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9화 (19/425)

19화

살기에 젖은 붉은 눈동자.

미흉의 살기는 고진유를 벨 듯 날카로웠다.

하지만 고진유는 그의 살기를 무심히 흘려보냈다.

“네놈은 누구냐?”

“채가장에 볼일이 있는 사람.”

고진유는 두경모와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 주인도 세상을 어렵게 살고자 하는군.”

‘끄응.’

그의 말이 맞았다.

돌려준다고 했을 때 돌려받으면 될 일을, 과한 욕심 때문에 망쳤다.

‘내 기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

미흉은 상대가 누군지 정확한 정보를 받지 못했다.

그저 도둑 한 놈을 잡고자 한다는 설명만 들었을 뿐.

‘속았어. 똑바로 알아보고 의뢰를 받았어야 했다.’

물러나기에는 이미 늦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위약금이 열 배다…… 젠장…… 전력을 다해 이놈을 잡은 뒤 보수를 더 올려 받아내야겠군.’

타아앗!

미흉은 사음검을 뽑았다.

“저놈을 포위하라!”

두두두두-

귀살단 용병 이십 명이 원을 그리며 고진유를 포위했다.

척척척.

주위를 둘러싼 채 검을 앞으로 겨누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준비를 했다.

“다치고 싶지 않다면 검을 버리고 항복해라!”

씨익.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남궁인과 싸운 뒤 스스로의 무공에 대해 알게 되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자들의 그림자만 봐도 두려워했을 텐데.

“그건 내가 할 말 같소이다. 남의 일에 괜히 상관하지 말고 물러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당한 그대의 수하들이 안 보이시나?”

“크윽, 네놈이 어떻게 수하 놈들을 처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겁하게 기습했겠지! 하지만 네놈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상황은 달라졌다.”

“착각은 자유라 하더니만. 맘대로 생각하시오. 여하튼 난 분명히 물러날 기회를 줬소. 괜히 다친 후에 원수를 갚는답시고 쫓아다니지나 않았으면 하는 바이오.”

“허튼소리 하지 마라! 귀살단은 이놈을 잡아라!!”

타아앗!

미흉은 신형을 튕기며 가장 먼저 고진유를 향해 달려 나갔다.

육중한 덩치와 다르게 제법 빠른 몸놀림.

쉬익.

사음검이 허공을 베는 소리 또한 날카로웠다.

스윽.

고진유는 가볍게 머리를 돌리며 피했다.

‘이런……!’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미흉의 검이 떨어지면서 몸의 중심이 흩뜨려졌다.

“사부님께선 몸을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로 검을 잡으라 하셨지. 물론 실전에서 그게 쉽게 되진 않겠지만!”

빠르게 수습했지만 그 순간 보인 빈틈.

휘이이익!

고진유는 호충신법을 각법으로 변화시키며 오른발을 휘둘렀다.

무음무형각(無音無形脚).

퍼어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미흉은 쓰러진 채 뒤로 굴렸다.

“우우욱.”

왼쪽 늑골이 부서진 듯 가슴 전체로 고통이 밀려왔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호충신법을 이용한 각법이 마음에 들었다.

달려드는 용병들을 향해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이거 좋은데.’

고진유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검을 피하며, 반대로 무음무형각으로 상대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찌이익-

퍼어억!!

용병들은 고진유의 발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대체 어디에서 공격이 나오는 거야?!’

보이지 않는다면 소리라도 듣고 피해야 했지만, 눈앞에 번쩍거리는 순간 끝이었다.

패애애앵-!!

용병들은 목을 내리치는 각법에 우후죽순 정신을 잃었다.

타앗!

‘이거 신나는데……!’

싸우면 싸울수록 새로운 것을 익혀가는 것이 좋았다.

고진유의 양쪽 발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춤을 추듯 용병들 사이에서 날아다녔다.

‘이길 수 없어…….’

두경모는 처음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고진유의 무공을 보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대문파의 무공을 웬만한 인원수의 우위로 이길 수 없다는 말을 몸소 체험했다.

털썩.

귀살단 마지막 용병까지 바닥에 쓰러졌다.

으으으-

고통의 신음만이 서재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수하들과 시선이 마주지자, 그들도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고진유는 싸울 의지를 잃은 그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싸우고 싶지 않다면 옆으로 물러나시오.”

“…….”

호위 무사들이 눈치를 보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고진유는 서재를 향해 소리쳤다.

“장주! 나와서 이것을 받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휘리리릭!

그가 허리에 묶은 천을 풀었다.

천 안의 내용물을 본 두경모와 호위 무사들의 눈이 커졌다.

‘역시…… 황천연이 맞구나……! 이자가 훔쳐간 물건이 황천연이었어! 장주는 황천연을 잃어버린 게 아니리 그냥 돈을 주기 싫어 춘복이에게 누명을 씌웠던 거야……!’

두경모는 화가 났다.

그도 채가장 밑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더러운 인간인 줄은 알았지만…… 완전 인간말종이었군…….’

서재 안에 있던 채악진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겁에 질린 듯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화, 황천연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재빨리 고진유의 손에 든 물건을 훑어냈다.

“장주,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이다. 난 단지 이것을 돌려주려고 왔을 뿐인데. 이 예의도 모르는 인간들은 누구요?”

“보, 본인도 모르는 일이오. 갑자기 저놈들이 나타나서 서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소.”

채악진은 곧바로 변명을 했다.

그러고는 두경모를 가리켰다.

“아마도…… 두 호위가 말도 없이 이들을 불러 모은 게 아닌가 싶소.”

두경모의 표정이 굳어졌다.

장주가 직접 내린 명령이 아니던가!

그의 잘못을 태연히 수하의 탓으로 돌리다니.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정까지 완전히 떨어졌다.

“장주의 말이 맞소?”

“아닙니다. 저자가 저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대가 오면 잡을 수 있게 용병들을 모으라고 말입니다.”

채악진이 당황하며 노기를 터뜨렸다.

“이노오오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고진유는 혀를 찼다.

“쯧쯧. 하긴 그 버릇이 어디 가겠소. 당신에게 이들은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지.”

“아니외다! 저, 저 배은망덕한 놈들이 거짓말을 하는 게 맞소!”

“됐소. 지금 그걸 따질 이유도 없소. 당신은 참으로 이중적인 사람이오. 어쨌든 약속을 했으니 이건 가져가시오. 당신이 숨겨놓은 물건을 내가 찾아줬다는 걸 잊지 마시고.”

“……!!”

‘이놈이 일부러……!!’

채악진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자. 가져가시오.”

고진유는 황천연을 앞으로 내밀었다.

‘일단…… 황천연을 챙겨야 한다.’

채악진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고, 고맙소이다.”

고진유는 손에 든 황천연을 채악진의 손에 내려놓았다.

‘됐…… 다. 다시 찾았다……!!’

채악진은 두 손에 황천연이 들어오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스르르르-

잡았던 두 손에 힘이 풀리면서 황천연을 바닥으로 떨어졌다.

따아아앙-!!

황천연이 바닥에 부딪히며 두 조각으로 깨져 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채악진에게는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허…… 어…… 이럴…… 수가…….’

채악진의 표정이 아귀처럼 일그러졌다.

“이런, 아깝게. 똑바로 들지 그랬소.”

황천연을 받는 순간 느껴진 침을 찌르는 듯한 마비 증상.

“쯧쯧, 참 좋은 물건이었는데. 잘 가라.”

고진유는 계속해서 속을 뒤집고 있었다.

‘이놈이……!!’

황천연이 깨진 이상 계획했던 모든 미래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난 분명히 말한 대로 돌려줬고, 눈이 있으면 당신이 잘못해서 깨뜨린 것도 알아먹었을 테고. 그럼 더 이상 내겐 볼일이 없는 걸로 알겠소이다.”

채가장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하지만 이미 채가장의 모든 눈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서재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자, 잠깐!”

부들부들 떨고 있던 채악진은 돌아서려는 고진유를 재빨리 불러 세웠다.

“또 무슨 볼일이 있던가?”

“다른…… 것도 도, 돌려줘야 하지 않겠소?”

“다른 것이라니? 난 그대의 서재에 숨겨져 있던 황천연을 찾아준 것밖에 없는데. 무엇을 돌려달라는 건지 똑바로 말하시오.”

채악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내가 분명 황천연과 함께 전표를 숨겨놓았거늘! 어디서 모른 체한다는 것이더냐?! 이 도둑놈아!! 어서 내 전표를 내놓아라!!”

“어허, 이 사람이…… 이번에는 나를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오? 황천연을 찾아줬으니 은인으로 모시지는 못할망정. 도둑이었다면 황천연을 돌려주러 왔겠소?”

“이익, 이. 이 도둑놈이……!!”

“누가 누굴 보고 도둑놈이라는지 원. 여하튼 볼일 끝났으니 난 그만 가보겠소.”

휘이익!

고진유는 마지막으로 채악진을 쳐다본 후 그대로 사라졌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잡아라!!”

“…….”

“두 호위!! 지금 무슨 짓인가? 빨리 가지 못하겠느냐?”

두경모의 눈빛은 무심했다.

채악진이 무슨 말을 하든지 이젠 관심도 없었다.

“장주, 그만두겠소이다.”

“뭣이? 그만두겠다고? 네놈 맘대로?”

피식.

두경모는 실소를 지었다.

“웃긴 양반이군. 그만두는 것도 당신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게요?”

“……!!”

“지금까지 일한 대가를 주시오.”

“못…… 준다. 네놈들이 맘대로 그만 두지 않았더냐?!”

휘익!

그러자, 호위 무사 중 한 명이 검을 뻗으며 채악진의 목을 겨누었다.

“히익!”

“이봐. 무슨 말이야? 우리 돈을 못 주겠다고? 다시 말해봐.”

사내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채악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두경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두…… 호위. 저기…… 수, 수하들을 진정시키게나.”

“직접 부탁하시오. 서로 그만둔 마당에 저들 또한 내 명을 따를 이유가 없소이다. 그리고 나 또한 같은 심정이오. 지금 당장 밀린 월봉을 주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외다.”

“아아아, 알겠네. 전부 줄 터이니 내 목에서 검을 내려놓게나.”

두경모는 검을 겨눈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우리 돈을 주시오.”

“크흠, 큼, 누가 안 준다고 했는가. 갑자기 모두 그만둔다고 하기에 화가 나서 그런 것이지. 바로 주겠네.”

“그럼 가시죠. 앞장서십시오.”

채악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망했어…… 소문이…… 소문이 퍼져 나가겠지?’

모든 사람들이 내일부터 채가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것이었다.

부(富)를 좇다가 명예까지도 잃어버렸다.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 * *

인양은 들뜬 표정을 한 채 일찍 객잔으로 찾아왔다.

연주상단에 들어갈 소개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객잔에 들어서자 창문가에 앉아 있는 고진유가 보였다.

“일찍 왔네?”

“네, 공자님.”

“아침은 어떻게 했어?”

“아직.”

“모두 앉아. 나도 금방 일어났는데 같이 먹지.”

“고맙습니다.”

스윽.

고진유는 자리에 앉은 인양 일행에게 소개장을 내밀었다.

“받아. 상단에 가서 이걸 보여주면 될 거야.”

“고맙습니다, 공자님. 은혜를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안 갚아도 좋으니까, 대신 내 얼굴 쪽팔리지 않도록 해줘. 알겠지?”

“넵,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인양은 소개장을 옆 청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입이 근질거린다는 눈빛으로 고진유를 바라보았다.

“뭐냐? 또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밖에서 소문이 퍼지고 있거든요.”

“무슨 소문? 난 못 들었는데.”

“채가장에서 일어났던 일이 완전히 까발려졌습니다. 채가장 장주가 몰래 숨겼던 황천연을 화산도협(華山盜俠)께서 찾아내 불쌍한 사람을 돕고 정의를 실현했다고 말입니다!”

인양은 말을 하면서 슬쩍 고진유의 눈치를 보았다.

“뭐라고? 화산도협은 또 무슨 말이야?”

“채가장에서 호위 무사들이 몽땅 그만두면서, 채가장 장주가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다 알려지게 됐거든요.”

“……허어.”

“거기에 연주상단에서 일어난 일까지 더해지면서, 사람들이 화산도협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면서…… 요.”

“어엉? 그 일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잘 모를 텐데?”

사람들이 이번 일과 연주상단에서 일어났던 일의 연결 고리를 어떻게 알고?

고진유는 바로 느낌이 왔다.

“흐응, 그 소문을 퍼뜨린 게 네놈들 같은데?”

“그, 그게……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신이 나서 떠드는 바람에…….”

“나 참…… 뭐,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앞으로는 항상 입이 무거워야 할 거야. 내 사부님께선 함부로 말을 하고 다녔다간 다치기 십상이라고 하셨거든.”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어. 연주에 가면 상단주에게 내 안부나 전해줘.”

“알겠습니다, 공자님!”

인양 일행에게 고진유는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알려준 은인이었다.

고진유는 그들을 뒤로하고 객잔에서 일어났다.

‘나도 이제 조심해서 다녀야겠군. 소문이 많이 나면 안 좋아. 당분간 조용히 지내야지.’

그때,

“저어…….”

인양이 주춤거리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또 할 말이 있는 모양이지?”

“그게…….”

“머뭇거리지 말고 말해봐.”

“저를 받아주십시오, 공자님! 제가 공자님을 모시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어?”

고진유는 그의 간곡한 눈빛을 보았다.

“왜? 무공을 익히고 싶은 거면 난 가르쳐 줄 수 없어.”

“그건 아닙니다. 전 단지 공자님을 곁에서 모시고 싶을 뿐입니다.”

일행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같이 다니면 심심하지는 않겠지만…… 예전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하남성으로 가야 하는 길이지만 굳이 기한을 정한 여정이 아니긴 했다.

“나머지는?”

“저희들끼리 미리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머지는 장사를 배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군…… 좋아. 네가 원한다고 하니 알아서 해. 대신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내가 제법 귀찮은 일에 관련이 많거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인양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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