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묵경의 눈이 커지는 동시에 입이 벌어졌다.
‘고…… 수!’
흑귀들을 상대로 자신 있게 나선 그를 보았다.
고진유의 허리에서 빠져나온 검에서 빛이 퍼져 나갔다.
스걱-
흑귀들이 펼친 검이 먼저 떨어지기 전에 그들의 가슴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으으으으악!!”
“커어어억-”
털썩.
흑귀들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매화 향이 주변을 물들였다.
‘화산의 매화검법.’
그는 단번에 고진유의 무공을 알아보았다.
묵경의 표정이 또 한 번 변했다.
‘화산파의 제자라. 뜻밖이군.’
흑귀들을 상대로 싸우는 고진유를 보는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타아앗!
고진유는 서 있던 자리에서 신형을 띄워 흑나찰 소구정의 앞으로 곧장 향했다.
“다수의 적과 상대할 때는 적의 우두머리를 쳐라.”
오청석은 무공뿐만 아니라 비무에 관해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일들까지 가르쳐 주었다.
‘크으으윽, 빠르다!’
소구정은 순간 눈앞에 나타난 고진유를 피해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파앗!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검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매화토염(梅花討染)의 초식이 펼쳐졌다.
매화 꽃잎이 주변을 전부 잠식할 듯 물들이며 소구정의 눈앞을 가렸다.
그는 정신이 없었다.
‘큭, 이, 건…… 매화!’
퍽퍽퍽퍽퍽.
소구정은 매화 잎을 하나씩 막아내며 계속해서 뒷걸음을 쳤다.
‘망할!’
하지만 허리와 어깨에 매화 잎이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피잇!
날카로운 검기로 변한 매화 잎에 소구정의 몸이 휘청거렸다.
후각을 자극하는 매화 향이 가득했다.
‘매화 향이 이렇게 진하다니!’
화산파의 무공은 내공이 높을수록 매화 향기도 진해졌다.
‘대체 이런 놈이 어디에서 튀어나온……! 설마?’
소구정의 눈이 번쩍 뜨였다.
최근 주변 지역에서 입소문이 자자한, 화산파의 무공을 쓴다는 젊은 청년.
“너…… 어어언…… 화산도협……?”
지옥혈림에서 일급 수배령이 내려온 인물.
‘역시…… 나를 알고 있다면 이놈들이 계속 날 쫓고 있었던 게 확실하군.’
그 지옥혈림이라면 당연히 쫓아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당분간은 정말 조용히 다녀야겠다.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하나?’
지이이이잉-
홍매화단의 극성을 넘긴 내력이 넘실거렸다.
‘……아니. 그럴 순 없지.’
놈들이 찾아온다면 굳이 피하지 않고 상대할 것이었다.
다른 자들은 용서할 수 있지만 지옥혈림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네놈들에게 내 존재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지옥이 되게 만들어주마.’
단번에 끝을 낼 한 수.
매화일지(梅花一摯)를 펼치자 검 끝에 검기가 모였다.
쉬이익-
소구정의 이마로 향하는 한 줄기 빛.
그가 피할 수 없는 속도를 막아내고자 손을 올리는 순간, 검기는 이미 이마를 통과한 뒤였다.
‘커어어억. 이런…… 일이…….’
두 눈에는 불신이 가득한 채, 소구장의 몸이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쿠우우웅!!
한 번의 초식에 쓰러진 흑나찰 소구정의 모습은 남은 흑귀들에게 두려움과 충격을 주었다.
후다다닥!
‘우, 우린 이길 수 없어!’
흑나찰 소구정을 한 수에 처리하는 화산도협을 그들이 잡기에는 무리였다.
개죽음을 당하기 싫었다.
휘이익!
흑귀들은 동시에 포구에서 물러났다.
* * *
선체와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물방울.
고진유는 마치 매화 잎이 날리는 듯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포구에서 목격한 일 때문인지, 무림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배에 함께 탄 승객들은 고진유와 인양의 주위로 다가서지 못했다.
스윽.
묵경이 고진유의 곁으로 슬쩍 다가섰다.
“아우님이 요즘 광동성의 인기남아 도협이었구려.”
피식.
“인기남아는 또 뭡니까?”
“말 그대로 여인들 사이에 만나보고 싶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내란 말이지.”
고진유는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인기남아는 당신이지 않소. 풍류미군이라 하더군요.”
“그거야 당연하지.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내는 없으니.”
끄덕끄덕.
풍류미군의 소문은 과연 사실이었다.
인양이 자신도 모르게 인정할 정도로.
“아우님, 미안하게 된 것 같군. 괜히 우형(愚兄)의 일 때문에 앞으로 귀찮게 되었네.”
“사실대로 말해보시오. 흑귀들에게 쫓기는 이유가 뭐요?”
“내가 잘생겼잖아.”
“…….”
“저기, 농담은 다른 사람에게 하십쇼.”
“허어, 농담은 무슨. 정말로 내가 잘 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네.”
고진유는 진지하게 말하는 그가 웃겼지만, 거짓은 아닌 듯했다.
“궁금한가? 나를 형이라 부르면 가르쳐 주지.”
고진유의 입꼬리가 다시 꿈틀거렸다.
흑귀들을 놀이 상대로 삼을 정도의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은 당연히 무공이 강하다는 의미였다.
그의 신형에 흐르는 내기는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안정적으로 보였다.
“조금이라도 진지할 수 없소?”
“하하하! 내 천성이 그러하거늘. 아우님은 내 성격이 마음에 안 드는가? 난 아우님이 마음에 드는데.”
“근데 그 별호는 뭡니까? 바람기가 상당히 있는 모양입니다.”
“어라? 아우님은 내가 누군지 잘 모르는 모양인가 본데. 그건 바람기가 아니고 그녀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이라네.”
인양이 옆에서 말을 보냈다.
“진유 형. 이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 인양은 풍류미군에 대해서 잘 아는 모양이군.”
“대충은요. 소문이 많이 돌았습니다. 여자들 사이에서 항상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왜?”
“잘생기고 무공도 강하고…….”
강서성의 칠대세가 모임에 처음 나타난 그는 탁월한 외모와 현란한 말솜씨로 많은 여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덕분에 사내들의 비무 신청 또한 줄줄이 받았고.
하지만 결과는 칠대세가 후지기수들의 연이은 패배.
묵경은 가볍게 그들을 이긴 뒤 상쾌한 모습으로 자리를 떠났다고 했다.
더구나 그가 펼친 무공은 중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천하삼재검법이었고 말이다.
“그날 이후 많은 여인들이 이상형으로 풍류미군을 뽑는다구요.”
묵경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어떤가? 내가 그런 사람이네. 갑자기 형이라고 부르면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됐소이다. 북호에서 내리면 서로 각자 갈 길 갑시다.”
“싫은데. 아우님을 따라다니고 싶어.”
“…….”
이 사내에게서 진지한 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연인지 두 사람은 흑귀에게 쫓기는 중인 것도 같았다.
묵경과 함께 다니면 정말로 피곤할 것 같았다.
“따라오든 말든 그건 당신 일이니 그렇다 쳐도, 이유나 압시다. 왜 쫓기는 겁니까?”
“형이라고 부르면…….”
“성격을 보면 고집은 세지 않을 것 같은데, 의외로 세군요.”
“하하하! 그건 내 모친 성격을 닮아서 그런가 봐. 나중에 소개시켜 줄까?”
“어머니도 계시오?”
“아우님은 안 계시는가?”
“…….”
“이런, 미안하게 됐네. 일부러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야.”
“괜찮소이다. 형. 됐소?”
“아니, 이름도 부르면서 형이라고 해야지. 지금 내 목소리처럼 다정하게 다시 불러보게.”
질색하던 고진유는 결국 그의 얼굴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진짜 웃긴 사람이군.’
태어나서 이런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묵경 형. 됐소?”
“하하하하!! 진유 아우, 됐네! 이젠 우린 서로 형 아우라 부르는 사이군! 그럼 말을 놓겠어.”
“하아, 이제 어서 말이나 해보시오. 쓸데없는 말 좀 그만하고.”
“하하하! 그래, 그래.”
묵경은 기분이 좋은 듯 크게 웃었다.
인양은 두 사람 옆에서 대화를 들었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유치함이 그들의 대화에서 느껴졌다.
묵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알았겠지만, 중원에 이 형님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거든. 아우는 혹시 백화궁이라고 들어봤나?”
“백화궁? 거긴 뭐 하는 곳이오?”
오 년 전 중원 강서성에 검문 출신 초화서가 개파하여 세운 여인들의 신흥 문파.
고진유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뭐야. 화산파 제자가 백화궁을 몰라?”
“화산파 제자라고 중원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거요? 모를 수도 있지.”
‘흐음……? 백화궁을 모르다니. 이 녀석 정체가 뭐지?’
묵경은 점점 더 고진유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백화궁은 여인들로 구성된 문파이지. 으음, 혹시 중원십봉(中原十鳳)과 오미화(五美花)는 들어봤겠지?”
“……뭐어…… 얼핏.”
“모르는군. 지금까지 어디 사람도 없는 섬에 갇혀 살았나? 다른 건 몰라도 그녀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모르면 안 되네. 허어…… 사내라면 어찌…….”
그는 고진유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진유는 옆에 선 인양을 보았다.
“인양아, 넌 알아?”
“아…… 네에. 중원에서 유…… 명하긴 합니다.”
“그렇구나. 네가 알 정도면 정말 유명한 사람들인가 보네.”
사소한 것이지만 무림에 대해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사부가 알려주지 못한 오 년 동안 무림은 많이 변해 있었다.
고진유는 경청하는 자세가 되었다.
“백화궁이 어떻게 되었는지 계속해보세요.”
“보아하니 무림에 대해 아는 게 적은 모양이네. 근데 걱정 안 해도 돼. 형인 내가 잘 가르쳐 주지.”
“됐소. 빨리 이야기나 하세요.”
“백화궁주의 제자 중 한 명이 중원십봉 중 백화봉 진허란이야. 어찌 사내라면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나. 백화봉에 가서 그녀를 만났지.”
“그래서요?”
“소문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이더군. 물론 그녀도 나의 진면목을 본 이상 사랑에 빠져드는 건 당연했고.”
“……그런데?”
“진유 아우도 알겠지만 내 숙명은 한 여자만을 사랑할 수 없다네. 한데 워어어낙 강경하여 몇 번 만난 뒤 헤어졌지. 내가 깔끔한 성격이라 확실히 정리를 했는데, 그 여자가 사부에게 내가 무슨 결혼 약속을 했다고 고한 거야.”
“……정말로 결혼을 약속했소?”
“무슨 말이야. 난 만인의 연인이라니까.”
“혹시…… 그녀와 깊은…… 관계를 한 건 아니고?”
“아우는 우형을 천하의 나쁜 놈으로 보았는가? 우형은 일편단심 한 여인만을 위해 몸을 바칠 것이네. 함부로 내 순결을 줄 수 없지.”
“만인의 연인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건 여인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무슨 개똥 같은 말인지 모르겠소.”
고진유와 인양은 요상한 표정이 되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흑귀들과는 어떻게 된 것이오?”
“백화궁주가 열받아서 지옥혈림에 의뢰를 했다더군. 뭐, 그래도 괜찮아. 흑귀 정도는 충분히 피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백화궁주가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면 의뢰를 접겠지.”
그는 흑귀들이 떼로 그를 잡으러 오는 상황에서도 태연한 듯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어때? 이젠 됐어?”
“잘 들었소. 나도 사내이긴 하지만 잘했다고는 동조할 수 없군요.”
궁주의 입장에서 제자의 마음을 건드린 묵경에겐 화가 날 수밖에 없었을 터.
“이번에는 쫓아냈지만, 그들이 계속 잡으러 오지 않겠소이까?”
“의뢰를 철회하지 않으면 끝까지 흑귀들을 보내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아우 옆에 있으면 해결되잖아, 안 그래?”
“허어…… 생각하는 게 얄밉군요. 흑귀들에게 잡혀가서 고생이나 했으면 좋겠소.”
“하하하하! 속마음을 너무 진솔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탁! 탁!
묵경은 손바닥을 가볍게 고진유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말게. 내가 잡혀가더라도 두 사람에게는 피해가 없도록 하겠네.”
“이미 그들은 내 신상에 대해 알고 있을 겁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시오.”
“후후후, 자, 그럼…….”
묵경은 미소를 띠며 친한 척했다.
“……내게 물어볼 게 있소?”
“당연. 아우님의 정체.”
“…….”
고진유의 허리에 찬 검을 가리켰다.
“분명 무공을 보면 화산파의 제자이긴 한데, 검을 보면 아닌 것 같다니깐. 화산파의 검은 손잡이에 매화가 그려져 있거든.”
“……!”
“게다가 흑귀들과 마주쳤을 때 원수처럼 싸우는 것을 봐선 사정이 있는 것 같기고 하고.”
“됐소. 남에게 굳이 내 개인 사정까지 말할 필요가 없군요.”
“이야, 섭섭하네. 이젠 같은 배를 탄 동료가 되었거늘. 게다가 형 아우 하는 사이가 아닌가? 우린 삼형제일세. 하하하.”
“동료는 무슨…… 북호에 내리면 서로 갈 길 가는 겁니다.”
“아니. 난 아우를 따라다니겠네. 믿을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관상에서 억겁의 세월이 흐르는 흔적이 보이거든.”
“푸흡.”
고진유는 어이가 없어 또 웃어버렸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
“억겁이고 만겁이고 됐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도착하면 서로 갈 길 가는 거요.”
“후후후, 그러든지. 난 내 갈 길을 가겠네. 아우님 뒤를.”
아무래도 제대로 걸린 것 같았다.
* * *
배에서 내린 뒤 이각이 지났다.
“저어…… 진유 형님, 저기 뒤에…….”
인양은 뒤에 따라오는 묵경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신경 안 써도 돼.”
“아…… 네에, 형님.”
“그보다…… 우리들을 따라오는 놈들이 보이지?”
“네에?”
인양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따라보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지만 수상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저어, 안 보이는데요?”
“저기 길가에 누워 있는 거지들 말이야.”
“아…… 네, 보입니다. 거지들이 왜?”
“저들은 보통 거지들이 아니야. 북호에서 우리가 내리자마자 그때부터 따라 붙었어.”
스윽.
뒤에 있던 묵경이 빠르게 붙었다.
“아우님, 정말인가?
그도 거지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상 편하게 태연한 듯 누워 있는 거지들.
“음…… 하긴 거지들이 여기에서 동냥할 일은 없겠군.”
“누구를 미행하는지 모르겠군요.”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난 아니야. 그녀들 말고는 딱히 다른 짓은 안 했다고.”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군요.”
“……흐음.”
묵경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개방에 미행당할 짓은 하지 않았다.
“여하튼 누군가 조만간 나타나겠죠.”
“지옥혈림은 아닐 거야. 그놈들이 개방에 의뢰할 리가 없지. 개방도 정파인데 지옥혈림과 썩 좋은 관계는 아니거든.”
“개방에 부탁할 정도라면 제법 힘이 있는 문파겠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고진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법 힘이 있는 문파라…….’
어렴풋 느낌이 왔다.
‘저들이 나를 미행한 것이라면 남궁세가일 수도 있겠군. 한번 확인해 볼까.’
파앗!
고진유가 신법을 펼쳤다.
“엇, 아우님! 어딜…… 가시나?”
묵경은 눈으로 빠르게 그를 좇았다.
‘엄청 빠르군. 대체 무슨 신법이지?’
다시 봐도 화산파의 신법은 아니다.
“나도 한 빠름 하는데 말이지…….”
저번에도 보았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자신이 없었다.
나무 아래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개방 거지.
꾸벅꾸벅 조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줄곧 한 사람의 뒤를 주시하고 있었다.
‘두 겹으로 묶은 머리카락에 연한 청의 경장 무복. 허리에 붉은 검대. 생김새로 봐서는 화산도협이 확실해.’
남궁세가 광동성 총지부에서 나온 의뢰.
-살군검 남궁인을 이긴 젊은 화산파 제자의 행방을 찾아달라.
‘쩝, 상부의 명이니 부탁은 들어주긴 하겠지만…….’
개방은 중원십대세가보다는 구대문파와 가까웠다.
입맛은 다신 그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고진유를 찾았다.
미행의 규칙은 계속 쳐다봐선 안 된다는 것이니까.
‘엥…… 사라졌다?’
깜짝 놀란 개방 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나를 찾고 있소?”
“허억!!”
나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가만히 있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온몸을 짓누르는 내기에 개방 거지 항안개는 몸이 움찔거리며 가만히 멈췄다.
고진유가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개방에서 나를 왜 따라오는 거요?”
“저어…… 공자님. 무슨…… 말씀이신지?”
“포구에서부터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
항안개는 완벽하게 미행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혹시 남궁세가에서 나를 찾아달라고 했소?”
‘알고 있어. 어디에서 의뢰를 한 것인지까지.’
항안개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
“…….”
“그들에겐 이미 연락을 갔을 테고. 여기가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만나게 되겠군.”
만날 것이라면 차라리 일찍 만나는 게 좋을 터.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요?”
“서, 서죽이란 마을이 있소이다.”
“알겠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남궁세가에 연락을 하시오.”
“알겠소이다.”
항안개는 고진유의 말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사라졌다.
고진유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궁세가에서 나를 찾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들이 아우님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네. 아우는 무림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 같군.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생각을 하는 무리가 바로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지.”
묵경이 뒤에서 다가왔다.
“아우가 살군검 남궁인을 꺾었다고 했지? 이젠 물러날 방법은 없어. 그들은 무너진 남궁세가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계속 도전할 거야.”
“하아, 그냥 개인적으로 싸운 일밖에 없는데. 혹시 방법은 없소?”
“방법이야 간단한지. 남궁세가에서 아우님에게 덤비지 못할 정도로 강하면 문제가 없다네.”
“흐음…… 간단하군요.”
“훗, 맞아. 간단해.”
고진유는 걸음을 내디뎠다.
“어, 아우님? 또 어딜 가시나?”
“어디긴 어디겠소. 남궁세가와 싸우러 가야 할 게 아니오.”
“정말…… 로 싸우려고? 남궁세가인데? 도망 안 가고? 저 개방 거지를 속인 뒤 도망가는 거 아니었어?”
“도망을 가진 왜 갑니까? 남궁세가에 죽을 짓도 안 했는데.”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다치잖아.”
“안 다치게 싸우면 되죠.”
“그래? 안 다치게 싸우겠다고? 말이 돼?”
“잘하면 됩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은 끊으세요.”
고진유는 시원스레 묵경을 스쳐 지났다.
“인양아, 가자.”
“넵, 진유 형님!”
인양은 소리를 크게 지르며 고진유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