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저놈을 여기에서 꺾는다면……!’
여인들의 관심은 자신에게로 돌아올 터!
상관후는 여인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한 번 더 손에 힘을 주었다.
‘풍류미군이라니. 빛 좋은 개살구 주제에.’
그녀들과 저놈의 연회 자리까지 단 몇 걸음.
당당하게 다가서서 묵경을 향해 소리치려는 그때,
“이보……!”
스윽.
상관후의 앞으로 웬 사내가 가로막듯 들어섰다.
‘뭐야, 이 자식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상관후가 사내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리려는 순간,
“진유 형님.”
여인들 사이에 있던 인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시간 잘 보내고 있군.”
“앗…… 네에.”
인양은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졌다.
“아우님, 왔는가? 이야기는 잘 끝났고?”
“대충요. 시간도 많이 지난 것 같은데 그만 갈까요?”
“근데 뒤엔 누구야? 같이 왔어?”
호기롭게 묵경을 향해 다가섰던 상관후가 세상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누구요?”
상관후는 앞을 막아선 인물이 누구인지 알았다.
고진유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 도협…… 반…… 갑소이다. 상관후라고 하오.”
“여기 볼일이 있소?”
“아, 아니…… 그냥, 지나가는…….”
화산도협과 묵경은 서로 형아우라 부르며 친한 사이였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던 길 가시오.”
“아, 알겠소.”
상관후는 그대로 옆으로 돌아섰다.
‘제기랄…….’
참담한 패배감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참는 표정.
고진유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 * *
묵경과 인양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화산파로 갈 거라고?”
“그렇게 됐습니다. 한 번은 갈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 나도 함께 간다.”
“저도 진유 형님과 화산파로 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고민할 시간도 없이 대답했다.
“오히려 잘됐네. 이번 기회에 서악으로 유명한 화산을 구경하면 되겠구만.”
“안 그래도 허경 사숙도 상관없다고 하시더군요. 혹시나 따라오지 않을까 싶어 미리 물어봤소.”
“후후후, 역시! 잘했어. 진짜 기대가 되는군. 화산이라. 역시 진유 아우를 따라다니기 잘했어. 화산파에도 가보고.”
묵경은 기분이 좋았다.
고진유를 만난 순간부터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몇 년 동안이나 사이가 좋지 않던 아버지와 짧지만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얼어붙었던 사이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첫 물꼬는 튼 셈이니까.
“아 참, 아버지를 만났다면서요?”
“몇 마디만 하고 나왔다.”
“잘했소.”
“잘하긴 뭘…… 앞으로도 계속 여자 꽁무니나 따라다닐 것인지 묻더라. 내가 따라다니는 게 아니고 여인들이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그게 그거라면서…… 여하튼 행실 조심하고 사고 치지 말라는 잔소리만 들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처럼 사고는 안 친다고 했더니 한 대 패더군.”
“맞을 짓 했군요. 충고해 주는 부모님이 계신 건 좋은 일입니다.”
“…….”
고진유가 고아라는 사실을 안 뒤, 묵경은 가족에 관한 말이 나오면 얌전해졌다.
“아무튼, 그 뒤엔 정색을 하시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묻더군. 그래서 네 뒤를 졸졸 따라다닐 거라 했더니 여자들 따라다니는 것보다 천 배 만 배 낫다고 하시면서 그건 잘 생각했다고 하시더라.”
“풋…….”
고진유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
‘뭐랄까. 시끄럽고 정신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왜 웃어?”
“그냥…… 좋아 보여서요.”
* * *
하후세가의 이순 연회가 끝났다.
고진유는 묵경, 인양과 함께 화산파 일행들 뒤에서 동행했다.
우종성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진우청의 뒤를 따랐다.
한 발씩 내딛는 걸음걸이는 기운이 반쯤 빠져나간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삼대제자이면서 매화검수에 올라선 그는 늘 자신감이 강했었다.
‘그때 그 눈빛은…….’
하지만, 남궁한의 도전을 피했던 자신을 보는 진우청의 그때 그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차라리 못났다고 말이라도 하신다면…….’
그 많은 군중들 앞에서 처절한 패배자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보이기 싫었다.
평소엔 화산파의 이름을 중원에 알리겠다며 자신 있게 떠들고 다녔는데.
‘사숙께서…… 나를…… 못난 놈이라고 여기시겠지?’
진우청은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뒤에 따라오는 인물.
화산도협밖에 없었다.
“사형.”
그때, 사제인 장두총이 그에게 가까이 붙어 섰다. 두터운 입술 사이에서 미소가 보였다.
‘이 녀석이…….’
사제라고 해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견제하는 행동들이 조금씩 거슬리는 놈.
“어디 몸이 좋지 않으시오? 걷는 게 여어엉 시원찮습니다.”
‘나를 놀리고 있어.’
장두총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앞에 걷던 진우청까지 관심을 보였다.
“호경의 말처럼 몸이 좋지 않으냐?”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지금까지 쉬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잠시 휴식을 하는 게 좋겠군.”
“사숙님, 전 괜찮습니다.”
우종성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우청은 이미 한 자리를 고른 뒤 앉고 있었다.
‘망할 새끼가…….’
우종성의 눈에 힘을 주며 장두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장두총은 이미 돌아선 채 일행들 뒤로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서 걷던 고진유도 자리를 잡았다. 옆으로 묵경과 인양이 다가앉았다.
묵경은 앞선 화산파 제자들을 슬쩍 가리켰다.
“분위기가 좋지만은 않군.”
“사는 게 다 그렇죠.”
“아우와 말하다 보면 가끔 애늙은이 같아.”
“그런가요?”
쉽지 않았던 어린 시절과 오 년 동안의 무인도 생활.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고(思考)를 가지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만일 화산파에서 아우를 제자로 삼는다면 저들과 사형제가 될 거야.”
“사형제가 된다 해도 상관없어요. 옛날에도 마음에 안 드는 놈들과 같이 지낸 적이 많았거든요. 그때처럼 있어도 없는 듯하면 됩니다.”
“푸흐흐, 다른 사람이라면 힘들 것 같은데 아우라면 정말로 그런 식으로 잘 할 것 같아.”
“오, 인정하는 겁니까?”
인양은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도중 고개를 돌렸다.
화산파 제자들 중에서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전 우종성에게 한마디 했던 젊은 도사.
“도협, 여기에 앉아도 되겠나?”
아래 사람에게 툭 내던지는 듯한 말투였다.
“잘 모르는 사람과는 어색해서.”
“이제부터 동문이지 않는가?”
“이름이 장두총이라 했소?”
“동문 사이에선 이름보다는 도명을 부르지. 호경이라 하네.”
장두총은 자연스럽게 세 사람의 옆에 앉으려고 했다.
“잠깐.”
“응?”
“무안하게 하기 싫어 말을 돌렸더니 일부러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는 것이오?”
“도협, 무슨 말인가?”
“내가 낯을 가리는 편이라서 굳이 여기에 앉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소. 조금 시간을 가집시다.”
장두총은 얼굴이 붉어졌다. 바로 거절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그런가? 하후세가에서는 여인들 사이에서 잘만 놀고 있는 모습이지 않았나?”
“그거야, 여기 묵경 형이 분위기를 잘 이끌어 주셔서 편안한 자리였소.”
씨익.
묵경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장두총과 시선을 마주쳤다.
“알…… 겠네. 본 문으로 올라가는 동안 시간이 많으니 그때까지는 친해지지 않겠나.”
“내 마음에 들지 모르겠소. 내가 사람 사귀는 데 상당히 까다로워서.”
‘망할 놈 새끼.’
기분이 나빠진 장두총이 바람 소리가 날 것처럼 팩 돌아섰다.
피식.
우종성은 실소를 뱉었다.
‘도협의 성격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친한 척을 하려다가 당했군.’
진우청과 서너 마디 나누는 대화를 들으니, 당연히 화산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딱히 없는 듯 보였다.
우종성은 우울했던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저편에 앉아 있는 고진유를 쳐다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닮고 싶다.’
* * *
지옥혈림 사대흑신왕.
남흑신왕 허주광은 추혼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받았다.
-화산도협 고진유.
보고서의 첫 장에 적혀 있는 이름.
최근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스윽.
한 장씩 차례대로 보고서에 적힌 내용들을 읽었다.
오 년 전 일부터 최근에 일어난 일까지 고진유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적혀 있었다.
투욱.
그는 보고서를 탁자 위에 가볍게 던졌다.
“소연아, 완벽한 영웅의 탄생이지 않느냐?”
“네. 그의 등장에 대해 우리도 한몫을 한 셈이 되었지요.”
“어디 다치지 않았느냐?”
“독강시와 호신갑의 때문에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허허, 조심하지 않고. 앞으로는 너무 일선에 나서지 않도록 해라. 소연이 네가 다친다면 주군에게 한소리 듣지 않겠느냐?”
허주광은 그녀가 여전히 일선에서 움직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 림의 일을 하고 싶다기에 추혼대에 넣었건만, 수하들을 데리고 현장을 몰래 나가고 있었다.
“괜찮아요. 앞으로 더 조심하지요.”
“내가 호위를 보내주면 어떻겠느냐?”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북소연은 뚜렷하게 의견을 밝혔다.
“어허, 그럼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그녀가 수하에게 보고서를 올리지 않고 직접 찾아온 이유가 있을 터.
“도협은 하후세가에서도 그의 사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정말로 그가 검절의 제자가 맞다고 생각하느냐?”
“네. 확실해요. 분명 검절에게 비밀이 있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후세가에서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허주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북소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죽은 그가 무엇을 숨겼는지 알아내는 게 문제이군.”
“네, 그가 숨긴 물건을 과연 제자가 알고 있는지 그것부터 알아내는 게 순서일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본 림에서 먼저 잡는 겁니다. 이제는 화산파에서도 화산도협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터. 우리가 빨리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특히 그 신비인들이 알기 전에…….”
“흐으음, 알겠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그자를 잡기 위해서는 최소한 흑명군이 나서야 합니다.”
“흑명군이라면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놈을 충분히 잡을 수 있겠지. 두 명의 흑명군이라면 되겠느냐?”
“아! 당연히요! 흑명군 두 분이 도와주신다면 그를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후후후, 소연아, 이번 일을 잘해보거라.”
“걱정 마세요. 그의 능력은 이미 들어난 상태거든요. 충분히 잡을 수 있어요.”
북소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협, 기다리고 있어라. 조만간 찾아갈 테니.’
* * *
섬서성 화음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호남성을 지나 호북성으로 들어선 일행은 곧장 섬서로 향했다.
지루한 여정 속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인양이었다.
화산파의 일행과 동행하는 중에도, 인양의 수련은 쉬지 않았다.
인양에게 신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자, 진우청은 화산파의 신법이 아닌지 바로 확인했다.
다행히 화산파의 무공이 아니어서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호충신법이라 부르는 신법이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단순하게 빠른 보폭으로 움직이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게다가 몸을 비틀거나 옆으로 걷는 모습들이 화산파의 제자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쳇, 여전히 바보 같은 신법을 펼치고 있군.’
장두총은 처음과 달리 세 사람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진우청의 말도 있었지만 화산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 것.
고진유는 며칠 전부터 인양에게 호충신법의 호충보를 내력 없이 펼치도록 수련시키고 있었다.
일부러 큰 동작과 과한 움직임이 이어지자,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도 못했다.
한 발을 크게 내딛는 듯 움직이던 인양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진유 형, 아홉 번 움직였어요!”
“잘했어. 그 정도면 충분히 좋아졌다. 그래도 열 번은 기본이야.”
“알겠어요. 저기 뒤에서 연습을 더 할게요.”
“수고해.”
인양이 뒤로 움직이자 묵경이 다가섰다.
“나도 가르쳐 주면 안 돼?”
“안 배운다면서요?”
“그게 아니라, 처음에는 모양새가 이상했잖아. 나같이 잘생긴 사람이 이상한 모양새로 움직이면 많은 여인들의 꿈과 환상을 깨뜨릴 수 있어 위험하다고.”
“묵경 형은 여전히 꿈과 환상을 주면 됩니다. 굳이 안 배워도 돼요. 현재 신법도 충분히 좋으니까. 그리고…… 신법이 너무 빠르면 여인들에게 화려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잖아요.”
“그…… 런가?”
묵경의 입꼬리가 살짝 말렸다.
“사숙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현재 익히고 있는 연화무환보(軟花舞幻步)가 최고라면서요.”
“뭐어 나쁘지는 않지. 중원십대보법에 당당히 들어가니까.”
성녀곡의 이름을 중원에 알린 무공.
절대보법으로 알려진 연화무환보였다.
고진유도 그의 보법이 궁금했는지 여유가 될 때 서너 번 가볍게 비무를 주고받기도 했다.
세 사람은 화산파의 일행과 함께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후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찌리릿.
‘누군가 기다리고 있어.’
전방에서 흐르는 기가 느껴졌다.
휘익!
고진유가 진우청의 곁으로 단숨에 다가섰다.
“도협, 무슨 일인가?”
그는 아직 전방에 숨어 있는 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진우청이 곧바로 기감을 올려 전방을 살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아이의 내력은 내가 가늠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동행하며 고진유의 내력을 수차례 확인했었다.
그때마다 많은 내력을 느낄 수는 없었는데.
“앞에서 누가 우리를 기다리는 거지?”
“아마도 우리가 아니라, 저를 기다리는 것이겠죠.”
점점 진하게 전해지는 상대의 기.
‘지옥혈림이 분명하군. 둘 중 하나겠지? 나에 대한 복수일까.’
아니면 사부님께서 숨긴 그 물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