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고진유는 일행들 앞으로 나섰다.
‘기의 흐름을 봐서는 더 강한 놈들이겠어.’
전방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가 지금까지 만난 흑나찰이나 흑귀들과 달랐다.
지옥혈림에서 운영하는 총 네 곳의 중원사대지옥.
지옥도를 비롯하여 지옥수, 지옥토, 지옥궁이 존재했다.
지옥혈림의 수장 지옥혈존 아래로 네 명의 사대흑신왕이 있으며 흑신왕 아래로 각각 다섯 명의 흑명군이라는 절대고수들이 존재했다.
고진유는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돌멩이는 허공을 가르며 똑바로 날아가며 고목을 강하게 맞혔다.
퍼어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목의 나뭇가지에서 나뭇잎들이 흩날렸다.
떨어지는 나뭇잎 사이로 흑의인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진우청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이 보이자 당황했다.
“지…… 옥혈…… 림.”
무림의 청소부.
흑귀들이 앞을 가로막은 채 살기들을 뿜어냈다.
확실히 화산도협의 소문들 중 지옥혈림의 흑귀들과 연관된 것도 있었다.
“저놈들과 무슨 원한이 있는가?”
“깊은 관계입니다.”
그에게 사실 그대로 밝히기에는 아직 시기가 빨랐다.
“둘 중 하나는 세상에서 사라져야겠지요.”
‘흐음…… 둘 사이에 이유는 있는 듯한데…….’
숨겨진 일들이 말았지만, 진우청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스윽.
흑귀들 사이에서 두 명의 흑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의 가슴에 새겨진 진한 핏빛의 군(君)이란 글자.
허리를 두른 붉은 혁대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지옥혈림의 절대고수 흑명군.
두 명의 흑명군 중 가느다란 턱에 일자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의 중년 사내.
“화산도협. 우리를 찾아내다니 제법이군. 만나보고 싶었다.”
추관동이 싸늘하게 말했다.
‘저자들은……!’
진우청은 긴장했다.
중원 무림에서 지옥혈림 흑명군의 명성은 낮지 않았다.
최소한 절정의 내력을 넘어선 무인으로 알려진 고수.
그런데 그런 흑명군이 둘이나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아이를 잡기 위해서 저들이?’
추관동은 화산파 도사들을 살폈다.
‘별일 없는 놈들이군.’
툭 던지는 그의 음성은 간단명료했다.
“화산파는 물러나라. 여기에서 죽고 싶지 않다면. 본 림은 화산도협에게 볼일이 있으니.”
“……!”
진우청은 노기가 치밀었다.
‘어디에서도 무시를 당한 적이 없거늘.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한테……!’
고진유가 화산파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사형 오청석의 제자였다.
동문을 버릴 수는 없는 일.
“뭣들 하느냐? 적은 싸우고자 하거늘. 싸울 준비를 하지 않느냐?”
진우청은 검을 뽑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출수를 할 준비를 마쳤다.
휘익!
그의 뒤로 화산파 제자들이 바짝 붙어서며 정렬을 맞추었다.
“지옥혈림이 중원 무림에서 안하무인이라 들었건만, 감히 본인 앞에서 화산파조차 무시할 줄은 몰랐군.”
“화산사절 장절 진우청.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본 림은 화산파와 싸울 생각이 없다. 물러나라.”
“하하하! 건방지군. 지옥혈림 따위가 본 문에 협박을 하는구나.”
“크크크, 언제 적 화산파라고. 조용히 넘어가고자 했건만, 결국 죽고 싶은 모양이지?”
“네놈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걸 생각이군.”
“이놈이……!”
진우청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스윽.
그때였다.
흥분을 하던 진우청의 앞으로 고진유의 손이 다가왔다.
“사숙께서는 어찌 사람 같지도 않는 쓰레기들과 언쟁을 하시려고 드십니까? 마음을 가라앉히시지요.”
“도협!”
고진유는 환하게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
흥분했던 기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미안하네. 내가 흥분을 했다.”
“괜찮습니다.”
고진유는 그를 진정시킨 뒤 돌아서며 추관동과 마주했다.
“흑명군이라 했소? 지옥혈림은 이제야 본인을 상대하는 데 흑나찰 정도로는 벅차다고 본 모양이군요.”
“…….”
“후후, 그런데 흑명군으로 된다고 보시오? 힘들지 않을까? 내가 생각보다 조금 센 편이라서.”
고진유는 실실 미소를 지었다.
“사숙님, 이러다 나중에는 흑신왕까지 나오는 게 아닙니까? 물론 상대조차 되지 않겠지요.”
진우청에게 가볍게 던진 말이지만 상대가 받아들이는 감정은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흑명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고진유의 뜻.
‘흑명군을 도발하고 있어.’
진우청은 흑명군 추관동의 얼굴을 살폈다.
방금 전의 자신처럼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노오오오옴!!”
단번에 호통 소리가 울렸다.
살기를 쏟아내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
“화산도협, 겨우 몇 놈 이겼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오늘 네놈의 사지를 분질러 놓겠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미리 말하는데, 나와 싸울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할게요. 그래도 당신들은 나를 죽이지 못하겠지만.”
씨익.
고진유의 눈동자에서 순간 섬뜻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저 녀석이…….’
추관동의 몸이 움찔거렸다.
* * *
주도권은 단번에 전환되었다.
‘이건…… 자신감이다. 일부러 상대를 흥분시키며 도발을 한 게 아니야.’
진우청이 고진유를 보며 물었다.
“상대는 흑명군이다. 자신이 있느냐?”
“사숙님, 자신이 없으면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
고진유의 물음에 머리를 때리는 충격을 받았다.
‘허어, 내가 헛살았도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무림인이 어디 있으랴.
“그렇구나. 알겠다.”
결전이 시작되었다.
추관동은 손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흑귀들은 화산파 도사 놈들을 모두 죽여라!!”
타아앗!
파아앗!
수십 명의 흑귀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데구르르르르.
그들 앞으로 굴러나오는 둥근 물체.
흑귀 중 한 명이 눈이 커지면서 기겁을 했다.
“천뢰!! 마비폭이다!!”
“으악! 피해…….”
그들의 목소리는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콰아아아앙!!
흑귀들 사이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수천발 의 마비침들이 퍼져 나갔다.
“아아아악……!!”
“커어어억.”
전신으로 파고들어간 마비침에 흑귀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구르기 시작했다.
북소연에게 빼앗았던 물건.
“이 정도의 위력이라니…… 겁나는 물건이었군.”
바닥에 뒹군 채 고슴도치가 된 흑귀들을 보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비겁하게 무슨 짓이냐?!! 무림인이라면 당연히 정당하게 싸워야 하거늘! 이게 정파라는 화산파에서 하는 짓거리냐?!”
추관동이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게 됐소만, 그 물건은 얼마 전에 당신들 흑나찰에게 빼앗은 물건이라 돌려 드린 거요.”
“망할 새끼가…….”
그는 고진유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정정당당히 싸우지 못할까?”
“떼로 몰려와서 할 소리는 아니외다.”
휘리리릭!
고진유는 대답과 동시에 신법을 펼쳤다. 그의 앞으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나갔다.
‘이놈. 빠르다.’
추관동은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쌍장을 뻗었다.
구우우우우우-
흑명군의 독문장법 흑무장(黑霧掌)에서 쏟아진 장력이 고진유를 삼키려 들었다.
휘릭!!
고진유의 신형이 기다렸다는 듯 좌우로 흔들리면서 사라졌다.
‘빠르다!’
추관동은 다급히 사방을 살폈지만 상대방의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우선 방어를……!!’
우우우웅-
추관동은 내력을 최대한 끌어내며 기습을 조심했다.
“비겁한 놈…… 숨어서 공격을 하다니. 모습을 드러내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좌우로 살폈다.
“숨긴 어디에 숨었다는 거요. 당신이 못 찾았을 뿐이지.”
‘뒤!!’
추관동은 등 뒤에서 싸늘한 기를 느끼는 동시에 몸을 비틀었다.
파앗!
지옥혈림의 절대고수다운 실력.
“쌍마혈장(雙魔血掌)!”
슉슉슉슉슉-
수십 장의 장력이 고진유를 향해 날았다.
스르르릉-
고진유는 뒤로 몸을 날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매화화류(梅花火流).”
퍼엉! 펑! 펑, 펑!
매화가 만들어낸 불꽃이 피어나며 쌍마혈장이 만들어낸 장력들을 하나씩 태워 버렸다.
타앗!
뒤로 내려선 고진유가 검을 앞으로 겨누며 호탄신(虎彈身)을 펼쳤다.
궁신탄영의 신법처럼 강하게 튕겨 나가는 몸.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을 일직선으로 뻗었다.
“매화일지(梅花一摯).”
신검일치. 신검합일이 이러할까.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추관동의 가슴을 향했다.
“커어억!!”
가공한 기세의 위력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다.
‘이놈의 내력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이지?’
약관의 나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내력.
쫘아아악!!
“크아아아악!”
추관동은 양손으로 합장을 하며 전신 내력을 한줌 남김없이 끌어 올렸다.
덜덜덜덜-
전신이 떨리며 단전에서 올라온 내력이 그의 양손에 집중되었다.
서서히 커지는 내력의 흑구(黑球).
파아아앗!!
흑구와 검이 부딪혔다.
서로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팽팽한 힘이 서로를 밀어내며 겨루었다.
‘이 양반 대단한데.’
흑명군의 무위.
지옥혈림의 절대고수란 말이 사실이었다.
현재 중단전의 내력은 반 정도가 남아 있다.
‘내력을 완전히 하단으로 전환시킨 뒤 단숨에 밀어낸다.’
중단전에서 나온 내력이 전신혈맥을 타고 하단전으로 빠르게 향했다.
우우우우웅-
수로를 타고 흘러나가는 듯 거친 소리.
‘지금이다!’
하단전을 완전히 개방하며 내력을 폭발시켰다.
파아아아앙!!
그러자 하단전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힘이 불어나면서 손을 통해 검으로 전해졌다.
끼기기긱-
흑구에 금이 가며 조금씩 깨어져 갔다.
추관동은 당황하며 눈이 커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콰아아아앙!!!
굉음.
흑구가 폭발했다.
이어지는 후폭풍에 추관동의 몸이 떠오르며 뒤로 넘어졌다.
울컥.
바닥에 쓰러진 그가 피를 토해냈다.
“관동, 괜찮은가?”
도완이 다가온 뒤 그의 몸을 빠르게 살폈다.
“크으…….”
추관동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완전히 장기들이 흩뜨려졌다.’
빨리 운기행공을 하지 않는다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처억.
그는 추관동을 어깨에 둘러맸다.
“어딜 가려고? 지옥혈림 놈들은 내 눈앞에서는 살아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슈우우욱.
그들을 향해 공중에서 매화 잎들이 비수처럼 내리꽂기 시작했다.
도완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뭣을 하느냐? 앞을 막아서라!”
채애애앵--!!
챙! 챙!챙! 챙!
도완의 명에 흑귀들이 앞으로 나온 뒤 매화 잎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아악!”
“커어억.”
흑귀들의 비명이 울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사이, 부상을 당한 추관동을 업은 도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휴우…… 도망갔군.’
고진유는 숨을 고르며 흥분된 몸속의 내기를 안정시켰다.
흑명군과의 대결.
‘중단전의 내력이 없었다면 밀어내지 못했을 거야.’
싸움에선 이겼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흑명군 한 명을 상대로 중단전의 내력을 모두 끌어냈어. 지옥혈림을 상대할 떈 더 조심해야겠군.’
지옥혈림에는 흑명군보다 강한 네 명의 사대흑신왕이 존재한다.
‘확실히 사부님 말씀처럼 무림에서는 절대로 자만해서 안 되는군. 언제 어떤 놈들이 내 앞에 나타날지 몰라.’
육지에 온 뒤 계속되는 승리에 혹시 자만한 것은 아닌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기회였다.
‘앞으로 흑신왕까지 상대하려면 열심히 수련해야겠는데.’
휘익!
그때, 묵경이 다급히 다가왔다.
“진유 아우, 괜찮아?”
“보시다시피. 묵경 형은 어떻소?”
“괜찮아. 저 정도는 애들 장난이지.”
“다행이네요. 인양은?”
“우리가 가르친 대로 싸움이 나자마자 쏜살같이 사라지더군. 얼마나 빠른지 보이지도 않더라고.”
“후후, 굳이 인양까지 싸울 필요는 없죠. 아직 어립니다.”
진우청은 주위를 살폈다.
천뢰마비폭의 영향인지 다행히 제자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저 아이는 어떻게 이런 내공을 펼칠 수 있지?’
남궁한과의 비무를 보면서 강한 줄은 진작 알았지만, 흑명군과의 내력 싸움에서 이겼다.
흑명군의 무공도 분명 예상보다 강했는데 말이다.
그동안 함께 동행하며 살폈지만 고진유의 단전에는 내력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흑구를 깨뜨릴 때 단전에서 뻗어 나온 내력을 설명할 수 없었다.
고진유가 설명을 해주기 전까지는….
“사숙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네. 몸에는 이상이 없는가?”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저놈들이 비겁하게 도망을 간 것이지요.”
“…….”
“다음에 만나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할 겁니다.”
지옥혈림에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대단한 녀석이로다.’
예전엔 화산파에도 이런 인물이 있었다.
화산검절 오청석.
‘정말로…… 이 아이가 화산파를 이끌어 줄 수 있다면.’
기세가 기울어져 가는 화산파에 새로운 변화를 주지 않을까.
* * *
슈우우우욱-
외상이 아닌 내상을 당했다.
추관동은 곧바로 운기행공을 했다.
흑구가 터지면서 몸의 장기들이 뒤죽박죽 되어버렸다.
‘우우욱.’
입 밖으로 고통의 신음을 내지 못하고 참아냈다.
혈맥을 따라 기가 흐르면서 틀어진 장기들이 본래의 자리로 찾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는 땀이 수없이 흘러내렸다.
운기행공을 한 지 반시진이 지난 후.
“하아아아…….”
온몸이 늘어지면서 안도의 탄식이 나왔다.
“관동, 괜찮은가?”
“다행히…… 위험한 순간은 벗어난 듯하네.”
완전한 몸으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도완은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믿을 수 없군. 겨우 약관의 나이에 그 정도의 내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빠드득.
추관동은 이빨을 강하게 씹었다.
“크크…… 내가 방심을 했다. 다음에 만나면 그놈의 사지를 잘라 놓을 것이다.”
추관동의 눈동자가 넘치는 살기에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