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화산(華山).
서악화산지험(西岳華山之險), 화산여립(華山如立)이라 할 만큼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며 우뚝 솟아 있었다.
멀리서 보고 있으면 마치 매화가 피어오른 듯한 형국.
이 다섯 개의 봉우리 중 서봉인 연화봉에 화산파의 주요 경내가 위치해 있었다.
‘천하의 기암괴석은 서악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이군.’
고진유는 화산파의 산문 앞에 멈춘 채 하늘과 맞닿은 화산의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기가 눌린다고 할까?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화산이 내뿜는 웅장한 기세를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을 듯했다.
“어떤가?”
고진유의 뒤로 진우청이 다가섰다.
그 목소리에는 화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사부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화산을 보게 된다면 단번에 반할 것이라고요.”
“후후후, 그분의 말씀이 맞는 듯싶은가?”
“화산의 기개는 천하제일 호연지기라 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화산을 바라만 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가에 눈물이 주룩 흘렸다.
“왜…… 우느냐?”
“……사부님께서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하셨던 화산을 직접 보게 되니 눈물이 납니다. 함께 오셔야 했는데…….”
“…….”
진우청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아…….’
고진유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
제자가 사부를 그리워하는 눈물이 분명했다.
‘사형은…… 사형이…….’
화산으로 오르는 그의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 * *
‘도착했다.’
고진유의 가슴이 뛰었다.
눈앞에 나타난 제일도문.
천하제일도당(天下第一道黨)의 현판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매화가 비치는 도복을 두른 화산파 도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청은 그들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서명전주님을 뵙습니다.”
“허경, 먼길을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하후세가주는 어떠하시던가?”
“여전히 정정하셨습니다.”
“그렇구만. 우리 같은 나이가 되면 건강이 제일 중요하지.”
진우청은 옆으로 몸을 돌렸다.
서명전주 곡진은 화산파 제자 뒤편에 선 세 명의 사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덕에 그들 중 바로 고진유를 알아볼 수 있었다.
“도협, 이리 와보게.”
진우청이 얼른 고진유를 불렀다.
‘사부님께서 화산파에 가면…….’
고진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청석이 부탁한 것이 있었다.
한 걸음씩 자연스럽게 걷는 걸음에 내력을 일부러 내보이듯 흘려보냈다.
‘매화단심기(梅畫單心氣)가 분명하거늘.’
곡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고진유의 내력은 나무랄 데가 없을 만큼 정심(正心)했다.
‘허어…… 본 문에 있는 제자들도 이처럼 정심(正心)하면서 청심(淸深)하게 익히지 못한 정기를 익혔다니…… 믿기지 않는구나.’
저 아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화산파의 심공을 익힌 것이 틀림없었다.
“그대가 화산도협인가?”
“그렇습니다.”
“반갑네. 그대에게 물을 것이 너무나 많아. 따라오게.”
“알겠습니다.”
곡진은 오직 그에 대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화산도협이 누구인지.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는지.
정말로 화산파의 제자인지.
매화태청전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화산파 도당들을 지나쳤다.
화산을 닮은 건물들 또한 화산의 기세를 닮은 듯했다.
고진유는 시선을 똑바로 하며 지나치는 듯했지만, 구경 나온 많은 화산파 도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소문의 인물인 화산도협을 신기하게 구경하는 시선과, 정말로 화산파 제자가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
곧 화산파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본전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본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 하나하나에서 유구한 도가의 전통을 지닌 화산파의 힘이 전해져 왔다.
‘정말 화산파에 온 거야.’
긴장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슴이 떨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곡진이 다가서자 진대량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세나.”
“잠시만…….”
고진유가 뒤를 따라오던 묵경과 인양을 보았다.
“우린 밖에 있을 테니 잘 다녀와.”
“묵경 형님과 기다리겠습니다.”
고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태청전은 고요했다.
좌우로 선 도인들이 숨을 죽인 채 곡진을 따라 들어선 청년, 고진유를 살폈다.
“으음…….”
그들 중 몇몇의 도인들이 놀란 음성을 흘렸다.
고진유에게서 흐르는 내기를 본 그들은 곡진이 받았던 감정과 꼭 같은 것을 느꼈다.
“장문인, 화산도협이란 불린 청년입니다. 도협, 이분께서 본 문의 장문인이시다. 인사드려라.”
스으윽-
고진유는 그 자리에서 공손하게 절을 했다.
“고진유라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
장문인 주명진은 고진유가 태청전으로 들어온 뒤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를 살폈다.
고진유에게서 흐르는 내기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매화단심공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본인이 화산파의 장문인이라네. 만나서 반갑군.”
“저 또한 화산에 오게 되어 정말로 기쁩니다.”
“후후후, 그대가 좋다고 하니 다행이네. 오는 길이 힘들지 않았는가?”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오는 길에 허경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잘됐군.”
서너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갔다.
출신이 도둑이라 하여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건만.
‘흐음…… 특별히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이는데. 누가 저 아이를 가르쳤는지 잘했군.’
주명진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스윽.
그러자 고진유의 앞으로 한 명의 도인이 나섰다.
육척장신의 도인.
‘이분이시구나.’
처음 보는 인물이지만 고진유는 그가 한진검선 양군경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도협의 무공이 십사수매화검법과 매화단심공이라 들었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혹시나 그대가 본 문의 제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
“당장 단전을 파괴한 뒤 무공을 펼칠 수 없도록 사지의 맥을 끊지.”
“겁나는군요.”
“당연히 겁나는 일이다. 그러니 함부로 화산파의 제자라며 사칭하지 않는 것이지. 그럼 묻겠다. 그대가 본 문의 무공을 어떻게 익혔는지 소상히 말하게. 한 치의 거짓말도 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제가 화산파의 무공을 익힐 수 있었던 이유는 한 분과 사부의 연을 맺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대와 사제의 연을 맺은 화산파의 인물이 누구인가?”
“화산사절이신 검절 허진 사부님이십니다.”
“……!!”
양군경은 숨이 멈춰지는 듯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매화태청전에 모인 도인들 모두 고진유를 향해 시선이 집중되었다.
양군경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다시 물어야 했다.
“방금…… 허진이라 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가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사부님께서 늘 그리워하셨던, 한진검선 도진 도인님이 아니십니까?”
“……!”
“사부님께서는 두 분이서 계실 때는 늘 본인을 진부(眞夫)라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진부라고 부른 것까지 알다니…… 이 아이가 정말로 허진의 제자였단 말인가?’
화산도협의 소문을 듣자마자 당장 잡아와서 따끔하게 혼을 내주고자 했던 양군경이었다.
“허진은, 허진은 어디에 있느냐? 살아 있느냐?”
“사부님께서는…… 얼마 전에 선계에 드셨습니다.”
“아…… 아…….”
순간 양군경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언제 다가섰는지 고진유가 그의 팔을 잡았다.
“……!!”
매화태청전에 있던 도인들은 고진유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빠르다. 순식간에 움직였어.’
이는 양군경도 마찬가지.
“고, 고맙다.”
“아닙니다. 사부님께서 늘 사조님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허어……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것이더냐? 제 앞길도 똑바로 가지 못하는 놈이…….”
고진유는 의자에 그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양군경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 년 동안 한 줌 소식도 없던 제자.
제발 살아만 있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결국 죽음으로 돌아왔다.
‘항상 나의 곁을 지켜줄 것이라 했던 녀석이…….’
그를 지켜보던 장문인 주명진이 대신 나섰다.
“도협, 허진이 죽었다면 그동안 어디에서 지냈는가?”
고진유는 눈을 감았다.
오청석은 화산파에 모든 사실을 전부 말할 수 없다고 그에게 당부했다.
진실은 오직 믿을 수 있는 사람. 사부이신 한진검선 양군경만이 알아야 한다고.
고진유는 가장 중요한 사실, 즉 무림맹에서 복면인들에게 얻은 철갑에 관한 부분을 제외한 채, 흑선에서부터 사부 오청석과 만나기 전까지 일어난 이야기를 했다.
숨을 죽인 채 그의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오청석이 복면인들에게 사지가 잘렸다는 말에 안타까워했고.
오청석을 죽이지 않고 지옥혈림에 의뢰해 지옥도에 보냈다는 말에는 분노가 치솟았다.
이어지는 흑선의 난파와 오 년 동안의 무인도 생활.
지옥혈림의 흑귀들이 탄 흑선이 섬에 찾아오면서 탈출하게 된 내용까지 모두 들은 화산파의 도인들에게서 탄식이 군데군데 흘러나왔다.
고진유가 한 이야기는 모두 쉽게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양군경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힘든 생을 살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눈물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장문인도 마찬가지였다.
“……도협, 정말로 믿기 어려운 말이네.”
“제가 전달해야 할 말은 모두 했습니다. 제자인 제가 사부님의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전 믿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맞다. 그 녀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난 양군경이 고진유 앞으로 다가섰다.
“장문인, 이 아이는 허진의 제자가 맞소이다. 여러분들이 제자로 받아들일지는 회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면 되오. 본도는 회의에서 나온 결정에 따르겠소이다.”
“집법전주…….”
“따라오너라.”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양군경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 * *
두 사람이 향한 장소는 집법전이 아니었다.
연화봉 정상에 지어진 작은 도당.
‘여기는…….’
처음 온 곳이지만 어디인지 알았다.
양군경이 먼저 상궁으로 먼저 올라섰다. 뒤를 따르던 고진유는 태산과도 같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
‘사부님께서 하늘보다 더 큰 분이시라 하셨던 말씀이 맞구나.’
“들어오너라.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있겠지?”
“사부님께서는 상궁을 매화원궁이라 부르셨습니다.”
“맞다. 이곳은 화산파의 조사이신 매화검선께서 매화검을 만천하에 알렸던 곳이니라.”
상궁의 내부는 넓지 않았다.
흑단목으로 지어진 제단은 세월의 오랜 흔적 때문인지 회색빛을 띠었다.
재단 중앙에는 단 하나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었다.
양군경은 두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었다.
고진유도 그를 따라 부복을 했다.
“이름이 진유라 했느냐?”
“고진유라 합니다.”
“내가 너와 여기에 함께 온 이유를 아느냐?”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곳은 사부께서 맨 처음 사제의 연을 맺기로 결정을 내렸던 장소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제의 연을 맺은 후 처음 간 곳이라 하셨고요.”
“맞다. 자랑스러운 내 제자를 조사님의 위패를 모신 이곳에서 인사를 드리기 위해 왔었지.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
“허진이 받아들인 제자라면 당연히 나의 사손이 아니겠느냐?”
양군경은 무작정 고진유를 사손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한 명밖에 두지 않았던 제자 오청석을 믿기 때문이었다.
무인도에 단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제자로 받은 것이 아니라, 고진유가 화산의 제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일 테니까.
“사조님, 사손의 절을 받으십시오.”
고진유는 일어나 양군경을 향해 절을 했다.
회의에서 어떻게 결정이 나든 두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청석이 고진유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처럼, 양군경도 고진유를 사손으로 받아들였다.
이젠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사조와 사손의 사이였다.
“사조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허진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소상하게 말해보아라.”
양군경은 알고 있었다.
고진유가 거짓을 고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 외에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오직 사조님께만 전하라 하셨습니다.”
양군경은 가슴이 착잡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다른 사람도 믿지 못했단 것인가.’
고진유는 무림맹에서 일어난 사건부터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매화태청전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부분.
철갑의 존재.
‘어찌 이런 일이…….’
복면인들이 왜 오청석을 바로 죽이지 않고 지옥혈림에 의뢰했던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철갑의 위치를 알기 위해 그 아이를 죽이지 않고 고문했던 것이구나.”
제자 오청석이 당했을 고통이 느껴졌다.
신비복면인과 지옥혈림.
“내…… 이놈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양군경의 내기가 솟구쳤다.
스윽.
고진유가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사조님…….”
흥분하여 소용돌이치던 그의 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허어…… 대체 이 아이의 내력이 어찌 되기에…….’
절정을 넘긴 내력을 바로 가라앉힐 정도라면, 상대 또한 절정을 훨씬 뛰어넘어야 했다.
“사부님의 원수는 사손인 제가 꼭 갚을 것입니다.”
“……!”
“사조님께서는 제가 그들과 어떻게 싸우는지 지켜보시면 됩니다. 그놈들이 한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후회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결의에 찬 목소리.
세상에 이보다 무거운 말은 없는 듯했다.
“자신이 있느냐?”
“전 사부님의 제자이며 사조님의 사손입니다.”
울컥.
“하하하하!!”
양군경이 대소를 터뜨리자 상궁 전체가 흔들거렸다.
오 년 동안 이보다 더 크게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제자 오청석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자만심이 아닌, 무한의 자신감.
그의 안에서 슬픔과 벅참이 동시에 넘실거렸다.
양군경은 두 팔을 벌려 고진유를 꼭 껴안았다.
“고맙구나. 알겠다. 그놈들이 어떻게 죽는지 지켜보마.”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혼자서 싸우도록 두지 않겠다. 네 뒤에서 내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지켜주마.’
끼이익-
상궁의 문이 다시 열렸다.
산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의 그림자에 세상이 붉게,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