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매화관장 학경의 별호는 매선향(梅仙香).
화산파의 도인들 중 가장 진한 매화 향을 풍긴다고 하여 얻은 별호였다.
심법으론 매화강기공(梅花剛氣功)을 익혔으며 무공으론 매화절검(梅花絶劍)을 익혔다.
그가 두 손을 펴자 매화 향이 바람에 실려 주위를 감싸며 호신강기를 만들어냈다.
그때였다.
수련생들 사이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매화관에서 최고점수를 지닌 상급반의 최고 기재.
그의 단호한 표정만으로도 어떠한 결심이 섰는지 알 듯했다.
“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호중,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호정 사제의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제가 강하다면 당연히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예를 잊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호중의 말이 맞다.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서로의 대한 예의에 어긋날 수는 없지.”
“맞습니다. 호정 사제가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만, 관장님께 도전한다면 사형제인 우리들 입장에서는 저희들을 무시하는 행동이라 여겨집니다.”
“흐음…… 그 말도 옳다.”
호중 혁자영은 이번에는 고진유를 향해 섰다.
“호정 사제에게 다른 뜻은 없네. 사형의 입장에서 사제에게 한 수 부탁하는 바일세.”
‘어라.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제주가 있군.’
호중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들이 사제를 인정하도록 만들어주게.”
“그러죠. 한데 사형께선 말을 너무 어렵게 돌려서 하는군요.”
“무슨 뜻이지?”
“나와 싸우고 싶다면 모두 나오세요. 사형제의 예의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모든 수련생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여러 명이 덤벼도 상관없다는 도발이 아닌가?
그들 사이에서 장두총이 나섰다.
“호정! 정말 우리가 전부 나서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사형들이 원하신다면 사제인 제가 얼마든지 받아들여야지 않겠습니까?”
학경은 수련생들 앞으로 서너 걸음 다가서는 고진유를 말리지 않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다.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지.’
동문 중에 뛰어난 인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존감이 무너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에 스스로 허무함에 빠지거나 포기할 수도 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잘됐군. 비무를 통해 동문의 정이 생기는 법이지.’
한발 물러난 학경의 행동으로 무언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때, 혁자영이 다가서는 수련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물러나라!”
장두총의 얼굴이 매섭게 일그러지더니 벌컥 화를 냈다.
“호중! 혼자 싸우겠다는 것이냐? 우리는 허수아비냐?”
“호경, 너야말로 무슨 생각이지? 우리 모두가 덤벼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 사제를 죽일 생각인가?”
“그건……! 아니지만…….”
“난 단지 호정 사제와 무공을 겨루어 매화관을 통관하겠다는 호언장담이 맞는지 확인할 뿐이다.”
장두총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쳇, 이 새끼도 예전부터 맘에 안 들었어.’
동문이라 하나 그는 사교보다는 하루 종일 무공 수련에만 시간을 보냈다.
‘화산에 들어올 때부터 정이 안 드는 놈이야.’
호중이 검을 잡고 앞으로 내밀었다.
“사제는 우리에게 실력을 보여주게.”
“사형께 선수를 양보하겠소이다.”
“고맙군.”
파아아앗!!
혁자영이 검을 뽑는 동시에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펼쳐졌다.
십사수매화검법에 후초식 열 가지 초식을 더한 검법.
매화자명(梅花紫明)을 펼치자 검 주위로 붉은빛 매화가 피어났다.
허공으로 흐르는 매화 꽃잎이 고진유의 눈에 담겼다.
번쩍!
혁자영의 검이 고진유의 가슴을 똑바로 향했다.
‘왜 피하지 않지?’
사아아아-!
검은 한 줌의 주춤거림도 없이 고진유의 가슴 어림을 지나쳐 갔다.
‘베었……!’
하지만,
파아앗!
검이 허공을 꿰뚫었다.
‘어디냐!’
붉게 피어오른 매화가 사라지고, 혁자영은 재빨리 아래로 떨어진 검을 회수하는 동시에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했다.
그 순간.
“늦었습니다.”
“……!!”
눈앞에 나타난 고진유의 얼굴.
가볍게 팔을 앞으로 내미는 동작을 보면서도 몸이 반응하지 못했다.
푸우욱.
검집 끝이 심장에 눌려 왔다.
혁자영은 충격을 받았다.
굳어진 얼굴.
‘검조차 빼지 않을 정도로…… 일초지적도 안 된다는 말인가?’
숨조차도 쉴 수 없었다.
“계속하겠소?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러면서 고진유는 검집을 뒤로 물렸다.
‘동문이라 여기는가?’
방금 전 고진유의 말은 분명 오해의 소지가 충분했다.
하나 건방지거나 상대를 무시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렇군. 동문이기에 놀이처럼 즐겁게 놀아주겠다는 뜻인가.’
혁자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화산파를 위해 누군가 길을 넓게 펼쳐주면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아닌가.
편안하게 펼쳐놓은 길을 따라가면 될 일이다.
“그만하지. 사제의 무공은 강하다. 오늘만이 아니라 다음에 또 괜찮을까?”
“당연하죠.”
“고맙군.”
혁자영이 포권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본 장두총이 발끈했다.
“이봐, 호중! 네놈 멋대로……!”
“됐어. 호정 사제는 자격이 있다.”
혁자영이 고진유를 인정하며 뒤로 물러나자 장두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가?’
학경은 미소를 지었다.
화산파의 미래를 끌고 갈 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가 혁자영이었다.
그런 그가 고진유와 겨우 비무 한 번 했을 뿐인데 기도가 변했다.
‘재미있어지는걸.’
고진유에 대해 지니고 있던 약간의 거부감도 어느덧 사라졌다.
“이젠 우리 차례겠지?”
“그렇습니다.”
“좋아. 짧지만 몸도 풀었을 것 같고.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을 것 같군. 지금 시작해 볼까?”
“좋습니다.”
학경은 세 개의 매화 문양이 새겨진 검집을 수평으로 천천히 올렸다.
그의 신형에서 흐르는 매화 향기.
둘 사이에 매화 향이 가득했다.
“준비가 되었으면 들어오너라.”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허리에 찬 검을 잡았다.
왼손으로 전해져 오는 검의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 검은 사조님께서 사부님을 위해 주문하신 것.’
오 년 동안 이름도 없이 주인을 찾고 있었던 검.
양군경은 검을 건네며 스스로 이름을 지어라 하셨다.
‘앞으로 나와 함께할 동반자. 사부님의 뜻을 이을 사의검(師意劍)이다.’
지이이잉-
고진유의 손에 들린 사의검이 자줏빛의 검신을 드러내며 검명을 울렸다.
“좋은 검이군.”
한눈에 봐도 보통 검은 아니었다.
고진유는 내력을 올리면서 매화류개(梅花流開)의 자세를 잡았다.
‘십사수매화검법. 이것 하나밖에 익히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인 모양이군.’
창천무룡 남궁한과 흑명군을 이긴 실력.
하나 십사수매화검법은 평검수의 제자가 익히는 화산파의 기본 무공이었다.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을 해보는 수밖에!’
방어에 최적화된 화산파 검법.
매화절검을 익힌 학경이 먼저 공격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타앗!!
단절향(斷切香)의 초식.
학경이 고진유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끊기 위해 달려들었다.
파바밧!
고진유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대로 매화류개를 시전했다.
단절향의 공간에서 물러난 사의검에서 매화가 피어올랐다.
‘이 정도밖에?’
학경의 눈빛이 바로 실망으로 물들었다.
사의검이 펼친 매화가 단절향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듯했지만, 학경이 펼친 초식은 변초.
슈우우우우-
단절향의 초식이 벽소첨절(闢消尖切)로 빠르게 전환된 뒤 고진유를 덮쳤다.
“끝났군.”
장두총이 비웃음을 흘렸다.
“역시 관장님이시다.”
“그러게. 변초에 완전히 당한 것 같아.”
“당연하지 않아? 관장님의 절검은 변초에 최적화된 검이잖아.”
하지만,
‘아니…… 막혔어.’
그들 중 오직 혁자영만이 고개를 흔들었다.
화아아아아아-
학경이 펼친 두 번째 초식에서 피어난 매화 향이 흔들리고.
학경의 공간으로 사의검이 움직였다.
채애애앵-!!
투명한 매화 잎이 눈앞에서 터지면서 솟구쳤다.
“매화영음……?”
어찌 고진유가 펼친 초식을 모르겠는가?
‘이 초식이…… 이렇게 강한 힘을 지녔다고?’
콰아아앙!!
“큭!”
계속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멈추지 않고 밀려들어 오는 고진유의 반격.
‘이번에는 매화일지인가?!’
당연히 이 초식도 잘 안다.
하지만 고진유가 펼친 초식은 그가 평소 알고 있던 초식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빠르고 강맹했다.
다급하게 뒤를 물러난 학경이 매화일지를 펼치며 눈앞으로 다가온 고진유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 녀석……!! 내가 변초를 펼칠 거라 예상한 거야!’
그 짧은 순간 모르는 척 속아준 뒤 반격을 해왔다.
팟!
멈칫.
사의검의 끝이 정확히 학경의 목 앞에서 멈췄다.
매화관 전체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한 치만 더 깊이 찔렀어도 숨을 쉬지 못했을 것이 확실하다.
고진유를 상대하는 동안 장기인 매화절검을 제대로 펼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졌…… 다.”
비무의 결과는 완벽하게 고진유의 승리였다.
학경은 허탈한 심정이었다.
여태까지 삼대제자와 비무를 하여 져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두 번의 초식에.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야 하건만.
‘이 녀석 말대로 본 문에서는 좋은 일이 아닌가.’
기분은 오히려 반대로 좋아졌다.
매화관 역사상 관장을 꺾은 제자는 이 아이가 처음이다.
“호정, 매화관을 통과했다.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허허, 허허허! 도진 사형! 저 아이의 무력이 정말로 높지 않소이까?”
멀리서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던 시선들.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늘 차분하던 주명진은 더 없이 흥분해 있었다.
“어떤가? 허진이 보낸 화산파의 보물이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주명진의 시선은 멀리 고진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근차근 키울 수만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아쉽습니다.”
“저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좋겠네.”
주명진은 양군경에게 고진유가 화산파에서 이 년 동안만 수련하기로 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도 허락했다고 하지만, 학경과의 비무를 보자 아쉬움이 커져갔다.
“사형, 호정에게 다시 말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장문인. 이미 끝난 이야기일세. 호정, 저 아이가 지나가는 길이 곧 화산파의 길이 될 터이니 장문인께서는 도움을 주면서 지켜보면 되네.”
“하아, 사형께서 그리 말하신다면. 정말 아쉽군요.”
주명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사형을 힐끔 보았다.
예전 그의 제자였던 검절 오청석의 경우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중원 무림에 나가겠다는 오청석을 막아서지 않으셨던가.
‘흐음…… 사형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
* * *
고진유는 홀로 연화곡을 내려섰다.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둡고 어쩐지 음산이 기운이 감도는 곳.
화산파 제자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세 개의 수련관과 달리, 천매관은 무공을 수련하는 무관이 아니었다.
‘이곳은 무공을 직접 배우는 곳이 아니라 했지?’
양군경은 직접 가보면 알 것이라 했다.
연화곡을 완전히 내려왔는지 더 이상 길은 없었다.
“이곳인가?”
석벽 아래 넓은 장소만 있을 뿐.
세월의 흔적 탓인지 가까이 다가서자 벽에 새겨진 천매관의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도착한 천매관.
“사조님께서 통과하라고 하셨으니 뭔가 있겠지. 기다려 볼까.”
주위를 보며 앉을 자리를 찾던 고진유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 할 때였다.
“어허, 거긴 내 자리다.”
천매관 전체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습니까?”
옆자리로 엉덩이를 움직이자,
“거기도 내 자리다.”
여전히 목소리만 들릴 뿐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들리는지 모르겠군.’
화산파의 기인이 확실했다.
고진유는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허공에다 물었다.
“이 자리는요?”
“거기도 내 자리.”
“여긴?”
“내 거다.”
“여기도요?”
“맞다.”
“이건?”
“…….”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여긴 아닌가 보군요.”
“아니, 내 자리다.”
“저건?”
“이 자식이…… 여기에 있는 모든 자리가 내 자리다!”
“아……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죠. 그럼 서 있는 건 괜찮습니까?”
툭툭.
고진유는 얼른 일어나 뒤로 돌아서며 고개를 숙였다.
‘빠르다. 뒤에 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어.’
거의 그의 가슴 정도밖에 오지 않는 노도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따악!!
노도는 손에 든 막대기로 고진유의 머리를 때렸다.
“아야!”
“왜 이리 말이 많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또 말대꾸를 하는군! 쯧쯧, 어린놈이 어른을 봤으면 얼른 인사나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다니. 네놈 사부가 누구냐?”
“허진 사부님이십니다.”
“허진? 음…… 검절이라고 불리던 놈이 맞느냐?”
“네. 그렇습니다.”
“제법 똘망한 녀석이었지.”
노도는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부님을 아는 모양이십니다.”
“당연하다. 그놈도 여기를 다녀간 적이 있었지. 내가 알기로 오 년 전에 갑자기 소식을 감췄다고 들었거늘, 살아 있었던 모양이구나.”
“얼마 전에 등선하셨습니다.”
“이런. 안타깝구나.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화산파에서 좋은 인재를 잃었어.”
노도는 고진유의 아래위를 살폈다.
“손 줘봐.”
“…….”
휙!
노도는 뺏어가듯 고진유의 손을 잡았다.
“이놈 봐라? 신기한 녀석일세.”
노도는 처음으로 흥미로운 눈빛으로 고진유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고진유의 내력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기를 봐서는 매화단심공을 익힌게 맞는데 비정상적이야. 네놈 사부가 어떻게 내공을 가르쳤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군.”
노도는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고 고진유의 몸속을 빙빙 돌며 살폈다.
그의 눈이 두 배나 커졌다.
“네놈 짓이냐? 아니면 네놈의 사부 짓이냐?”
“무엇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툭툭.
고진유의 손을 놓으면서 가슴을 향해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 말이다. 여긴 누가 만들었냐?”
“……제가 만들었습니다.”
“허허! 골 때리는 놈일세. 잘못하면 그냥 죽을 텐데. 이걸 네 사부가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사부님 몰래……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크크큭,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다니! 죽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아…… 네에. 알겠습니다. 근데…….”
고진유가 노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거냐?”
“맞습니다.”
“멍청한 놈이로다. 여기가 어디냐?”
“천매관입니다.”
“잘 아는 놈이 내가 누군 줄 모르겠다는 것이냐? 내가 천매관을 맡고 있으니 관장이겠지!”
천매관장 공서도인.
오십 년 전에 중원에서 활약한 화산파의 절대기인으로, 중원오기 중 매화기검(梅花奇劍)이 바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