기운을 억누르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화산파의 심법으론 한계가 있었다.
독소응이기에 현재까지 견디며 올 수 있었던 것뿐.
“사숙님, 만일 그를 따라가면 사실 수 있습니까?”
독소응은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넌…… 내가 화산을 버리고 사파에 가라는 것이냐?”
독소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죄송합니다. 전…… 다만 사숙님께서 살 수 있다고 하기에…… 오 년 동안 섬에 갇혀 있으면서도, 사부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화산을 간직한다면 내가 앉은 여기가 화산이라고요.”
“됐다. 청석이 괜한 이야기를 했구나. 오늘 일은 못 보고 못 들은 것으로 해라.”
“……알겠습니다.”
“비무할 준비를 해라. 내가 네게 줄 것은 더 이상 없다. 오늘이 네가 여기에 있어야 할 마지막 날인 것 같구나.”
그 순간, 독소응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천살성의 사기가 완전히 개방되며 고진유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 * *
반시진 후, 홀로 정자에 앉은 독소응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청석, 괴물은 내가 아니라 자네가 보낸 녀석일세.”
한 번에 술잔을 비운 입가에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비무를 하는 도중.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 일어났다.
‘두 검이 하나로 동화되고 있어?’
사기를 막아내는 것이라 여겼던 매화검법의 초식을 정기가 아닌 사기의 내력으로 펼치는 고진유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사기를 흡수하다니.
독소응이 다급히 물었다.
“네가 어떻게 사기를 펼칠 수 있느냐? 사공(邪功)을 익힌 것이더냐?”
“아닙니다. 그동안 사숙님의 사기를 단전에 모아두었습니다.”
독소응의 눈이 커졌다.
“대체…… 몸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게…… 사숙님의 사기가 워낙 강해서 막아내거나 흘려보내기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중단전에 사기를 모으기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런 미…… 친놈이 있나?’
정기와 사기는 결코 한 몸에 공존할 수 없다는 게 무림의 상식.
하나 고진유는 그 상식을 거리낌 없이 파괴했다.
“하긴, 그런 녀석이니 혈사천주를 따라가라는 말을 하지.”
그는 다시 술잔을 채웠다.
‘조용하군.’
수년 동안 혼자 지내면서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고독.
그는 화산의 서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 년 안에 천하제일문으로 만들겠다라…… 직접 보고 싶군.’
하지만 그의 생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이 년을 넘길 수 없었다.
‘오 년이라…….’
그가 고진유가 말한 오 년의 시간을 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만이 남아 있을 뿐.
벌컥.
독소응은 술을 연이어 들이켰다.
‘무료했던 삶이 막 재미있어지려고 하는데. 지금 같은 심정이면 죽고 싶지 않군.’
고독전에 올라와 스스로를 고립시킨 후,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든 순간이었다.
* * *
동봉의 끝자락 선장애를 따라 펼쳐진 경관.
눈에 덮인 화산의 웅장함은 평소보다 그 기세가 더 드높았다.
‘정말 멋진데…… 발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야.’
고진유는 두 팔을 펼치며 화산의 정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듯 호흡했다.
반년의 시간.
독소응과 비무를 하는 과정에서 천매도에서 얻은 매화단심공을 완벽하게 운용할 수 있게 있었다.
고진유의 단전은 반년 전에 비해 금강석처럼 단단해졌다.
그때였다.
휘이익!
등 뒤로 빠르게 지나가는 기척이 느꼈다.
‘누구지?’
고진유는 가만히 선 채 주위의 변화를 읽었다.
‘으으음.’
단전에 내력을 올리며 주위를 향해 기감을 넓히자, 미세하게 움직이는 바람 소리까지 귀에 들렸다.
고진유의 귀가 꿈틀거렸다.
파아앗!!
호충신법을 펼친 그가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갔다.
고진유의 신형은 눈꽃이 핀 나무들 사이로 빠르게 움직였다.
주위의 광경이 어지러울 정도로 휙휙 지나갔지만, 고진유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점점 거리가 줄어들었다.
휘익-!
‘이런……!’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거리가 저만치 벌어졌다.
뚝.
고진유는 신법을 멈췄다.
“정말 상당한데.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 ……근데 여긴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자, 앞은 절벽으로 막힌 막다른 장소였다.
무작정 쫓아온 탓인지 화산의 어디쯤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해는 봉우리를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돌아가야겠군.”
그렇게 뒤로 돌아선 순간,
“깜짝이야.”
눈앞에 나타난 소동.
소동은 활짝 미소를 띤 얼굴로 고진유를 올려다보았다.
“넌 누구야?”
“나? 여기 화산파 제자.”
“아니! 이름 말이야.”
“고진유라고 해. 도명은 호정. 너야말로 누군데 여기 혼자 있어?”
소동은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어디서 왔어? 이곳 말투가 아니잖아.”
“저 멀리 남해에서.”
“아하, 먼 곳에서 왔구나.”
소동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고진유를 바라보았다.
“…….”
고진유도 소동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오뚝한 콧날, 선명한 붉은색 입술. 검은 눈동자를 지닌 눈이 빨려 들어갈 듯 깊었다.
“너…… 집은 어디야?”
“여기.”
소동은 손가락으로 화산을 가리켰다.
“어디라고?”
“멍청아! 여기라구.”
“화…… 산이 네 집이란 말이야?”
“응!”
고진유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산속에 산다는 말이지?”
“진짜 멍청하구나. 화산 전체가 내 집이라구.”
“그, 그래? 그럼 집에 얼른 가. 날이 어두워지고 있잖아.”
소동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왜?”
“더 안 노는 거야? 재미있었는데.”
“……나도 더 놀아주고 싶지만, 사조님도 뵈어야 하니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보낼 수 없어.”
“사조가 누군데?”
“집법전주이신 도진 도인이시지.”
“아하, 그 멀대 같은 사람?”
“……!”
양군경에 대해 잘 아는 듯한 말에 고진유는 놀라 되물었다.
“사조님을 아는 모양이네?”
“당연하잖아. 화산에 사는 사람이면 전부 알아. 너만 빼고.”
“나 말이야?”
“응. 전혀 읽지 못하겠어. 넌…… 이상해.”
스윽.
소동은 손을 올려 고진유의 가슴을 가리켰다.
“거기서 내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어.”
사람이 아니구나.
고진유는 문득 깨달았다.
“너…… 이름이 뭐지?”
“화산령인.”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
“누구를?”
휙.
소동은 손을 올려 고진유를 가리켰다.
“나를…… 왜?”
“아니, 멍청아. 저기 봐.”
소동의 손가락은 고진유의 뒤편 절벽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천매도의 인연을 얻은 자여.
화산령인의 보호를 받을지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글자가 나타나 있었다.
‘화산령인이라면…… 이 녀석이라고 했는데.’
그 순간, 고진유의 뒤에서 점점 커다란 빛이 일어났다.
번쩍!
소동의 몸이 황금빛으로 변해 흘러가 고진유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인연자는 화산령인을 받아들이며 운기하여라.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고진유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앉은 뒤 매화단심공을 운기했다.
우우우웅--!!
고진유의 단전에서 흐르던 매화단심기가 황금빛을 흡수하며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소주천에 이어 대주천.
화산령인이 고진유의 몸을 황금빛으로 물들여갔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마지막 황금빛이 사라지는 순간.
스윽.
고진유의 검은 눈동자 속에 황금빛의 매화가 만개했다.
화산령인의 전설.
화산파의 조사 매화검선만이 마주했다는 화산 정기의 결정체였다.
* * *
“일 년이란 시간은 정말 눈 깜빡할 새 지나가는군.”
휘이익!!
눈앞을 지나가는 소리.
분명 사람이 맞건만 신형은 보이지 않고 바람만이 남아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그리고 저 녀석은 정말 오로지 주구장창 신법만 익히는구나!”
묵경은 저 멀리 사라진 인양의 뒤를 바라보았다.
화산에서 내려온 뒤, 묵경과 인양은 곧장 성녀곡으로 돌아왔다.
신법공을 익혔지만 내공이 필요한 인양에게 성녀곡의 내공이라면 적당할 듯했으니까.
서문세가의 내공은 당연히 세가에서 반대할 게 틀림없었다.
곡주이자 묵경의 어머니 묵연화는 내공을 가르쳐 주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성녀곡의 속가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여인들로 구성된 문파이지만 백화궁과 달리 성녀곡은 사내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양은 성녀곡의 속가제자가 되어 연화심공을 익혔다.
신법공에 연화심공을 익히면서 생긴 내력으로 그의 호충신법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인양 아우의 신법을 보니 이젠 오라버니보다 빠르겠어요.”
“저 녀석이 죽기 살기로 수련을 하잖아. 에이…….”
묵경은 궁시렁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요?”
“저 녀석을 보니 나도 놀고 있으면 안 될 거 같다고.”
“푸훗, 진짜로 철 드셨네요.”
입을 가리며 웃는 여인.
성녀곡주 묵연화의 직전제자 황미미가 재밌다는 듯 계속 웃었다.
“내가 언제는 철이 안 들었냐?”
“날마다 여자들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녔잖아요. 내가 모를 줄 아세요? 세상 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는걸요.”
“어허, 네가 아직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따라다닌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나?”
“백화궁의 진 언니 사건만 해도 그래요. 괜히 착한 사람 건드려 놓구선.”
“무슨 말을 이상하게 하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진짜 건드린 줄 알잖아. 난 그저 좋게 좋게 지내자고 한 것뿐이다.”
“여하튼…… 안 그래도 내일쯤 백화궁주님과 진 언니가 온다고 하던데. 알아서 하세요.”
“허억! 뭐라고?”
묵경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들이 왜?!”
“내가 어떻게 알아요? 온다고 하니 오는 줄 알죠. 사부님이 말씀하셨는데, 도망가면 모자(母子) 관계를 끊으시겠대요.”
“뭐……! 내가 도망을 왜 가? 나쁜 짓도 안 했는데.”
“후후, 그럼 열심히 무공 수련 하세요. 나중에 정인(情人)께 민망하게 보이면 안 되잖아요. 이제 일 년밖에 안 남았는데.”
“참 나, 누구 맘대로 진유 아우가 정인이야?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제발 착각은 사절이다. 그리고 네가 정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한둘이냐? 누구였더라? 창천무룡 남궁한도 정인이라 했던 것 같은데?”
“아이, 내 맘이죠. 그리고 오라버니가 도와줘야 해요. 나도 인양 아우를 본 문의 제자로 받아주도록 도와줬으니까요. 서로 상부상조하는 게 성녀곡의 기본 정신 아닌가요?”
“이게…… 제발 네 맘대로 생각 좀 하지 마라. 내가 이래서 니가 껄끄럽다고!”
“호호호!”
* * *
화산파 경내로 돌아온 뒤, 고진유는 검수암에서 지내면서 독소응에게 배운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검수암으로 찾아온 화산파의 도인들과 비무를 하기도 했지만, 한 명도 이기지 못한 채 그냥 돌아갔다.
양군경은 비무를 보면서 만족했다.
동봉에서 돌아온 고진유의 무공은 완벽했다.
비밀리에 다시 치른 매화관장 허공과의 대결에서도 십 초 만에 검을 꺾었다.
“허허, 매화천향은 더욱더 진하게 흐르는구나.”
“사조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느냐. 모든 게 네가 열심히 수련을 한 게 아니더냐.”
고진유는 보는 그의 시선은 대견함으로 가득했다.
“내가 오늘 온 까닭이 있느니라.”
“말씀하시지요.”
“중원 무림에는 많은 무공들이 있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무림에 나간 뒤에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라. 검을 항상 지니고 있겠지만 만일의 경우 맨몸으로 적을 상대할 때도 생길 수 있다.”
양군경은 예전에도 제자였던 오청석에게 장공을 익히도록 했었다.
“장법이나 권법을 익히는 게 좋을 듯하구나. 장서원에 연락을 할 테니 무엇을 익힐지는 네가 결정을 내리도록 해라.”
“넵, 알겠습니다.”
사조 양군경의 권유에 장서원에 다녀온 고진유는 화산파의 권공으로 화산복호권을 택했다.
‘호충신법과 연계해서 펼치기에 좋은 무공이야.’
양군경은 곧바로 화산사절의 권절이자 화산권선 유형지에게 권공을 배우도록 했다.
그리고 지금, 고진유는 화산관의 현판 아래 서 있었다.
‘들어가 볼까?’
우르르르르-
그때, 화산관으로 오십여 명의 수련생들이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 누구지?”
“신입인가?”
몰려든 수련생들이 고진유의 뒷모습을 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앗! 저기 옷에……!”
수련생들 중 한 명이 매화도의에 그려진 세 개의 매화 문양을 가리켰다.
“매화검인이시다!”
놀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여기서 수련하는 모양이지?”
“아, 네에!”
수련생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이 마주 섰다.
“저어…… 혹시 화산도협이십니까?”
“맞다. 내가 호정이다.”
척, 척, 척, 척.
수련생들은 몸을 바로 세우며 포권을 했다.
“호정 사형을 뵙습니다!”
사형제 관계는 화산관을 통과하여 도명을 받는 순서로 정해졌다.
화산관 수련생에게 고진유의 존재는 전설이었다.
“호정 사형께서는 화산관에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관장님께 무공을 배우러 왔다.”
“네에? 설마……?”
수련생들은 매화관 관장이신 매선향 학경과 고진유가 비무를 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주 사숙님이 화산사절 중 권절이시잖아. 그분께 권공을 배우러 온 것뿐이다.”
“아! 아, 알겠습니다. 저희들을 따라 오십시오.”
고진유는 피식 웃으며 수련생들을 따라 화산관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