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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대도-35화 (35/425)

35화

휘익!

굳은 표정의 중년 도사가 땅바닥에 깊게 판 뒤 세 구의 시신을 던졌다.

‘월극참마의 멸극도법을 이길 줄은…….’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시신이 된 복면인들의 무공은 얕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극일천의 육십사괘무장(六十四卦武將) 중 삼인.

매화검수 정도는 간단히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다.

중년 도사는 무심한 눈빛으로 흙을 펴서 시체를 묻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군. 어떻게 보고를 할지 암담하다.’

화산도협을 납치하려던 계획이 실패했다.

결국 비밀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시신을 빼내왔다.

‘설마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년 도사는 마지막으로 땅을 골라 흔적을 지웠다.

땅을 전부 파내지 않고서는 이제 시신을 찾을 수 없다.

아침이 밝자, 그는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텅 빈 광장.

화산파의 수련관들 중 가장 넓은 수련장이었다.

수련생들이 오기에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기에, 그는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주저앉듯 털썩 앉았다.

‘매화관과 천매관을 하루 만에 통과한 데다가…… 정말 보통 놈이 아니군.’

화산도협에 대한 일은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살군검을 운이 좋아서 이긴 게 아니었어.’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은 채 이각이 흘렀다.

끼익-

수련관의 문이 열리면서 오십 여 명 정도의 화산관 수련생이 들어섰다.

“관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수련생들이 한 명씩 인사하며 중년 도사의 앞에서 정렬하기 시작했다.

화산관의 관장.

화산권선 유형지가 수련생들을 맞이했다.

“모두 별일은 없더냐?”

“넵,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

유형지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련생들은 화산파 경내에 흐르는 소문에 대해 가장 빠르게 듣고 민감하다.

‘이들이 모른다는 것은 소문이 나지 않았단 말이지? 왜 말을 하지 않았을까?’

고진유가 침입자를 상부에 알리지 않은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섣불리 먼저 움직일 수는 없다. 놈이 어떻게 나오는지 기다려 봐야겠지.’

* * *

고진유는 이미 죽은 복면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놈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나타날 것이었다.

화산파에 숨어 있는 변절자는 사조인 양군경이 조심스럽게 찾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사조의 뜻에 따라 화산의 동봉(東峰)인 조양봉 고독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화산파에서 가장 특이한 인물이 기거했다.

“화산제일검 독소응. 그에게 가서 무공을 배워라.”

하지만 양군경은 정확하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사조님은 좀 막무가내시구나…… 가르쳐 주는 걸 그냥 배우면 된다고 하시니.”

천매관의 일도 그랬다.

적어도 공서 도인의 존재만큼은 알려줄 수도 있었던 거 아닌가.

이번도 비슷하긴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독소응이 누구인지 간단하게 들었다는 것이었다.

오청석은 화산사절의 검절로서 무림에 이름을 알렸지만. 독소응은 한 번도 화산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중원은 물론 화산파 전체가 화산제일검으로 인정한 인물…… 정말 궁금하네.’

고독전(孤獨殿)은 조양봉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위치했다.

조양봉으로 향하는 길은 다른 세 개의 봉우리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여기는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움이 섞여 있어.’

고진유는 잠시 제자리에서 멈춰 조양봉의 경관을 구경했다.

발밑 아래로는 운해가 펼쳐져 있었다.

섬 아닌 섬 같은 곳.

마치 언젠가처럼 바다 위 섬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기(死氣)를 얼마나 내뿜으시길래 스스로 이곳에만 두시는 걸까.’

화산제일검의 비밀.

독소응이 무림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정파의 제자는 지닐 수 없는 강한 사기(死氣) 때문이었다.

“히야…….”

고독전이 가까워지자 고진유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온몸 세포 하나하나가 찌릿거렸다.

‘이게 사람이 낼 수 있는 기운이라고?’

고독전으로 가는 방향 일대로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네.”

사기가 얼마나 진하게 퍼져 있는지 중단전에서 나온 내기가 스스로 호신강기를 만들어내며 밀어냈다.

그렇게 조양봉을 오른 지 반시진이 지날 무렵.

슥슥슥.

전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고진유의 눈에 황무지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닥을 고르고 있는 도사가 보였다.

‘저분이시군.’

서로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화산제일검 독소응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멀리 떨어진 십여 장까지 그의 신형에서 흐르는 사기가 진동을 했다.

고진유는 말없이 그의 뒤로 다가섰다.

그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돌아보지 않은 채 땅을 고르고 있었다.

‘다 하려면 반 정도 남은 건가?’

말끄러미 그를 보던 고진유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남아 있던 쇠스랑을 하나 잡은 뒤 땅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독소응이 고개를 돌려 고진유가 하는 행동을 보았다.

“무작정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듯이 해라.”

“알겠습니다. 부드럽게…… 여인의 머리카락을 넘기듯이.”

묵경의 말투를 흉내 내며 씩 웃은 고진유가 다시 손을 놀렸다.

손이 처음과 달리 가볍게 움직였다.

“웃긴 녀석이군.”

독소응이 피식 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독소응이 일을 멈추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 테니 마무리 잘하고 오너라.”

“네에, 사숙님. 먼저 들어가서 쉬십시오.”

“본 문에 신기한 녀석이 들어온 모양일세.”

그가 고독전으로 올라간 뒤 반각이 지나 땅을 모두 고른 고진유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봐도 잘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며 만족한 고진유가 다시 씩 미소를 지었다.

* * *

고독전은 생각보다 큰 건물이었다.

홀로 지내신다기에 작은 암자 정도를 생각했었다.

‘멋있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주변은 도당이 아닌 일반 부잣집 정원처럼 나무들 꽃들로 정리가 되어 있었다.

‘특이하네. 주위엔 사기가 진동을 하는데 꽃은 잘 자라고 있어.’

고진유는 정원을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정자까지?’

두 사람이 앉을 정도의 크기의 정자.

독소응은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지 말고 올라오너라.”

“네, 사숙님.”

독소응은 여전히 짙은 사기를 내뿜고 있었다.

“허허,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군.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앉아라.”

“고맙습니다.”

그는 이미 준비해 둔 찻잔에 차를 따라 부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도명은 호정이며 이름은 고진유라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본 문에는 언제 입문했느냐? 이곳에 올 정도라면 분명 이름이 알려졌을 텐데.”

“며칠 지나지 않았습니다.”

독소응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고진유를 뚫어지게 보았다.

“며칠 안에 생긴 매화기가 아니거늘. 나에게 농을 하려는 것이냐?”

“제가 어찌 사숙께 농을 논하겠습니까. 무공은 화산에 올라오기 전에 사부님께 배워 익혔습니다.”

“속세에서 익힌 무공이 이 정도라…… 대단하군. 네 사부가 누구더냐?”

“검절이신 허진 사부님이십니다.”

멈칫.

차를 들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허진이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살아 있었단 말이군?”

고진유는 그에게도 자신이 화산에 올라오게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독소응은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한마디 반응도 보이지 않고 들을 뿐이었다.

따악.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차가 아닌 술을 마셔야겠군. 잠시 기다려라.”

고진유는 술을 가지러 가는 독소응의 표정을 보았다.

‘눈물…….’

애써 참고자 하지만 눈가에 고인 눈물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뒤 항아리를 들고 그가 돌아왔다.

“망할 놈…… 잠시만 화산제일검을 맡겨놓겠다고 하더니,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먼저 갔군.”

그는 연이어 술을 마셨다.

검절 오청석은 화산파의 동문들 중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친우였다.

고진유는 비워진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허진의 제자라 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약속은 안 지켰지만 제자는 잘 뒀어.”

“고맙습니다.”

“허진을 죽인 놈들이 지옥혈림이라고?”

쏴아아아아아---

한마디 했을 뿐인데 엄청난 사기가 정자에서 뻗어나갔다.

‘왜…… 사조님께서 사숙님께 사실대로 말을 하지 말라셨는지 알겠다. 천살성…… 의 전인이 맞구나.’

독소응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살기를 지닌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 태어났다.

만일 화산파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면 희대의 살성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내 당장 그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죽일 것이다.”

점점 강해지는 사기에 고진유의 매화단심공이 반응했다.

내기가 흘러나오며 정자 안을 매화 향기가 은은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붉게 물들었던 독소응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천천히 돌아왔다.

‘오호…… 천살성의 기를 중화시켰다.’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 없군. 네가 익힌 심공은 무엇이더냐?”

“매화단심공을 익혔습니다.”

“……!”

독소응은 믿기지 않았다.

그가 아는 매화단심공에서는 이런 위력의 내기가 나올 리 없었다.

“손을 볼 수 있겠나.”

독소응은 고진유가 내민 손을 잡고 내력을 살펴보았다.

“이런 괴물 같은 녀석이 있나? 정말로 매화단심공이 틀림없다니…….”

하지만 이것만으로 천살성의 기운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군.’

의문은 커질 뿐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고진유의 내기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보아하니 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여기에 찾아오지 않아도 될 것을. 왜 왔느냐?”

“도진 사조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사숙께서? 네 녀석의 내공이라면 누가 가르쳐도 상승의 무공을 배울 수 있을 텐데.”

독소응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진유는 가지고 온 서신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사조님께서 드리라 하셨습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서신을 바라보던 독소응이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곧바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웃음소리.

“하하하!! 네가 공서 사조님께 오 년 안에 화산파를 천하제일문으로 만들겠다고 장담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정말 유쾌하군. 사내라면 그 정도의 포부는 있어야겠지.”

독소응은 자세히 고진유를 살폈다.

‘지금까지 찾아왔던 녀석들과 달라.’

“좋아. 네가 원하는 만큼 여기에서 지내도록 해라.”

“고맙습니다, 사숙!”

* * *

고독전에서 보내는 하루의 일상은 간단했다.

새벽에 일어난 뒤 운기행공을 시작으로 아침식사.

그후 독소응을 따라 밭일을 한 뒤 점심식사.

오후 작업을 한 후엔 저녁식사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운기행공을 마쳤다.

고진유는 하루 종일 독소응과 함께 움직였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독소응이 내뿜는 천살성의 기운은 강해졌다.

어떤 때는 호흡이 거칠어질 정도로 살기가 강해졌지만, 그때마다 고진유는 중단전에서 나온 호신강기로 이를 흘려보냈다.

한 달이 지난 이날도 마찬가지.

마지막 하루의 일과를 보내기 위해 명상에 잠겨 있던 고진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죽겠네.”

고독전에 올라온 후 며칠 동안은 천살성의 기운을 가볍게 상대했다.

한데 천살성의 기운은 줄어들긴커녕 점점 커져만 갔고, 그에 따라 몸도 똑같이 무거워져 갔다.

‘일전에도 다들 도망갔다지? 이러다 나도 도망갈지 모르겠는데?’

분명 한계가 찾아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 전에 방법을 찾아 해결하든지, 아니면 고독전에서 물러나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이런, 내가 무슨 말을. 도망은 안 되지.’

운기한 매화단심기가 천살성의 사기를 몸속에서 조금씩 밖으로 밀어냈다.

쉬이이익-

미세한 혈맥을 통해 사기들이 몸속에서 빠져 나갔다.

‘다행히 사숙께서 사정을 봐주면서 사기를 조절해 주셨지만, 이대로는 안 돼.’

빠른 시일 내에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진짜…… 사기만 따로 가둘 수 있으면 좋겠네.”

생각 없이 투덜거리던 고진유가 순간 멈칫했다.

순간 머리를 스친 생각.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따로 가둔다고?’

고진유는 중단전이 있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도 엉뚱한 생각을 한 뒤 중단전을 만들었다.

사부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했지만, 성공했다.

‘새로운 단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기만 넣을 수 있도록 작은 공간을 만드는 정도도 안 되려나? 중단전은 넓잖아!’

중단전 안에 사기만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계획.

‘좋아. 이번에는 단전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니까 괜찮겠지.’

우우우웅-

고개를 끄덕인 고진유가 내기를 끌어 올렸다.

곧바로 중단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중단전의 공간 중 일부를 따로 분리한다.’

고진유는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중단전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한 투명막이 생겨났다.

‘우우욱…….’

투명막이 점점 형태를 갖추고. 중단전은 두 공간으로 나누어졌다.

다행히 중단전을 호신강기로 보호한 탓에 고통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새롭게 만든 중단전의 나누어진 새로운 공간에 사기만을 따로 모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진유는 운기를 풀었다.

* * *

스윽.

독소응은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한 달이나 버티다니…….’

그가 화산파 경내가 아닌 조양봉에서 따로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강한 살성에 의한 사기 때문이었다.

화산파의 동문들은 일상생활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천살성을 상대로 끝까지 내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곧줄 홀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부터는 사기를 모두 풀어야겠군. 만일 이것까지 참을 수 있다면 무공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

고진유가 한 달 동안 사기에 적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기운을 완벽하게 막아낸다면 중원에서 사파인들과 마주쳐도 충분하고도 넘치게 견딜 수 있다.

‘후후후, 청석. 이상한 놈을 보내주어 고맙다. 언젠가 우리가 원했던 대로, 본 문이 중원 최고의 문파가 될지도 모르겠군.’

화산파를 중원최고의 문파로 만들자던 약속.

두 사람에겐 이루지 못한 꿈이었지만, 그의 제자는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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