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36화 (36/425)

36화

조양봉 위로 해가 떠올랐다.

‘사숙님께서?’

침상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고진유의 눈에 평상시와 달리 검을 든 독소응의 모습이 담겼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나이를 먹으면 잠만 잘 자는 것 같구나. 내려오너라.”

두 사람은 정자 앞 공터에서 마주 섰다.

슈우우욱--

독소응의 신형에서 사기가 뿜어져 나갔다.

‘과연 이 기운을 참아낼 수 있겠느냐?’

마지막 시험.

독소응이 천살성의 기를 막아두었던 결계를 완전히 풀었다.

먹이를 덮치는 야수처럼, 사기가 단숨에 고진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스르르르-

‘중단전으로 인도한다.’

고진유는 호신강기를 진정시키며 사기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 녀석……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지?’

독소응은 예상과 다른 고진유를 보며 깜짝 놀랐다.

매화단심기가 마치 안내를 하는 것처럼 혈맥을 타고 고진유의 몸속에 들어선 사기를 중단전으로 끌어 올렸다.

‘사기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다.’

독소응은 당황했지만 사기를 바로 거두지 않았다.

‘힘들어하는 표정이 아니야.’

혈맥을 타고 흘러 들어간 사기가 중단전에 들어섰다.

예상대로 사기가 중단전 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중단전이 없었다면 몸속을 돌아다니면서 정기를 손상시켰을 터.

사기로 인해 검게 변했던 피부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필요 없는 사기는 탁기와 함께 밖으로 배출한다.’

성공이었다.

이제는 독소응의 사기에 힘들게 저항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 고진유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굳이 아깝게 사기를 왜 버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고진유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천살성의 사기를 막아내다니……!”

독소응은 어이없다는 듯 침음성을 내었다.

단순하게 사기를 막을 거라 생각했을 뿐, 설마 중단전에 모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엉뚱하게 튀어버린 고진유의 생각은 꿈에도 모른 채, 천살성의 사기를 이겨냈다는 것이 마음에 든 독소응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다. 오늘부터 아침저녁으로 무공을 펼쳐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 * *

파아아아앙!!!

‘천살성이 무서운 이유가 있었어!’

선천적으로 내력의 양이 달랐다.

팔 성으로 펼친 이십사수매화검법이 극성으로 받아치는 고진유의 위력보다 강했다.

주르르르르륵-

사의검을 가슴에 올린 채 한 수를 막아낸 고진유가 서너 장 뒤로 밀려났다.

‘이크, 내력이 정말 장난 아니시네.’

강한 충격에 사의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독소응의 검이 미친바람처럼 사방에서 송곳과 같이 쑤셔왔다.

그야말로 매화광풍(梅花狂風).

사기까지 더해진 위력은 보통에서 두 배는 더 강한 힘을 냈다.

“하앗!”

다행히 천매도의 기연을 얻은 고진유의 매화검법 또한 한층 더 강해졌다.

물러서지 않고 독소응에게 접근한 고진유가 매화구벽(梅花拘劈)으로 미친바람을 쪼개기 시작했다.

팟팟팟팟!!

도끼질을 하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바람을 잠재웠다.

“제법이군! 검절의 제자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독소응은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마음껏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팔 성에서 십 성으로 내력을 끌어 올렸다.

‘죽지는 않을 테지!’

검붉은 천살성의 기와 함께 자하기(紫霞氣)가 동시에 그의 몸을 지배했다.

두두두두두--

독소응이 밟고 있는 바닥이 지진을 일으켰다.

‘어, 엄청나신데…….’

고진유는 중원으로 나온 이래 과연 저걸 막아낼 수 있을지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막아낼 겁니다!”

고진유도 전력을 다해 내력을 끌어올렸다.

사의검의 자줏빛이 점점 진하게 변하며 검붉은 기에 맞서 대항했다.

‘제대로 꺾어야 더 크게 자라는 법.’

고진유는 무공을 익힌 뒤 제대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독소응은 검 끝에 무극심매(無極心梅)의 정수를 끌어 올렸다.

검 끝에 맺힌 작은 매화.

번쩍!!

강한 빛이 찰나에 터진 후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진유는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며 투명 매화 잎을 둘러 막아섰다.

“어?”

그 순간, 갑자기 매화 잎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뚫렸어?!’

고개를 숙여 가슴을 내려다보자 매화의 문양이 도의 위로 또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매화산우를 펼친 사의검과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온 독소응의 일검.

털썩.

고진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천매도의 깨달음을 얻고 꽤 자신 있었는데.

‘겨우 무공을 익힌 지 오 년이야. 내가 자만했어.’

고진유는 힘을 주어 엉덩이를 틀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후후, 충격을 받을 줄 알았거늘. 대수롭지 않게 이겨내는 것을 보니 정신력도 강하군.’

독소응은 뒤로 돌아서 다시 거리를 벌렸다.

“다시 시작할까?”

“……예!”

농사를 짓던 독소응의 모습에선 미친 검을 휘두른다는 소문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었다.

‘검이 미쳤다는 건…… 사실이었어…….’

이른 새벽 시작한 비무는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졌다.

‘히, 힘들어!!’

* * *

천문전에 들어선 수곡자는 고개를 숙였다.

“육십사괘무장들이 실패했다는 말이군.”

“화산도협의 무협을 잘못 판단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도협이란 인물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지. 그대의 잘못만은 아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습니다.”

“부담은 실수를 부르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유연하게 상대를 처리하게나. 터무니없는 짓은 하면 안 되겠지만.”

“유념하겠습니다.”

나하중은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화산도협이 화산파에 그 물건에 대해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정말로 모르고 있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거나.

‘태생이 좀도둑이었던 녀석이다. 무슨 꿍꿍이속일꼬?’

“전주님, 방향을 제시해주십시오.”

“기다려 보세. 밝히고자 했다면 벌써 할 수 있었다. 화산에서도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보겠다고 하니, 며칠이라도 지켜보세나.”

“네. 알겠습니다.”

* * *

여명이 밝기에는 이각 정도 남아 있는 시간.

화산에서 일출을 보기 가장 뛰어난 곳이 동봉이었다.

거친 기암들로 이루어진 화산의 절경들.

뽀드득.

고진유는 눈을 밟으며 하기정으로 걸어갔다.

이십 년을 남쪽 지방에서 보낸 고진유에게 하얀 눈이 내리는 광경은 환상적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설화가 떨어지는 듯했다.

추운 날이지만 새하얀 눈을 맞으면서 걷는 길은 포근했다.

하기정에 도착한 그는 눈을 치운 뒤 해가 뜨는 방향을 보며 앉았다.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고진유의 얼굴에서 화산의 산세를 닮은 듯한 사내의 기운이 뻗어 나왔다.

조양봉을 서서히 비추던 태양이 붉게 떠올랐다.

우우우웅-

하단전과 중단전에서 동시에 내력을 끌어 올려 운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 고진유는 시험 삼아 운기를 해보았다.

처음에는 두 개의 단전에서 나온 내력을 동시에 제어하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익숙해졌다.

이제는 두 개의 단전에서 뻗어 나온 내력이 자연스럽게 소주천을 이어 대주천을 돌았다.

이 방법으로 일주한 운기행공의 내력은 일반 무인들이 운기하여 얻은 내력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내공을 익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고진유의 내력 또한 점점 높아져 갈게 틀림없었다.

태양은 이미 중천에 떠올랐다.

하기정에서 일어난 고진유가 사의검을 들어 올렸다.

‘어젠 사숙님과의 비무에서 겨우 이십 초를 넘겼는데, 오늘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까.’

반년 동안 단 한 번도 비무에서 이기지 못했다.

독소응과 비무를 하기 전 고진유는 내력의 우위만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천살성에서 흐르는 사기의 양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력의 우위에 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무의 승패는 초식의 운용에 달려 있었다.

독소응의 무공은 이십사수매화검법과 천살성의 살성을 조금이나마 억누를 수 있는 태을현천검(太乙玄天劍).

그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매화검법의 후초식 십식을 완벽하게 익혀야 했다.

‘역시 사숙님은 화산제일검이야.’

지이잉-

자색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며 햇빛을 반사시켰다.

히죽 웃은 고진유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독소응과의 비무가 기억 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타아앗!

하기정에서 몸을 공중으로 띄운 고진유는 눈밭에 내려서면서 사의검을 일자로 세웠다.

하단전의 내력을 사의검을 통해 앞으로 밀어냈다.

파아아앗!!

십여 장 앞으로 생긴 일자선.

이십사수매화검법의 후초식 매화광일(梅花光一).

독소응에게 배운 건 없다.

하지만 그는 분명 고진유에게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전수했다.

반년 동안 비무를 하면서 운용할 수 있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초식을 펼쳤다.

변초와 허초를 연계하면서, 마치 무공을 가르치듯이.

이 모든 것을 배우며 익히는 것은 고진유의 몫이었다.

한 번 움직인 사의검은 멈추지 않았다.

오직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독소응의 움직임을 따라 사의검을 휘두르고 내리쳤다.

슈우우욱--!!

사의검에서 뻗어 나온 내기와 고진유의 움직임에 발밑의 눈이 사방으로 쓸리면서 꽃잎처럼 흩날렸다.

그 사이로 사의검이 검무를 추듯 눈꽃을 만들어냈다.

후초식의 마지막 십식 매천유일(梅天唯一).

이를 마지막으로 고진유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스윽.

고진유는 눈을 뜨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꽃을 향해 손을 폈다.

떨어진 눈꽃이 따뜻한 손바닥의 온기에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고진유를 중심으로, 눈밭에 선명한 매화 문양이 나타났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극성으로 펼쳐야 나타난다는 매화천영(梅花天英).

그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전부 익힌 순간이었다.

* * *

고진유는 눈에 잠긴 화산을 구경하며 천천히 내려왔다.

내력이 높아지면서 무공도 강해졌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변화는 호충신법이었다.

고독전까지 내려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반각도 되지 않았다.

멈칫.

처음 보는 중년인이 독소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구지?’

매화도의가 아닌 중원 무림인의 복장으로 보아 외부인이 틀림없었다.

‘여긴 외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데.’

동봉이라 하나 이곳 역시 화산파의 권역.

고진유가 잠시 망설일 때, 독소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오너라.”

“……!”

고진유가 두 사람의 곁으로 내려섰다.

날카로운 눈썹을 지닌 적의 사내.

오십 초반으로 보였지만, 넓은 어깨와 단단하게 보이는 상체의 신형에서 독소응에 못지않은 사기가 뿜어져 나왔다.

“손님이 오신 모양입니다. 제가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이것 봐라?’

곧 적의 사내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상대는 젊은 화산파의 도사.

다가서지 못하게 일부러 강한 사기(邪氣)를 뿜었건만 얼굴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

“불청객이다. 그냥 있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사숙님.”

적의 사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젊은 도사, 본인은 그대의 사숙과 할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잠시 물러나라.”

“사숙님께서 있으라 하셨소.”

적의 사내는 받아치는 고진유의 한마디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크큭, 하긴. 사숙의 말은 잘 들어야지. 본인이 한 번은 넘어가겠다. 그만 물러나라.”

적의 사내는 이번엔 독소응에게 말했다.

“아직 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네. 물려 보내.”

“저 아이가 있으나 없으나 내 대답은 똑같소.”

“정말로 죽고 싶은 것인가? 이대로 간다면 그대의 생은 얼마 남지 않게 되거늘, 정녕 모른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혈사천주. 난 화산파의 제자이오. 내 운명이 그러하다면 천명에 따를 뿐. 억지로 생을 연장시킬 생각이 없소. 그만 돌아가시오.”

“천살성의 기를 가진 인물이 어찌 도사가 된다는 말인가! 그대의 운명은 정파가 아닌 사파에 이어진 걸세. 천명이라 했는가? 그대의 천명은 화산이 아니라 혈사천이란 말일세.”

“후후후…… 세상일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외다. 내 마음과 몸은 이미 화산에 묻었소.”

“천살지인!”

혈사천주가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외침에도 독소응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혈사천주는 시선을 돌려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천살지인, 저놈을 살리고 싶으면 본인의 말을 따르라.”

붉은 손바닥이 삽시간에 고진유를 향해 날아갔다.

파앗!

고진유의 신형이 순간 이동을 한 듯 옆으로 물러났다.

헛손질을 한 혈사천주의 눈이 커졌다.

“사숙님께서 분명 거절을 하셨거늘, 없어 보이게 구질구질하군요. 그만 내려가는 게 좋겠소.”

‘구질구질?’

혈사천주는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았다.

“이놈이…… 누구에게 함부로 말을 하는 게냐?”

“당신 말고 누가 있소.”

“하! 어린놈이 천방지축이군.”

혈사천주는 두 손이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고진유를 향해 다시 한번 홍사장(紅邪掌)이 출수했다.

쉬이이이익--

붉은 운무와 함께 사기(邪氣)가 전방 전체로 뿜어져 나갔다.

그때였다.

스윽-

피처럼 붉은 운무를 뚫고 혈사천주의 목에 검이 다가왔다.

“……!!”

죽음의 기가 혈사천주의 목을 분리하려는 순간, 홍사장을 빠르게 거둔 그가 검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사의검을 뻗어낸 고진유를 보는 혈사천주의 안색이 굳어졌다.

‘젊은 놈 무공이……!’

비록 한 수이지만 그와 필적하게 대등하다.

휘이익!

이번에는 혈사천주의 목을 향해 독소응의 검이 날아왔다.

“천살…… 지인, 무슨 짓인가?”

“혈사천주, 분명 물러나라 했소. 지금 물러나지 않는다면 둘 중 한 명은 죽겠지.”

붉게 물든 독소응의 눈동자를 보면서 진심임을 알았다.

“……알겠소.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 하지만 다음엔 혼자 가지 않을 것이오.”

혈사천주는 마지막으로 고진유를 노려본 뒤 그대로 고독전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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