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웅성웅성.
백여 명가량의 인부들이 등에 식량과 부식들을 지고 화산으로 올라왔다.
한 달에 한 번.
식량과 부식을 재어놓는 식영전 창고는 경내로 들어서지 않고 화산파 정문 입구에서 남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차.”
이마에는 흰색인지 회색인지 모를 수건을 둘러맨 인부들이 창고에 짐을 내렸다.
슥슥슥.
입고 책임자인 허서 도인은 창고 앞에 서서 물량들을 확인 후 입고 물품서에 줄을 그었다.
“허서 도사님.”
인부들 책임자인 중년 사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영춘이, 모두 끝냈는가?”
“네. 주문하신 물품들을 창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수고했네. 내려가거든 상단주에게 고맙다고 전해주게.”
허서 도인이 그가 내민 확인 장부에 서명하며 말했다.
“다음 달에도 부탁하네.”
“네, 알겠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려고 하니 오늘은 여기에서 머물다 내일 일찍 내려가게.”
“예에, 고맙습니다.”
중년 사내는 장부를 가슴에 넣은 뒤 인부들에게 다가갔다.
늘 그랬듯이 인부들은 식영전 앞마당에서 하루 저녁을 보내기 위해 자리를 폈다.
허서 도인은 그들을 잠시 지켜본 뒤 돌아서서 곧바로 식영전 집무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그는 주위를 살폈다.
이윽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품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물품서 사이에 끼여 있던 종이.
-도협을 데리고 갈 것이다.
‘여기에서?’
허서 도인은 인상을 썼다.
그들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알지만 어찌 화산파 본 문에서 도협을 납치한단 말인가.
‘내일 아침에 난리가 나겠군.’
그럼에도 허서 도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성공을 확신했기 때문일 터.
그가 할 일은, 인부들 중 극일천(極一天)에서 나온 인물을 찾아 고진유가 기거한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 * *
화산파 경내에서 동쪽으로 이각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검수암.
오청석이 화산파에서 지낼 당시 기거하던 곳이었다.
그가 무림에서 사라진 후 오 년 동안이나 비어 있던 곳.
보통의 경우 소속이 없는 삼대제자들은 화산관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하지만 고진유는 특별히 검수암에서 지내도록 허락을 받았다.
깊은 밤.
고진유는 가부좌를 한 뒤 매화단심공을 외우며 운기를 행공하기 시작했다.
천매도를 만개시킨 후 몸에 일어난 변화를 고진유도 잘 알았다.
쏴아아아---
하단전에서 흐르는 내기는 괴도에서 익혔을 때와 비슷했다.
혈맥을 따라 흐르는 내기가 중단전을 거침없이 통과했다.
지금까지 익혔던 매화단심공의 내기 경로와 천매도의 경로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원래라면 소주천을 마치면 그대로 끝이 나야 하지만, 천매도의 경로는 내기가 곧바로 자연스럽게 대주천으로 넘어섰다.
대주천을 통한 내력은 자연스럽게 중단전으로 모아졌다.
이각도 넘기 전에 대주천의 운기가 끝났다.
‘운기는 이거지.’
고진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운기행공을 마쳤다.
육지에서 운기행공을 하면서 어딘가 불편했던 느꼈던 것들이 시원하게 사라졌다.
청각은 물론 시각도 밝아지며 기감까지 넓어졌다.
그때,
파삭.
어둠 속에서 공기의 흐름을 따라 검수암으로 향하는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도 도둑고양이가 있는 모양이군. 화산파를 무시하는 것인지 자신감이 넘쳐나는 것인지 모를 일이야.’
검수암으로 들어오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즉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올 수 없다는 것.
‘내게 볼일이 있는 놈들이라면 둘 중 하나다.’
지옥혈림.
아니면 사부를 죽인 신비 세력.
고진유는 암자에서 일어났다.
“손님이 오면 마중을 나가는 게 주인의 예의겠지.”
* * *
슬금슬금.
검수암 주위로 들어선 세 명의 복면인.
그들은 일 장 주위로 흐르는 소리들을 내력으로 가두면서 암자로 올라섰다.
검수암은 불이 꺼져 있었다.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복면인 중 한 명이 문 앞에 소리를 죽인 채 다가섰다.
안을 노려보던 찰나.
“어허, 그게 소리를 죽이는 거요? 그렇게 움직여서야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다니겠소. 쯧쯧.”
“……!!”
“거기다 살수 주제에 혼자가 아니라면 서로 동작을 맞춰야 하는 것도 모르다니. 많이 맞으면서 배워야겠소이다.”
세 명의 복면인들이 동시에 흠칫했다.
검수암 옆으로 도복을 두른 젊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도협……?”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을 보면 도둑놈은 아니고, 지옥혈림에서 왔다면 내 앞에서 복면은 필요 없었겠지. 그럼 어딜까?”
“…….”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복면인들이 기회를 보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점혈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독문신법인 공축신법(空縮身法).
파앗!
검수암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복면인이 제자리에서 사라진 동시에 공간을 뚫고 고진유의 앞에 나타났다.
휘익!
그가 손을 뻗었지만, 고진유는 뒤로 물러나면서 가볍게 손을 피했다.
휙! 휙! 휙!
연이어 손속이 이어졌지만,
“그만하는 건 어떻소? 그러다 손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하, 자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보아라!”
팟팟팟팟--!
눈앞에서 어지럽게 쏟아지는 손의 잔상들.
“참…… 말을 안 듣네.”
싹둑.
복면인의 손이 잘려 나갔다.
“……!!!”
복면인은 사의검이 언제 발검되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푹.
고진유는 비명을 지르기 전에 먼저 복면인의 아혈을 눌렀다.
“조용히 해. 당신들의 존재는 당분간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좋게 말하면 고맙게 여기면 될 것을 꼭 삐딱하게 생각한다니까.”
복면인이 잘린 팔을 감싸 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고진유는 그가 도망가도록 가만히 볼 생각이 없었다.
“어딜 가려고?”
물러난 복면인의 목을 향해 사의검이 떨어졌다.
채애애앵!!
또 다른 복면인의 검이 사의검을 막아냈다.
“사람들은 왜 좋은 말을 해줘도 성심껏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다른 복면인이 손이 잘린 복면인의 어깨를 잡으며 아혈을 풀었다.
“빨리 지혈하게.”
“크으으으…… 저 녀석은 내가……!”
“곤(坤), 누가 책임자인지 똑바로 인지해라.”
“……큭!”
결국 손이 잘린 복면인은 고진유를 노려보며 뒤로 물러났다.
“화산도협, 검절처럼 사지가 잘리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우리와 함께 가는 것이 좋을 거다.”
“과연, 사부님을 죽인 놈들과 같은 패거리로군. 예상하긴 했지만, 너무 쉽게 정체를 밝히는 건 아니오? 혹시 나 정도는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뜻인가?”
휘이이익-
쉬이이익--
대답 대신 두 명의 복면인들이 좌우로 움직여 고진유를 앞뒤를 막아섰다.
“할 수 있으면 해봐.”
고진유의 말이 끝난 순간, 전방에 선 복면인이 허리에서 월극도를 뺐다.
달빛에 반짝이는 월극도가 살기를 뿜어냈다.
“월극참.”
피이이잉--!!
수십 갈래로 갈라진 월극도의 강기가 고진유를 향해 회전하면서 날아갔다.
주위 공간을 가득 메운 월극.
고진유는 사의검을 앞으로 내민 뒤 원을 그렸다.
우우우우웅--
사의검에 의해 만들어진 검의 돌풍이 점점 커져 나가면서 날카롭게 날아오는 월극들을 하나씩 튕겨냈다.
‘이 녀석의 무력이…… 이 정도라고?’
너무나 간단하게 월극참을 막아낸 고진유를 본 복면인이 당황했다.
“송(訟), 정신 차려라!! 호신강기를 일으켜!!”
흠칫!
그는 건너편에서 부른 복면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그의 앞으로 흩날리는 매화 꽃잎과 진한 향기가 퍼져 나갔다.
매화 잎 사이로 꽂히는 고진유의 매서운 눈동자.
매화 잎이 흐르는 바람을 따라가자 한풍이 느껴졌다.
쉬이이익-
무음무형의 신법 무영신(無影身)이 송(訟)을 베었다.
“커어어억!”
가슴을 스쳐 지나간 사의검에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송!!!”
뒤편에 있던 복면인이 그를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살기가 진한 흑색의 매화 잎이 지나간 뒤는 모든 것이 끝이었다.
쿠우우웅.
복면인은 무릎을 꿇었다.
즉사는 면한 듯 보였지만, 빨리 치료를 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장담하지 못할 상황.
세 명 중 둘이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부상을 입었다.
그들이 당한 건 상대의 실력을 똑바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화산도협, 오…… 늘은 이만 물러나겠다. 다음번에는…….”
“다음은 없소. 내가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 올 때는 쉽게 왔을지 모르겠지만, 떠날 때는 내 허락 없이 나갈 수 없소이다.”
고진유가 한발 앞서 그들 앞을 막아섰다.
‘어떻게 놈들을 찾아낼지 고민했는데, 알아서 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
찌이이이잉--!
홍매화단의 극성까지 일으킨 내력을 사의검에 밀어 올렸다.
자줏빛의 검신에서 흐르는 매화 향기가 붉은빛을 띠며 복면인을 감싸기 시작했다.
‘우욱…… 이 녀석은…… 검절보다…… 강하다.’
복면인은 오청석의 무력에 대해 잘 알았다.
복면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나타났다.
“이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안 모양이군.”
휘리리리릭!!
어지럽게 돌아가는 매화 잎들.
강한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 잎이 복면인을 감쌌다.
복면인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며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허공만 수없이 벨 뿐이었다.
“이놈……! 비겁하게…… 숨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파앗!!
매화가 폭발을 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사이로 나타난 사의검.
“커어억!!”
사의검은 정확히 복면인의 가슴을 찔렀다.
‘세 명 모두 살려둘 필요는 없지.’
즉사한 그를 본 두 명의 복면인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돌아선 고진유의 눈빛.
무형의 살기가 숨을 멈추게 할 정도로 강했다.
‘사, 산 채로 잡힐 수 없다.’
푹!!
“지금 뭐 하는……!”
한 손이 잘린 복면인이 검을 들어 동료 복면인의 등을 찔렀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그었다.
“기…… 다려…… 라. 네…… 놈도…….”
툭.
그의 목이 아래로 떨어졌다.
고진유는 망연히 분리된 목을 바라보았다.
‘실수했어. 점혈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그들이 바로 자결할 거라 생각지 못했다.
이를 악문 고진유가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라도 봐야겠어.”
그때,
휘이이익!
퍼어어엉-!!
서너 개의 연막탄이 터지더니 흰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오며 검수암을 순식간에 가렸다.
핏! 핏! 핏! 핏!
앞을 가린 연기 속에서도 정확히 목표를 향해 비수들이 날아왔다.
“젠장!”
고진유는 비수들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검수암 위로 올라선 동시에 연막에 가린 전방을 향해 매진한풍(梅眞寒風)의 초식을 빠르게 펼치며 연기들을 밀어냈다.
“……빠르군.”
다시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는 복면인들과 싸운 흔적만 있을 뿐, 세 구의 시신이 사라져 있었다.
기감을 넓혀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사정권 밖으로 물러난 것 같았다.
“벌써 기감에 잡히지 않는다…… 산 아래로 향했다면 계속 내력을 펼쳐야 했겠지?”
고진유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화산파의 경내가 있는 방향이었다.
* * *
매화관과 천매관을 하루 만에 통과했다는 고진유에 대한 소문은 경내 전체로 퍼져 나갔다.
‘공서 사숙님께서 호정을 인정하셨다.’
화산제일검 독소응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하셨던 분이다.
일찍이 일어나 차를 마시는 양군경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똑똑.
그때,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사조님, 호정입니다.”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간.
“들어오너라.”
양군경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들어선 고진유를 보았다.
“편히 기침하셨습니까?”
“너도 잘 잤느냐?”
“야밤에 조금 시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도 들었다.”
양군경은 다급하지 않았다.
“우선 차라도 한잔 마시도록 해라.”
“고맙습니다.”
쪼르르르-
찻잔에 매화 향이 향긋하게 피어올랐다.
“본 산에서 딴 매화이니라.”
고진유는 우선 향을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볍게 한 모금을 마셨다.
입안에서 퍼져 나가는 매화 향기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어떠냐? 괜찮지 않느냐?”
“사부님께서 그리워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 녀석도 이 차를 좋아했지.”
양군경과 고진유는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다시 한 모금을 넘겼다.
“검수암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지? 하지만 그게 아닌 모양이구나.”
“네, 사조님. 당분간 조용히 할 일이었습니다. 사실 어젯밤 화산에 세 명의 복면인들이 침입했습니다.”
“복면인이라 함은……?”
고진유는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허! 본 문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그놈들 중 한 명이 월극의 모양처럼 생긴 도를 사용했단 말이지?”
“강해 보였습니다.”
“중원 무림에 월극도를 사용하는 무림인들은 제법 있다. 그중 가장 강한 인물이라면 이백 년 전 활약했던 월극참마(月極斬魔)라는 월량군의 용병장이지. 그 후엔 강한 인물이 없었어.”
“아쉽습니다. 그놈들의 시신을 확인해서야 했는데…… 짧은 순간에 빼앗겼습니다.”
“그놈들의 시신을 훔친 인물이 움직인 방향이 본 문이라고 확신하느냐?”
“시신 세 구를 업고 기척을 내지 않고서 산 밑으로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양군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진유가 화산파 다른 도인들에게 그 물건에 대한 것을 비밀로 한 이유.
“힘들지 않겠느냐? 그놈들이 생각보다 훨씬 넓게 퍼져 있는 것 같구나.”
“아닙니다. 아직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일은 오직 사조님과 제가 해야 할입니다.”
“알겠다. 내 필히 본 문에 숨어 있는 쥐새끼를 잡아내마.”
제자인 검절 오청석을 죽인 놈들.
양군경의 눈빛이 서리처럼 날카로워졌다.
‘이놈들…… 기다려라. 내가 복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