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웅성웅성.
임시 비무대로 가는 길.
수많은 이파 사이에서 세 사람은 마치 끌려가듯 움직였다.
묵경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진유 아우…… 난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가고 싶으면 혼자 가서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러면서도 그 또한 비무대회는 구경하고 싶었는지, 막상 객잔으로 돌아가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았다.
고진유는 묵경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결국 그가 먼저 가기 싫은 이유를 털어 놓았다.
“휴우…… 알겠다, 알겠어. 실은…… 아버지가 서문세가의 가주야.”
“그런데요?”
고진유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묵경이 당황하며 물었다.
“엥? 놀랍지 않아?”
“어디 부분에서요? 대단한 집안의 아들이긴 합니다만…… 그게 저기 가기 싫은 이유가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소.”
“난 서문경이라 아니라 성이 묵씨야. 어머니 성을 따랐지.”
서문세가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돌려서 말했다.
“난 또…… 그래도 부럽네요. 부모님이 두 분 모두 살아 계시는군요.”
“…….”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나 피하기만 하면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고진유는 걸음을 멈춘 뒤, 왔던 길을 되돌아섰다.
“알겠어요. 객잔으로 갑시다.”
“……구경…… 안 하고?”
“궁금은 하지만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입니다.”
묵경은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돌아설 줄은 몰랐다.
“객잔으로 가자면서요. 안 갑니까?”
“아니다. 그냥…… 비무대회에 가자. 하긴 내가 잘못한 것도 없어. 서로 안 맞았을 뿐이지.”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당소의 아들.
다만 본부인이 아닌 성녀곡 전대 곡주의 제자 묵연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묵경은, 세가에서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세가에서 자란 그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보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 스스로 서문의 이름을 버리고 어머니 성을 따르면서, 서문세가와의 인연을 끊으려고 했다.
“부담되면 안 가도 됩니다.”
“가자. 비무대회잖아. 당연히 나도 보고 싶긴 해. 아우 말대로 피하면 계속해서 피하게 될 거고.”
묵경은 혼자 다녔던 예전과 달리 마음이 편해졌다.
본래 그의 성정이라면 처음부터 근처에 얼씬도 않았을 게 분명하다.
‘음…… 아우 때문인가?’
곁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한 느낌이다.
와아아아아!!
비무대 가까이 다가서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진유 형님!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인양도 군중들을 따라 흥분한 듯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여기가 좋겠군.”
고진유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비무대 위로 한 중년 사내가 올라와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듯했지만 군중들의 함성 소리에 섞여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둥! 둥! 둥!
북소리가 나면서 군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조용해졌다.
“이제 시작되는군.”
묵경의 말처럼 중년 사내가 비무대에서 내려간 뒤, 젊은 사내가 올라섰다.
“와아아아!!!”
“호남십룡의 하후천이다!!”
군중들이 젊은 사내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척.
하후천은 군중들을 향해 포권을 하며 소리쳤다.
“할아버님의 생신을 맞이하여 하후세가의 일원으로 본인이 먼저 나섰소이다! 누가 본인과 함께 손을 나누고 싶은 분은 올라오시면 고맙겠소이다!”
휘이이익-!
비무대 위로 청의무복을 입은 사내가 올라섰다.
척.
사내는 포권을 했다.
“장사장원의 두익이라 하오.”
“오! 막공검으로 유명한 장사장원이 아니오.”
“그렇소이다. 한 수 부탁하겠소.”
채애애앵!!
두익은 검을 뽑았다.
채애애앵!
까아아앙!!
하후천과 두익의 비무가 빠르게 십여 초 지나갔다.
대등하게 펼쳐지던 두 사람의 비무는 이십 초가 되면서 순식간에 차이가 벌어지더니,
파앗!
하후천의 검이 두익의 목 앞에서 기세를 멈췄다.
“와아아아아!!”
“하후천 만세!”
군중들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하후천을 향해 환호했다.
고진유는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비무를 바라보았다.
‘흐음…… 비무라서 그런가. 기세들은 별론데.’
흥미가 떨어지자 고진유의 표정이 뚱해졌다.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인데?”
“……저들 사이에서 힘이 안 느껴지더군요.”
“하긴. 호광검까지 이긴 실력인데 쉽게 아우 마음에 들겠어?”
“와아아아아!!!”
이번에도 역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 비무대회는 한 명의 승자를 정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한 문파에서 한 명씩 올라와 직접 지명을 하고, 원하는 상대가 올라오면 비무를 하고 내려갔다.
곧이어 전의 비무와 비슷할 정도로 감탄과 아쉬움의 아우성이 뒤를 이었다.
휘이이익!!
한차례 함성이 또 지나가고, 비무대 위로 또 다른 사내가 올라섰다.
“호남십룡의 서문정이다.”
‘서문정?’
고진유는 옆에 앉은 묵경을 보았다.
전 비무자들을 볼 때와 달리 굳은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은 비무대 주위 귀빈석에 앉은 중년인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는 사람이오?”
“서문세가의 가주. 비무대에 있는 사내는 배다른 형이지.”
“형도 있었소? 부럽네요.”
묵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그래. 누나와 여동생도 있다.”
“완전 복받은 사람이네. 얼굴도 잘생겨, 부모님도 빵빵한 집안의 수장이고, 형제들도 많고.”
“거 다 맞는 말이긴 한데 말이지. 참 나, 됐다! 내가 애들처럼 투정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서문정의 무공은 강했다.
그를 상대하기 위해 올라온 사내는 삼 초도 넘기지 못한 채 기권했다.
비무대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절정을 향했다.
군중들은 과연 어느 문파에서 어떤 인물이 올라올지 한껏 기대하며 비무대를 주시했다.
스르르르륵-
다음은 가만히 선 자세에서 비무대에 올라서는 사내.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사내의 신법은 차원이 달랐다.
“본인은 남궁세가의 남궁한이라 하외다.”
웅성웅성.
남궁한의 이름이 주는 무게에 비무대 주위가 고요해졌다.
창천무룡 남궁한.
남궁세가주의 다섯째 아들인 그는 남궁세가에서 백 년에 한 번 태어날 무재라 알려져 있었다.
사파무림의 무공 오십 위에 드는 혈사궁주와 결전에서 삼십 초를 겨루면서 그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으며 더욱 명성을 날렸고.
그는 이미 중원 무림에 이름을 떨치는 무림인이었다.
이십 대 후반이라 하나, 후기지수들의 대결이 이루어지는 비무대 위로 남궁한이 올라올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본인과 손을 겨루어볼 무림의 영웅이 계시다면 올라오시오.”
남궁한은 한 방향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화산파 제자들을 향한 무언의 압박.
‘훗.’
남궁한은 속으로 실소를 지었다.
화산파 제자들은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매화검수 우종성은 손이 떨렸다.
남궁한은 고개를 돌려 관중들을 향해 소리쳤다.
“최근 무림의 소문을 들으니 화산파의 명성이 높더이다. 역시 대남궁세가에 대적할 수 있는 문파는 화산파가 아니겠습니까! 본인은 이 자리에서 화산파의 검이 소문처럼 강맹한지 겨루어 보고 싶군요.”
스윽.
남궁한은 검을 천천히 뽑아 들며 귀빈석 사이에서 한 명을 가리켰다.
“어떻소? 화산장절이신 허경 도인께 묻습니다. 화산파에서 본인의 도전을 받아주겠습니까?”
‘이…… 놈이…….’
진우청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수많은 시선들이 진우청에게 고정이 되었다.
의도적으로 화산파를 무시하는 행동이 분명했다.
‘여기에서 못한다고 한다면…….’
남궁세가의 힘에 굴복한 것이라 소문이 날 것이다.
귀빈석 아래에 함께 온 제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떨고 있어.’
진우청의 시선을 받은 우종성은 주눅이 든 채 고개를 떨구었다.
이 년 전 무림맹에서 주최한 천하비무대회에서 그와 비무를 했었다.
그의 검 앞에 일초지적도 되지 못하고 비참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날 이후 얼마나 망신을 당했던가.
남궁한의 비웃음이 들렸다.
“하하하하! 중원 무림의 최고봉인 화산파의 제자들이 본인과 싸우고 싶지 않는 모양이외다. 설마 화산파가 남궁세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대남궁세가는 싸움에 져도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화산파는 아닌 모양이군요. 중원 제일의 문파인 화산파에 대실망입니다.”
“……그게 무슨!!”
결국 참지 못하고 진우청의 노기가 치솟아 오를 때였다.
스으으으으-
관람석에서 바람을 타고 흐르는 듯이 사내가 비무대 위로 다가섰다.
남궁한의 신법과 비교해도 결코 낮지 않은 수준.
‘아우가……!’
묵경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화산파가 무시당하는 광경을 보면서, 그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중이었다.
사뿐.
고진유는 비무대에 가볍게 내려섰다.
“후우, 이런 느낌이군.”
비무대 위에 서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생각했었다.
모든 시선이 집중되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넌 누구지?”
남궁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화산파 제자를 찾는다면서? 그래서 나왔다. 싸가지가 더럽게 없는 놈을 패고 싶어서.”
“…….”
남궁한은 고개를 돌려 진우청을 보았다.
그러고는 대소를 터뜨렸다.
“아하, 아하하하하!! 과연 화산파도 한물간 모양입니다! 이런 미친놈이 스스로 화산파 제자라고 하면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귀에 익은 말인데. 내게 그런 말을 하다가 깨진 사람이 남궁세가에 두 명이나 있었지. 누구더라. 살군검과 호광검이었나?”
고진유의 목소리가 조용하지만 강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경악하여 소리쳤다.
“그분은 화산도협이시다!!”
순간 대회장 전체가 술렁거렸다.
놀란 것은 진우청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화산파에서 전서를 받았다.
화산도협을 찾아 화산파로 데리고 오라는 장문인의 명이었다.
‘저…… 청년이 화산도협이라고?’
꾸욱.
남궁한의 눈가에 살기가 단번에 뻗어 나왔다.
“눈에 너무 힘주는 거 아니오.”
“네놈이…… 정말로 화산도협이 맞느냐?”
“어떻게 하면 확인이 되려나? 살군검이나 호광검이 오면 되겠군요.”
“하하하하!”
남궁한의 대소가 또 한 번 터졌다.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네놈을 찾아다닐 뻔했는데. 내 앞에 잘 나타났다.”
“과연 내가 잘 올라왔군. 수고를 덜어줬으니 수고비라도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큭. 언제까지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척.
남궁한은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잠깐만.”
고진유는 손을 올렸다.
“뭐지?”
“얼마 전에 이상한 놈을 때리느라 검이 망가졌는데, 바빠서 아직 구하지 못했거든. 잠시만 기다려 봐.”
“이 정신 빠진 새끼가…….”
휘익!
그 순간, 진우청이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대가 화산도협인가?”
“네, 소청 사숙님.”
“……!”
진우청의 눈이 커졌다.
‘소청이 뭔지 알고 있어.’
오청석과 진우청.
이름에 ‘청’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두 사람은 서로를 대청과 소청으로 부르곤 했다.
“설마…… 넌…… 대청 사형의 제자이더냐?”
“죄송하지만 나중에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아 참, 혹시 검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알…… 겠다. 내 검을 사용해라.”
진우청의 눈가로 눈물이 나올 듯했다.
그는 귀빈석으로 돌아가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오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잊혀가던 사형 오청석의 존재.
진우청에게서 검을 건네받은 고진유는 손가락으로 검 손잡이에 매화검인을 표시하는 세 개의 매화 문양을 살짝 쓸었다.
스릉-
가볍게 검을 뽑았다.
‘……느낌이 완전 다르군. 이런 걸 명검이라고 하는구나.’
찌이이이잉-
그때, 검명이 울리며 검광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허어……! 검이 저 아이를 받아주었다.’
진우청은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보면서도 고진유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봐, 이제 시작하지.”
“……실력은 있는 것 같군.”
남궁한도 상대의 실력에 대해 단번에 알아챘다.
휘이이이잉-
비무대 위로, 기의 격돌로 생긴 바람이 솟구쳤다.
군중들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고수들의 대결을 눈앞에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번쩍!
남궁한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남궁세가의 검법 중 가장 빠르다는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섬전뇌광(閃電雷光)!”
극성으로 빛이 터져 나오는 동시에 벼락이 쏟아졌다.
일검으로 남궁세가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리라.
고진유과 거리는 이 장 안.
절대공간에 든 이상 승패는 끝이다.
하지만,
휘리리릭!
‘사라졌다?’
그의 검은 아쉽게도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매화…… 가…….”
눈앞으로 천 갈래, 만 갈래의 매화 꽃잎이 하늘거리며 어지러이 흩날렸다.
챙챙챙챙챙!!
남궁한은 현란하게 뒷걸음을 치면서 매화 잎을 향해 섬전산벽(閃電散壁)을 펼치며 모두 쳐냈다.
비무대 끝까지 물러난 남궁한은 떨어져 있는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도협, 방금 한 수는 칭찬해 주지. 하나 그것뿐이라면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맛보기에 벌써 실망할 필요는 없지.”
“훗, 입만 산 것인지 확인해 주마.”
타아앗!!
남궁한은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섬전십삼검뢰의 팔검식 섬전유성(閃電流星).
구우우우웅-!!
하늘 위에서 가공할 기운을 뿜으며 뇌전들이 떨어져 내렸다.
고진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엄청난데……! 피하면 간단하겠지만…… 부딪쳐 보고 싶다.’
그는 어느덧 무림인이 되어갔다.
강한 상대를 보면 피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해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이다.
우우우우우-
중단전을 만든 뒤 처음으로 전 내력을 하단전에 옮겼다.
고진유의 하단전 부위가 불쑥 튀어올랐다.
스파아아아앗-
매화이산(梅花利散).
부풀어 오른 단전이 단번에 터져 나오며 검을 통해 밖으로 퍼져 나갔다.
세상은 마치 백색의 매화로만 채워졌다.
콰콰콰콰콰콰-!!
거대한 뇌전의 기와 매화 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군중들은 물론, 귀빈석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콰아아아당!!
비무대는 산산히 갈라지고 무너져 내렸다.
서로 마주 보며 선 두 사람.
고진유와 남궁한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
“…….”
울컥.
남궁한이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젠장…… 몸속의 장기들이 엉켰어.’
내력에 비해 몸이 제대로 버티지 못한 탓이었다.
고진유가 미소 지었다.
“계속할까?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난 더 싸울 수 있소.”
“나도…… 싸울 수 있다.”
“그런가?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공격하지.”
고진유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패야 했다.
휘이익!!
호충신법을 펼치는 동시에 남궁한의 허리를 향해 검을 뻗었다.
쉬이이익-!!
날카로운 검기가 남궁한의 허리를 향해 날아갔다.
남궁한은 이를 악물고 근육을 움직이려 했지만, 마치 공간을 뚫고 나타나는 듯한 검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그때,
“도협, 물러나라.”
휘익!
고진유의 앞으로 중년인이 나타나 검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